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현공)

[스크랩] 현공풍수의 역사적 인물

장안봉(微山) 2013. 12. 19. 03:55

현공풍수의 역사적 인물(옮겨온 글)

 

 

아래 글은 가칭 '현공풍수공부'의 원고입니다. 오타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책이 나올 적에는 수정을 할 것이므로 참고자료로 보시기 바랍니다.

 

                        2005년 7월 2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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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공풍수의 역사적 인물

 

모든 학문에는 나름대로의 걸어 온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들을 통해서 선현의 노고와 공덕을 헤아리는 것도 공부하는 후학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이며 상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현공과 연관된 역사를 대략 살펴봄으로 해서 흐름을 같이 한다는 의미를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그럼 어디 역사 속에서의 현공이 걸어 온 길을 살펴보도록 하자.

 

1. 풍수학의 이전(以前)

 

아마도 처음의 풍수는 그야말로 경험에 의한 출발이었을 것으로 짐작을 할 수가 있겠다. 바람이 불 적에는 언덕 아래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고, 또 추운 겨울에는 동굴에서 보내는 것이 동사(凍死)를 면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풍수는 시작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그러다가 점차로 궁리를 좋아하는 지능형 인간들이 나타나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을 것은 아마도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에 해당하는 추장이나 대장은 아마도 이러한 것을 구전(口傳)으로 전수를 받지 않았을까? 그래야만 종족을 이끄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가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오늘의 풍수학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봤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생존경험에서 발생한 학문인 셈이다.

 

이러한 출발점에서는 연구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겠지만 점차로 복잡해지면서 더욱 은밀한 속의 작용까지도 다 얻어내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은 늦게 태어난 덕(?)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왜 그런 광고가 있지 않는가, 이미 죽은 사람들을 들먹거리면서 뭘 못해봐서 불쌍하다던가? 여하튼 이러한 인연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면서 역사에 남아있는 인물들 중에서 대표적인 몇 사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물론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기까지에는 남지 않은 흔적의 역사도 그보다 몇 백배, 혹은 몇 천배의 분량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러한 전설에 대해서는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다루게 될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뒤로 미루도록 하고 우리는 역사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한다.

 

 

 

2. 역사에 등장하는 풍수조사(風水祖師)

 

역사적인 풍수학의 흔적은 현재 남아 있는 서적을 근거로 해서 역추적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남긴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봐도 후학에게 좋은 공덕이 될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1)청낭경(靑囊經)-한(漢)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책 이름을 의지해서 청오자가 지었다고만 전하고 있다. 또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는 말도 전한다. 황석공은 기원전 220년대의 진(秦)나라때의 사람이라고 전하는데, 하도와 낙서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혹 원문을 한번 봐야 속이 시원하실 벗님이 계실 수도 있겠다. 어디 구경 한번 해본다고 무슨 큰일이야 날라구..... 보자 까짓거. 다만 질려버리는 것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냥 한번 쓰윽~ 보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기만 바랄 뿐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상권에서는 하도의 다섯 기운과 낙서의 방위에 대한 음양의 기운이 서로 위치를 잡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을 삼고, 중권에서는 천지간의 형기에 의해서 모든 움직임이 생겨난 기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하권에서는 천지간의 형기가 각 방위별로 배치가 된 다음에는 어떤 영향이 이뤄지게 되는지를 설명한 내용이다.

 

?囊經 

上卷 

天尊地卑,陽奇陰偶, 一六共宗,二七同道,三八?朋,四九?友,五十同途,闢闔奇偶,五兆生成,流行終始。 

八體宏佈,子母分施,天地定位,山澤通氣,雷風相薄,水火不相射,中五立極,制臨四方,背一面九,三七居旁,二八四六,縱橫紀網。

陽以相陰,陰以含陽,陽生於陰,柔生始剛,陰德宏濟,陽德順昌。 

是故陽本陰,陰育陽,天依形,地附氣,此之謂化始。 

 

中卷 

天有五星,地有五行,天分星宿,地列山川,氣行於地,形麗於天,因形察氣,以立人紀。 

紫微天極,太乙之御,君臨四正,南面而治,天市東宮,少微西掖,太極南垣,旁照四極。 

四七?經,五德?緯,運斡坤輿,垂光乾紀,七政樞機,流通終始。 

地德上載,天光下臨,陰用陽朝,陽用陰應,陰陽相見,福祿永貞,陰陽相乖,禍咎踵門。 

天之所臨,地之所盛,形止氣蓄,萬物化生,氣感而應,鬼福及人,是故天有象,地有形,上下相須而成一體,此之謂化機。 

 

下卷 

無極而太極也,理寓於氣,氣?於地,日月星宿,剛氣上騰,山川草木,柔氣下凝,資陽以昌,用陰以成。 

陽德有象,陰德有位,地有四勢,氣從八方,外氣行形,內氣止生,乘風則散,界水則止。是故順五兆,用八卦,排六甲,佈八門, 

推五運,定六氣,明地德,立人道,因變化,原終始,此謂之化成。 

 

나름대로 도움이 되실까 하여 원문을 보여 드렸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길지 않아서이다. 다만 도움이 되지 않기는 이나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나는 현공풍수’가 ‘지겨운 현공풍수’로 변할까 그 점을 염려해서 원문을 보여 드리는 등의 헛수고(?)는 하지 않을 참이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리고 나중에 원문에 대해서는 풀이를 해 드릴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봐서 뒤로 미루도록 한다.

