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가

[스크랩] 상여2

장안봉(微山) 2014. 3. 4. 04:42
 

현대는 [죽음]에 대한 경건한 인식이 죽어버린 박제의 시대이다. 본래 인류는 죽음을 인식하여 다양한 [문화]를 만들었고 그 문화적 삶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눈부신 [문명]을 만들었다. 어디에서 본 이 문장이 오랫동안 나의 궁금한 화두, [죽음의 의식]을 해결해 주었다.
아울러,한국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탄생이다. 그래서 음산한 종말로서가 아닌 새로운 가능이라고 묵시적으로 받아들인다. 허물과 미움과 증오를 씻어 버리며 갈등에서 화해로, 질시에서 사랑으로 전이되게 한다.
그리하여 한국인에게 있어서 죽음의 예식 [장례]는 그 어느 통과의례보다도 본질에 있어 더더욱 화해와 사랑의 컨셉으로 구성되어 진다라는 명제로 우리의 죽음에 관한 일종의 한국적인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으리라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마는 [죽는]것에는 그 순서가 없다고 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과 경외를 동시에 가지는 이중적 감정을 지니게 된다.
독특한 장례문화가 남긴 문화의 코드들 옛날, 망자(亡者)를 기준으로 왕의 죽음을 붕(朋)이라 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 경우는 거(去)라 했으며 장삼이사 같은 일반인은 졸(卒)이라고 표현하며 능(陵)과 묘(墓)와 산소가 구분되어 그 죽음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경건 함의 농도를 차별화 하였으니, 본질적 의미는 원래 있던곳 으로의 회귀, 즉[돌아갔다]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화두는 우리역사 수 천년 동안의 숙제로 남아 불교와 유교를 이 땅의 최대 가치선으로 자리 매김 시켰다. 그러나 우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코 그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을 모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 기준으로 유추하여 버린다. 그에 따라 여러가지의 제례와 종교의식들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과거에 대한 유별난 관심 조선왕조 500 년간의 정치권력투쟁의 역사는 [죽음]의 문제가 외형상의 이슈들 이었다.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 입는다면 기간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등속의 문제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한 그 이면에는 과거문제에 유달리 집착하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원형질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 우리는 죽음이라는 [과거]에 그 많은 에너지와 의미를 쏟아 부으려 했을까 ?
불교에 기반을 둔 고려를 누르고 새 왕조를 건립한 세력들에게는 새로운 차별화를 위하여 택한 통치이념이 유교였다. 유교는 다른 종교철학과는 달리 민속과 무속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가장 민속적으로 두 이질적 개념을 융화한듯 하다.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이 유교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장례] 절차의 구체화, 세분화, 정형화를 보면 일목요연하게 들어난다. 이렇게 세분화되고 철학적인 장례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통치 원리하에서 서서히 [죽음]의식이 산자를 위한 통과의례로 자리잡으며 [체면]과 [외양]을 중시하는 민족적 기질이 한 곳으로 집대성하여 비이상적으로 증폭 된 부분이 이 죽음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다. 그 흔적은 적어도 외형에 있어서만큼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를 않고 현대화 되어버린 국적 없는 [의례]로 남아있다.
반면에, 의식은 변하지 않아 아직도 그 옛날의 실천규범을 따르려는 이중적인 문화지체 [cultural lag]를 일으킨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는 종종 절차와 성의문제로 유족간에 싸움이 벌어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의식엔 죽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산자의 그것보다 더욱 크기 때문이리라.
만약 문화가 진정으로 가치지향적인 개념이라면 이 죽음에 대한 의식은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가 더딘것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몫은 산자의 것이기에 말이다.

[무덤에 관한 이야기]
♤ 산 자가 사는 무덤 늦더위에 모기와 벌까지 쏘여가며 매년 힘들게 벌초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문씨종중의 장손은 선산을 만들기로 했단다.더구나 편한 것만을 찾는 세태에 다음 세대가 깊은 산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조상 묘소를 행여 방치할까 두려워 한 곳에 모시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한 여름 내내,지게에 가는 소나무 가지를 깔고 조상 유골들을 얹어 정성스레 이장을 했다.먹고 살만한 종손은 종손이라는 책임에 많은 이장 비용을 들여 나지막한 야산 둥지에 모두 안장하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그로부터 한 달 뒤 그의 작은 집 조부가 돌아가셨다.문중에서는 “구장(오래된 시신)에 생장(바로 돌아가신 시신)을 합묘하는 것이 아니다.다른 곳에 옮겨 육탈이 된 뒤에 다시 옮겨야 한다”며 가까운 언덕에 묘를 쓰라고 했다.그러나 작은 집 자손들이 완강히 우기는 터에 선산에 모시게 되었다.
한데 보름 뒤 경찰이 찾아왔다.성실하던 종손 집 큰 아들에게 변고가 생겨 수배 대상이 되었단다.그리고 효자둥이였던 둘째 아들마저 부산에서 직장을 잃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그 때까지도 농삿일과 함께 뚝배기를 만들어 팔았던 종손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빈손이 된 종손을 문중에서 돕기 위해 나섰으나 멀리 연고가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며칠 후 그의 작은 집에는 경사가 났다.서울에 점포를 낸 것이 날로 번성 하고 있는데다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연이어 서울의 일류대학과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이다.작은 시골 마을은 잔치 분위기였고 그들은 조상 묘소에 인사를 올렸다.몇 달 후 필자는 선산 모퉁이에 서서 묵묵히 옛집을 보고 있는 그 종손을 보았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안동 댐이 세워지기 전 김씨 문중에서는 긴급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문중에서 잘 보존해 오던 묘를 댐 공사로 인해 이장해야 하기 때문이었다.며칠 뒤 문중에서 봉분을 열기 시작했다.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얀 김이 나오면서 영롱한 구슬같은 것이 주렁주렁 그 안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며칠 후 이상하게도 집안에 일이 생겼다.

