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교,서원)

[스크랩] 예천군 개포면 옥동서원

장안봉(微山) 2012. 12. 18. 12:59

 

 

 예천군 개포면  옥동서원

 

 

 

 

 

 

 

 

 

 

 

 

 

 

 

 

 

 

 

 

 

명 칭 :  옥동서원(玉洞書院)
소 재 지 :  개포면 이사리 235-1
(원소재지 :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검암’마을)
건축시기 :  1702년
이건시기 :  1993년
훼철시기 :  1868년

건축 이야기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원생?진사 등이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이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이 있다. 이러한 서원 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도참사상에 따라 수세(水勢)?산세(山勢)?야세(野勢)를 보아 합당한 위치를 택하여 지었다.
건물의 배치 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른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를 놓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재?서재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 구역 밖 한옆으로 배치한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 배경
옥동서원(玉洞書院)은 개포면 이사리에 있다. 서원은 1702년 개포면 경진리 ‘검암마을’에 건립되었는데, 1868년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3년에 옮겨 지은 것으로 신달정(辛達廷), 정언굉(鄭彦宏, 1569~1640), 김곤(1596~1678)을 배향하고 있다.

건축 구성
서원은 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옥동사(玉洞社)가 있고, 강당 뒤에는 내삼문(內三門)과 사당인 효의사(孝義祠)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평면은 전면에 툇간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내력과 기능

관련이야기
- 옥동서원
옥동서원(玉洞書院)은 개포면 이사리에 있다. 개포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의 하나로 예천군의 남서부에 위치하는데, 1914년 용궁군 북상면과 예천군 개포면이 통합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지역은 218m인 숭두산이 가장 높을 정도로 산지가 없고 거의 구릉지다.

개포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예천읍과 호명면, 서쪽으로는 용궁면과 문경군 산북면, 남쪽으로는 지보면, 북쪽으로는 유천면과 접하고 있다. 이사리는 개포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직선상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개포면 지역으로, 큰 절이 있었으므로 ‘이시릿골’ 또는 ‘이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이사리’라 하였다. 이사리는 ‘작은이사리’, ‘안골’, ‘음지마’, ‘큰이사리’, ‘절골’, ‘참샘이’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졌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참샘이마을’이다. 참샘이는 ‘한천’이라고도 한다. 열두이사리의 가장 끝 마을이며, 마을 앞에 수량이 많고 참물이 용솟음치는 샘이 있어 ‘참샘이’이라 하였다고 한다.



관련문서
- 관련 전적
정언굉 - 『답문록(答問錄)』

관련인물

관련인물
- 정언굉
정언굉(鄭彦宏, 1569~1640)은 개포면 금리 지골(池洞) 사람으로, 본관은 동래(東萊)다. 자는 여곽(汝廓)이고, 호는 서계(西溪)요, 정옹(鄭雍)의 현손자로 정구(鄭逑)의 제자다.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용문 사람 이휘음, 전이성과 함께 급제하였다. 1609년에 봉상시봉사, 1610년에 성균관학정을 거쳐『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성환동찰방, 호조좌랑, 금교도찰방을 거쳤는데, 광해군의 정치 문란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숨어 살았다. 인조반정 후 1623년에 고성군수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이괄의 난(1624) 때 왕이 충청도 공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문경새재에 이르렀으나,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시켰다.
그 후 군자감첨정이 되었다 1625년에 청송부사로 나가 정치를 잘했고, 다시 서울로 가서 여러 벼슬을 거쳐 종삼품인 승문원판교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병자호란(1636년) 때 벼슬을 버리고 개포면 지골로 와서 옥산정(玉山亭)을 지었다. 경학, 역사, 제자백가 등의 책을 두루 깊이 읽어 연구하고,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날리며 여생을 보냈다. 성격이 어질고, 후덕하며, 덕성스럽고, 청렴결백하고, 곧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께 대한 효도,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가 독실하였다.