 

2)장경(葬經)-진(晉) 곽박(郭璞) 276-324

 

장경은 일명 금낭경(錦囊經)이라고도 한다. 풍수학의 핵심논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청대의 건륭제 때에 제작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채택이 된 명저로 손꼽힌다. 진나라의 곽박이라는 분이 지었다고 전하는데, 이름은 곽경순(郭景純)이다. 많은 책을 지었고, 기감(氣感)에 대한 이야기까지 기록을 하였는데, 풍수로 인해서 자손이 잘 된다는 의미를 최초로 밝혔다고 하여 풍수의 천재라고 하기도 한다. 이미 이 시기에 곽박은 풍수에 대해서 상당한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하겠고, 그래서 그를 풍수조사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원문을 보여 드리는 것은 참는다.

 

 

 

3. 당대의 중흥조사(中興祖師)

 

당대(唐代)가 되면서 풍수학은 더욱 발전을 기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두각을 나타내신 분으로 현공풍수에서 조사로 보는 분이 등장을 한다. 그 이름은 양균송(梁均松)선생이다. 저서도 무척 많으며, 특히 청낭경(靑囊經)을 풀이한 것으로 제목이 된 청낭오어(靑囊奧語)는 특별한 명저로 꼽히기도 한다. 나중에 대풍수가 되시거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다.

 

1) 양균송(梁均松) 선생 841-907

 

워낙 연구도 많이 했고, 실력도 뛰어나서 많은 일화를 남기신 분으로 봐야 하겠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양균송 일대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언제 시간이 나면 풀이를 해 드릴 마음도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은 재미가 있어서 읽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간략하게 한 두 대목만 소개를 해 드리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고자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양균송 선생은 중국 강서(江西)성의 여릉(廬陵-지금의 吉水縣)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익(益)이 있고, 자는 숙무(叔茂)이며 호는 구빈(救貧)이다.

 

출생환경은 유복자(遺腹子)였다고 하니까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겠고, 그 어머니는 두주(竇州)의 어떤 상인에게 개가(改嫁)를 했으므로 선생의 출생지는 두주가 되는 셈이다. 두주는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신의현(信宜縣)이다. 당시의 출생한 시기를 보면, 당나라 무종(武宗) 辛酉년이고, 서기로는 841년이 되는 해의 8월 16일이다.

 

부친은 찬도(粲都), 어머니는 하씨(何氏)이며 형제는 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일반사람을 뛰어 넘었다고 하는데, 옛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특히 좋아해서 17세에 등과(登科)하여 벼슬길에 올라서는 서기 875년에서 880년 사이에 국사(國師)를 임명받았으며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와 영태지리사(靈台地理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역할은 황실의 풍수관련 서적과 풍수의 실무적인 일을 맡아서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임기 중에는 풍수관련 서적을 깊이 연구하여 그 요령을 깨달아서 후에 각 명가(名家)의 풍수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이론적인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873년에 왕(懿宗)이 죽고 희종(僖宗)이 다음 왕이 되었는데, 왕조마다 혼란과 부패의 상황들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여 의연히 조정을 벗어나서 평민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에 개인적인 소지가 금지되었던 《옥함비술(玉函秘術)》을 몸에 지니고는 사방으로 구름처럼 정처 없는 나그네 길에 올라서,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풍수의 이론을 살피면서 또 실제로 현장에서 대입을 하면서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왕조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이라서 늘 거동이 자유롭지 않아서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로 호를 구빈(救貧)이라 바꾸고는 공동산(??山-일명 名空山)으로 숨어 들어가서 또 연구를 하였다.

 

나중에 생계를 위해서 공동산을 떠난 다음에 자기 스스로 풍수학의 특징을 연마하여 건주(虔州)에 머물면서 각지의 풍수와 연관된 일로 활동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서서히 풍수의 대가로 명성을 얻어가게 되었다.

 

그가 풍수활동에 대해서 연구 하면서 확인을 해 보니, 양택(陽宅)은 논할 것도 없고, 음택의 땅을 선택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 등등이 모두 하나같이 서로 통하는 바가 없고, 길흉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며 그로 인해서 눈으로 대충 헤아리거나, 사(砂)니 용(龍)이니 맥(脈)이니 하는 것도 다 각각이라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개선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정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제거하고, 타당한 것은 채용하는 형식으로 연구를 하였는데, 이것 중에서 형세를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사용하는 사람을 일러서 ‘형세파(形勢派)’라고 하거나, 혹은 ‘만체파(巒體派)’라고 불렀는데, 통상 부르기를 ‘공파(?派)’라고도 했다.

