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서원(東山書院)
|
동천서당(동산서원)
백불암 최흥원 고택 |
|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배향인물: 최흥원(崔興遠) ❏창건연도: 1820년(순조 20) ❏향 사 일: |
연 혁
동산서원은 백불암 최흥원(百弗庵 崔興遠)의 생시(生時)에 대구부 부인동(夫仁洞)에 농연서당(聾淵書堂), 대구부 해안현(解顔縣) 칠계(漆溪)에 북계서당(北溪書堂)을 세워 문인들의 교육장소로 운영하다가 선생의 서세(逝世)후 북계서당을 동산사(東山祠)로 변경하여 선생을 배향하여 오다가 영남사림(嶺南士林)의 서원 건립에 대한 중론을 모아 선생의 향리(鄕里)인 칠계마을(현 대구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1818년부터 2년간 서원 정당 및 묘우(廟宇)등 제반 건물을 건립하여 1820년 서원을 창건하여 동산서원(東山書院)이라 개칭하여 선생을 단독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하다가 서원 옛터를 정비완료하고 복원 준비를 하고 있다. 동산서원 호기(號記)는 경의당(敬義堂), 진덕문(進德門), 본립재(本立齋), 지급재(知及齋), 가행재(可行齋), 인수재(仁守齋)이다.
배향인물
1)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조선 영조, 정조시의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백불암(百弗庵) 또는 수구암(數咎庵)이며 私諡(유림에서 諡號를 드림) 문정(文正)이다. 봉림대군(후에 孝宗)의 사부(師傅)인 최동집의 5대손이며 현감을 지낸 최수학의 장손이다. 관직은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禦侮將軍世子翊衛司翊贊이며 당세의 유림사표(儒林師表)이었으며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받으며 문하에 120여명의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정조임금이 세자를 책봉하며 전국에 널리 선생을 초빙할 때 가히 나라를 다스릴 경술지사라하여 도백(道伯)의 추천을 받아 세자좌익찬(世子左翊贊)이 되었고 실학에 심취하여 성호 이익선생과 교류하며 그 스승 반계 유형원선생의 반계수록을 교정할 때 나라에서 이 책의 교정을 볼 사람은 백불암선생 밖에 없다고 하여 이를 맡아 교정하여 널리 반포하였으며, 아울러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코자 사재(私財)를 내고 동민들과 뜻을 모아 부인동향약(夫仁洞鄕約)을 제정하여 세금을 내어주는 공전고(公田庫), 불우한 백성을 구제하는 휼빈고(恤貧庫)를 세워 향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정조임금의 큰 칭송의 전교를 받았다. 생시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나라를 경영할 정도의 경륜으로 대효(大孝)라 칭송받으며 사후(死後) 나라에서 정조(正祖)임금이 소수 홍패를 만들어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고을에서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15권 7책이 간행되어 있고 53년간의 일기책이있다.
참고(사진포함)-경주최씨옻골종가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okgol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백불암 최흥원 : 배운 바를 실천한 선비?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한 선비?
정진영(안동대학교 사학과)
<간략소개>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은 팔공산 아래 옻골에서 그 자신뿐만 아니라 5대 할아버지적부터 산 대구의 토박이이다. 최씨 가문이 대구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중반부터였으니 5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최흥원은 홀로 열심히 공부하여 대구는 물론이고 영남을 대표하는 큰 학자가 되었고, 조정에도 그 명성이 알려졌다. 최흥원의 학문은 입과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효도를 지극히 하였고, 밖으로는 부인동에서 향약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정조 임금은 벼슬을 거듭 내려 최흥원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최흥원은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죽은 후에는 효행의 표창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의 벼슬이 내려졌다. 또한 후대의 사람들은 최흥원을 ‘대효(大孝)’를 실천하였다거나, ‘경제(經濟)의 대강(大綱)을 얻은 선비’로 높이 평가하였다.
백불암, 스스로를 낮추다.
최흥원은 1705년(숙종 31)에 태어나서 1786년(정조 10)에 세상을 마쳤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대구를 떠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대구 토박이다. 조선시대의 대구는 경상도의 감영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 경상도를 흔히들 영남이라고도 하였다. 영남에는 선비와 학자가 많기로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최흥원이 평생을 보낸 옻골은 오늘날 대구의 동구 둔산동에 속한 조그만 마을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칠계가 된다. 모두 옻나무가 무성한 골이라는 뜻이다. 최씨들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게 된 것은 최흥원의 5대 할아버지 적부터였는데, 그 때는 아마 옻나무가 무성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옻골에는 옻나무는 없지만, ‘백불고택(百弗古宅)’이라는 집 이름이 붙은 옛 집에 최흥원의 후손들이 무성히 살고 있다.
