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가회면의 귀농촌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
기사입력 2010-05-14 오전 9:04:33
정월 보름날 아침을 하얀집펜숀에서 잘 먹고 우리는 서정홍시인의 뒤를 쫓아 험한 산 비탈을 오른다. 도저히 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좁고 험한 길이다.
큰 문중 산소가 있는 제실 옆을 조금 더 가니 진흙 뻘길이 나오고 차가 더 이상 나가지를 못하고 섰다. 그 앞에 집들이 듬성듬성 몇 집이 보였다.
단지 4가구만 사는 귀농촌인 '벽오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도 없이 지내다가 이곳의 원주민(?)인 정상평씨가 심어 놓은 오동나무가 제법 자라 '벽오마을'이라고 귀농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이곳 귀농인들은 한 집 한 집 들어오면서 산속 문중 땅 옆을 개간해 가면서 경작할 땅을 조금씩 만들어 왔다.
여기 이 동네는 원래 정상평씨가 겨우 자기 땅을 붙이며 혼자 살았는데 서정홍시인이 소개한 지금의 부인을 만나 애도 한명 낳아 세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땅이다. 이 정상평씨가 촌장이 되어 차례로 들어오는 귀농인들을 집도 같이 지어 주고 보살펴 주어 다들 무사히 안착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영어선생을 접고 들어온 교사부부, 수녀를 관두고 들어온 여성 두 분, 서로 다르게 들어와 결혼해서 사는 한 가구, 촌장인 정상평씨 가족 이렇게 4가구가 사는 동네다.
진흙땅 길을 겨우 들어와 차를 댄 집이 이진홍, 임진희 교사부부집이다. 자기들이 낳은 '산'이와 '강'이와 '연'이를 입양하여 셋을 키운다. 네다섯 살 아래위로 고만 고만한 귀염둥이들이다. 귀농한지 얼마 안 돼 농사짓는 것도 힘들 텐데 아이들 농사까지 짓는다니? 정말 대단한 젊은이들이다.
부부는 원래 청주사람으로 충북대학을 나와 대구에서 영어선생으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대구에서 이진홍 선생은 열열 운동가였던 모양이다. 서정홍시인의 표현을 빌면 꽁지머리를 하고 자전거타고 다니다가 여기 귀농하고서야 지금의 삭발머리를 하였다고 한다.
몸에 '00반대' 펼침막도 두르고 다니고 200일 동안 백화점 앞에서 우리쌀 지키기 서명운동과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한다.
부부가 10년 넘게 다닌 학교를 때려치우고 여기 들어 온 것은 2년 조금 넘는다고 했다.
대구 시절에 젊은이들의 모임인 '땅과 자유'를 만들고 천규석선생(대구 한살림운동과 소농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과 녹색평론의 김종철선생 등 영남학파(?)의 말씀도 들으면서 뜻한바 있어 귀농한 모양이다. 물론 이 마을은 귀농안내인(?)을 자처하는 서정홍시인의 소개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 부부는 재작년부터 논농사를 시작했고 작년부터 밭농사를 시작했다. 가족들 먹고 조금 나눌 정도로 작게 하고 있다. 밭은 1200평 정도 인데 4가구가 나눠서 부치고 있는데 자급하려다보니 종류별로 조급씩 많이 심어 거두어 마무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이것저것 농사짓는 다는 게 요즘 이야기고 첫해엔 갈무리한 먹거리가 없어 그야말로 보리고개도 처음 맛봤다고도 했다. 첫해에 보리 고개를 맛보고 그 다음해부터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10월부터 매일 갈무리하고 저장하고 나물말리고 무말랭이하고 김장도 많이 하고 해서 금년도는 문제가 없다고 자신 만만해한다.
그런데 여기가 워낙 산골이라 모든 도시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없애거나 줄였다고 한다. 인터넷은 물론 TV 및 전화도 집집이 없다. 그래서 5명 쯤 되는 애들 먹거리가 제일 문제다. 할 수 없이 시장을 보면 꼭 애들한테 필요한 멸치와 미역 등 어물만 따로 산다고 한다.
이렇게 도시문명과 등을 지고 철저히 자립이 가능할까? 이들은 마치 앞으로 필연적으로 닥칠지도 모를 식량폭동(우리의 20% 정도의 식량 자급률로 보면 이러한 위기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의 위기에 대비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진홍씨 집에서 담소를 끝내고 그의 안내로 촌장인 정상평씨 집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정상평씨는 오늘 우리가 여길 도착했을 때 서정홍시인과 같이 어떤 모임이 있어 급히 출타해 버려 없었다. 그의 9살 난 아들 구륜이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사람이 그립던 구륜이는 우리 일행 중 젊은 처자들만을 데리고 앞서 가버렸다. 소구경도 시켜주고 이것저것 안내하느라 오랜만에 신이 났다.
