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지명유래(풍수)形氣風水
충북 청주시 강서동 비하리(飛下里)와 충북 청원군 북일면 비상리(飛上里)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영조 36년인 1860년부터 이곳에 기러기 모양의 큰 새가 날게 된다는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가에 의하여 이런 예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지명을 기러기가 나는 동네라 하여 비흥리(飛鴻里)라 부르기 시작했다.비흥리가 발전하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에는 삼분되어 비상리(飛上里) . 비중리(飛中里) . 비하리(飛下里)로 부르게 되었다.그
후 청주시가 팽창함에 따라 비하리는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제5공화국 시대에 청주 국제 공항 건설 계획에 따라 이륙 지점과 착륙 지점의 최적지를 찾다 보니까 신기하게도 그 지명과 일치하게 되었다. 이륙 지점은 새가 날기 시작한다는 뜻인 비상리가 되고 착륙 지점은 새가 내린다는 비하리가 되어 옛지명대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충남 대전시 유성(儒城)은 대전시로 편입되기 이전엔 충남 대덕군 유성읍이었는데 이곳은 삼국시대 이후 유림(儒林)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신라 경덕왕 16년(서기757년)에 선비 유(儒)자, 재 성(城)자를 써서 유성이라 명명되었는데 그후 선비들이 살지 않고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땅이었던 것이 정부가 기술입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곳에 대덕연구단지를 세워 우리나라 첨단과학연구소의 산실이 되고 있으며,대전 문화동에 있었던 충남대학교가 1984년도에 이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선비들이 사는 동네인 진짜 유성이 된것이다.
경북 달성군 논공면(論工面)이라는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부터 논공(論工)으로 불려져 왔는데 농사를 짓는 농촌이라 사람들은 마을 이름이 이상하다며 수백 년을 살아왔다. 현재 논공공업단지(論工工業團地)가 들어서 있으며 공단 규모가 140만 평으로 공단 지역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평화의 댐이 건설되는 지역은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수상리(水上里)와 수하리(水下里)로 이댐이 건설되면 댐을 기준으로 해서 수상리(水上里)는 위쪽에 수하리(水下里)는 댐의 아래에위치하게 된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교동(校洞)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향교(鄕校)가 있었던 지역이라 교동이라 불렸는데 이씨조선이 멸망하고 나서부터 교동국민학교,삼척중학교, 삼척공업전문학교가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 지방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기도 과천(果川)을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주막이 있어 유숙을 하거나 음식을 먹으며 시험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곳이라 삼남 지방 선비들이 오가며 들르던 장소였다. 그래서 그곳이 바로 한양에 가서 벼슬하는 관문(關門)이라 하여 관문리(官門里)라고 불렀다. 1986년 1월 1일 과천읍이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관문리도 관문동(官門洞)으로 변경되었는데 이곳에는 정부 제2종합청사와 중앙 공무원 교육원 등 관청이 들어서 지명 이름대로 행정마을이 되었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米川里)에 무너미 고개가 있다. 이고개는 이조 중엽 고승 정진대사 (靜眞大師)가 불사(佛事)를 일으키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중 이 고개에 잠시 머물다가 잠이 든 것이 있었다. 꿈속에서 산 아래 마을 전체가 물속에 잠기고 큰 배들 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현재 이 산골짜기는 실개천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는 이 골짜리에 물이 꽉 차고 이 고개 위로 물이 넘어간다.”