옛날에는 어른이나 훌륭한 분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학문이 높은 선비나 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름 대신에 호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최흥원은 호를 백불암(百弗庵)이라고 하였다. 백불암이란 ‘백부지 백불능(百弗知百弗能)’에서 따온 말이니, 곧 아는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스스로를 낮춘 이름이다. 그래서 그 당시 또는 후대의 사람들은 ‘백불암 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이란 학문이 아주 높은 분을 존경하고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붙이는 존칭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도 최흥원이라는 이름 대신에 ‘백불암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불특정한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글은 직접 대면해서 주고받는 말과는 달리 객관적인 사실 관계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다. 평가는 가능한 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최흥원 혹은 백불암이라고만 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가 그냥 ‘최흥원’이라고만 부르겠는가?
가문의 역사
최흥원의 아버지는 통덕랑 석정(鼎錫)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이다. 1705년에 외가인 대구 원북(院北)에서 그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수학(壽學)은 무과 출신으로 사헌부 감찰을 거쳐 광양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전라도 운봉에 귀양 가서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고조할아버지 위남(衛南)은 생원이고, 증조할아버지 경함(慶涵)은 선교랑이었다. 모두 대대로 대구의 옻골에서 살았다.
옻골의 최씨 본관은 경주이고, 광정공파에 속한다. 경주 최씨 광정공파가 대구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백불암의 11대 할아버지인 맹연(孟淵)으로부터 시작한다. 맹연은 16세기 초반에 평안도에 있는 맹산현에서 현감을 지냈다. 그러다가 늘그막에 벼슬을 버리고 대구로 옮겨왔으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 년 전이 된다. 이후 그의 후손은 지묘동, 도동, 옻골 등지에 터를 잡아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최흥원의 먼 할아버지가 대구로 옮겨오기 이전에는 강화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513년 맹연의 한 아들이 과거에 합격했을 때 그 거주지를 강화도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불암의 11대 할아버지가 어떠한 인연으로 대구에 거주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대구는 그 할아버지의 처가나 외가와 인연이 있는 곳이었을지 모른다. 이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대부분 처가나 외가를 따라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처가로 옮겨 처가살이를 하였다. 따라서 그 아들딸들 또한 외가에서 자라 어른이 되어 벼슬살이로 나갔다가 다시 외가로 돌아오거나 또 그들의 처가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아무튼 맹연의 후손들은 대대로 대구에서 살면서 꾸준히 벼슬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최흥원의 6대조인 최계(崔誡 : 1567-1622)는 호를 태동(台洞)이라 하였는데 무과출신이었다. 최계는 임진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였던 김성일(金誠一)로부터 대구의 임시 의병장에 임명되어 왜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선무2등공신(宣武2等功臣)에 봉해지고 곧이어 만경현령이 되었다. 그는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얻었으나 3년 만에 갈리고 말았다. 이것은 아마 그가 문과가 아닌 무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부분의 지방 수령들은 문과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무과출신을 조금 낮추어 보았던 것이다. 무과 출신이 그것도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얻으니 더욱 소외되고 배척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계는 벼슬에서 물러나자마자 고향에 돌아와 서당을 열어 집안의 분위기를 무(武)에서 문(文)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자제들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기금도 마련하고, 많은 책도 구입하였다.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그의 아들들은 당시 대학자였던 정구(鄭逑 : 호 한강)의 제자가 되었고, 마침내 문과의 예비시험에 해당하는 생원과 진사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무튼 백불암의 6대 할아버지는 임란 의병 활동과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그 후손들의 성장과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5대 할아버지인 최동집(崔東集 : 1586-1661)은 최계의 둘째 아들로 호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는데, 30대의 초반에 처음으로 옻골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옻골의 한자식 표기는 칠계가 된다. 모두 옻나무 골이라는 의미이다. 아마 백불암의 5대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는 옻나무가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을 것이다. 최동집은 당시 대학자였던 정구 선생에게 배웠고, 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봉림대군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가는 마당이었으니 시간이 급박했다. 일정을 맞추기엔 백불암의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서 도중에 교체되고 말았다. 백불암의 5대 할아버지는 무척 실망하였다. 더욱이 곧이어 명나라가 망하자 세상의 일에 뜻을 접고 그만 팔공산 아래의 부인동에 들어가 농연정(聾淵亭)을 지어 은거생활을 하였다. 은거란 다만 정치나 나라 일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세월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최동집은 농연정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부인동의 동민들과 함께 약속하여 서로 도우며 풍속을 변화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하였다. 백불암이 훗날 이곳에서 향약을 실시하였던 것은 5대 할아버지의 이러한 유업을 계승한 것이었다.
