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중앙공원의 충신과 청백리-한산 이씨(韓山 李氏)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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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성곽 자체로도 완벽한 호국의 성지지만, 산성을 둘러싼 주변 마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오늘의 번성한 시대를 이뤘다. 산성 주변의 성남, 하남, 광주 일대와 서울의 한강 남쪽 일대는 조선시대에 대규모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된 강무(講武)와 국왕의 수렵(狩獵)이 빈번하게 열린 지역이다. 성남의 창곡동이나 하남의 상사창, 하사창, 창우리 등의 지명이 남한산성에서 필요한 물자의 창고가 있었던 사연이 있고, 공군비행장(서울공항)이 있는 지역은 군용 농장인 둔전(屯田)과 탄천목장이 있었다. 그리고 탄천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13만의 대군이 주둔해 조선정부를 압박했고, 탄천 상류 험천에서는 충청감사 정세규가 근왕병을 이끌고 와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 분당 중앙공원 일대는 한산 이씨 집성촌 분당의 중앙공원 일대는 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의 집성촌이 형성돼 있었으며, 250년 이상의 나이테를 가진 느티나무 보호수(지정번호 : 경기성남-10)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웅변해 준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수내동가옥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민가의 살림집 가운데 하나다. 원래는 70호 가량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 중 한산 이씨는 30호 가량 됐다. 공원 내에는 지석묘(고인돌)군과 마을 어귀에 있던 큰 느티나무, 연못, 정자 터, 한산 이씨의 산소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장윤(李長潤, 1455~1528)은 봉화현감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증직됐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어질며 겸손하고 후덕해 평생에 말을 빨리 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불쌍히 여기는 일에 힘썼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체로 관리가 된 자는 그 아랫사람이 죄가 있을 때 그대로 두고 생각하면 내 노여움이 풀리는 것이니 갑자기 사람을 상하게 하는 조짐이 없게 해야 한다.”하니 사람들이 격언(格言)이라고 했다. 손자 지함(之涵)은 세상에서 토정선생이라 일컬었고, 증손은 영의정 산해(山海)요, 이조판서 산보(山甫)다. 이 질(李秩, 1473~1560)은 장윤의 첫째 아들로서 상주·울진 등 7개 군의 군수를 역임해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80세가 넘었음에도 뜻과 지혜가 명민(明敏)했으며, 필력(筆力)은 건강했지만 경제적 형편은 어려웠다. 중앙공원의 <봉화공 삼세이하 유사비>에 “제사를 지낼 때면 가난해서 제사를 잘 차리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자손이 영화롭게 되면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경류(李慶流, 1564~1592)는 평난공신 이증(李增)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전투에 참전해 상주 북쪽 증연(甑淵)에서 전사했다. 왜적이 크게 집결해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2년 후 선조임금이 도원수의 종사관 이경함에게 묻기를, “이경류가 그대의 동생인가?”하니, 경함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싸움터에서 죽었다고 해 내가 매우 애도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구나. 누구의 종사였으며 어디서 죽었는가?”하니, 경함이 아뢰기를, “변기(邊璣)의 종사관이었고, 영남에서 전사했습니다.”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윤섬과 박지도 모두 그때 죽었다. 그들은 평일 시종하던 신하들이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을 금할 길 없다.”했다. 특히 윤섬, 박지, 이경류 ‘3종사(從事)’는 문관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경류는 형을 대신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청백리 이병태(李秉泰 ; 1688~1733)의 자는 유안(幼安). 진사 협(浹)의 아들이다. 언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여 영조임금이 호랑이 가죽을 내려 주기도 했다. 1727년(영조 3)에 호조참의로 있을 때, 탕평책(蕩平策)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려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는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아 1730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해 그해 6월 특별히 그 직은 파해 주었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됐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므로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됐다. 합천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제향했다.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떠나서나 항상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으니 정조 20년 청백리에 녹선됐다. 몹시 가난해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었고, 임종한 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고 했다. 청렴결백함이 뛰어나 숙수(菽水=콩과 물, 변변하지 못한 음식)를 이어대지 못했는데도 그의 지조는 변하지 않았다. 영의정 심수현(沈壽賢)이 “살아서는 청백(淸白)한 지조가 있었고 죽어서는 시체를 염(殮)할 기구가 없었으며, 또 늙은 어미가 굶주림을 면치 못한다.”고 아뢰어, 고(故) 감사 한 지(韓祉)의 전례에 따라 그 어미를 보살펴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고 증직하며 장례를 치르게 하라 명했다.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내렸다. 홍수원(洪?元·1611~163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창하다 중국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1586~1637)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홍수원의 묘역이 한산 이씨 묘역에 있는 것은 부인이 이확의 딸인 것에 기인한다. 한편 묘소와는 별도로 그의 묘표가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아버지 홍익한의 묘석과 함께 보존돼 있는데, 묘표가 이렇게 평택시에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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