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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강 건너기 프로젝트 - 주교지남(舟橋指南)
1776년 집권 노론(老論) 세력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직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숭 작업에 진력하였다. 양주 배봉산(현재의 서울시립대학교 근처)에 있던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고, 화성(華城)을 조성하여 개혁을 상징하는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행차에 나섰다. 아버지를 추숭하는 작업을 통해 왕권을 과시함과 함께 현장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조의 화성행차에서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온 것은 한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중종이 아버지 성종의 선릉을 참배하기 위해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넌 적이 있는 등 이전에도 배다리가 몇 차례 만들어지긴 했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배다리 건설이 요구되었다. 정조는 대규모 행차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새로운 배다리의 건설을 지시하였다.
1789년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고, 묘당(廟堂)에서는 『주교절목(舟橋節目)』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4년(1790년) 7월 1일의 기록을 보자.
배다리[舟橋]의 제도를 정하였다. 상이 현륭원을 수원(水原)에 봉안하고 1년에 한 번씩 참배할 차비를 하였는데, 한강을 건너는 데 있어 옛 규례에는 용주(龍舟)를 사용하였으나 그 방법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배다리의 제도로 개정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그 세목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상의 뜻에 맞지 않았다.
이에 상이 직접 생각해내어 『주교지남』을 만들었는데, 그 책에 이르기를, “배다리의 제도는 『시경(詩經)』에도 실려 있고, 사책(史冊)에도 나타나 있어 그것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외지고 고루함으로 인하여 아직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가한 여가를 이용하여 아래와 같이 산만하게 적었다. 묘당에서 지어 올린 주교사의 절목을 논변하고 이어 어제문(御製文)을 첫머리에 얹고 이름 하여 『주교지남』이라 하였다.
[定舟橋之制。上旣奉顯隆園於水原, 將歲一展省, 以江路渡涉, 舊典用龍舟, 而其法多不便, 改用舟橋之制, 命廟堂撰進節目, 未稱上旨。
上乃親自運思, 爲舟橋指南, 其書曰:舟橋之制, 載之詩, 見於史, 昉之久矣。 我國僻陋, 未之能行,
予於燕閒之暇, 漫錄如左。 廟堂撰進舟橋司節目, 爲之論辨, 仍以御製文, 弁其首, 名曰 舟橋指南]
정조의 명을 받은 서용보, 정약용 등은 1795년 2월 24일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배다리가 건설된 곳은 노량 지역. 동호(지금의 동호대교 일대), 빙호(지금의 동빙고, 서빙고 지역) 등이 함께 물망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노량이 선정되었다. 노량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폭도 비교적 좁아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근대에도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가 처음으로 건설된 것을 보면, 이 시대 과학과 건설 수준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주교지남』에서도 첫 번째 고려 대상이 ‘지형’으로, 정조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점이 배다리를 놓을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주교지남』의 기록을 보자.
첫째 지형이다.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은 동호(東湖) 이하에서부터 노량(露梁)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 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冰湖)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1척 정도 되는 얕은 물에는 나머지 배를 끌어들여 보충할 수 없는 즉 형세상 선창을 더 넓혀야 하겠으나 선창은 밀물이 들이쳐 원래 쌓은 제방도 지탱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새로 쌓아서야 되겠는가.
건너야 할 날짜는 이미 다가왔는데 수위의 증감을 짐작하기 어려워 한나절 동안이나 강가에서 행차를 멈추었던 지난해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또 강물의 성질이 여울목의 흐름과 달라서 달리는 힘이 매우 세차고 새 물결에 충격을 받은 파도가 연결한 배에 미치게 되므로 빙호는 더욱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이들 몇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다만 수세가 상당히 높아 선창을 옛 제도대로 쓸 수 없는 점이 결점이다. 이것 역시 좋은 제도가 있는 만큼【아래 선창교(船槍橋) 조항에 보인다.】
염려할 것은 없다. 이제 이미 노량으로 정한 이상 마땅히 노량의 지형을 살피고 역량을 헤아려 논의해야 하겠다.
[一曰形便。 舟橋形便, 自東湖而下露梁爲最, 何者? 東湖流緩岸立爲可取, 然水闊而路迂爲不便矣。
冰湖水狹爲可取, 然南岸勢緩而延遠, 水纔添尺, 岸退十丈。
添尺之淺水, 不能引餘船以補, 則勢將增廣船槍, 而船槍爲新水所囓, 原築者猶不能支, 況可以新增乎?
渡涉之期日已屆, 水勢之增減難度, 則半日江次鑾路之停留, 往年事可鑑也。
且水性異於灘駛, 其趨迅甚, 新波衝濤, 及於聯船, 冰湖尤不可用矣。 都不如露梁之兼是數者之美, 而無是數者之病。
但湖勢頗高, 船槍不可用舊制。 然亦有良制,【見下槍橋條】
不足爲慮。今旣以露梁爲定, 當以露梁審勢量力而論之]]
배다리 건설에 지형에 이어 다음으로 고려된 것은 물의 넓이, 즉 강의 폭이었다. 노량의 넓이가 2백 수십 발이었으나, 여유분까지 두어 대략 300발을 기준으로 하였다.
둘째는 물의 넓이이다. 선척의 수용을 알려면 반드시 먼저 강물의 넓이가 얼마인가를 정해야 한다.