홀로 깨우쳐 이름을 얻다.
최흥원은 18세에 생원초시에 합격하였다. 생원초시라는 것은 과거시험의 한 과정이다. 조선시대에는 벼슬길에 나아기기 위해서는 대부분 대과라고 불리는 문과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생원초시는 말하자면 문과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기초단계의 시험인 셈이다. 초시에 합격하였으니 이제 생원 본시험을 거쳐 생원이 되고, 그리고 대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나아가리라 모두들 기대하는 바가 컷을 것이다. 그러나 최흥원은 25세가 되던 해에 그만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말았다. 과거보기를 그만 둔다는 것은 벼슬길을 포기하는 것이니, 당시로서는 아주 어려운 선택이었다. 과거급제와 벼슬에 나아감은 조선시대 모든 양반들의 최고의 희망이고 목표였다.
최흥원이 과거보기를 그만 두었다는 것은 공부를 그만 두었다는 말은 아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를 위한 시험공부는 진짜 공부와는 많이 달랐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정답을 외우고 형식에 맞추어야 했으니 그것이 진정한 공부가 아님은 분명하였다. 정답을 잘 맞추고 형식에 딱 맞게 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제도로는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없다는 비판도 일찍부터 터져 나왔다. 더욱이 과거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여러 형태의 부정행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하였고, 특정 지역과 당파는 아예 능력과 관계없이 불합격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제도를 개혁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최흥원은 과거공부는 더 이상 진정한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답 외우기의 형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올바르게 생각하고, 나아가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진짜 공부에 몰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흥원은 홀로 배우고 깨우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는 그를 이끌어 줄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에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심나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남에게 물어서 해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혼자서 깊이 궁리하고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백불암의 학문을 더욱 깊이 있고 실천 가능하게 하였던 원동력이었다. 말하자면 불리한 환경을 독실한 공부로 극복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듯 최흥원은 요즈음의 학력과 경력으로 본다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선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는 훗날 학문적으로 이름이 높아 ‘영남삼로(嶺南三老)’로 크게 존경 받았다. 영남은 오늘날의 경상 남북도를 아우르는 이름이고, 선비와 학자가 많기로 나라에서도 으뜸이었다. ‘삼로’ 곧 영남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던 세 사람은 최흥원과 함께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 1710-1781), 남야 박손경(南野 朴孫慶 : 1713-1782)이다. 이들은 당시 영남의 선비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대구와 안동, 그리고 예천에 거주하였지만, 서로 오가면서 혹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고, 자제들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최흥원의 명망은 경상도에서만이 아니었다. 중앙의 조정에서도 일이 있을 때마다 최흥원을 천거하였다. 1782년(정조 6) 영의정 서명선은 정조 임금에게 학문이 높기로 이름난 영남에서도 가장 명망이 높은 최흥원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선비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고 건의하였고, 1784년(정조 8)에는 세자 책봉과 함께 왕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할 선비를 전국에서 물색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입을 모아 최흥원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정조 임금 또한 이러한 최흥원을 만나보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벼슬과 품계를 거듭 높이고, 경상감영에 특별히 명령하여 책을 인쇄하여 하사하기도 하였다. 최흥원이 받은 직책과 품계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경모궁 수봉관[종9품, 74세] -> 장릉참봉[종9품, 74세] -> 동몽교관[종9품, 75세] -> 장악원 주부[종6품, 78세] -> 공조 좌랑[정6품, 79세] -> 익위사 익찬[정6품, 80세] -> 통정대부[정3품, 82세] -> [사후] 효행 정려 -> 통정대부 증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벼슬을 받으면 당연히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한다. 그러나 최흥원은 한번도 나아가질 않았다. 이미 70이 넘은 나이였기도 하지만, 도리어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속여 잘못된 은혜를 입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입장이었다.
최흥원이 이렇게 주목받게 된 것은 그의 학문이 조선후기의 흔들리는 세상을 구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백불암의 학문적 특징은 입과 귀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배우고 익힌 것을 몸소 실천하는 실천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실천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름 아닌 효성과 향약 실시로 나타났다. 그래서 최흥원은 당시에 유행하던 이기설(理氣說)에만 매몰되어 있던 학자가 아니라 ‘경제지사(經濟之士)’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경제지사란 나라를 경영하고 민생을 구제할 수 있는 선비를 의미한다. 이것은 향촌의 이름 없는 선비가 한 말이 아니라 당대의 학자요 정치가였던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과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의 평가이다.