 

당말(唐末) 이후에 공파는 풍수에 대한 형상을 봐서 해석하는 방법으로 장시간 행업을 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형기(形氣) 쪽에 속한다고 하겠다.

 

양균송 선생과 나경의 인연을 보게 되면 이전에는 12지지로 방향이 되어 있던 것을 한대의 장량(張良-장자방)이 24좌향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자북(磁北)을 첨가하여 명실공히 나경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나경의 연구에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겉으로는 형세파로 시작했지만 내심 비전(秘傳)된 현공법에는 나경을 이용해서 정확한 좌향을 잡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흔적이다.

 

그 당시에 공파 이외에 비교적 영향력이 있었던 파는 ‘민파(福建派)’였는데, 민파에 대해서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실린 글에 의하면, ‘민파의 풍수법은 강서(공파)에서 구했으나 그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의 좋은 책을 찾고 나경(羅經)을 헤아리고 여러 가지를 연구하여 서로 참작하고 결합하였으나 그 요지(要旨)는 얻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봐서는 민파는 이기(理氣)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공법은 간단명료했으므로 비전이 되었고, 민파는 이론적으로 접근을 하다가 보니 연구를 더욱 다양하게 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공파는 산의 형세를 관찰하고 용의 흐름에 의한 기세를 봐서 혈자리를 선택하게 되는데, 민파는 방위에만 편중되어 나경을 중요하게 쓰고 있다고 하겠으니 당시에는 오히려 민파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고 풍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파의 방법을 참고하게 되었을 것인데, 민파도 점점 개선하여 발전하면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일파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대(元代)이후에는 민파의 발전이 진일보하여 하나의 틀을 유지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얻은 명칭이 ‘이기파(理氣派)’인 것이다. 이기파는 계속해서 학습과 아울러서 공파의 형세론을 연구하였고, 공파는 또 공파대로 이기파가 사용하던 나경을 도입하게 됨으로 해서 종래의 양파가 갖고 있던 결함이 보완되면서 이후로는 두 파의 차이를 찾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양균송 선생은 실천과 종합결론을 내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는데, 용을 찾는 것, 산세를 살피는 것, 물을 보는 것, 그리고 혈 자리를 찍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를 풍수사대요결(風水四大要訣)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에 대해서 선생이 저술한 책은 많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는 《감룡경(?龍經)》《의룡경(疑龍經)》 《장법도장(葬法倒杖)》《청낭오어(靑囊奧語)》 《감룡십문(?龍十問)》《이십사사장법(二十四砂葬法)》《천옥경(天玉經)》《천옥경외편(天玉經外篇)》《도천보조경(都天寶照經)》등이 있다.

 

이러한 글들은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쌓여온 풍수학의 요지이므로, 후학이 풍수를 배울 적에는 반드시 참고하고 의거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풍수는 원류가 무척 오래이다 보니 각 왕조마다 대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각기 한 가지로 말이 통일되지 않아서 계통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다만 양균송 선생이 공파(?派)를 창안하고 표면적으로는 형기법을 전하면서 이기법은 내부적으로 전승했다고 추정이 된다. 그러다가 지금에 이르러 무수히 많은 풍수학자들이 모두 양균송 선생을 풍수학의 조사라고 하며 자신은 양균송 선생의 몇 대 제자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양균송 선생은 중년이후 일생을 바쳐서 풍수학을 연구 했는데, 909년에 길을 가다가 노환이 발동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니 나이는 69세였다.

 

선생이 죽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그의 생전 공덕을 칭송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며 참례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 옆에 비각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비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청대(淸代)에 단도헌(段道軒)과 오조룡(吳肇龍)이 양공제자(楊公弟子)라는 뜻으로 동일한 위치에 사당을 세우고 신주비(神主碑)를 세웠는데, 그 비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양공(楊公)이 비교적 장기간 거처했던 삼료촌(三僚村)에는 당시의 주민들이 생전의 인연을 그리워하여 현지인들이 양공묘(楊公墓)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무너져 없어지게 되었고, 다만 남은 것은 현재의 우도현(雩都縣)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주련의 몇 귀절 글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선생에 대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이나 매한가지라고 하겠으니 무학대사나 도선국사와 얽힌 풍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도 되겠다. 그 중에는 사실인 것도 있겠고, 그냥 그야말로 전설인 것도 있겠지만 원래가 뛰어난 인물 뒤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붙어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그만큼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생략하고 뒷날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다.

 

다만 마지막으로 강조를 하고 싶은 것은 사고전서에 양균송 선생의 저서가 3권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사고전서에 풍수관련 책은 모두 10권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신다면 그 내용이 과연 신뢰할 정도가 상당하다고 봐도 되겠다.