그때로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그렇지만 이름있는 고승의 말인지라 동네사람은 그때부터 정진대사가 한 말에 따라 물이 넘는 고개라 해서 물넘이 고개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무너미고개로 변하여 계속하여 동리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르고 불러왔다. 그러다가1980넌 대청(大靑) 다목적댐이 건설됨에 따라 대청호(大靑湖)의 물이 이 마을까지 꽉 들어차게 되었고 전설로 내려오던 무너미 고개에 대형 상수도관이 매설되어 청주시의 상수도를 공급하는 길이 되어 무너미 고개 전설이 실화가 된 것이다.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大田里)에도 무너미 고개가 있다. 옛날부터 이 고개를 통하여 물이 넘어간다는 뜻으로 무너미 고개로 전해 내려왔는데 충주댐이 건설됨에 따라 양수장(揚水場) 설치로 이 고개에 물이 통하는 도수로(導水路) 터널이 설치되어 이 고개에 물이 지나가고 있다.충남 공주군 계룡면 월곡리도 무너미 고개가 있고,전남 담양군 수지면 두정리에도 무너미 고개가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전남 완주군 용진면 산정이 수리제(水利堤)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로 물이 지나간다는 뜻으로 수리 고개라고 전해 내려왔다. 1954년 인근 아중(雅中)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이 수리제 고개에 배수관을 묻어 물이 통과하고 있다. 이렇게 예전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것이 댐이 건설되거나 양수장이 설치됨에 따라 전설이 현실화된것이다. 선인들의 혜안에 정말 감탄할 나름이다.
충북 보은군 회남면 거교리(巨橋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산간 오지 마을로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 마을이 침수되고 큰 다리가 가설될 것이라는 유명한 풍수가의 예언이 있은 다음부터는 큰 다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거교리(巨橋里)로 불려왔다. 그후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거교리에 대한 얘기가 신빙성이 없다고 할 때이다.
1980년 대청댐이 건설됨에 따라 거교리는 모드 침수되어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고지대로 이주했으며 수침선(水沈線) 위로 도로를 잇는 큰 다리가 가설되어 전설이 실화가 되었다. 그 다리 이름은 거신교(巨新橋)로 길이 180m,폭15m, 높이52m이다.
전북 옥구군 대야면 복교리(福橋里)의 경우 옛날부터 이 동네에는 다리가 많이 세워져 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하여 복교리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1977년 복교(福橋 : 길이 40미터,폭 16미터)가 가설되었고 1986년부터 만경교(萬頃橋:길이600미터,폭10미터)를 가설하는 중에 있어 지명대로 되고 있다.
충북 제원군 금성면 월굴리에 고교 부락(高橋部落)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은 금성천(錦城川)과 중전천(中田川)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지금부터 약 삼백여 년 전에 온동네 사람들이 합심하여 다리를 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어떤 노승이 이 광경을 보고 그곳으로 다가가서 그 다리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다리는 높은 다리,즉 고교(高橋)라 불러야 합니다.” “나무로 놓은 저 얕은 다리를 고교(高橋)라 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제일 학식있는 사람이 이렇게 반문했다. “앞으로 약 3백년이 지나면 이 다리 난간까지 물이 차게 되어 그때에는 다리를 높게 놓아 야 하니까 고교(高橋)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노승의 말에 아무도 반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노승은 인근절에 사는 주지로 평소 신승(神僧)이라 불리던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렀다. 1983년 충주댐이 건설됨에 따라 마을 전체가 수몰되었고 그옛날 목교(木橋)가 세워졌던지역에 길이 157미터,폭 10.5미터,높이35미터의 높은 다리가 세워짐에 따라 3백여 년 전에 이 동네가 수몰되고 높은 다리가 세워질 것을 미리 예견한노승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다리중에서 제일 멋진 경관을 가진 다리 중의 하나가 남해대교 이다. 남해대교(南海大橋)의 양끝 동네 이름을 보면 큰다리를 놓게끔 된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
다리의 양쪽 동네 이름을 보면 하나는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露梁里)요, 다른 하나는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露梁里)이다 . 한곳은 남해군이고 다른 한곳은 하동군으로 군(郡)은 서로 다르지만 지명은 똑같은 노량리 인 것이다 . 이 노량(露梁) 이란 뜻은 이슬로(露) 자에다 나무다리 량 또는 대들보 량(梁) 자니까 이슬처럼 가는 대들보처럼 연결된 다리 라는 뜻이다. 남해대교는 두개의 교각에 다리 상판(上板)을 가설한 적교(吊橋)로 길이 660미터, 폭이 12미터인 다리이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무룡리 뒷산은 예부터 산이 먹처럼 검다하여 흑(黑山)이라 불려왔는데 1973년 흑산광업소(黑山鑛業所)가 개발되어 많은 석탄을 캐내고 있는데 총매장량은 1억 1천만 톤이며 연간 13만 톤을 생산하고 있다.
