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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릉 여행 [09] 지역별 왕릉군(14) - 강원도 영월군

장안봉(微山) 2012. 12. 26. 18:16

왕릉 여행(9) - 지역별 왕릉군(14)

14. 강원도 영월군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장릉(陵)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의 능으로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군 영흥리에 단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탄생과 즉위는...
단종은 세종 23년에 세자였던 문종(文宗)과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원자(元子)로 탄생하였으나 모후인 현덕왕후(문종 즉위 후 추숭)는 단종 탄생 다음날, 산후병으로 승하하셨습니다. 단종은 세종 30년에 왕세손으로, 문종 즉위년에는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 문종 2년에 문종이 승하하여 12세에 조선 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단종의 죽음은...
문종이 임종에 앞서 단종을 염려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에 보좌를 유언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이 단종 원년,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피살되고 문종의 아우이며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이 되어 군국대사를 좌지우지하였고 수양대군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고명대신과 불궤(不軌)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로 추방하고 단종 3년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역모의 죄로 유배시키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이 되었으나 세조 3년(1457)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비의 아버지인 송현수와의 단종복위 계책이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폐서인이 되었고 그 해 10월 24일 유배지인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었으니 춘추 17세였습니다.

 

단종의 시신은...
단종이 사사되어 동강에 버려졌으나 누구를 막론하고 단종의 시신 옮길 경우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으며, 다음 해, 봄에 얼음이 녹으면서 시신이 멸종될 처지에 놓이자 영월에서 존경받는 호장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으슥한 밤을 이용하여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관에 담고서 십여리 떨어진 동을지산 줄기에 암장하고 수 십명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몸을 숨겼다고 합니다.

단종의 복위는...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 어렵게 단종의 암장 자리를 찾아내어 노산묘는 59년만에 봉분을 갖춘 무덤의 모습을 할 수 있었으며, 선조 13년(1580)에는 석물들을 세우고, 숙종 24년(1698)에 노산대군으로 추복되어 묘호를 단종으로, 능호를 장릉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입니다.

 

또한 정조 15년(1791)에는 장릉의 능역에 단종을 위하여 순사(殉死)한 충신들을 봉제(奉祭)하는 배식단(配食壇)에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朝士位 198人), 환관군노 28인(宦官軍奴 28人), 여인위 6인 모두 264인의 위패를 봉안한 배식단사(配食壇祠)가 건립되었습니다.

▲ 단종역사관

▲ 장릉의 재실

▲ 락촌비각과 기념비

▲ 배견정

장릉 답사는...
영월의 장릉은 10 여년 전에 가족과 함께 장릉과 청룡포 등을 둘러 보았습니다만, 왕릉을 알게 된 후에 다시 답사하려고 했으나 워낙 먼 지역이라 왕릉 중에서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곳입니다. 장릉 답사는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알게 된 청운당(당시 고교 1년생)과 여주의 영릉에 이어 두 번째 동반 답사였습니다.

 

영월 입구에 있는 선돌에서 디카 메모리를 집에 두고 온 것을 발견했을 때는 충격이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사진을 담아 가지 못하다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 발생되었으나 다행히 청운당이 가져 온 필카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단종의 유적지들은 영월 시내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청운당이 계획한 단종의 유적지김삿갓 묘까지 다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2006년 6월, 8월 다시 다녀 왔습니다.

▲ 사릉에서 온 정영송

▲ 정영송 앞에서 본 장릉

▲ 엄홍도 정려각

▲ 배식단사

장릉의 특징은...
장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가 있으며, 정려비, 기적비, 정자 등이 있는 왕릉은 영월의 장릉 뿐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되었습니다.

 

장릉 입구에서...
장릉은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영월군에서 직접 운영,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입장료와 주차료가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다른 왕릉에 비해서 2배를 받더군요. 어쨌거나 입구에서 관리소장을 찾으니 집표하시는 분이 자기가 관리 책임자라고 하여, 사전 설명과 협조를 부탁드렸으나 쉽게 허락을 하지 않아서 20 여분을 또 팽팽한 긴장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허락을 받고서야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 배식단

▲ 수복방

▲ 비각

▲ 영천

장릉에 들어서면...
10 여년 전에는 능으로 올라가는 길이 정자각 뒷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길은 폐쇄(겨울에 관람객들이 미끄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폐쇄했다고 함)되어 잔디로 덮혀 있었습니다. 장릉 입구를 들어서면,왼쪽에는 단종 역사관(2002년 개관)과 재실이 그리고
엄흥도 정려각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락촌비각(駱村碑閣)락촌기적비가 있습니다.