최흥원이 살았던 18세기는 한편에서는 양반중심의 사회 체제에 많은 병폐가 보다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 전면에서 새로운 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과도기였다. 따라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큰 개혁과 혁신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때일수록 체제의 안정은 더욱 절실하기 마련이었다. 개혁과 혁신이 백성들의 요구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의 주장이라면, 체제의 안정은 지배층에게 있어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자기 생존의 문제였다. 이러한 시기에 백불암에게 쏟아진 학문적 기대와 ‘경제지사’로서의 평가는 단순한 공치사가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시대가 그를 필요로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때는 최흥원이 이미 70을 넘기었으니 세상의 기대감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때문에 아쉬움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효행을 기려 정문이 내려졌고, 벼슬을 더욱 높여 승정원의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의 증직이 내려졌던 것이다.
스승과 벗, 그리고 제자들
최흥원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이름 난 스승을 두지 못하였다. 11세에는 고모부 이주숭(李柱崇)으로부터 중국의 역사인 19사(史)를 배웠고, 25세에는 서당에서 공부하였으나 영리만을 추구하는 공부에 실망하여 이듬해에 그만 두었다. 이후로는 스승이 없이 오직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그래서 공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서 다른 고을에 가서 공부하던 동생으로부터 소학 대학의 공부순서와 주자독서법(朱子讀書法)이라는 공부방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실학자로 이름이 높은 순암 안정복은 훗날 최흥원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스승 없이 학문을 이어, 초연히 홀로 깨우쳤네.”라고 노래하였다.
그러나 최흥원은 마음속으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나 회재 모두 영남의 대학자요 큰 스승이었다. 그래서 최흥원은 퇴계와 회재를 모신 서원인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 찾아가 참배하고, 안동에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많은 선비들과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특히 1740년(36세)에는 전라도 광양에 유배 중이던 김성탁(金聲鐸, 호 霽山)을 찾아갔으며, 1746년(42세)에는 평생의 친구가 된 이상정(李象靖, 호 大山)과 이광정(李光靖, 호 小山) 형제를 만났는데, 이들은 모두 퇴계의 학문을 계승한 안동의 큰 학자들이었다.
최흥원은 많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글들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백불암집>>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사귄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제자와 친척들을 제외하고도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은 40여 명이 된다. 벼슬에 나아가지도 않았고, 영남을 벗어나지도 않았으니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이들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실학자로 이름 높은 성호 이익(李瀷)과 정조 임금 당시에 오랫동안 재상의 지위에 있었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이다. 이들은 서울 근교의 남인들로서 당시 학문적 또는 정치적으로 영남 선비들의 후원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최흥원은 이들과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자제를 보내 문안하거나 편지를 보내는 정도였다. 이러한 인연을 통해 채제공은 후에 최흥원의 5대조 대암공의 유허비문을 직접 짓게 된다. 이 비는 오늘날 용수동 냇가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다.
최흥원과 편지를 가장 많이 주고받은 사람은 이상정과 이광정 형제였다. 이들과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있었다. 학문적으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사이였다. 특히 이상정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대학자로 당시 영남의 선비 사회를 이끌어 가는 입장에 있었다. 최흥원과 이상정은 서로간의 사귐뿐만 아니라 서로 자제들을 바꾸어 가르치고 있었다. 즉, 최흥원의 조카들은 이상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상정의 자제들은 최흥원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최흥원은 이상정의 부고를 접하고 크게 슬퍼하여 3개월간 흰옷을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이상정 역시 최흥원을 “가장 깊이 마음을 기우려 사귄 사람”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임해서도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편지를 많이 주고받은 사람은 조선적(조선적, 호 恥齋)이었고, 그와의 관계 또한 이상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외에도 최흥원과 교유하였던 인물은 모두 당대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었다. 그리고 동생 흥건(興建) 또한 그 어느 벗들 못지않은 학문의 동반자였다.
최흥원은 100여 명이 넘는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이들 제자들의 거주 지역은 경상도 전역에 걸쳐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안동이 특히 많으며, 대구와 경주, 칠곡, 단성, 밀양 등지의 출신들도 많았다. 경주 최씨의 통혼권이 영남의 유명 양반가문을 망라하듯이, 최흥원의 제자들의 범위도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학맥(學脈)과 혼맥(婚脈)이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흥원의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수양과 실천을 겸하다
젊은 시절 주위에서 가르침을 받을만한 스승조차도 가지지 못하고 홀로 깨우쳐야만 했던 최흥원이 어떻게 하여 무엇으로 영남을 대표하고 조선을 대표하는 큰 학자가 되었을까?
