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牧隱 李穡先生의 生涯와 思想

장안봉(微山) 2013. 12. 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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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萬物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은 萬物의 靈長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천하만물을 지배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天下萬物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소중한 歷史的 記錄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天下에 가장 고귀한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人類의 역사에 찬란한 공헌을 남기고 간 사람도 있고, 뜻 없는 삶을 안일하게 즐기다가 간 사람도 있으며, 때로는 歷史의 흐름에 逆行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生을 마감한 사람도 있다. 사람은 動物世界와는 달리 차원 높은 價値觀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社會를

社會답게 만들게 하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기도 해서 人類歷史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5千年 역사에도 후세에 귀감이 될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분이 麗末鮮初 王朝 交替期의 격동기에 태어나서 李成桂 일파에게 몰려 69세를 일기로 生을 마감한 牧隱 李穡先生이다. 先生은 평생을 大義名分에 입각해서 올바르게 처신해 왔으며 학문과 節義思想으로 사람답게 살아와 學界와 思想界 그리고 政治界에 큰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 역사상 큰 업적을 남긴 人物이다. 먼저 선생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先生은 稼亭公 穀의 외아들로 慶北 盈德郡 寧海에 있는 외가에서 1328년(高麗 忠肅王 15)

5월 탄생하였다. 先生의 字는 穎叔이요 號는 牧隱, 諱는 穡이다.

先生은 人品이 출중하고 타고난 재질이 뛰어나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成均試에 수석으로

급제한 후,16세에 正七品의 별장 벼슬을 시작으로 官界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19세에 당대 명문가인 안동權氏 花原君 仲達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고 26세 때인 恭愍王 2년에 文科에 응시 壯元及第하였다. 先生은 그 먼저 元나라 國子監 生員에 例補되어 3년 동안 그 곳에서 수학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先生의 부친께서 元나라 制科에 등제하여 中瑞司典簿로재임 중이므로 朝官의 아들이라 하여 禮遇를 함으로써 유학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中國學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性理學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하게 되었다.先生은 24세 때 父親喪을 당해서 귀국 終制後 다시 渡元해서 26세 때 元나라 科試에 壯元及第한 후, 肅雍府丞의 관직을 맡은바 있다. 그 해 일시 귀국, 가을에 征東行省의 解元에 합격, 進奉使의 書狀官이 되어 다시 元京에 가게 되었다. 다음해 2月 元朝의 會試에 급제하고, 3月 皇帝가 親臨하는 殿試에 2等으로 합격하니 이것은 元나라 사람이 아니면, 壯元及第를 줄 수 없다는 규정으로 밀려서 2等 합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先生의 뛰어난 학문실력이 인정을 받아 翰林院에 등용되고 國史院 編修官을 역임하였다. 先生은 29세에 귀국 高麗王朝에 중용되어 吏部侍郞, 右諫議大夫, 左丞宣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32세 때 中原을 휩쓴紅巾的의 亂이 일어나 우라나라 北方 四洲가 賊에 유린되고 開京까지 함락되어 恭愍王은 利川까지 파천하게되는 수모를 겪었다. 先生은 이 亂을 평정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一等功臣

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선생께서 이때 王에게 올린 ‘平紅巾賊陳情表’는 先生의 충정 어린 사연을 잘 담고있는 上表라 하겠으니, 이것은 저 유명한 諸葛亮의 出師表에 필적할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國政에 참여하게된 先生께서는 恭愍王에게 田制改革, 國防强化, 敎育振興, 佛敎抑制등을 건의해서, 많은 국정쇄신을 하였다. 權力과 經濟 그리고 敎育의 모든 문제가 高麗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佛敎界에 집결되어 있었으므로 佛敎 개혁문제는 곧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어려운 문제를 先生은 개혁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그 업적이 인정되어 先生은 44세 때 정당문학의 宰相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55세 때에는 正一品인 判三司使가 되었고 58세에 검교 門下侍中이 되었다. 先生께서 成均館 大司成에 재임할 때 先生은 成均館을 재건하고 鄭夢周, 金九容, 朴尙衷, 李崇仁등 당시의 명망 높은 巨儒들을 발탁 學官을 겸임 시키고 分經授業을 감행해서 性理學 硏究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宋代 儒學이 우리나라에 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때 朝鮮王朝 초기의 석학 陽村 權近과도 학문의 전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先生은 博學强記 하여서 佛經까지 모두 섭렵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詩文學에도 뛰어나서 6千31首의 詩를 남기고 있다.