 

락촌은 박충원(朴忠元)의 호로서 박충원이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하여 현몽으로 노산묘(魯山墓)를 찾아 수축 봉제(修築 奉祭)한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1973년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락촌기적비 오른쪽 20여 미터 뒤로는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 산신석(좌)과 예감(우)

▲ 정자각

▲ 신계 및 동계

▲ 능역에서 내려 본 모습

장릉으로 올라가는 길은...
장릉 능역은 역사관과 락촌비각 사이의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능역 50 여미터 전방 길옆에는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 소나무는 제17회(1984년) 단종제 행사 때 사릉(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능)에서 10년생 소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올해로 30년된 소나무 일텐데, 소나무가 너무 작고 어립니다. 돌표식에는 정영송(精靈松)과 1999년 이식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장릉 능역을 관람하고 다시 돌아 나오면 중간에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내려오면 배식단사로 내려오게 됩니다.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옆에는 배식단이 있으며, 참도로 걸어 들어가면 참도가 꺽어지기 전에 정면에는 영천(靈泉)이, 참도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지면 정자각이 있습니다. 정자각 왼쪽에는 예감과 산신석이 한 곳에 위 아래로 있습니다. 그리고 신계는 동계와 똑같습니다.

 

정영송에 대해서 확인하여 보니...
당시 영월의 장릉관리소에 문의하여 알아 본 결과, 20년 전에 사릉에서 가져 온 소나무 두 그루는 소나무가 아니라 전나무인 것으로 밝혀져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그 후에 사릉에서 직접 소나무 씨앗을 받고, 싹을 틔워서 가져다 1999년4월 9일에 다시 이식을 하였다고 하니 심은지 얼마되지 않은 어린 소나무입니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는...

▲ 왕방연 시조비 앞에서 바라 본 청령포

청령포(淸冷浦)는 단종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이며,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있는 천연의 요새같은 곳입니다.

▲ 청령포를 건너는 배

▲ 단종 어가의 부속 건물인 초가집

▲ 복원(2000년 4월)된 단종의 어가

10년 전에는 강을 건너던 작은 배는 뱃사공이 긴 줄을 잡아 당기면서 청령포를 건넜었는데, 지금은 주변에 식당과 상점 건물도 들어서고 주차장도 넓으며, 특히 배에는 모터를 달아서 뱃사공의 수고를 덜었습니다만, 손님들이 같이 줄을 잡아 당기며 건너던 재미는 없더군요.

 

청령포에 내려서면 100 여 미터 앞에는 전에 없었던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복원해 놓은 어가와 유지비각이 있으며, 조금 더 들어가면 관음송이, 이 곳을 지나서 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벼랑에 서면 첩첩산중을 휘돌아 흐르는 강줄기만 보입니다.

▲ 청령포 내에 있는 영월의 관음송

▲ 두 팔 벌려서 관음송의 굵기를...

▲ 금표비

영월의 관음송은...
관음송은 청령포 안에 있으며 나이는 600여년 정도되고,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m의 크기로 1.2m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으며,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소나무가 단종의 슬픔을 보고 들었다는 뜻이라 합니다.

 

관음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으며,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청령포의 금표비는...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므로, 조정에서는 영조2년(1726)에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이 금표비에는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식으로 동서 300척 남북 490척 이라는 글씨가 금표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도 영조 39년에 세웠습니다.

▲ 망향탑에서 내려다 본 전경

▲ 망향탑

▲ 노산대

전망대 아래 쪽에는 왕비인 송씨를 그리며 쌓았다는 자그마한 돌탑인 망향탑도 있으며. 절벽을 따라서 좌측으로 오르면 단종이 한양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노산대가, 언덕을 내려오면 전방에 금표비가 보입니다.

 

청령포를 돌아 나와서 매표소에서 도로 왼쪽 50 미터 지점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의 슬픈 처지를 읊은 왕방연 시조비가 있으며, 이 곳에서는 청령포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들은...

단종의 유적지들은 장릉이 있는 영월읍 영흥리 주변에 많이 모여 있습니다. 청운당이 장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덕사 입구에 있는 해우소(화장실)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므로 한 번쯤 둘러 볼 만하다고 해서 보덕사로 향했습니다.

 

보덕사 입구 왼쪽에는 120년된 사찰의 해우소(解憂所)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으며, 문화재자료 132호로 지정될 만큼 희소한 건물이더군요. 해우소 안에는 6칸씩 2줄로 남녀별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보덕사에서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보덕사의 부속 암자였던 금몽암(禁夢庵)이 있으며, 단종이 꿈속에서 보았다고 해서 금몽암이라고 고쳐 불렸다고 합니다. 다음은 창절사로 가서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안을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창절사(彰節祠)는 단종복위를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위시한 10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2층으로된 문루(배학루)가 있으며, 문루 안에는 양 옆으로 창절서원이, 안쪽에는 창절사가 있습니다.