강원고 태백시 계산동(鷄山洞)의 앞 개울의 이름은 검은 내 즉 검천(黔川)으로 불려왔는데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이 계곡에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검천이란 지명의 속뜻을 모르다가 해방 후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가 설립되어 석탄을 채광하면서부터 물이 검어져 지금은 이름그대로 검천이 되었다고 한다.
또 충남청양군 대치면 탄정리(炭井里)라 불리고 있는데 현재는 청양광업소가 무연탄을 채광하고 있다. 전남 광양에 세계적 규모에 광양제철소(光陽製鐵所)가 세워진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곳의 지명은 광양군 태금면(太金面) 금호리(金湖里)로 원래 섬으로 금호도(金湖島)라 불렀다. 옛날부터 주민들에게 쇠섬, 금도라 불려졌는데 이곳에 세계 굴지의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것이다. 옛지명과 딱 부합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이름은 삼국시대부터 작명(作名)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 이조를 통하여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지명을 지을 때는 풍수지리가(風水地理家)나 도인, 전설, 시설물, 풍속, 주변 환경에 따라 짓는 것이 상례였으나 그때 이름 지을 때는 전혀 걸맞지 않던 지명이 현대에 와서 국토개발사업으로 댐을 건설하거나 농업용수개발로 저수지를 축조함에 따라 그 지명에 흡사하게되는 지역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간벽지 마을 이름 중에 물 수(水) 자나 배 주(舟) 자나 고기 어(魚)자가 들어가는 동네는 현재 그 지명 이름대로 되는 것을 많이 발견 할수 있다.
충북 보은군 화남면 사음리(舍音里)는 산간벽지로 화전민들이 사는 동네로 예부터 그 동네를어부동마을이라 불렀다. 산에 어부라는 말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말로 주민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연유에는 관심없이 그럭저럭 살아왔다. 그러다가 1980년 대청댐이 건설되어 이동네 앞까지 담수되어 내수면(內水面)어업으로 전환하여 산간오지에서 어부가 된 것이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水滿里)는 내륙지방으로 이조 중엽 전라관찰사이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준 노래인 채지가를쓴 이서구(李書九)가 이마을을 지나다가 “이 동네는 장차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한 다음부터는 ‘물이 동네에 가득찬다’는 뜻으로 수만리라 불러왔다. 1965년 이곳에 동상저수지가 축조되어 이 마을 일부가 물에 잠기고 마을 앞에 물이 가득 차게 되어 이서구 선생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이 동상저수지는 제방 높이가 30미터, 저수면적99핵타, 저수량이 1억1천만 톤 정도라고 한다. 전북 적상면 포내리(蒲內里)는 소맥산맥의 중심지에 위치한 산간벽지 마을로 언젠가는 이 마을이 깊은 물속에 잠기어 포내가 된다고 전해내려왔다. 그 시대에 그 말은 상식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1987년 4월에 한국전력공사에서 적상산(赤裳山) 양수발전소(揚水發展所) 건설을 위해 댐을 축조함에 따라 적상면 포내리 일부가 물속에 잠기고 호수로 바뀌어 옛지명대로 되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大草里)에 운주사(運舟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신라 말엽에 왕건의 국사이며 한국의 풍수지리를 더욱 발전시킨 도선이 창건한 절로 절의 이름답지 않게 배를 띄운다 또는 배를 탄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운주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아니 스님, 절 이름에 배 주(舟)자를 쓰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무슨 연유라도 있습니까?” 도선보다 나이 어린 스님이 이렇게 물었다.