나이 든 측들은 뒤쳐 저 이진홍씨가 마을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촌장 집에 가는 도중에 짓고 있는 마을 회관도 구경했다. 원래 정상평씨가 살던 집으로 그의 가족이 지금 집으로 새로 짓고 옮기고 여기는 리모델링해 마을 회관 겸 '강아지 똥 학교'를 열 작정이라고 한다. 철저히 마을 공동체를 준비 중이다.
정상평씨 집에는 마침 귀농하여 농사짓는 다는 바로 그 두 여성들이 와있었다. 오늘이 대보름이라 집에서 만든 차와 과자를 놓고 대보름 행사(?)를 하는 중이라고 우리를 반겼다. 정상평씨부인은 정상평씨가 자랑하던 대로 미인이었다. 첩첩산골에 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우리가 여기 들어와 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하고 떠 보았더니 '여기'가 자기는 그렇게 좋다고 말한다. '여기'란 정상평씬지 농사일인지 알쏭달쏭 하다.
우리들은 귀농하여 농사짓는 두 여인에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요즘 농한기라 좀 덜 바쁜지를 인사차 물었다. 두 여인은 요즘 농한기라 마음이 편하고 못 읽었던 책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 왔을 땐 농한기에도 벽돌 찍어 직접 집을 짓느라고 쉴 틈이 없었단다.
원래 수녀로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전력에 대해서는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잠깐씩 들어 본 걸로는 정말로 제대로 된 농사를 짓고 싶어 수녀생활을 접고 귀농한 모양이다. 아마도 생명의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세상과 영성(靈性)을 알고 싶었을 거라 짐작된다.
여자끼리 귀농하여 농사를 짓는 게 소문이 나 2~30대 젊은 여성분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두 분이 인상이 참 좋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분은 세상의 물리를 터득한 인디언 추장 같으시고 젊은 측은 용감한 인디언 전사 같으시다.
그들은 농사를 한참 배우고 있다고 했다. 마치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호미질 괭이질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땅과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녀들이 땅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원래 대지의 신이었던 여성들이 땅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여성들만의 귀농이 진정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여성들과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산골 마을의 청정함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진홍씨는 우리를 흙벽돌 찍는 기계 앞으로 데려갔다. 유압식으로 내려 눌러 찍는 반자동식 기계였다. 내가 군대 있을 때 손으로 내려 눌러 찍는 기계 보다 많이 발전해 있었다. 그는 6마리 소를 키우는 공동 축사와 똥 먹는 닭 키우기, 자기 집 개가 남의 집 귀한 거름(똥)을 먹다 혼난 얘기 등을 덤으로 들려 줬다.
그는 집 앞에서 우리에게 그들이 만든 조청과 한방 차를 선물했다. 우리는 답례로 여기서 농사 지을 수 없는 멸치, 김 등 해산물을 보내주마 약속하고 이 귀농인들의 산마을을 떠났다.
외진 산비탈에 있는 남의 문중 땅을 겨우 개간해 네 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삶을 의탁했다. 농사로 지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자급을 하겠다는 그들은 모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모험이 성공할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의지와 열정을 보는 순간, 그러한 우려와 의구심은 어느새 없어졌다. 그들은 모험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을 땅과 자연에 귀의시킨 것이리라.
우리는 어제 약속한 '콩사랑'의 김성환사장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의 공장은 합천과 산청군의 경계에 있었다. 그는 원래 큰 장류공장의 공장장으로 있다 지금의 이 공장으로 독립했다고 한다. 그의 공장으로 안내되어 그의 과학적 '메주와 청국장, 간장, 된장만들기' 강의를 들었다. 그는 모든 장류를 온도, 습도 등을 과학적으로 빈틈없이 맞추어 관리하고 있었다. 들어 보니 그럴 듯 했다.
그의 강의가 끝나자 우리는 저도 모르게 된장을 한 통씩 샀다. 그는 거기에 자기의 자부심을 걸고 있는 콩사랑 간장을 한 병 씩 덤으로 얹어 줬다. 된장찌개가 나의 특기라 나는 좋은 된장만 얻으면 부자가 된 느낌이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모처럼 집에서 칭찬 받겠다'는 덕담을 남기고 그와 헤어졌다.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http://cafe.naver.com/yemane)
큰 문중 산소가 있는 제실 옆을 조금 더 가니 진흙 뻘길이 나오고 차가 더 이상 나가지를 못하고 섰다. 그 앞에 집들이 듬성듬성 몇 집이 보였다.
