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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호일보)분당 중앙공원의 충신과 청백리-한산 이씨(韓山 李氏)

장안봉(微山) 2012. 12. 22. 10:46

 

분당 중앙공원의 충신과 청백리-한산 이씨(韓山 李氏)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07월 06일 (월) 15:33:16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남한산성은 성곽 자체로도 완벽한 호국의 성지지만, 산성을 둘러싼 주변 마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오늘의 번성한 시대를 이뤘다. 산성 주변의 성남, 하남, 광주 일대와 서울의 한강 남쪽 일대는 조선시대에 대규모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된 강무(講武)와 국왕의 수렵(狩獵)이 빈번하게 열린 지역이다. 성남의 창곡동이나 하남의 상사창, 하사창, 창우리 등의 지명이 남한산성에서 필요한 물자의 창고가 있었던 사연이 있고, 공군비행장(서울공항)이 있는 지역은 군용 농장인 둔전(屯田)과 탄천목장이 있었다. 그리고 탄천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13만의 대군이 주둔해 조선정부를 압박했고, 탄천 상류 험천에서는 충청감사 정세규가 근왕병을 이끌고 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분당 중앙공원 일대는 한산 이씨 집성촌

분당의 중앙공원 일대는 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돼 있었으며, 250년 이상의 나이테를 가진 느티나무 보호수(지정번호 : 경기성남-10)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 준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수내동가옥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민가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70호 가량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중 한산 이씨는 30호 가량 됐다. 공원 내에는 지석묘(고인돌)군과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 연못, 정자 터, 한산 이씨의 산소들이 잘 보존돼 있다.

고인돌(지석묘)군은 중앙공원 안에 있는데, 분당을 개발하기 전 1989년과 1990년에 이루어진 문화재 조사를 통해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로 추정되는 171기 가운데 대표적인 10기를 이전해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전된 10기는 분당동 지석묘군의 2기, 야탑동 지석묘군의 5기, 도촌동 지석묘군의 3기 등이다. 이들 고인돌은 한국 지석묘의 전체 맥락을 연구하는 데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유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한산 이씨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인데, <토정비결(土亭秘訣)>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그의 조부인 이장윤의 묘역을 이곳에 정한 이후로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까지 오랜 기간 동안 약 26명의 인물 묘역이 조성됐기 때문에 묘제 및 석물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의미있는 곳이다.

이장윤(李長潤, 1455~1528)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어질며 겸손하고 후덕해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불쌍히 여기는 일에 힘썼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체로 관리가 된 자는 그 아랫사람이 죄가 있을 때 그대로 두고 생각하면 내 노여움이 풀리는 것이니 갑자기 사람을 상하게 하는 조짐이 없게 해야 한다.”하니 사람들이 격언(格言)이라고 했다. 손자 지함(之涵)은 세상에서 토정선생이라 일컬었고, 증손은 영의정 산해(山海)요, 이조판서 산보(山甫)다.

이 질(李秩, 1473~1560)은 장윤의 첫째 아들로서 상주·울진 등 7개 군의 군수를 역임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80세가 넘었음에도 뜻과 지혜가 명민(明敏)했으며, 필력(筆力)은 건강했지만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다. 중앙공원의 <봉화공 삼세이하 유사비>에 “제사를 지낼 때면 가난해서 제사를 잘 차리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자손이 영화롭게 되면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증(李增, 1525~1600)은 이질의 손자며, 1580년 예조참판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예조, 형조, 공조 판서와 의정부의 좌우참찬을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전쟁에 대비하기를 주장했다. 세상을 떠난 뒤 영의정에 추증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부조묘(不?廟)’ 사당이 건립됐고, 문집으로는 <북애시고(北崖詩稿)>가 있다. 묘표의 이수는 쌍룡이 연꽃 속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양각했으며, 작은 원 안에 태극문을 새겨놓았다.

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평난공신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전투에 참전해 상주 북쪽 증연(甑淵)에서 전사했다. 왜적이 크게 집결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2년 후 선조임금이 도원수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묻기를, “이경류가 그대의 동생인가?”하니, 경함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해 내가 매우 애도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구나. 누구의 종사였으며 어디서 죽었는가?”하니, 경함이 아뢰기를, “변기(邊璣)의 종사관이었고, 영남에서 전사했습니다.”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윤섬과 박지도 모두 그때 죽었다. 그들은 평일 시종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을 금할 길 없다.”했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정조 16년(1792) 12월 14일 상주 유학 맹진태(孟鎭泰) 등이 상소하기를, “옛날 섬 오랑캐들이 창궐하던 때 윤섬, 이경류, 박지가 함께 순변사 이일(李鎰)의 막하에 있으면서 전쟁에 참가했는데, 상주의 증연에 이르렀을 때 적들이 나타나자 이일은 도망쳐 버리고 세 신하가 맨주먹을 들어 힘껏 치다가 힘이 다해 적을 꾸짖으며 죽어갔습니다. 그리해서 당시 사람들이 그 땅을 이름해 학사담(學士潭)이라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향집에서는 이경류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그가 전사한 것을 알게 됐다. 말은 상주에서 성남까지 500리 길을 달려와 주인의 소식을 전한 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경류는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됐고,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됐다. 1727년(영조 3) 정려비가 세워졌고, 이경류 묘역 아래에는 충직한 말의 무덤이 있다.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 1688~1733)의 자는 유안(幼安). 진사 협(浹)의 아들이다. 언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여 영조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내려 주기도 했다. 1727년(영조 3)에 호조참의로 있을 때, 탕평책(蕩平策)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려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는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1730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해 그해 6월 특별히 그 직은 파해 주었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됐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므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됐다. 합천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제향했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으니 정조 20년 청백리에 녹선됐다. 몹시 가난해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었고, 임종한 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고 했다. 청렴결백함이 뛰어나 숙수(菽水=콩과 물, 변변하지 못한 음식)를 이어대지 못했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殮)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故) 감사 한 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보살펴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고 증직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했다.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수원(洪?元·1611~163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다 중국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 한편 묘소와는 별도로 그의 묘표가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아버지 홍익한의 묘석과 함께 보존돼 있는데, 묘표가 이렇게 평택시에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1683년 4월 23일 숙종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예조판서 남이성(南二星)이 말하기를, “(병자호란 때)강화도가 함몰될 때에 홍익한의 후처인 허씨는 적을 만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처의 아들 홍수원은 팔을 벌려 허씨를 가리다가 칼에 찔려서 죽고, 허씨는 마침내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홍수원의 처 이씨도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었습니다. 이 일은 송시열이 지은 홍익한의 묘문(墓文)에 상세히 적혀 있으니, 그 말이 어찌 믿을 만 하고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영의정 김수항이 말하기를, “홍익한은 몸소 대의를 부지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충효와 의열이 모두 한 집에 모였으니, 특별히 숭상할 만 합니다.”하니, 임금이 아울러 세 사람을 정문(旌門)하도록 명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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