조선시대 양반들의 학문은 당연히 유학이고, 유학 가운데서도 주자의 성리학이었다. 다른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학문하는 선비들 모두가 유학자였다. 모두가 유학자라 하더라도 어떠한 류의 학자인가는 성취한 학문적 업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면 유학자로서 최흥원이 성취한 것은 무엇일까? 실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순암 안정복(//)은 백불암의 학문적 성취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통의 선비들은 천박하여 다만 입과 귀만 숭상하는데,
공은 근본을 돌이켜서, 오로지 실천에 힘을 쏟았네.”
유학자라고 불리던 보통 선비들의 학문이란 그저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기만할 뿐인데 최흥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안으로는 수양하고 밖으로는 배우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하는데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의 유학자들의 학문이 중국의 주자(朱子)나 퇴계 이황이 이룩하고 성취한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누가 얼마만큼 더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조선 특히 후기의 선비들은 관념적인 차원의 이해에만 급급할 뿐 수양과 실천을 소홀히 하였다.
그럼 최흥원이 힘써 실천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효도였다. 그래서 어버이 섬김에 조금의 잘못이나 부족함도 없었고, 스스로 행동함에 법도에 어긋남도 없었다.
효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선비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었던 선비들은 당시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부모를 잘 모시고 제사를 잘 받드는 것 정도로만 그치고 말았다. 이것은 효도의 극히 적은 일부일 뿐이다. 최흥원의 효도는 봉양과 제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가짐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향약을 실시하여 그 가르침과 혜택을 온 고을사람들에게 미치게 하여 칭송이 부모의 귀에까지 들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러 대효(大孝)라고 하였다. 최흥원은 바로 이 같은 대효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도 1789년(정조 13)에 정문을 내려 효행을 높이 표창하였다. 부모를 모시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태에 비추어 본다면 최흥원의 대효는 너무 커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러나 실천을 강조하는 최흥원과는 달리 당시의 일반적인 공부 분위기는 말단적인 지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공부가 그러하였다. 이 같은 공부는 실천이 뒤따를 수 없는 것이었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공부란 책을 읽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백불암의 생각이었다. 당시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는 젊은이들의 공부란 다름 아닌 과거시험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선비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거 합격이야말로 출세하여 부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최흥원은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를 멀리하고 부귀와 명예만을 쫓아 과거에 몰두하는 세태를 곳곳에서 개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젊은이들에게 자신과 같이 과거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최흥원은 비록 과거 공부를 하더라도 근면하게 해야 하고, 또 과거 공부로 인하여 근본적인 공부를 폐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과거공부와 최흥원의 실천은 사실상 부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부하는 과정과 방법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거공부가 주로 암송하거나 글짓기에 힘을 쏟는데 반해 최흥원은 소학(小學)과 같은 공부를 아주 중요하게 강조하였다.
소학이란 물 뿌리고, 청소하고, 응하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상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그것은 글자를 해석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깊이 사색 하여 몸과 마음으로 얻어 행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천은 내면의 수양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면의 수양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학문하는 사람들이 힘써 지켜야 할 부분이었다. 마음은 모든 일의 줄기이고, 마음이 아니면 모든 일을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수양을 해야 하고, 수양은 무엇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최흥원은 ‘경(敬)’을 제시하였다. 경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최흥원은 일찍이 거처하는 집의 좌우에 ‘경(敬)’자를 크게 써 놓고 항상 보면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반성하기를 개을리 하지 않았으며, 임종에 이르러서도 혹 스스로 공경하고 조심함이 없지나 않는지 두려워하는 마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면 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경은 공경(恭敬)하면서도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깊은 못가에 서거나 얇은 얼음 위를 걸을 때 아주 조심하여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거들떠 볼 겨를이 없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오래하여 몸에 익히게 되면 어려움이 갑자기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처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최흥원은 비록 홀로 있더라도 더욱 더 삼가고 엄숙히 하여 말하고 행동함이 저절로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홀로 빛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일러 최흥원의 실천학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양을 전제로 한 실천학이니 또한 수양실천학이라 할 수 있다. 수양과 실천을 겸한 학문, 이것이 바로 최흥원이 성취한 학문의 특성이다.