정언굉은 평소 후진을 양성할 때 “늘 마음을 바르게 가져라. 물욕으로 중심을 잃으면, 소인의 동아리에 떨어진다”고 했다. 또 자손을 훈계할 때, “너의 잘못을 꾸짖는 이는 너의 스승이요, 너를 칭찬하는 이는 너를 치는 칼날을 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답문록(答問錄)』과 문집이 있고, 개포면 경진리 검암(劍岩) 동리의 옥동리사(玉洞里社)에 제향되었다. 정언굉이 12세 때, 고을 원이 동헌 뜰 앞이 대나무를 소재로 시를 지으라 하니 이르기를, “맑음은 어진 이의 덕이요, 곧기는 선비의 절개로다. 키우기 힘들다 마라. 의젓한 그 모습이 대견하구나”라고 하였다.
- 김곤
김곤(金?, 1596~1678) 은 개포면 경진리 검바우(劍岩) 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예안이다. 자는 자진(子珍)이요, 호는 검암(劍岩)이고, 김득선(金得善)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에 생원이 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다.

이때 성균관 학생이 모두 당황하여 피난하기에 정신이 없었으나 6촌 동생 김강등과 함께 성균관의 다섯 성인의 위판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왕을 따라 피신하여 개원사에 봉안하였다. 1648년(인조 26)에 식년 문과에, 예천 사람 남천택, 남지망과 함께 급제하였다. 그리고 벼슬이 현감, 제용감주부,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헌부감찰에 올랐다. 그러나 80세가 넘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6년 성균관 전적으로 다시 불림을 받았으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벼슬에 나아가기를 굳이 원하므로, 서울로 가서 공조와 병조의 좌랑이 되었다. 얼마 후 다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섬김에 정성을 다해 이웃에서 김곤의 효성과 우애에 탄복하였다.

그 후 80세에 수직(壽職)으로 정삼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1677년에 첨지중추부사의 자격을 받았으나 이듬해 타계하였다. 무덤은 유천면 손기리 손골(蓀洞)에 있고, 개포 검바우의 옥동리사에 제향되었다. 옥동리사는 김곤, 신달정, 정언굉을 제향한 사당인데, 1868년 대원군이 철폐할 때 그 위패와 이름을 쓴 사발을 묻은 분봉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김곤은 성격이 외유내강하여 조금도 오만하지 않고,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평생 남의 허물을 감싸고 남을 도우며 사치를 몰랐다. 또 성품이 대쪽 같아 옳고 그름의 판단이 한 칼로 치듯 분명하였다. 김곤은 부지런하여 성리학에 능통하여 문집을 남겼다. 임종에 앞서 시로써 말하기를, “오십이 넘어 과거하여 공이 없는데, 충효를 다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노니, 자손들은 내 뜻을 따라, 허물없이 살아가라”고 하였다.

마을이야기

예천 > 내성천북부권 > 이사리
- 이사리.
이사리는 개포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직선상 2.5㎞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 개포면의 지역으로, 큰 절이 있었으므로 ‘이시릿골’ 또는 ‘이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이사리’라 하였다. 이사리는 ‘작은이사리’, ‘안골’, ‘음지마’, ‘큰이사리’, ‘절골’, ‘참샘이’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원이 위치한 곳은 ‘참샘이’마을이다.

참샘이는 ‘한천(寒泉)’이라고도 불린다. 열두이사리의 가장 끝 마을이며, 마을 앞에 수량이 많고 참물이 용솟음치는 샘이 있어 ‘참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작은이사리는 큰 이사리에서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생긴 마을로, 여러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어 ‘열두이사리’라고 한다.
안골은 ‘내동(內洞)’이라고도 불린다. ‘열두이사리’의 마을 중 하나로, 골짜기 안쪽에 있다.

음지마는 ‘음지촌(陰地村)’이라고도 불린다. ‘열두이사리’의 마을 중 하나로, .마을이 북향이고, 옛터 응달 쪽에 있다.
큰이사리는 ‘옛터’ 또는 ‘고기(古基)’라고도 불리는데, ‘열두이사리’에서 마을 중 으뜸이다. 영월신씨의 집성촌으로 가장 먼저 이 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본래는 옛 절터였다고 한다.

절골은 ‘사곡(寺谷)’ 또는 ‘사동(寺洞)’이라고도 불린다. 고려때 서악사(西岳寺)라는 절이 있었던 터에 생긴 마을로, 영월신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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