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安珦)의 처음 이름은 유(裕)니 흥주인(興州人)이다. 아버지는 부(孚)니 흥주 의원 출신으로 밀직부사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향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교서랑(敎書郎)을 지내고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옮겼고, 다시 내시원(內侍院)에 속하였다.
삼별초(三別抄) 난에 안향이 적중에 빠지자 적은 평소 명성을 듣고 안향을 임용하고자 치유와 위협을 하고「안한림을 놓아준 자는 벌을 내린다.」고 하였으나, 안향이 계책을 써서 탈출해 돌아오니, 왕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12년(1271) 사신의 명을 받들고 서도(西道)에 나가 청렴과 근신으로 명성을 얻었다. 내시원에 소환되어서는 상소하여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없앴고, 얼마 후 감찰어사로 옮겼다.
충렬왕 원년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여자 무당 3인이 요사스런 신을 받들어 백성을 현혹하면서 고을마다 돌아다녔는데, 그들이 이르는 곳에는 마치 공중에서 사람이 꾸짖는 듯한 소리가 들리니 이 소리를 듣는 이는 모두 분주히 앞을 다투어 제사를 지냈으며, 수령 또한 그러했다. 무당이 상주에 이르자 안향이 그들을 잡아 매질을 하고 가둬놓으니, 그들은 신의 맡을 빌어 재앙을 받는다는 말로 협박하여 상주사람은 모두 두려워했으나 안향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 후 무당이 애걸하자 안향이 이들을 석방하니, 요사스런 일이 영영 없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안동에 이르러 아전에게 발을 씻게 하니, 아전이 이르기를,「나는 이 고을에 속한 아전인데 너는 어찌하여 내게 모욕을 주는가?」하고 여러 동료와 모의하여 힐책하려하자, 다른 늙은 아전이 안향의 얼굴을 살펴보고 밖으로 나와 말하기를,「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분은 후일에 반드시 귀할 사람이니 가볍게 보지 말라」하였다. 상주에 머문 지 3년에 안렴사(按廉使)가 선생의 청렴한 정사를 조정에 알려 드디어 판도좌랑(版圖佐郞)에 오르게 되었고, 얼마 후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옮겨다가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고, 다시 좌사의(左司議)에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있다가 합포(合浦)로 나가 군사를 안무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고을이 편안케 되었으며 누차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옮겼다.
충선왕(忠宣王) 즉위 후 참지기무 행 동경유수 집현전태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 行東京留守 集賢殿太學士 鷄林府尹)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참리(參理)가 되었고, 충렬왕이 복위되고 충선왕이 원나라로 갈 때에 안향이 배종을 하였다. 어느 날 원나라 임금이 왕을 급히 부르자 왕이 겁을 먹었다. 원나라 승상이 나와서 말하기를「배종한 신하 중 우두머리가 입대(入對)하라.」하므로 안향이 들어가니, 승상이 원나라 임금의 뜻을 전하여 말하였다.「너희 왕은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가?」하니, 안향이 대답하기를,「규방의 일이란 밖의 신하로서 알 바 아닌데, 지금 이와 같은 것을 물으니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승상이 이 말로 아뢰자 원나라 임금은「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아는 사람이니 먼 곳의 사람이라고 소홀하게 대접하겠는가.」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
26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자 권신이 시기하여 드디어 왕에게 중찬(中贊)을 더하고 고령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게 했으나 얼마 후 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29년에 안향은 학교가 날로 쇠퇴해가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에 건의하기를, “재상의 직분으로서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보다 급선무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양현고(養賢庫)가 고갈되어 선비를 기를 수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각 은 한근. 7품 이하는 벼슬에 따라 차등 있게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키고 여기에서 이자를 취하여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자.」 하니, 양부에서 이 의견을 가지고 왕에게 알리니, 왕 또한 내탕고(內帑庫)전곡을 보내 보조하였다. 밀직(密直) 고세(高世)가 자신이 무인이라며 돈을 내려하지 않았다. 이에 안향이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부자(夫子)의 도가 만세에 법으로 전하여.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들은 아비에게 효도하며 아우는 형에게 공경하니 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돈을 내어 생도를 양성해야 하는가?’ 라고 한다면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무시함이니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하니 고세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며 바로 돈을 내었다.
안향은 또한 남은 자금으로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현 및 70제자의 영정을 그려오게 함과 아울러 제기 . 악기 . 육경 . 제자 . 사서(史書) 등을 구입해 오게 하였고 또한 밀직부사(密直副使) 로 치사(致仕)한 이산(李산)과 전법판서(典法判書) 이진(李?)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를 삼으니 금내학관(禁內學館) . 내시삼도감(內侍三都監) 오고(五庫)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 그리고 칠관(七管). 십이도(十二徒)의 모든 유생들로서 책을 끼고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유생 가운데 선배에게 예를 행하지 않는 선비가 있자. 안향이 노하여 벌을 주려하였는데, 유생이 사죄하므로 안향이 경계하기를,「나는 그대들을 나의 자손처럼 여기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늙은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가?」하고,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대접하였다. 이에 서로 이르기를「선생은 우리를 이처럼 지성으로 대하는데 만일 감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32년 병오년 9월에 다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장사지내는 날 칠관 십이도(七管 十二徒)의 유생들이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다.
안향은 장중하고 자상하여 모든 사람이 경애하였고. 승상부에 있으면서 정사에 능하고 결단을 잘 내리니 동료들이 그의 뜻에 따르면서 오직 삼가하고 다투지 않았다.
항상 학교를 일으키고 훌륭한 인물을 양성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비록 정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속에 잊은 때가 없었다. 그리고 빈객을 좋아하고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였고. 문장이 맑고 힘이 있어 볼만하였으며, 또한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다. 김이(金怡)와 백원항(元恒)이 벼슬하지 않았을 적에 안향이 두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후일에 반드시 모두 벼슬을 하리라」하였다.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가 동년생으로 모두 명성이 있었는데 안향이 그들을 불러 시를 짓게하여 관찰한 후 말하기를,「이제현은 귀와 장수를 누리겠으나 이이는 장수하지 못하리라.」하였었는데 과연 그 말이 모두 들어맞았다.
만년에 항상 회암선생(晦菴先生)의 영정을 걸어놓고 경건한 마음을 다했고 호를 회헌이라 하였으며. 거문고 한 벌을 간직하고 언제나 가르칠 만한 선비를 만나면 이를 권하여 타게 하였다.
충숙왕 6년 기미년에 문묘 종사를 의논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안향은 비록 섬학전을 건의하여 설치했으나 어찌 이것만으로 종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는데, 문인 신천(辛藏)이 그 말을 적극 물리쳐서 마침내 종사하였다.
아들 우기(于器)는 충열왕조에 급제하여 누차 국자전주(國子典酒) .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이 일찍이 안향이 호종을 오래하지 않고 돌아간 것을 유감으로 여겨 그의 아들 우기에게 죄를 내리려했으나 때마침 사면되었다. 충숙왕이 즉위하여 밀직부사 겸 대사헌(密直副使兼 大司憲)을 제수했으나 얼마 후 파직되고 원윤(元尹) 조후(趙珝)가 대신하였다. 이는. 조후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우기는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으나 안에서 도와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식자들은 그를 애석히 여겼다. 일찍이 합포(合浦)에 나가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칭송을 받았고 16년 검교 찬성사(檢校 贊成事)를 역임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언으로 박장(薄葬)을 명하였다.
우기의 아들 목(牧)은 급제하여 충숙왕조에 누차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공민왕조에 순흥군에 봉해졌으며. 죽은 뒤에 문숙(文淑)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