단지 4가구만 사는 귀농촌인 '벽오마을'이다. 원래 마을 이름도 없이 지내다가 이곳의 원주민(?)인 정상평씨가 심어 놓은 오동나무가 제법 자라 '벽오마을'이라고 귀농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이곳 귀농인들은 한 집 한 집 들어오면서 산속 문중 땅 옆을 개간해 가면서 경작할 땅을 조금씩 만들어 왔다.
여기 이 동네는 원래 정상평씨가 겨우 자기 땅을 붙이며 혼자 살았는데 서정홍시인이 소개한 지금의 부인을 만나 애도 한명 낳아 세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땅이다. 이 정상평씨가 촌장이 되어 차례로 들어오는 귀농인들을 집도 같이 지어 주고 보살펴 주어 다들 무사히 안착했다고 한다.
▲ 한적한 도로 옆 산속을 올라가 자리한 벽오마을에는 귀농한 젊은이들 4가구가 논과 밭을 끼고 자리하고 있다. 이진홍씨가 맞아주어, 그의 집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올망졸망한 세 아이들이 일행을 반기며 귀여움을 떤다. |
대구에서 영어선생을 접고 들어온 교사부부, 수녀를 관두고 들어온 여성 두 분, 서로 다르게 들어와 결혼해서 사는 한 가구, 촌장인 정상평씨 가족 이렇게 4가구가 사는 동네다.
진흙땅 길을 겨우 들어와 차를 댄 집이 이진홍, 임진희 교사부부집이다. 자기들이 낳은 '산'이와 '강'이와 '연'이를 입양하여 셋을 키운다. 네다섯 살 아래위로 고만 고만한 귀염둥이들이다. 귀농한지 얼마 안 돼 농사짓는 것도 힘들 텐데 아이들 농사까지 짓는다니? 정말 대단한 젊은이들이다.
▲ 서시인은 일이 있어서 안내만 해주고 금방 떠나면서도 계속 이 마을 젊은이들 칭찬을 그치질 않는다.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진홍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행들 역시 감탄한다. 오른쪽부터 이진홍, 서정홍, 박태이, 김송희, 박명학, 필자 |
부부는 원래 청주사람으로 충북대학을 나와 대구에서 영어선생으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대구에서 이진홍 선생은 열열 운동가였던 모양이다. 서정홍시인의 표현을 빌면 꽁지머리를 하고 자전거타고 다니다가 여기 귀농하고서야 지금의 삭발머리를 하였다고 한다.
몸에 '00반대' 펼침막도 두르고 다니고 200일 동안 백화점 앞에서 우리쌀 지키기 서명운동과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한다.
부부가 10년 넘게 다닌 학교를 때려치우고 여기 들어 온 것은 2년 조금 넘는다고 했다.
대구 시절에 젊은이들의 모임인 '땅과 자유'를 만들고 천규석선생(대구 한살림운동과 소농운동을 주도하고 있다)과 녹색평론의 김종철선생 등 영남학파(?)의 말씀도 들으면서 뜻한바 있어 귀농한 모양이다. 물론 이 마을은 귀농안내인(?)을 자처하는 서정홍시인의 소개로 들어 왔다고 한다.
이 부부는 재작년부터 논농사를 시작했고 작년부터 밭농사를 시작했다. 가족들 먹고 조금 나눌 정도로 작게 하고 있다. 밭은 1200평 정도 인데 4가구가 나눠서 부치고 있는데 자급하려다보니 종류별로 조급씩 많이 심어 거두어 마무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이것저것 농사짓는 다는 게 요즘 이야기고 첫해엔 갈무리한 먹거리가 없어 그야말로 보리고개도 처음 맛봤다고도 했다. 첫해에 보리 고개를 맛보고 그 다음해부터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10월부터 매일 갈무리하고 저장하고 나물말리고 무말랭이하고 김장도 많이 하고 해서 금년도는 문제가 없다고 자신 만만해한다.
그런데 여기가 워낙 산골이라 모든 도시문명을 될 수 있는 대로 없애거나 줄였다고 한다. 인터넷은 물론 TV 및 전화도 집집이 없다. 그래서 5명 쯤 되는 애들 먹거리가 제일 문제다. 할 수 없이 시장을 보면 꼭 애들한테 필요한 멸치와 미역 등 어물만 따로 산다고 한다.
▲ 다른 집들에서 조금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나무들에 가려서 안보이던 정상평씨의 집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공동 축사도 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벽오마을의 기틀을 닦은 사람이 정상평씨인가 보다. 그의 9살 난 아들이 길게 땋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나와 반긴다. |
이렇게 도시문명과 등을 지고 철저히 자립이 가능할까? 이들은 마치 앞으로 필연적으로 닥칠지도 모를 식량폭동(우리의 20% 정도의 식량 자급률로 보면 이러한 위기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의 위기에 대비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진홍씨 집에서 담소를 끝내고 그의 안내로 촌장인 정상평씨 집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정상평씨는 오늘 우리가 여길 도착했을 때 서정홍시인과 같이 어떤 모임이 있어 급히 출타해 버려 없었다. 그의 9살 난 아들 구륜이가 먼저 마중을 나왔다. 사람이 그립던 구륜이는 우리 일행 중 젊은 처자들만을 데리고 앞서 가버렸다. 소구경도 시켜주고 이것저것 안내하느라 오랜만에 신이 났다.
