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 이언적선생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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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 이언적선생 재실로 사용 중인 달전재사 전경 |
달전재사(경북 문화재자료 2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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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전재사 입구 전경 |
▲ 달전재사 좌측 관리사 모습 |
원래는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전하기도 하고, 조선 태종(太宗) 2년(1402년)경에 창건한 건물이라고 구전될 뿐 확실한 근거 자료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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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에 위치한 달전재사 및 현판 |
현재는 조선조 성리학자로 동방 오현(五賢) 중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는 재사로 사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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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에 딸린 누마루 정면과 측면 모습 |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 건물은 약 80여년 전 까지만 해도 불상(佛像)은 없지만 승도(僧徒)들이 거주하며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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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마루 내부 모습과 현판 |
달전재사는 ㅁ자형 팔작지붕의 와가(瓦家)로 정면 6칸, 측면 6칸이며, 건물 배치에 있어서 배면(背面)에 루(樓)마루를 위치시키고 좌측 협문으로 통해 정침으로 출입하도록 고려되어 다른 재사 건축에서 보기드문 특이한 배치 수법으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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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전재사 좌측, 묘지로 오르는 입구에 묘지 안내석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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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로 오르는 주변 전경과 묘지로 오르며 바라 본 달전재사 모습 |
회재 이언적선생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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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 이언적선생 묘역 전경 |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 신도비(경북 유형문화재 37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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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 이언적선생 신도비 전경. 옥산서원에 있는 신도비가 376-1호이고, 이 곳 신도비는 37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회재 이언적선생 신도비는 선조 초, 추숭(追崇)과정에서 기대승(寄大升)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撰)해졌고 1577년(선조 10년)에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로 옥산서원 내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9년 뒤인 1586년에는 손엽(孫曄)의 글씨로 신도비가 다시 묘소 앞에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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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앞에 회재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특히 옥산서원 내 신도비는 수(首), 귀부(龜趺)의 조각에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건립 연대나 이언적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 등을 고려하여 볼 때 두 신도비 모두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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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묘역 전경. 쌍분이면서 부후 묘입니다.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의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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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 이언적선생 묘 |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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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묘역 내 문인석 모습 |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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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석에서 바라 본 신도비 모습(우측 사진) |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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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적선생 부인 함양박씨(咸陽朴氏) 묘역 전경 |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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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박씨(咸陽朴氏) 묘 |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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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박씨 묘역 내 망주석. 망주석이 회재선생 묘역에는 없고, 부인 묘역에만 조성되었습니다. |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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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박씨 묘역 측면 모습 |
▲ 함양박씨 묘역 측후면에서 내려다 본 모습 |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 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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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박씨 묘역 후면에서 바라 본 모습 |
회재 이언적선생 아들 수암공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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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제(從弟) 경력공(經歷公) 통(通)의 아들인 응인(應仁)을 회재선생 양자로 맞아... |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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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양자 수암공(守庵公) 이응인(李應仁) 묘역 전경 |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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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암공 이응인 묘 |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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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암공 묘역내 문인석이 조금 특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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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암공 묘역내 문인석 측후면 모습 |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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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암공 묘역내 문인석 얼굴 모습 |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 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회재집》에 실려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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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암공 묘역 전측면과 후면에서 바라 본 모습 |
농재 이언괄선생 아들 매헌공 배위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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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헌공(농재선생 양자) 배위 묘만 있고, 매헌공의 묘는 없습니다. 왜 부인 묘만 이 곳에 있는지... |
(4) 경주(慶州) 보문파(普門派)의 유래(由來) 학모회(鶴慕會)창립 즈음하여 李時英
우리 여주 이씨(驪州 李氏) 시조는 고려 향공진사(高麗 鄕貢進士) 휘(諱) 세정(世貞) 할아버지로부터 7 세간(世間) 거지(居地)가 분명(分明)치 않고 8세 휘(諱) 숭례(崇禮) 할아버지께서 연일(延日)로 오셨는데 배위(配位)는 청주(淸州) 양씨(楊氏)이며 경상감사(慶尙監司) 양배(楊培)의 따님이시다.