 

참고로 사고전서에 기록된 책은, 감룡경, 청낭오어, 천옥경이다.

 

 

2)증구기(曾求己) 공안(曾安) 선생

 

양균송 선생을 직접 모시면서 심오한 내용을 전수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일반적인 이론은 공개를 하신 양균송 선생이지만 은밀한 이야기는 직계제자에게만 전수를 한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므로 증 선생이 받은 것은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만 한다. 증구기는 이름이고 공안은 아호인 듯하다.

 

 

3)증문천(曾文?) 선생

 

증공안의 아들이다. 그와 만나는 이야기를 《양균송전기(梁均松傳記》에서 봤는데, 전기에서는 증공안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증문천이 등장을 한다. 이러한 차이는 벌써 당나라때의 이야기이니 정확한 고증의 어려움으로 인한 역사가들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문제라고 봐야 하겠다. 그러니까 양균송의 제자가 증문천인지, 증공안의 아들이 증문천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는 정도로만 알아둬도 되겠는데, 중요한 것은 모두 다 인연에 의해서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책에 따라서는 증문적(曾文迪)이라고 한 곳도 있는데, 글자가 비슷한 것으로 봐서 둘 중에 하나는 잘못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의 학자들 간에도 차이가 나는데, 사고전서에는 증문천으로 명확하게 표기가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쪽을 따른다면 오류가 없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책을 남기지 않으면 후대에 전할 것이 없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이 분의 저서로는 《청낭오지(靑囊奧旨)》,《심룡기(尋龍記)》, 《음양문답(陰陽問答)》등이 전하는데, 선생의 이름을 손상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은 책으로 특히 유명한 것은 《청낭서(靑囊序)》가 있는데, 이 책은 사고전서에도 포함이 되었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책이다. 그런데 기록에 따라서는 증공안 선생이 지은 것으로도 전하는데 사고전서에서는 분명히 증문천이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4) 일행(一行) 선사

 

일행 선사는 자평명리학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는 스님이다. 그런데 현공에서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나왔는가 싶었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저서가 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책의 이름은 《멸만경(滅巒經)》이라고 하는데, 멸만경은 지금 없어져서 구할 수가 없이 그 방법이라고 하면서 전해지는 한 내용이 있으니 흔히 ‘팔택법(八宅法)’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동사택과 서사택으로 나누는 것으로 벗님이 조금만 풍수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들어 보셨을 것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 방법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논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속으로는 황제의 명을 받아서 다른 종족들은 풍수를 잘못 써서 멸종하라고 하는 의미에서 패망할 자리를 명당이라고 하는 오도(誤導)를 했다고 한다. 물론 도를 닦는 스님이 되어서 그렇게까지 혹독하게 했을까만서도 전해지는 말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풍수이론이 우리나라에서도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한족은 배우지 않고, 만주족과 변방의 종족들에게 배우도록 했다는데, 이것이 역수입이 되어서 중국으로 다시 들어오면서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는 말도 있는데, 또한 세상의 인과응보 법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송대의 풍수대사(風水大師)

  

이번에는 조사가 아니고 대사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 본 것은 조사의 뒤를 이해서 큰 스승들이 나와서 대사라고 이름을 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봐도 될 분이 송대(宋代)에 출현하였다.

 

1) 오경란(吳景鸞) 선생

 

언뜻 듣기에는 여자 이름처럼 들린다. 물론 한국 사람의 정서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 분의 업적으로는 좋은 책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가고 책만 남는 것이 역사를 살피면서 얻게 되는 교훈이다. 벗님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책 한 권을 역사에 남기시게 되시기 바란다.

 

오경란 선생의 생몰 연대는 정확하지 않은 모양이다. 신선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원래 신선은 죽은 날이 없다고 봐도 되겠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본다. 전해지는 말로는 증문천의 제자는 진희이가 되고, 진희이(陳希夷)선생의 제자는 오극성(吳克誠)이고, 오극성은 오경란의 부친이 되는 것이므로 학문의 순서에서 진희이선생의 손자뻘이 된다.

 

선생의 저서로는 《망룡경(望龍經)》, 《도법쌍담(道法雙談)》등이 있는데 이러한 저서들은 후대에서도 생생한 지혜의 샘이 되는 명저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후에 반드시 봐야 할 책의 목록에 넣어 두시기 바란다. 그 중에서도 더욱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는 책은 《현공비지(玄空秘旨)》와 《천기부(天機賦)》이다.

 

그런데 같은 오경란 선생의 저서라고 전하는 책으로 《현기부(玄機賦)》라는 이름의 책도 있어서 내용을 확인해봐야 하겠다. 같은 책인지 다른 책인지 참고하시라는 말씀을 드린다. 근래의 학자들도 현공비지에 대해서 주석을 즐겨 달아서 자료가 많은 편이다.