장손에게는 소싸움에서 우승하던 황소가 갑자기 죽은 것을 비롯,하나하나 생각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끝내는 아름드리 기둥으로 지어진 한옥마저 넘어가더니 지금까지도 어렵사리 지내고 있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삶에 허덕이던 그의 동생은 거칠 것이 없이 번창하여 이제는 안동시내에서 고층 빌딩까지 짓고 잘 살고 있다. 요즘처럼 추석이 다가와 집안마다 벌초로 분주할 때면 종종 떠오르는 주변의 실화들이다.

예부터 사람들은 죽은 자에게도 산 자처럼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집이 필요하다고 믿었다.영생과 부활을 꿈꾸며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우리는 고분을 남겼다.마치 산 자가 기거하는 공간처럼 여러 방을 두고 가재 도구나 돈도 남겼다.이곳은 가족들의 아쉬움과 사랑이 녹아있는 곳이니 무덤은 죽은 자의 집이 아닌 산 자가 사는 느낌이다.죽은 자의 집은 산소,묘소,무덤,고분,총 등 지위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데 모두가 흙 속에 묻혔으니 전부가 ‘ 토방’인 셈이다.

우리에게 무덤은 단순히 죽은 사람의 집이 아니었다.무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며 제사를 지내는 성역이기도 하다.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로써 아이들에게 효를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이러한 조상의 묘를 단순한 유택(幽宅)으로 보지 않고 후손의 길흉화복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풍토도 사뭇 뿌리가 깊다.명당에 조상을 모셔 발복(發福)하려는 욕구,훌륭한 산소를 효도의 상징으로 보는 인식 등이 그것이다.삼국시대의 유적 발굴로 볼 때 권력층이나 부유층에서는 풍수이론에 입각하여 묏자리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이나 김유신의 무덤 등은 모두 풍수이론에 어긋남 없이 자리 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는 부친 환조(桓祖)의 묘를 명당에 써서 왕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흥선대원군은 부친 묘를 덕산의 가야산 명당터에 쓰고 왕권을 장악했다고 한다.여흥 민씨는 망우리 고개 너머 왕릉의 영역에 묘를 써 3 명의 왕비를 배출했다고 알려진다.여흥 민씨 묘는 이왕직을 지낸 민영기(閔泳綺)의 13대조가 왕비와 재상이 계속 나올 수 있는 묏자리로 잡은 것이라 한다.마치 귀중한 칼이 칼집에서 나온 모습 같다고 하여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명당이라 한다.결국 명당터의 묘일수록 가문의 결속력과 자부심을 다져주는데 더 없이 강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묏자리의 명당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인 환경의 길지를 말한다.그 요체는 혈(穴)이다.혈은 구멍으로 여성의 음부를 상징한다.혈과 명당은 풍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다.정혈법에 의하면 명당은 넓고 평탄하고 원만해야 한다.좁고 경사지거나 비뚤어지면 나쁘다.명당이 제대로 되어야 혈도 진혈(眞穴)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 명당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를 의미했다.왕자의 태묘이며 왕이 정치와 교육 등 모든 공식적인 의례를 거행하는 곳이었다.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며,제후에게서 조회받고,노인을 봉양하며,현자를 존경하는등 국가의 모든 큰 일들은 모두 명당에서 시행했다.즉 왕이 천명을 받들어 세상을 다스린다는 유교적 정치 사상은 건축물에 영향을 끼쳐 명당을 형성했고 여기서 군주의 정치적 이상이 구현되었다.민가에까지 확산된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다.집터보다는 묏자리 고르기가 더 관심사였다.

풍수지리설에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문구가 있다.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다.살아생전에 효도하고 정성된 마음을 가지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묘지문화는 이제 비좁은 우리 국토에서 선인선과의 새로운 문화 양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조상을 잘 모시면서도 별탈없는 예의로 정착되어야 한다.그래서 일까.사람들은 지금,납골당 안치에 여러 모로 관심이 높다.
출처 : 용방소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용방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