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천부경과 수심정기 20 - 도성덕립
5. 도성덕립(道成德立)
1) 수심정기의 목표
수심정기는 "내 마음을 지키고 내 기운을 바르게 하여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연한 가운데서
되는 것(논학문)"인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이다.
이와 같은 무위이화의 수행법인 수심정기는 교육에 의해 강요되는 외형적 수양이 아니라, 가만히 두어야 비로소 제대로 이
루어지는 내면적 수양이라고 보여진다.
이 수심정기가 달성하려는 목표가 도성덕립이다.
그렇다면 먼저 도와 덕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동양사상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자연적으로
접하게 되는 도(道)나 덕(德)은 수행자들에게는 거의 공통된 목표이다. 그러면서도 알맹이 없는 관념 덩어리나 뜬구름 처럼
허황되기 쉬운 목표가 도덕이 아니던가!
여기서는 도덕의 일반적인 정의나 내용을 제시하기 보다는 풍류와 무극대도에서의 도덕이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
보기로 하자.
동경대전의 탄도유심급에서는 "마음을 닦으면 덕을 알고, 덕을 밝히는 것이 도이다" 라고 말한다. 또 해월 선생은 "보았으
나 보지 못하고 들었으나 듣지 못하는데 이르러야 가히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음과 안으로 강
화의 가르침이 있음을 확실하게 터득해야만 가히 덕을 세웠다 말할 것이라" 하여 구체적인 수행의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가르침을 종합하면 먼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 보므로써 본성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음지키기를 하다보면 과거의 기억들이 잡념이 되어 떠오르는데, 그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억압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기
억들이 많다. 억압이나 회피의 충동은 교육을 받아 형성된 자의식(自意識)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만, 더 오래동안 지
켜보다 보면 보다 깊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충동인 경우가 많다.
교육으로 형성된 자아가 마음지키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준비시키는 가르침이 "세간 오륜(五倫) 밝은 법은 인성(人性)의 강
(綱)으로서 ...... 이런 말씀 본을 받아 아니잊자 맹서해서 일심으로 지켜내면 도성덕립 되려니와...(도덕가)" 라는 경구이니,
평소에 사회적 규범을 지키므로서 본심과 의식이 반목하지 않게 하여 보다 쉽게 속마음에 접근하도록 해 준다.
수운 선생은 유교의 강령을 인성의 강령으로 들었는데, 풍류에는 유교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인성의 강령이 이미 있었으니,
기자가 문왕에게 전했다는 홍범구주가 바로 그것이다. 홍범구주는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사회적 규범에 의해 형성된 자의식이 과거의 기억을 거부하지 않게되면 보다 깊은 속마음이 나타나 자의식 자체를 관찰하
게 된다. 이 때부터는 오욕칠정이라는 본능과 관계 깊은 기억들이 떠오르는데 예를 들자면 사랑, 원한, 미움, 공포, 슬픔 등
이며, 최소한 이런 기억들을 억누르지도 않고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는 정도가 되어야 마음을 지키는 마음이 촐랑
거리지 않고 안정되는 경지에 도달한다.
이 부동심이 지켜보면서 억압하려고 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는 기억들이라면 본성에 거슬리지 않는 기억들이며, 그런
기억들을 남기는 행위가 선행이며, 선행을 하게 만드는 마음의 바탕이 덕이다. 부동심이 나타나는 수행의 경지에 이르면
보고 듣는 것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자주 체험되는는데 이것이 해월선생이 말한 덕이다.
무념무상의 상태를 지켜볼 수 있는 더 깊은 속마음이 나타나 마음을 지키게 되면 개인의 마음을 넘어선 천지자연의 공동무
의식이 의식 속으로 흘러 들어 온다. 그 메세지는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고, 생명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
나는 '사람의 도리에 대한 깨달음" 이다. 그것이 덕을 밝히다 보면 드러나는 덕을 밝히는 방법인 도이다.