부인동 향약, 유교적 이상사회의 실현
최흥원은 1738년(영조 14) 부인동에서 동민들과 더불어 향약을 실시했다. 향약의 실시는 그의 실천학을 사회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향약을 보통 사람들의 효도와는 다른 큰 효도의 실천으로 이해하기도 하였고, 인(仁)과 의(義)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유학의 또 다른 측면인 민생(民生)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고 실천이었다.
최흥원이 향약을 실시한 곳은 거주지 칠계가 아니라 부인동이었다. 부인동은 오늘날에는 팔공산의 부인사(夫仁寺) 아래 동내인 신무동, 용수동 일대가 된다. 이곳은 최흥원의 5대 할아버지인 최계가 은거하면서 이미 향약을 실시했던 곳이기도 하였고, 또 많은 토지도 있어서 최씨 집안과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마을이었다.
향약이란 중국 송나라 남전현의 도학자였던 여씨 형제들이 향리의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강목을 만들고 이를 실천함에 있어서 잘 잘못을 기록하였다가 향중의 회의 시에 상벌을 행하였던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후 남송의 주자에 의해 가감됨으로써 향촌의 규약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향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여말선초 주자의 저술을 통해서였지만,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 임금 때였다. 즉, 향촌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이를 통해 중앙의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림파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훈구파의 정치적인 탄압도 있었지만, 중국의 제도를 관권의 힘을 빌려 일방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향약이 새로운 모습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던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새로운 모습의 향약이란 중국식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게 고쳐진 말하자면 ‘조선적’인 향약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관권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개별 향촌사회 양반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활동에 의해 실시되고 있었다. 조선의 체제에 맞는 향약을 처음으로 실시한 것은 퇴계와 율곡이었고, 이후에 실시된 향약은 모두 이를 기본 모델로 삼아 고치고 보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질병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초상이 나면 일손을 돕고 부조를 하여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은 환난상구와 상부상조의 정신은 본래부터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고, 이를 고스란히 향약에 녹여 넣었던 것이다.
향약의 실시는 조선 후기 심지어는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도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늘 이상세계의 실현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향약의 실시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양반과 상놈이 엄격히 구분되는 말하자면 양반의 신분이 보장되는 양반사회, 남자와 여자가 길을 함께 걷지 않으며, 젊은이가가 늙은이의 짐을 대신 이고지는 유교적인 윤리도덕이 실현되는 그런 사회를 말한다. 그러나 향약의 실시는 어느 곳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농민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비록 환난상구와 상부상조로 고난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도 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당시 농민과 농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농민.농촌 문제의 핵심은 농민에 대한 신분적인 억압과 과중한 세금 부담에 있었다. 따라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면 향약의 계속적인 실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백불암이 부인동에서 동민들과 함께 실시한 향약은 백여 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었다.
최흥원의 향약은 퇴계의 향약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 김기(金圻)의 향약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향약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恤貧庫)라는 제도에 있다. 선공고란 토지를 가진 사람들의 세금을 대납해 주는 것이고, 휼빈고란 농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사지을 토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반의 특권과 유교적인 윤리도덕을 강요하기에 앞서 당시 농민들이 가장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문제를 선공고와 휼빈고를 통해 해결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백불암 향약의 핵심이고, 백여 년 넘게 유지되고 운영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최흥원은 선공고와 휼빈고의 창안을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응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사창법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창이란 각 고을에서 흉년이나 기근에 대비하여 곡식을 모아두었던 창고를 말한다. 백불암이 부인동에서 향약을 실시한 것은 1738년이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민생의 안정을 우선하지 않고서는 민속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즈음에 최흥원은 실학적인 학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접할 수 있었다. 1748년, <<반계수록>>을 본 최흥원은 이 책을 근래 경륜 있는 학문으로 최고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자신의 뜻과 부합하는 점이 많았던 것이다. 1752년, 최흥원은 방대한 분량의 책을 베껴 두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설치된 것은 바로 이듬해인 1753년이었다. 물론 이때까지 <<반계수록>>은 간행되지도 않았고, 관심을 두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아무튼 선공고와 휼빈고는 최흥원의 향약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내용이다. 사창법이 조선후기 일부 지역의 수령에 의해 실시되고는 있었지만, 향약과 결부되어 민간에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조선의 웬만한 선비라면 향약과 사창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들은 지식으로만 알았을 뿐이지만, 최흥원은 이것의 실천을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이다. 최흥원이 성취한 실천적인 학문이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선공고와 휼빈고를 통해 민생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백불암의 향약은 아주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은 양반이나 상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친척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상하의 구분이 있게 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말하자면 삼대의 다스림을 이룩하였다고 평하였다. 백불암의 향약은 중단의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향약을 실시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백여 년 넘게 유지된 경우는 흔하지 않다.