나이 든 측들은 뒤쳐 저 이진홍씨가 마을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촌장 집에 가는 도중에 짓고 있는 마을 회관도 구경했다. 원래 정상평씨가 살던 집으로 그의 가족이 지금 집으로 새로 짓고 옮기고 여기는 리모델링해 마을 회관 겸 '강아지 똥 학교'를 열 작정이라고 한다. 철저히 마을 공동체를 준비 중이다.
▲ 차도 과자도 직접 키우고 만든 것들이란다. 어지간하면 어느 하나 사먹는게 없다. 손님들이 아이들 선물이라고 과자를 사오면 안 줄 수도 없고 처치가 난감하단다. |
우리들은 귀농하여 농사짓는 두 여인에게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요즘 농한기라 좀 덜 바쁜지를 인사차 물었다. 두 여인은 요즘 농한기라 마음이 편하고 못 읽었던 책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 왔을 땐 농한기에도 벽돌 찍어 직접 집을 짓느라고 쉴 틈이 없었단다.
원래 수녀로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전력에 대해서는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잠깐씩 들어 본 걸로는 정말로 제대로 된 농사를 짓고 싶어 수녀생활을 접고 귀농한 모양이다. 아마도 생명의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세상과 영성(靈性)을 알고 싶었을 거라 짐작된다.
여자끼리 귀농하여 농사를 짓는 게 소문이 나 2~30대 젊은 여성분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두 분이 인상이 참 좋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분은 세상의 물리를 터득한 인디언 추장 같으시고 젊은 측은 용감한 인디언 전사 같으시다.
그들은 농사를 한참 배우고 있다고 했다. 마치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호미질 괭이질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땅과 친해지고 싶으니까.' 그녀들이 땅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원래 대지의 신이었던 여성들이 땅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여성들만의 귀농이 진정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 이 기계로 황토벽돌을 하나하나 찍어내고 말려서 집을 지으면 1년이 걸린단다. 초기에는 농한기 때도 집 짓느라고 쉴 수가 없었는데, 이젠 여유가 생겨 여행도 가고 책도 본다며 웃는다. |
그는 집 앞에서 우리에게 그들이 만든 조청과 한방 차를 선물했다. 우리는 답례로 여기서 농사 지을 수 없는 멸치, 김 등 해산물을 보내주마 약속하고 이 귀농인들의 산마을을 떠났다.
외진 산비탈에 있는 남의 문중 땅을 겨우 개간해 네 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삶을 의탁했다. 농사로 지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자급을 하겠다는 그들은 모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모험이 성공할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의지와 열정을 보는 순간, 그러한 우려와 의구심은 어느새 없어졌다. 그들은 모험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을 땅과 자연에 귀의시킨 것이리라.
▲ 벽오마을을 내려간다. 산 속에 4가구뿐이지만 개간할 땅이 없어 더 이상 이 곳에 새 이웃을 받을 여력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자급자족을 꿈꾸는 아주 작은 마을 공동체들이 곳곳에 생겨나면 어떨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
우리는 어제 약속한 '콩사랑'의 김성환사장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의 공장은 합천과 산청군의 경계에 있었다. 그는 원래 큰 장류공장의 공장장으로 있다 지금의 이 공장으로 독립했다고 한다. 그의 공장으로 안내되어 그의 과학적 '메주와 청국장, 간장, 된장만들기' 강의를 들었다. 그는 모든 장류를 온도, 습도 등을 과학적으로 빈틈없이 맞추어 관리하고 있었다. 들어 보니 그럴 듯 했다.
▲ 콩살림 공장에서 콩에서부터 온갖 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고르게 하얀 곰팡이가 핀 콩들을 그냥 집어 먹어봐도 맛있다. 맛있는 메주에서 맛있는 장이 나온단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 다퉈 된장을 사고 간장까지 덤으로 얻어 기쁜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
그의 강의가 끝나자 우리는 저도 모르게 된장을 한 통씩 샀다. 그는 거기에 자기의 자부심을 걸고 있는 콩사랑 간장을 한 병 씩 덤으로 얹어 줬다. 된장찌개가 나의 특기라 나는 좋은 된장만 얻으면 부자가 된 느낌이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모처럼 집에서 칭찬 받겠다'는 덕담을 남기고 그와 헤어졌다.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http://cafe.naver.com/yemane)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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