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
1575(선조 8)∼1641(인조 19). 조선 제15대 왕.
재위 1608∼162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恭嬪金氏)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 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진(臨海君珒)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인륜을 저버리고 난포하다고 하여 보류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 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 등 분조 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어 있는 곳)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 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다. 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해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 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였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한 후,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이듬 해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허위 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또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 해 살해하였다.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 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 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으로 빚어진 일이었다.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다.
선조 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였다. 후금의 강성에 대한 대비책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해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 : 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노력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 때 나왔다. 외래 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그의 재위 15년간은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이 일으킨 인조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또한 인재 기용에도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묘호는 광해지군묘(光海之君墓)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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