 

1338년 先生께서 회갑이 되던 해에 遼東征伐次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 威化島까지 출정한 右軍都統使 李成桂가 王權 획득에 야욕을 품고 무단히 回軍을 감행, 禑王을 폐위하고 新王을 옹립코저 함에 先生께서는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만류하였으나, 이를 강행하고자 하니 先生께서는 그러면, 正統上 禑王의 세자인 昌王을 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 曺敏修와 함께 昌王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王權 장악에 大慾이 있었던 李成桂는 “廢假立眞”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구실로 昌王을 몰아내고자 하자 門下侍中으로 재임중이던 先生은 그 부당성을 다시 지적하고 大義名分에 입각해서 쓰러져 가는 高麗王朝를 회생시키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새王朝를 세우려는 큰 뜻을 품었던 李成桂 一派는 마침내 禑王이 辛頓의 아들이라고 하는 누명을 씌워 昌王을 폐위하고 恭讓王을세우는 大政變이 벌어졌다. 이때 先生께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집에 돌아와 “歸去來辭를” 읽으면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있다.

 

 

讀 歸去來辭

樂夫天命復奚疑, 此老悠然歸去時

一點何曾恨枯膏, 我今三嘆杜陵時

乾坤蕩蕩山河改, 門巷寥寥日月遲

長肅白頭吾己矣, 閉門空讀去來辭

 

 

天命을 즐기며 살려고 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을 손가?

이 몸 늙었으니 서슴치 말고 돌아갈 때가 되었느니라.

보잘 것 없는 이 몸 하나 떨어져 간들 무엇 하러 한탄하랴!

나는 이제 杜甫의 서글픈 詩나 한탄하며 읽겠노라.

하늘과 땅은 변함없이 탕탕하건마는

사랑하는 故國山川은 바야흐로 바뀌어만 가는데,

쓸쓸한 대문 앞거리에는 해마저 저물어 가네.

世上을 한탄하며 휘파람 부는 나는 이미 백발이 되어가는구나.

어라! 슬프도다, 문이나 닫고 歸去來辭나 읽어보리라.

 

 

 

이 詩는 王朝交替의 비극을 故國山川의변천에 비유해서 선생의 심경을 토로한 斷腸詩라고 할 수 있다. 王權쟁취에 여념이 없던 李成桂一黨은 善竹橋에서 鄭夢周를 타살하고 先生의 큰아들 種德을 杖殺하였다. 李成桂는 先生을 백방으로 회유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자 귀양을 보내고 先生의 둘째아들 種學도 역모로 몰아 귀양을 보냈다가 사살한 다음 1392년7월17일 王位에 등극하고 朝鮮王朝를 開創하였다.

피 안 묻은 王冠이 어디 있으리요 만은 이때의 王朝交替期처럼 많은 피를 흘리고 교체된 王朝도 역사상 드물 것이다. 高麗王朝를 섬기던 忠臣들은 문을 닫고 세상에 나가지 아니하니 이를 杜門洞 72人이라한다. 朝鮮王朝가 일본에게 이 나라를 넘겨줄 때 72人이 도장을 찍어 賣國을 하였다하니 歷史上 業報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보여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歷史의 엄준한 심판을 실감나게 하는 사실이다. 귀양길에 오른 先生은 長湍, 咸昌, 驪興등 각지로 유배되어 고생을 하면서도 自足하고 살았다고 전한다.

 

李成桂는 先生을 韓山府院君으로 冊封하고 韓山伯등 작호를 내리면서 회유를 시도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不服하였다. 회유가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된 李成桂는이를 단념 하였는데 그를 추종하는 鄭道傳과 李芳遠은 先生께서 驪州, 驪江, 燕子灘에서 船遊한다고 하는 첩보를 듣고 毒이든 下賜酒를 보냈다. 毒이든 것을 알고도 이를 마신 先生께서는 69세에 急逝하게 된 것이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와서 대나무 숲을 이루게 되어 先生의 대쪽 같은 節義정신을 상징 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지금까지 驪州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李太祖는 사신을 보내서 조문하고 文靖의 시호를 내리고 3日 동안 朝會를 철회하고 先生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先生의 시신은 셋째아들 良景公이 수습해서 고향인 韓山에 안장하였다. 影幀에서 볼 수 있는 寬厚한 모습처럼 先生의 人品은 寬恕忠厚하였다고 전하며 議論에서는 論理가 정연하였고 王家와 勢道家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소 시키는 특출한 친화력을 소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文集에는 牧隱詩藁와 牧隱文藁가 있다. 先生의 道學과 文學은 陽村 權近에게 전수되어 朝鮮王朝 5百年의 根本思想이 되어 내려왔다. 權近은 先生의 文集 序文에서 “ 自吾東方文學以來, 未有盛於先生者也”라고 極讚하여 先生의 道學과 文學史的 위치를 간명하게 천명해 주고 있다.