양감사(楊監司)가 단종사화(端宗士禍)에 관련되어 장기현감(長鬐縣監)으로 오게됨에 같이 오셔서 연일(延日)에서 사시다가 별세하시니 묘소는 연일 우박동에 있다. 자제 두 분을 두셨는데 장자 휘(諱) 명회(命會)는 연일(延日) 옥동파(玉洞派) 조상이고 차자 휘(諱) 수회(壽會)는 판서공(判書公) 경주 양동파(良洞派)의 조상이다. 배위는 월성이씨(月城李氏)이신데 한성 판윤지대(漢城判尹之帶)의 손녀이시고 묘는 천군아동(千軍阿洞)에 있다.
판서(判書)공께서는 아들 형제를 두셨다. 맏아들 찬성공(贊成公) 휘(諱) 번(蕃) 할아버지는 양동(良洞) 손(孫)씨 집에 출입(出入)하시고 양동(良洞)에 와서 사셨다. 둘째 아들 별시위공(別侍衛公) 휘(諱) 필(苾) 할아버지는 영지(影池)에서 사시고, 아들 사 형제를 두셨는데 맏아들 경력공(經歷公) 휘(諱) 통(通)이시고 둘째 아들 충순위공(忠順衛公) 휘(諱) 도(道)이시다.
찬성공(贊成公)의 장자 문원공(文元公) 회재선생(晦齋先生)과 차자 농재선생(聾齋先生)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고 회재선생 증조부, 조부의 묘소에 묘갈명(墓碣名)을 짓고 입석(立石)을 하셨는데 ‘여강이공지묘(驪江李公之墓)’라 하시니 여강(驪江)이란 본관(本貫)은 이때부터 행(行)한 모양이다. 여강(驪江)은 여주(驪州)에 있는 강(江)이다.
회재 선생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종제(從弟) 경력공(經歷公)의 둘쩨 아들 휘(諱) 응인(應仁)을 양자(養子)하시고, 농제 선생도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 충순위공(忠順衛公)의 둘째 아들 휘 응기(應期)를 양자(養子)하시니 호(號)는 매헌공(梅軒公) 이시다. - 후손 분이 쓰신 내용을 인터넷에서 가져 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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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재선생 역시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 충순위공(忠順衛公) 도(道)의 아들 응기(應期 - 매헌공梅軒公)를 양자로 맞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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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헌공 배위 묘의 망주석 조각이 멋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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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헌공 배위 묘역 전면과 후면에서 바라 본 모습 |
회재 이언적선생 부모 묘역(찬성공 이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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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부(父) 찬성공(贊成公) 번(蕃), 모(母)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 경주손씨(慶州孫氏)의 부후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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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전방 좌우 측면에서 보면 회재선생 부친 묘가 앞에 있고, 모친 묘가 뒤에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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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부친 찬성공 이번선생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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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성공 묘역의 망주석도 조각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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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방 우측에서 바라 본 찬성공 부부 묘역. 쌍분이면서 부후 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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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손씨(慶州孫氏)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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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손씨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농재 이언괄선생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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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아우, 농재 이언괄선생 묘역 전경 |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은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용(子容), 호는 농재(聾齋). 경주출신. 영의정에 증직된 번(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 소(鷄川君 召)의 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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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괄 선생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 노모를 모셨다. 향로석의 조각이 예쁩니다. |
대학자인 형 언적(彦迪)에게 글을 배웠다.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듯 살아가라는 현인의 가르침에 따라 농재라 자호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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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재선생 묘역 하단 좌우로 조성된 망주석 모습 |
1545년(인종 1)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고, 이듬해 주부로 승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47년(명종 2) 송라도(松蘿道)의 찰방이 되었는데, 관할 역민의 부역을 경감하고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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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선생 묘역군내 망주석들은 모두 조각 문양이 너무 예뻐서 광나루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
형 언적이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몰려 북청에 유배되자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지어 윤원형의 전횡을 규탄하였다. 성리학과 경전에 밝았고, 후진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경주의 덕계사(德溪祠)와 덕연사(德淵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재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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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재선생 묘역 전후면 모습 |
달전재사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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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하단 21m 지점에 신도비, 이어서 이언적 부부 묘, 양자인 이응인 묘, 매헌공 배위 묘, 이언적 부모 묘, 이언적 동생 이언괄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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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 A 부분에 이언적선생 묘가 위치. 대련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산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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