 

그래도 신비하고 오묘한 현공의 본론은 살짝 감춰뒀다는 평은 받게 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아무에게나 전하지 말라는 현공 특유의 전승(傳承) 방법에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 후로 맥이라고 할 만한 자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고도 한다. 연결을 시키는 학자들은 500년 후에 명대(明代)의 장대홍(蔣大鴻) 선생으로 이어진다고도 한다.

 

 

2) 목당(牧堂) 채원정(蔡元定) 선생 1161-1237

 

자세한 행적은 나타나지 않지만, 저서가 있어 이름을 전하는데, 책의 이름은 《발미론(發微論)》이다. 그리고 이 발미론은 사고전서에 수록이 된 것을 보면 좋은 책이라고 평가를 받았다고 봐도 되겠다.

 

 

3) 사마두타(司馬頭陀) 대사

 

스님들이 풍수학에 연구가 깊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의 내력인 모양이다. 당대의 일행선사(一行禪師)가 유명하더니 송대에서는 사마두타가 등장을 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니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옮겨 드린다.

 

위산(?山)이 영우(靈祐)라는 이름으로 백장선사(百丈禪師) 휘하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한번은 풍수와 관상술에도 능통한 사마 두타(司馬 頭陀)라는 선객이 행각 중에 들러 백장선사에게 말했다.

 

"호남에는 위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제대로 주인을 만난다면 천오백 명의 학인을 수용할 수도 있는 명산입니다."

그리고는 그 산세를 자세히 설명하는지라, 백장선사도 상당한 흥미를 느껴서 말했다.

"이 늙은이가 거기 가서 살면 어떻겠나."

그러자 사마 두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스님은 좀 곤란합니다."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스님은 골인(骨人)이신데 저 산은 육산(肉山)입니다. 스님이 가셔서 사신다 해도 학인은 천 명에도 차지 못할 것입니다."

백장은 선사로서는 일류 중의 일류일지 몰라도 빈궁한 상이므로 복지(福地)의 주인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백장선사도 쓴웃음을 띄울 수밖에 없었으려니와, 그렇다면 제자들 중에서 적당한 사람이 있는가 점검해 달라고 하면서, 시자를 시켜 제일좌(第一座)인 화림보각(華林普覺)을 불러다가 보였다. 제일좌는 곧 수좌(首座)니, 학인의 우두머리다.

사마 두타는 화림에게 기침을 하며 몇 걸음 걸어보게 하고 나서 말했다.

"이 사람은 안 되겠습니다."

이에 백장선사는 전좌(典座)의 자리에 있는 영우를 불러오게 했다. 식사를 담당하는 것이 전좌니, 이때의 영우는 이십대 젊은이였다.

이번에는 사마 두타도 군말이 없었다.

"이 사람이라면 위산의 주인이 되기에 족합니다."

이리하여 영우를 보내기로 결정이 되었으나, 화림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일좌인 자기를 제쳐놓고 까마득한 후배를 큰 사찰의 주지로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였다.

이에 백장선사는 문답으로 결판을 짓겠다고 선언하고, 화림에게 정병(淨甁)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병은 대소변을 본 다음에 손을 씻기 위해 스님들이 휴대하던 물병이다.

"이것을 정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면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불교 안의 여러 중요한 교리를 젖혀두고, 옆에 있는 정병을 문제로 제시한 곳에 선사로서의 백장의 면목이 엿보인다. 화림은 제일좌답게 막힘없이 대응했다.

"그렇다 해서 나무토막이라고도 못할 것입니다."

이 대답에 고개를 저은 백장선사는, 영우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이것을 정병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면, 너는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그러자 영우는 스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더니 정병을 발길로 힘껏 걷어 차버렸다. 방바닥에 때 아닌 물을 흩으며 떼굴떼굴 굴러가 떨어지는 정병을 보면서, 백장선사는 파안대소했다.

"제일좌는 영우에게 졌도다."

이리하여 선사는 위산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살게 되었다. 도토리와 밤으로 식량을 삼고 새와 원숭이와 벗이 되어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조용히 좌선하였다. 그렇게 9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산지도 오래 되었건만 결국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구나. 본시 내 뜻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혼자 살아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그리하여 암자를 버리고 떠나려고 골짜기 입구에 다다르니 호랑이, 표범, 뱀, 구렁이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선사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이곳에 인연이 있다면 너희들은 각각 흩어질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를 마음대로 잡아먹어라" 하니 말이 끝나자 다들 흩어졌다.