▲ 영월 보덕사 해우소

▲ 금몽암

▲ 배학루(창절사 2층 문루)

단종이 사사된 관풍헌은...
1457년 6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은 그 해 큰 홍수가 나자 거처를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 해 9월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발각되어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 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를 구실로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 보내 결국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 의해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사사되었습니다.

 

관풍헌 오른쪽에는 자규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단종은 관풍헌으로 옮겨온 후, 이 누각에 자주 올라 자신이 직접 지은 자규시(子規詩)를 읊었다고 하며,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으로서 이 누각이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단종이 사사된 장소인 관풍헌

▲ 창절사

▲ 영모전

영모전과 민충사는...
영모전(永慕殿)은 단종의 영정(초상화)을 모신 곳으로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자 이 지역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여 오다가 사약을 받고 죽자 모두가 애도하며, 정성어린 마음으로 중종 12년(1517)에 사당을 짓고 항상 단종이 있는 것처럼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민충사(愍忠祠)는 영월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이 돌아가시자, 단종을 모시던 시녀 6인이 다음날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하여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영조 18년(1742)에 세운 사당입니다. 민충사 앞에는 금강정이 있으며, 바로 동쪽으로는 낙화암이 있습니다. 민충사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김삿갓은...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으로 세도가의 후손이었으나 어렸을 적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부인 선천방어사 김익순이 반군에 항복하고 목숨을 빌게되어, 난이 평정된 후,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한 김삿갓 가족은 전국을 전전하다 영월에 정착하게 됩니다. 김삿갓이 20세 때, 영월 동헌 향시에서 자신의 집안 내력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써 장원 급제하였으나 그 뒤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그는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 뒤로 김삿갓은 전국을 돌며 서민들 속에 섞여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시작 활동을 하며 일생을 보내게 되고, 당시 시대상황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는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57세 때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하자 둘째 아들이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 묻었다고 합니다.

 

김삿갓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와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 연구가인 박영국씨가 찾아내었으며, 1987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지금의 이곳에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시비'를 세웠습니다. 영월군에서는 그의 생가터와 묘지를 잘 보존하고 해마다 문화제를 열어 그의 넋과 시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 김삿갓 묘역

▲ 큰 돌판을 상석 대신으로...

▲ 김삿갓 묘역 뒤에서 본 전경

김삿갓의 묘는...
영월의 단종 유적지들을 돌아 보고 마지막으로 청령포에 들어 갔다가 나오니 5시가 넘은 시각이어서 김삿갓묘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습니다. "제6회 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2003.10.10~10.12)"를 며칠 앞 둔 시기로 김삿갓 묘로 가는 도로 길목마다 지팡이 짚고 삿갓을 쓴 김삿갓 상과 현수막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청령포에서 김삿갓 묘까지는 꽤 멀더군요. 전에는 도로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김삿갓 묘 입구까지 도로가 나 있었습니다. 입구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고 묘역으로 올라가는 왼쪽에는 큰 돌에 김삿갓의 글들이 많이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김삿갓의 묘가 있습니다. 묘역 앞에는 긴 돌이 양 옆으로 세워져서 망주석을 대신하였고, 다듬어지지 않은 모난 돌이 상석으로, 봉분 오른쪽에도 역시 다듬지 않은 돌로 비석을 세웠습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니 어둑어둑해 지더군요.

김삿갓이 살던 집은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얼마 멀지 않을 줄 알았는데, 20분 이상을 올라가야 합니다. 중턱에 집이 있길래 그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표지판이 보이고 김삿갓의 복원된 집이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 사진만 두 어장 찍고서는 급히 발길을 돌렸습니다.

 

영월군에서는...
영월군에서는 단종과 김삿갓에 대해서 대대적인 홍보와 매년 정기적으로 행사를 개최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습니다. 단종문화제난고 김삿갓 문화큰잔치를 매년 개최하여 영월은 단종과 김삿갓의 도시라고 할 만큼 단종이나 김삿갓에 대한 유적지 보전이나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사업들을 활발히 펼쳐서 역사의 고장이란 인식은 물론 지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단종의 유적지는 영월 도심을 중심으로 있으나 김삿갓 묘역은 영월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가 봐야 김삿갓 묘 이외에는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먼 곳까지 관광객을 불러 들이는 홍보와 기획력이 대단합니다. 두 곳 이외에도 봉래산(799.8m) 정상에 건립된 국내 최대 규모의 공립 시민 천문대와 책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 영월곤충박물관 등 관광객들의 볼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나마 영월군 관계자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영월 안내도

교통편은...
서울(경부, 중부)→신갈.호법분기점(영동)→만종분기점(중앙)→제천IC(38번국도)→영월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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