따라서 최흥원의 향약은 당시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물론이고 지방과 중앙의 관리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대구 부사와 경상도 감사 등은 물질적인 부조나 세금 감면 등을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향약의 소문은 자연히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정조 임금이 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흥원의 학문과 향약은 국가와 관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장려되었던 것이다.
최흥원은 향약을 통해 성취한 것은 비록 조그만 마을에서나마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실현한 것이다. 유교적 이상사회는 물론 양반들의 이상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자들이 그토록 실현해 보고 싶어 하던 바였다. 그래서 백불암을 ‘대효(大孝)’을 실천했다거나, 또는 ‘경제(經濟)의 대강(大綱)’을 얻었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불암의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던 것은 양반들의 이상사회가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진정한 개혁이었다. 이것이 바로 백불암의 성취이자 한계였다.
오늘날 우리의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가? 아니 실천은 고사하고 이상조차 없는 건 아닐까? 비록 모두의 이상사회는 아니라 하더라도 백불암의 실천과 성취를 가벼이 볼일이 아니다.
최흥원과 <<반계수록>>(에피소드 대신)
<<반계수록>>은 반계 유형원의 실학적 개혁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유형원은 어려서 서울에서 생활하였지만,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전라도 부안군의 우반동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은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반계수록>>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시대 실학적인 학문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를 뒤이어 이익, 홍대용, 안정복, 정약용 등 기라성 같은 실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유형원이 살았던 시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수습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기응변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회체제 전반에 걸쳐 이런저런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다. 무언가 근본적인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유형원은 당시 사회에서 필요한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반계수록>>에 담았다. 실학이란 조선후기의 공리공담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생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개혁적인 학문을 말한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1652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670년에 완성하였다. 유형원은 이 책을 마무리 한 후 3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유형원은 이 책에 담았던 그의 뜻을 제대로 세상에 펼쳐보이지도 못하였다.
유형원의 저작을 세상에 알리고 정책에 반영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그의 동지이고 사돈이었던 만학당(晩學堂) 배상유(裵尙瑜, 1622-1686)였다. 배상유는 유형원과의 토론을 통해 <<반계수록>>의 완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배상유는 유형원의 사후에 <<반계수록>>을 여러 부 필사하여 당시 최고의 위정자이며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와 이현일(1627-1704) 등에게 보내 그것이 발간되어야 하며, 그의 개혁안을 정책으로 구체화 시켜 줄 것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였다. 그러나 윤휴와 이현일은 <<반계수록>>의 내용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후 영남의 남인이 정계에서 몰락하고, 배상유 또한 세상을 뜨자 <<반계수록>>은 더 이상 주목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반계수록>>은 겨우 몇 부만이 필사되어 후손과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해졌을 뿐이었다.
최흥원이 <<반계수록>>을 접하게 된 것은 1748년 44세 되던 해였다. <<반계수록>>이 완성된 지 7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까지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아직 시골의 선비에 불과하였던 최흥원은 어떻게 간행도 되지 않은 <<반계수록>>을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다소 복잡한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최흥원의 어머니 함안 조씨 집안은 서울의 소론 명문집안이었던 평창 이씨와 혼인이 잦았고, 그리고 어머니의 외가인 평창 이씨는 바로 유형원의 문화 유씨와 혼인관계가 많았다. 따라서 문화 유씨는 최흥원의 어머니 진외가가 되고, 유형원의 아들은 최흥원에게 조카뻘이 되었다. 그래서 백불암의 아들인 주진(周鎭, 호 동계)은 이런저런 일로 서울에 왕래할 때 반드시 이들 집안들을 찾아가곤 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의 양반사회는 이렇게 복잡한 혼인관계를 끈으로 하여 서로서로 얽히고설키어 있는 사회였다.
아무튼 최흥원은 이러한 인연으로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던 유형원의 아들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 볼 수 있었다. 이를 본 최흥원이 찬탄해 마지않았고, 이를 필사해 두었었음은 이미 이야기 한 바와 같다.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있었던 영남의 대유학자 이상정도 최흥원으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보았고, 경상감사도 이를 빌려 보고자 했다. 당시 필사된 <<반계수록>>은 모두 13책이고, 이것은 옻골의 숭모각에 보관되어 있다.