이에 다시 암자로 돌아왔는데 천신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이 산은 옛날 가섭불 때에도 도량이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시 짓게 될 것입니다. 이 산을 항시 수호하신다면 반드시 부처님의 수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 해에 대안 (大安) 선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와서 선사를 도와 총림을 일으켰다. 구름처럼 모인 대중은 그 수가 1600을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가 선가(禪家)에 전하고 있는데, 그렇게 잡아준 터에서 발생한 것이 위앙종(?仰宗)이라고 하는 문파인데, 이 책은 불경이 아니고 풍수 책이므로 긴 이야기를 정리해서 보여 드렸다. 그리고 사마두타스님의 능력은 상당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정도로만 알고 계셔도 충분하겠는데, 이러한 자료를 풍수 책이 아닌, 전등록(傳燈錄)에서 찾을 줄은 또 생각하지 못했다. 여하튼 기록문화의 공덕이라고 해야 하겠다. 각설하고.

 

사마두타스님의 저서를 살펴보도록 한다. 《천원일기우형론(天元一氣寓形論)》, 《달승문답(達僧問答)》이 전한다. 달승이란 사마두타의 다른 별호이기도 하다.

 

 

4) 사자경(謝子敬) 선생

 

사자경 선생도 송대 사람이다. 저서로는 《일촌금혈법(一寸金穴法)》이 있는데, 명당을 잡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혈처를 찾아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재혈법(裁穴法)이라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혈자리를 확정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다.

 

 

5) 료금정(廖金精) 선생

 

역시 송대의 사람으로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기도 한데, 료금정 선생이 저술한《발사경(撥砂經)》이 잘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여 소개해 드린다. 이 외에도 많은 풍수학자들이 활동을 한 시기이다.

 

 

 

5. 명대의 풍수고수(風水高手)

 

이번에는 이름을 고수라고 붙여봤다. 뭔가 무리가 형성되어서 갑론을박의 활동이 이뤄졌다고 봐도 되겠기에 누가 고수냐고 하는 경쟁도 있었을 법 하다는 생각을 해 봤다. 명대(明代)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풍수에 대해서 연구발전이 이뤄지게 되었는데, 면면을 살펴보게 되면 다음과 같다.

 

1) 장대홍(蔣大鴻) 선생

 

뭐니뭐니해도 현공풍수에 최대의 공헌을 할 수가 있도록 초석을 제공한 분이라고 해야 하겠다. 장대홍선생의 이름을 빼 놓고서는 현공풍수를 논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하겠으니 말이다. 오경란 선생에 대해서 설명하면서도 언급을 했지만, 내노라고 할 고수라고 한다면 오경란 이후의 장대홍이라는 말을 한다.

 

전해지는 책은 《지리변정(地理辨正)》이 가장 유명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후대에 많은 주해서들이 나와서 이해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혹은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장대홍 선생은 이 책의 내용을 무극자(無極子)라고 하는 신선에게서 받았다고만 전하는데, 무슨 방법으로 얻게 되었는지는 또한 인연이려니 해야 하겠다. 그리고 다시 그 제자인 강요(姜?)로 전해지면서 일이 점점 커지게 된다.

 

 

2) 강요(姜?) 선생

 

강요는 원래 상당한 재물을 모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풍수에 관심을 갖고 선생을 찾다가, 장대홍선생을 만난 이후로는 20여년을 모시고 다니면서 전수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엄격한 비밀을 준수하던 장대홍 선생으로 인해서 핵심은 전해 받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대홍 선생이 멋진 터를 발견하고, 자신의 부친을 이장하고 싶으나, 그 땅을 구입할 돈이 없어서 난감해 하는 것을 보고는 선뜻 거금인 은 2천냥을 내어 그 땅을 사 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을 열고 비법을 전해 줬다고 하는데, 주기는 주면서도 절대로 공개불가를 강요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스승의 뜻을 어길 수가 없어서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겠는데, 책으로 남긴 자료는 《청낭오어(靑囊奧語)》를 주해한 책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핵심을 숨겼으나, 《종사수필(從師隨筆)》에서 이러한 내용을 암시적으로 섞어 넣어서 비로소 깊은 이치를 깨닫도록 전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전해지던 현공의 비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하겠다. 다만 종사수필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또 말이 많으니 후일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겠다.

 

 

3) 서선계(徐善繼), 서선술(徐善述) 형제선생

 

두 형제가 열심히 풍수를 연구해서 대가가 된 경우이다. 그리고 두 분의 저술로 이름이 높은 책은 《인자수지(人者須知)》39권이다. 아마도 풍수에 대해서 웬만큼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면 들어 봤을 가능성이 많은 책 이름이다.