다음은 先生의 節義思想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先生은 圃隱 鄭夢周와 冶隱 吉再등 高麗王朝末期의 節義派 인사들과 각별한 교분을 가지고 처세해 내려왔다. 先生의 節義思想 은 冶隱 吉再에게 보낸 詩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圃隱 鄭夢周에게 보낸 “圃隱齋記”에 더욱 先生의 선비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圃隱齋記는 先生이 한창 활약하던 53세 때 鄭圃隱의 號를 예찬한 글이다.圃隱의 뜻은 남새밭에 김을 매며 숨어산다고 하는 隱士의 뜻을 지니고 있는 號이다. 先生은 安貧樂道의 선비생활을 흠모해서 圃隱이라고 自號한 圃隱선생을 극찬하고 顔子처럼 가난하게 살면서도 道學을 즐기는 鄭圃隱을 찬미하였다

 

.先生의 號가 牧隱이니 아마도 이것은 꼴을 베어 등에 지고 소를 몰고 오는 牧童처럼 山속에서 숨어서 살겠다고 하는 선비정신에서 牧隱이라고 自號한듯 한데 冶隱 吉再의 號도 같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世人은 이 세분을 高麗三隱이라고 전하고 있다.

春秋大義에 입각한 先生의 節義思想은 朝鮮王朝에서 그대로 수용해서 발전해 내려왔다.

조카가 쓰고 있는 王冠에 눈이 어두워서 조카까지 밀어내고 王位에 오른 世祖와 맞서 싸우다가 처참하게 죽은 先生의 曾孫 李塏先生을 비롯한 死六臣의 節死는 바로 三隱의 節義思想을 계승해서 실천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富貴榮華보다도 목숨보다도 사람답게 사는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價値觀의 세계인 것이다. 이 節義思想은 佔畢齋 金宗直에게로 계승되고 그 후 己卯士禍때의 靜庵 趙光祖에게로 계승 되었으며 壬辰倭亂때에는 重峯 趙憲 등 義兵將에게로 계승 되었고 丙子胡亂때에는 三學士로 계승되었으며 韓末에는 勉庵 崔益鉉 등 義兵들에게 계승되었다. 日帝때 항쟁하다가 절사한

尹奉吉 義士, 金佐鎭 將軍 등 많은 義士들이 先生의 고향인 韓山에서 머지않은 乃浦地方에서 배출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다. 先生의 업적에 대해서 중앙대 李文遠은 “牧隱은 學者와 政治家, 敎育者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王朝交替期에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킨 忠臣이다” 라고 하였으며 “先生이 남긴 6千여수의 詩는 高麗王朝 최고의 作品”이라고 평가하였다. 서울대 琴章泰는“ 詞章學중심의 高麗末 思想界를 四書五經을 일괄적으로 해석, 한국 性理學의 기초를 마련하고 자신이 節死함으로서 실천도덕사상을 구현한 바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려대 尹絲淳은 ”高麗의 佛敎界 폐단을 과감하게 지적, 개혁함으로써 高麗를 佛敎社會에서 性理學 社會로 전환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고 천명하였다. 명지대 신천식은 ”先生께서 成均館 大司成으로 재임할 때 132명의 많은 인재를 양성, 儒學發展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고 찬양한바 있다. 先生의 인재배출은 여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先生의 후손인 韓山 李氏 문중에서 현재 考古學界, 歷史學界, 哲學界, 文學界, 政治界의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人才를 배출, 이 나라의 棟梁 역할을 자담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마도 先生의 陰德으로 이루어진 소치라고 생각한다. 韓國 姓氏中 가장 많은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 韓山 李氏 門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先生께서는 王朝 交替期의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과 두 아들이 交替期의 희생으로 他界하였지만은 先生의 節義思想과 道學精神을 추모하는 後學者들은 先生의 學德을 추모하고자 문헌서원, 신창서원, 임강서원, 단산서원, 서산서원 등 전국 각지에서 배향하고 선생의업적과 공덕을 추모하고 있다.

 

 

오늘 우리고장 大田에서도 學問的, 道學的, 政治的 모든 면에 걸쳐서 우리나라 歷史上 큰 업적을 남긴 牧隱先生을 추모코자 影幀閣을 건립하고 影幀을 모신 후 길이 先生의 얼을 되새기고자 함은 道義가 실종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새로운 指標가 되어 道義精神 함양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先生의 英靈이시여! 이 자리에 臨在하시어서 굽어 살피시고 흠향하시옵소서. 그리고 先生의 人品과 道學思想을 흠모해서 여기에 모이신 여러 人士들에게 祝福을 내려주시옵소서.

 

 

 

                                                                           * 牧隱李穡 大田影堂 落成式 *

 

                                                                                       春季祭享式

 

                                                                                      < 追 慕 辭 >

출처 : 한산이씨 대전화수회
글쓴이 : 한밭벌(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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