노량의 강물넓이가 약 2백 수십 발이 되나【발은 기준이 없으나 일체 지척(指尺) 6척을 한 발로 삼는다.】
강물이란 진퇴가 있으므로 여유를 두어야 하니 대략 3백 발로 기준을 삼아야 한다. 배의 수용 숫자를 논하는 데는 그 강물의 진퇴에 따라 적당히 늘이고 줄이는 것이 실로 무방할 것이다.
[二曰水廣。 欲知船隻之容入, 必先定水廣之幾何。
露梁水廣約二百數十把,【把無定限, 當一切以指尺六尺爲一把】
然水有進退, 宜存餘剩, 大約以三百把立準。 論其容入之數, 而隨其進退闊狹, 量宜增減, 固無傷矣]
▶ 화성능행도팔곡병(華城陵幸圖八曲屛) 중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우리땅우리진경(국립중앙박물관) 도록 중에서 인용(원본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정조는 이어서 배다리에 사용할 배의 선택과 동원할 배의 숫자에 대한 절목을 제시하였다.
셋째는 배의 선택이다. 지금의 의견에 의하면 앞으로 아산(牙山)의 조세 운반선과 훈련 도감의 배 수십 척을 가져다가 강복판에 쓰고 양쪽 가장자리에는 소금 배로 충당해 쓰겠다고 하나, 소금 배는 뱃전이 얕고 밑바닥이 좁아서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5개 강의 배를 통괄하여 그 수용할 숫자를 헤아리고, 배의 높낮이의 순서를 갈라 그 완전하고 좋은 배를 골라【모두 아래에 보인다.】 일정한 기호를 정해놓고 훼손될 때마다 보충하며 편리한 대로 참작 대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三曰擇船。 今議將以牙山漕船及訓局船數十隻, 用之江心, 兩邊則以鹽船充用, 蓋鹽船舷薄而底窄, 不堪用, 莫如統括五江船隻, 量其容入之數, 分之高低之次, 擇其完好之品,【幷見下。】 永定記號, 隨毁隨補, 從便酌定]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을 활용하였다. 새롭게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세곡이나 어물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에게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여 비용의 낭비를 막았다. 배에 번호를 부여하여 필요할 때마다 조달한 것도 주목된다. 다음에는 배다리에 동원할 배의 숫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넷째는 배의 수효이다. 여러 가지 재료에【종량(縱樑)과 횡판(橫板) 등이다.】
드는 경비를 알려면 반드시 배의 수효를 먼저 정해야 하고, 배의 수효를 정하려면 반드시 먼저 배 하나하나의 넓이가 얼마인가를 헤아려야 한다. 가령 갑이란 배의 넓이가 30척이 된다면【5발로 계산한다.】
을이라는 배의 넓이는 29척이 되며, 병과 정의 배도 차례차례 재어서 등급을 나누어 연결하고 통틀어 계산하여 강물의 넓이 1천 8백 척에【3백 발로 계산한다.】
맞춘다면 선척이 얼마나 수용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각종 재료의 경비도 또한 이를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지금 경강(京江)에 있는 배의 넓이를 일체 30척으로【만약 5발에 차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 척수에 따라 배의 수를 더해주어야 한다.】
계산한다면 강물의 넓이 3백 발 안에 60척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四曰船數。 欲知雜色【如縱樑橫板等。】
經費之容入, 必先定船隻之數; 欲定船隻之數, 必先量每船之廣爲幾何。 假如甲船廣爲三十尺,【以五把論。】 則乙船廣爲二十九尺, 丙丁船次第尺量, 分等聯合, 統以計之, 以應水廣一千八百尺,【以三百把論。】
則可知船隻容入爲幾許艘, 而雜色經費, 亦可以此推定。 卽今京江船廣, 統以三十尺,【若有未滿五把者, 則隨其尺數, 當增船數。】
則應水廣三百把, 當入六十隻矣]
배다리에 활용된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가운데는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 단계적으로 조금씩 작은 배들을 설치하였다. 배들의 설치가 끝난 후에는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약 7.2미터). 정조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보면 최대 9명의 사람이 일렬로 한강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다리의 양편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성을 꾀하였다. 또한 배다리의 양끝과 중간 부분에 세 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은 다리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리의 중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왕이 행차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최대 규모의 화성행차를 단행하면서 이 때 건설된 배다리를 활용하였는데, 배다리 중간에 있는 홍살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어머니에게 문안을 드리기도 했다.
정조 때의 배다리 구상과 건설 과정은 『주교절목』과 『주교지남』을 통해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그린 8폭의 병풍 중 「한강주교환어도」로 남아 있다.
「한강주교환어도」에는 배다리를 건넜던 어가행렬과 함께 행렬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떡장수 엿장수의 등장도 흥미를 끈다.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다리. 그리고 그 설계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배다리 건설을 성공시킨 관료들과 장인들, 배다리 건설에 적극 협조한 경강상인. 이들 모두의 합작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교지남』으로 배다리 건설의 세밀한 원칙을 제시하고, 배다리 건설을 완성한 정조. 정조는 이 배다리를 건너면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은 화성 건설과 함께 과학과 실학정신이 만개하였던 정조 시대의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고전번역원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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