 

 

4) 장종도(張宗道) 선생

 

장종도 선생의 경우에는 계보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의 저서로 전해지는 《지리전서(地理全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적어 놓았는데, 박식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6. 청대의 풍수대가(風水大家)

 

이제 모든 학문이 빛을 내면서 세상을 밝게 했던 청대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청대에는 강희황제-옹정황제-건륭황제의 삼대에서 문화, 학술적으로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풍수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청대의 풍수학에도 큰 획을 그어야 할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1) 심소훈(沈紹勳) 선생

 

이름을 죽잉(竹?)이라고 하는 심소훈 선생은 《심씨현공학(沈氏玄空學)》으로 현공풍수의 중심을 세운 대단한 분이라고 해야 하겠다. 분량도 엄청나다고 해야 하겠는데, 이 책에서 장대홍 선생의 현공에 대한 이치를 모두 파헤쳐서 강호에 밝힌 것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선생은 1849년이므로 청말(靑末)이라고 봐야 하겠다.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래는 일반적인 풍수 공부를 하였는데, 20대 초반에 부친의 장지를 찾던 중에 중태산(中台山) 남쪽에서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되어 있는 멋진 명당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도 아니고 자신의 부친을 위한 자리라고 한다면 멋지다는 말은 어느 정도로 멋진 것인지는 물으나마나 일 것이다. 그래도 혹시 싶어서 많은 대가들을 불러다가 감정을 의뢰한 결과 모두 하나같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싶어서 땅을 구하려고 했더니 어느 벼슬아치가 먼저 선수를 쳐서 날치기를 당해버렸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웠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관리가 장사를 지낸다고 해서 구경을 하러 갔더니만 땅도 그렇게 고운 흙일 수가 없었으니 더욱 아픈 배를 움켜잡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고 얼마 후에 그 관리는 죄를 짓고 귀양을 가던 도중에 죽어버리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어버리더란다. 순간 심선생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많은 지사들을 찾아서 질문을 해봐도 모두 하나같이 나쁘게 될 이유가 없다고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문을 풀지 못해서 잠을 설칠 지경에 마침 집안 형님뻘 되는 사람이 여행 중에 들렸는데, 그의 짐 속에서 《강요비본(姜?秘本)》이라는 책을 보고, 해당항목을 찾아보니까, ‘일운(一運)에 임좌병향(壬坐丙向)을 쓰면 반음과 복음에 걸려서 장사를 지내자마자 화가 바로 닥쳐서 패가절손한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으며 그제서야 비로소 의구심이 풀렸다. 사실 이때 봤던 글은 강요의 《종사수필(從師隨筆)》의 첫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從師隨筆 會稽姜?汝?甫著胡伯安藏 曺秋泉校

 

姻戚某氏其家廣延地師十餘年得一地堂局極美康熙二十三年甲子?時在一運係壬山丙向葬後不一年全家患疫死子姓爭産訟事至今未息杜陵夫子來登山觀之笑曰地固美惜犯反吟伏吟葬之禍至無日矣....

(이하 줄임) [종사수필에서]

 

눈이 밝으시면 대략 의미를 풀이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으실 것으로 본다. 앞에 이미 해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을 보니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을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비로소 현공풍수의 인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래서 26세가 되어서 그 형님뻘 되는 사람인 호백안(胡伯安)과 함께, 장중산(章仲山)의 제자라는 사람에게 공부를 청했는데, 이 사람은 실력은 분명히 뛰어난 사람임에도 한 글자도 누설하지 않기에 둘이 의논을 해서 거금을 주고 《음양이택록험(陰陽二宅錄驗)》이라는 책을 하룻밤 동안만 보기로 하고, 빌린 다음에 밤을 세워서 베꼈는데, 이때가 바로 187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야 비로소 현공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궁금증과 함께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었던 것이다.

 

 

[종사수필 복사첨부]

 

그 후로 30여년을 궁리하고 연구 한 끝에, 현공 대법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현공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고 나서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자칫했으면 아직도 현공의 깊은 이치는 안개 속에서 숱한 전설만 남기면서 묻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선생은 평소에 장대홍이나 장중산 등이 천기누설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감추는 것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해 했다. 하늘의 비밀을 인간이 배우게 되면 천벌을 받는다는 말에 대해서도 선생이 해석하기에는 몰라서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지리를 잘 알아서 지혜롭게 살면 땅이 복을 줘서 잘 살게 하지만, 지리를 모르고 엉뚱하게 공망에 묘터를 쓴다면 천벌을 받아서 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2) 장중산(章仲山) 선생

 

자를 중산(仲山) 이라고 하고, 이름은 보(甫)이다. 호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고 한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심소훈 선생이 그렇게 구하고자 애를 썼던 《음양이택록험(陰陽二宅錄驗)》을 지은 저자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도 진위여부를 논하는 학자가 있으니까 참고해서 살펴봐야 하겠다. 장중산 선생은 일명 무상파(無常派)라고 하는 문파를 세웠는데, 앞의 음양이택록험에 대해서는 위작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진정으로 현공의 핵심을 담은 책이라는 평을 받는 것으로 《지리변정직해(地理辨正直解)》가 있다. 심소훈 선생이 소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미처 몰랐거나 아니면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 사정이라는 것을 설명하다가 보면 장중산 선생이 맨 앞에 소개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것이다. 다만 인기스타가 맨 앞에 나온다고 생각을 하셔도 무방하겠다. 그럼 또 다른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광주(廣州)의 풍수종사 곽회건(?懷乾)의 맥을 이은 제자라고 하는 승백(承伯)선생의 주장을 보면 또한 일리가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승백(承伯) 선생의 의문