이 단계가 내가 모신 한울님이 내가 해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강화의 가르침" 이다. 그런데 이 단계는 그야말로 도
의 입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약간의 마음이 열렸다고 해서 어찌 도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하여 능히 천지조화를 행한 뒤
에라야 바야흐로 도통하였다 이르리라." 는 해월 선생의 가르침은 그런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초보 수행자
들이 증산 선생같은 특이한 능력을 욕심낸다면 그야말로 시작부터 탐음진치 사종마 중에 탐마에 사로잡힌다.
그 전에 도달해야할 중간 목표가 될 가르침이 해월 선생의 "사사로운 욕심을 끊고 사사로운 물건을 버리고 사사로운 영화
를 잊은 뒤에라야 기운이 모이고 신이 모이어 환하게 깨달음이 있으리니, 길을 가면 발끝이 평탄한 곳을 가리키고 집에 있으
면 신이 조용한데 엉기고 자리에 앉으면 숨결이 고르고 편안하며 누우면 신이 그윽한 곳에 들어, 하루종일 어리석은 듯하며
기운이 평정하고 심신이 청명하니라."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그 다음 경지는 천지가 쓸 데가 있고, 자연이 마음을 모아 허락한 경우에 저절로 발휘되는 도력이라고 생각해야 공부하다
가 복마에 걸려 뽑혀 나가는 불상사를 예방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수심정기와 도성덕립을 수행의 이정표로 내세우고, 구체적인 수련의 방법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 결과로 도달하는 경지까
지 친절하게 가르친 천도교의 공적을 기리는 입장에서 전도교 경전을 인용하여 도성덕립의 내용을 소개 하였다.
그러나 무극대도처럼 완성된 형태는 아닐지라도, 많은 종교와 수행자들이 스스로의 마음 속 절대자를 찾아서 하느님 말씀
을 전해 왔고 지금도 전하고 있다.
누구 말이 옳고 그른지를 따질 일이 아니다. 시급한 것은 지금 즉시 제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지켜보는 일이다. 제 마음 속
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욕심으로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다보
면 " 목전지사(目前之事) 쉬이알고 심량(深量)없이 하다가서 말래지사(末來之事) 같잖으면 그아니 내한인가"라는 탄식 밖에
얻을 것이 없다.
2) 도성덕립의 관문
수심정기의 과정에서 만나는 가장 큰 관문은 주역에서 말하는 감통신명(感通神明)이 아닐까 싶다. 도성덕립의 단계에서
거치게 되는 "보았으나 보지 못하는" 단계와 그 직후에 찾아오는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는" 단계 이다. 그러면 "보았으
나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앞서 말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떠오른다. 보고서도 보았다는 생각이 들지않고 기억으로도 남지 않는다.
본심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내용들만 기억에 편입되는데, 그 외에는 눈 앞에 나타났다가 그냥 사라져 간다. 억지로 보려하면
그 즉시 마경(魔境)에 빠져들게 되므로 상당한 주의와 마음 단속이 필요한 경지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초현상적인 존재의 체험이다. 나는 분명히 보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로
서 흔히 신명 또는 귀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런 경지와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보고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실재하는가? 천부경의 진리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다.
천부경의 '한' - 천도교 용어로 바꾸어 한울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속 마음으로 들어 있으며, 그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임의로 드나든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시공간 통합체인 현실세계가 클라인 원통의 속성과 같이 모든 곳이 통해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런 존재를 보고 듣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본심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속의 일부에 저장된 기억의 덩어리인 가짜 마음, 즉 의식으로 세상을 본다. 눈에 들어
오는 풍경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인 관심가는 것만 보는 것이 사람의 버릇이다. 이 의식이 눈과 짜고 세상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억한 정보들 중에서 제 마음에 드는 것들이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의식
을 만든다. 그 중의 대부분은 육체의 감각기관이 제공한 정보들이고, 따라서 부정확한 정보들이다. 시간도, 전파도, 자외선
도, 적외선도 감각기관은 포착해 내지 못한다. 그렇게 부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짜맞추어진 의식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자연
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본심으로 세상을 보려면 먼저 의식의 벽을 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몸의 벽을 넘어야 한다. 마음지키기를 꾸준히
하다보면 자기가 알고있는 것들이 모두 허상이었음을 알게 되고, 마음을 지키는 마음이 충분히 예민해지면 그 다음에는 몸
에서 전하는 정보들의 대부분이 의식과 밀통하고 있는 엉터리 정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 단계에서 필요한 지식이 천부경이 가르치는 우주구조, 즉 시공간 통합체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이 정신이상이 아니고, 시공간 통합체의 특수한 부분을 통과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육체의 한계
를 벗어날 때 큰 도움이 된다.
