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왐조실록 정조13년9월8일 (형국과혈)

장안봉(微山) 2015. 3. 22. 06:25

정조 28권, 13년(1789 기유 / 청 건륭(乾隆) 54년) 9월 8일(신묘) 1번째기사
총호사 김익·금성위 박명원에게 형국과 혈에 대해 유시하다

총호사 김익, 금성위 박명원에게 유시하였다.
“형국(形局)과 음양(陰陽)은 서로 안팎이 되므로 어느 한 쪽을 폐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그 경중을 논한다면 형국은 체(體)이자 본(本)이고 음양은 용(用)이자 말(末)이다. 그러니 어찌 체를 제쳐두고 용을 구한다거나 본을 팽개치고 말을 잡을 수 있겠는가. 원소(園所)의 체세(體勢)가, 서린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형국을 이루고 있는데, 만약 대주(對珠)의 뜻을 잃지 않으면서 아울러 분금(分金)4977) 의 법에 합치된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만약 분금에 구애되어 주안(珠案)을 그르치게 된다면, 천성(天性)의 형국을 어기고 빈주(賓主)의 정의를 잃는 것이니, 아무리 나경(羅經)4978) 의 묘용(妙用)을 얻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더구나 안산(案山)을 취하는 법은 해당 안산의 한 가운데에 꼭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좌우에 아울러 나아가 추이(推移)하여 쓰는 것이다. 그리고 매 방위에 각기 다섯 글자가 있으니 만약 구슬의 중앙이 분금의 길한 방향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구슬 좌우 각의 길한 방향과 만나는 곳에 나아가 변화하여 써야 되며, 만약 구슬이 작아서 단지 한 글자와만 만나는데다 또 길한 방향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금을 제쳐두는 한이 있어도 알맞은 안산을 잃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분금을 하는 법은 지극히 미묘하여 요새 사람 중에는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드물다. 더구나 1백 20간지(干支)나 3백 60도수(度數) 역시 어찌 일일이 서로 합치시킬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이치를 지나치게 믿으면서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는 구슬을 잃을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불 십분 성의를 쏟고 십분 상세히 살펴야 될 점이다.
그리고 혈(穴)의 깊이로써 말하자면, 금번에 얻게 된 진토(眞土)는 하늘이 준 것으로, 색깔로 보나 품질로 보나 곧 비할 데 없는 지극히 좋은 품질이다. 찬탄을 하고자 하더라도 형용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또한 그 뻗어온 산맥이 그다지 넓지 않은데도 혈처(穴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풍성하게 맺어졌다가 혈처를 지나면 다시 오무라지므로, 단지 부토(浮土)만 걷어내면 혈의 형체가 저절로 드러나니,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내포하고 있는 상(象)이다. 단지 진토의 테두리 중심에 나아가 혈을 꽂기만 하면 상하와 좌우를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무엇보다도 이 천심(淺深)을 마땅하게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록 7척(尺) 쯤으로 표준을 삼는 이미 정해진 규약이 있기는 하지만, 때에 임해 변화하여 요컨대 적중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에 7척까지 미처 파내지 않았는데 황색이 옅어지려는 기미가 있으면, 곧 파기를 중지해야 된다. 이는 대체로 누런 곳을 뚫고 지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적중하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얕게 해야 되지 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한삽 한삽 파들어갈 때마다 항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한치 한치 파들어가야 되니, 절대로 아무렇게나 방심하고 파지 말라. 또 혹시 색깔과 품질이 갈수록 짙어지고 딱딱해지며 갈수록 딱딱해지고 누렇게 되거든, 비록 7척을 넘게 파들어가더라도 무방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강구해 둔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지금 금정(金井)4979) 을 여는 날이 눈 앞에 다가왔기에 염려하는 생각에서 자다가 일어나 거듭 유시하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7장 B면
【영인본】 46책 52면
【분류】 *왕실(王室)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