 

종사수필이라고 하는 것이 전하는데, 과연 그 진위가 의심스럽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강요의 글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호백안이 어디에서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속아서 들고 왔거나, 아니면 계획적으로 꾸민 일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가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백안이라는 사람의 존재도 확실하지 않은 점도 의심스럽게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또 심소훈과 그의 형님 뻘 되는 사람이 장중산의 후계자를 찾아가서 몇 달인가를 머물면서 가르쳐 주기를 청해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서 은자 300냥을 들이대고 음양이택록험을 빌려서 하루 저녁에 열심히 베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의심스럽다.

 

왜냐면 그만큼 큰 가치가 있는 책이라서 한번 보는데 300냥의 거금이라고 한다면 그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을 밤새워서 베끼라고 빌려주겠는가 말이다. 그만큼 소중한 책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옆에서 지키면서 보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주장인데 과연 말이 된다.

 

또 심소훈이 그 당시에 은자 300냥의 거금을 낼 형편이 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그 돈을 구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또한 심소훈의 도덕성마저 의심이 간다는 말도 있는데, 이치적으로 봐서 조리가 정연하므로 괜한 의심이라고 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뜻 생각을 하면 심씨현공학을 헐뜯어서 무슨 이익을 바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해서 낭월도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살피게 되었는데, 문체를 봐서 조리정연하고, 이치가 타당한 바람에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장중산의 후계자라고 하는 사람의 글을 베꼈다고 하는 것까지도 다 믿어주자고 하더라도, 만약 벗님이라고 한다면 그 글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후계자 누구라고 하는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인데 그러지를 못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장대홍의 맥은 심소훈으로 흘러 간 것이 아니므로 현공법을 욕되게 하는 책이 심씨현공학이라고 하였으니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장중산 선생이 올바른 현공법을 알고 있다고 했고, 그 내용은 앞에 말씀드린 지리변정직해로 증명이 된다고 했으니까 만약 벗님들이 이러한 내용을 원하신다면 앞으로 이 책에 대해서 연구하고 살펴서 내용을 소개해 드릴 요량이다.

 

어찌 보면 심소훈 선생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볼 상이 사납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학자의 소견이므로 수용을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여하튼 왠지 찝찝한 경로를 통해서 얻은 자료가 대만과 홍콩을 주름잡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충정으로 수용을 하는 것도 좋겠다.

 

여기에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기왕에 벗님이 현공에 대한 공부를 하시기로 했다면 앞의 종사수필의 내용을 앞세워서 현공의 우수함을 팔아서는 곤란할 수가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기를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깊은 이치가 드러날 것인데 자칫해서 신뢰할 수도 없는 자료를 바탕으로 홍보를 하다가 망신을 당할까봐 염려를 해서 그렇다.

 

왜냐면 그렇잖아도 ‘험 잡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정통으로 걸려들어서 망신을 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만 주의를 하시더라도 무지로 인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 드리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찬성과 반대의 이론들이 나오면서 학문은 점점 깊고 그윽한 경지로 진행하게 되는 것은 틀림이 없다. 후학은 그 모두가 고맙고 다행스러울 뿐이다.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권하면서 줄인다. 다음에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7. 만개(滿開)한 현공의 꽃

 

심소훈 선생 이후로 책이 강호에 출현하게 되면서 세상은 아우성이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더욱 열광을 한 것은 대만과 홍콩이다. 중국은 그러한 인연이 되지 못한 연고로 해서 공산정권을 유지하는 사이에 대만에서는 현공이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민국 이후의 다양한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소개를 하기 어렵겠다. 특별히 많이 거론되는 이름만 대략 나열해 본다면, 오사청(吳師靑), 우석음(尤惜陰), 담양오(談養吾), 공소소(孔昭蘇), 임읍전(林邑全), 당정일(唐正一), 유훈승(劉訓昇), 왕계염(王啓?), 황세평(黃世評), 왕정지(王亭之), 종의명(鍾義明), 진관우(陳冠宇), 황춘발(黃春發), 백학명(白鶴鳴), 진설도(陳雪濤), 양장화(楊藏華), 임종(林縱), 진하주(陳河舟), 모창연(毛暢然), 증자남(曾子南) 등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러한 선생들은 모두 현공풍수에 대해서 이름을 날리는 선생들이라고 이해하면 되겠고, 이렇게 이름을 소개해 드리는 것은 관련 책을 찾으실 적에 참고가 되실 것으로 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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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현공풍수와 연관해서 저서가 있음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선생님들에 대한 소개를 해 드렸습니다. 현공공부를 하시는데 약간이나마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5년 7월 2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출처 : 서경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올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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