클라인 병에서는 내외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물질로 만들어진 우주모형에서는 병의 몸통 중 한 부분을 뚫
고 들어가지 않고서는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몸통 중의 한 부분인 벽,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며 부닥치는 한계이고, 사차
원을 가로막고 있는 벽은 물체라는 벽이다.
그 벽을 허무는 방법은 물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에게 물체는 자신의 몸이다. 그 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마
음이니,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돌려 내부의 마음을 살피는 수심정기가 바로 사차원으로 가는 문을 여는 가장 확실한 열쇠이
다.
모두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은 하느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회, 그런 세상을 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천부경 진리
의 결론이다.
수심정기의 구체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마음 보기와 마음 지키기에 대해서는 이 카페 안에 소개된 연세기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수심정기의 수행법을 확인하기 전에 쓴 글이라서 무극대도의 가르침들과 결부시키지는 않았지만, 그 기
본은 거의 같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3) 홍범구주 소개
홍범구주는 풍류의 주역이었던 동이족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던 통치의 규범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고, 작게는 개인의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오행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요, 오사는 예의의 기본이 되는 언행의 지침이다. 이 둘을 기본으로 제3주 부터는 나라를 다스
리는데 필요한 덕목으로 옮아간다. 즉 개인과 사회의 덕목을 모두 규정한 것이며, 후세에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유교라는 통
치사상으로 발전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덕목들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그대로 적용시키기가 어려우니, 홍범구주가 풍류의 강령이었다는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 내용을 원문대로 소개하는 정도로 생략하자. 자세한 내용에 관심있는 분들은 인터넷에서 관련자료를
찾아보기 바란다.
홍범구주 (洪範九疇) 원문(原文)
初一(초일)은 曰五行(왈오행)이요, 次二(차이)는 曰敬用五事(왈경용오사)요, 次三(차삼)은 曰農用八政(왈농용팔정)이요, 次
四(차사)는 曰協用五紀(왈협용오기)요, 次五(차오)는 曰建用皇極(왈건용황극)이요, 次六(차육)은 曰乂用三德(왈예용삼덕)
이요, 次七(차칠)은 曰明用稽疑(왈명용계의)요, 次八(차팔)은 曰念用庶徵(왈염용서징)이요, 次九(차구)는 曰嚮用五福(왈향
용오복) 威用六極(위용육극)이니라.
1. 일주 오행(一疇 五行)
初一(초일) 五行(오행)은 水曰潤下(수왈윤하)요, 火曰炎上(화왈염상)이요, 木曰曲直(목왈곡직)이요, 金曰從革(금왈종혁)이
요 土爰稼穡(토원가색)이니라. 潤下作鹹(윤하작함)하고, 炎上作苦(염상작고)하고, 曲直作酸(곡직작산)하고 從革作辛(종혁
작신)하고 稼穡作甘(가색작감)이니라.
2. 이주 경오사(二疇 敬五事)
오사(五事)는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니라.
3. 삼주 농용팔정(三疇 農用八政)
팔정(八政)은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니라.
4. 사주 협용오기(四疇 協用五紀)
오기(五紀)는 세(歲), 일(日), 월(月), 성신(星辰), 역수(曆數)니라.
5. 오주 건용황극(五疇 建用皇極)
6. 육주 예용삼덕(六疇 乂用三德)
삼덕(三德)은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이니라.
7. 칠주 명용계의(七疇 明用稽疑)
8. 팔주 염용서징(八疇 (念用庶徵)
9. 구주 향용오복 위용육극(九疇 饗用五福 威用六極)
오복(五福)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덕(德), 고종명(考終命)이니라. 육극(六極)은 흉단절(凶短折), 질(疾), 우(憂), 빈(貧), 악(惡), 약(弱)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