“어떤가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더러운 탐욕과 악심을 저 배에 띄워 보내라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네.하하하.......” 도선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풍수지리라면 이 나라에서는 아직 스님을 따라갈 만한 분이 없사옵니다. 무슨 연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선을 받드는 스님의 말이였다. “잘 보았네. 이산 아래 동네 지형을 보니까 언젠가는 물에 잠길 것일세. 그래서 미리 운주사라고 이름을 지으면 수백년후 저 동네가 수몰될 때면 중생들이 이 절 이름을 보고 놀라 신앙심이 생겨 이 절에 많은 중생들이 찾아와 융성될 것이 아닌가?”
도선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수백년이 흘렀다. 1976년 영산강 종합개발사업이 전개됨에 따라 나주호수가 생겨 물이 절 아래 동네인 대초리까지 담수되어 바로 절 앞에서 배를 탈 수가 있어 운주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의 혜안에 주민들과 나중에 이 설화를 들은 사람들은 탄복 했다고 한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두천동에 조곡(釣谷) 즉 낚싯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곳은 옛날 어떤 신통한 풍수지리가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이 계곡은 산간 계곡에 있어 그물로 피라미 몇 마리나 가재를 잡지만 먼 훗날 언젠가는 이 골짜기에서 낚시질을 하게될 걸세.” 이렇게 엉뚱한 말을 함에따라 그 계곡은 풍수가의 말대로 낚시질을 한다는 뜻으로 조곡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면서도 천지개벽이 되지 않고서는 도지히 저 골짜기에서 낚시를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던 것이 1975년 운암(雲岩)저수지가 생김에 따라 그곳에서 그 풍수가의 말대로 낚시질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온천수의 온도가 가장 높은 부곡(釜)온천도 옛지명이 온정리였다. 이곳의 행정 지명은 경남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이지만 조선조 초기에는 따뜻한 물이 나온다 하여 온정리로 불렸다.
이곳에서 나는 물로 목욕을하면 피무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자 관청에서는 사람들이 이 마을을 더럽히는 것을 막자는 뜻에서 거문리라고 짓고 이곳에 아무나 와서 목욕하는 것을 막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말을 거 잘를 클 거 자로 바꾸어 거문리라고 부르고 있으나 옛지명은온정리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규모가 큰 온천이며 온도가 섭씨72도에 육박한다고 한다.
덕구 온천은 행정구역이 경북 울진군 북면 덕구리로 일명 온정동 또는 溫井골이라는 곳으로 계곡 암벽에서 온천수가 나오고 있다. 오색 온천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五色里로 예부터 골짜기에서 따뜻한 샘물이 나온다고 하여 溫井谷이라 불러 왔는데 1982년 오색 온천이 개발되어 현재 성업중이며 현재 온천개발을 시도하고있는 지역도 대부분 온천에 관계되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장소는 명혈자리로 좌천룡우백호 전주작 후현무와 물의 배합이 딱 맞아 떨어지는 명당으로 이조 영조시대의 암행어사 박문수(서기1661~1756)가 사망하자 평소 명당이라는 자리(현재 독립기념이 위치한자리)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그 당시 박문수의 인품을 존경하는 유명한 지관이 극구 만류하였다.
“이곳은 2,3백 년 후가 되면 국가에서 중요하게 쓸 땅이니 그렇게 되면 그때 다시 이장을 하게 됩니다 . 그러지 마시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제가 보아 놓은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장사 지내도록 하십시요.
지관이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남쪽 병천면(竝天面) 은석산( 에 장사 지냇다고 한다 . 그 지관의 혜안에 탄복할만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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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주.팔자 원문보기▶ 글쓴이 : 정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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