<<반계수록>>이 발간되어 세상에 공개된 것은 백불암이 필사한 해로부터도 또 20여 년이 지난 1770년의 일이었다. 그러니 책이 완성된 지 꼭 백년 만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영조 임금이 경상감사에게 이름 난 선비에게 교정을 받아 감영에서 간행할 것을 명령했다. 감사는 여러 선비들의 의견을 들어 최흥원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집 보존당(報本堂) 서쪽 방에서 시작하였으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번거롭게 되자 마침내 감사에게 건의하여 동화사에 교정소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최흥원은 조카 우진(宇鎭) 등의 도움을 받아 <<반계수록>>의 마쳤고, 이것이 1770년에 드디어 대구 감영에서 발간되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써 최흥원은 1783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경상감사 이병모(李秉模)를 통해 <<반계수록>> 교정의 수고에 대한 칭찬과 함께 사서(四書) 언해본 각 한 질을 하사받았다.
최흥원과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대한 이 같은 관계를 아는 이 거의 없다.
<연보>
1705년(숙종 31) : 2월
* 15일 대구부(大邱府) 원북리(院北里) 외가에서 출생하다.
1721년(경종원년): 17세
* 9월에 밀양 손씨 명대(命大)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다.
1722년(경종 2) : 18세
* 가을에 향시(鄕試)에 나아가 생원 초시에 합격하다.
1727년(영조 3) : 23세
* 막내 삼촌 장사공(將士公)의 상을 당하다. 어린 4촌을 대신하여 3년 동안 조석으로 전(奠)드리고 곡(哭)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숙모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4촌 아우와 누이들을 이끌어 성취(成就)시키다.
1729년(영조 5) : 25세
* 현풍에서 보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가 돌아와 어른들에게 말씀드린 후 과거를 단념하다.
1733년(영조 9) : 29세
* 2월에 경산현감 엄경하(嚴慶遐)의 시에 차운하여, 세상을 한탄하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는 뜻을 부치었다.
* 6월에 장인인 절도사 손공(孫公)이 별세하시다. 당시 손공은 제주목사였는데, <<심경(心經)>> 1본을 구해 보내면서 열심히 연구할 것을 편지로 당부하였다. 이에 <<역괘도설(易卦圖說)>>을 베껴서 그 정중한 뜻에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부음이 오니 매우 애통해 하며 상심하였다.
1735년(영조 11) : 31세
* 7월 아버지 통덕공(通德公)의 상을 당하다. 11월에 대구의 북쪽 광점촌(廣店村) 언덕에 장사를 지내다.
1737년(영조 13) : 33세
* 3월에 중국 송나라 도학자 120명의 학설을 모아 70권으로 편찬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
* 9월에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다. 그러나 매일 사당에 참배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술과 과일을 올리다.
1738년(영조 14) : 34세
* 부인동에서 향약을 실시하다.
1740년(영조 16) : 36세
* 4월에 부인 손씨가 별세하다. 이후 40여 년을 홀로 지내셨다.
* 안동 지곡(枝谷)에 가서 권구(權榘, 호 屛谷) 선생을 찾아 보다. 12월에는 전라도 광양에 유배중인 김성탁(金聖鐸, 호 霽山) 선생을 찾아 보다. 아우 초려공(草廬公, 興漸)과 함께 진주 촉석루에 올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선생의 ‘삼장사시(三壯士詩)’에 차운하다.
1741년(영조 17) : 37세
* 11월에 셋째 아우 육와공(陸窩公, 興建)과 함께 <<예의유보(禮儀補遺)>>를 교정하다.
* 12월에 어머니의 생신에 수연(壽宴)을 열다. 이후 매년 한결같이 행하다.
1744년(영조 20) : 40세
* 임필대(任必大, 호 剛窩)가 찾아와 <<가례(家禮)>>와 <<소학(小學)>> 등을 강론하였다.
* 9월에 안동 도산서원을 찾아 참배하다. 안동에서 이상정(李象靖, 호 대산) 선생을 처음으로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다.
* 10월에 부인동(夫仁洞)에 강당이 완성되었다. 여기서 향약을 실시하여, 서로 좋은 일에 힘쓰고 잘못을 살피게 하였다.
1748년(영조 24) : 44세
* 정월에 조선적(曺善迪, 호 恥齋)과 이상정이 찾아와 <<심경>>과 <<대학>>을 강론하다.
* 8월에 서울 도저동에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빌려보고 근세 경륜 있는 학문 중에 수록이 최고라고 칭송하다. 이후 수록을 베껴 보관하다.
1750년(영조 26) : 46세
* 2월에 아우 육와공과 함께 <<성리대전>>을 강론하다. 부인동 농연(聾淵)에 북계정사(北溪精舍)를 완성하다.
* 3월에 북계정사에서 아우 육와공과 함께 <<중용(中庸)>>을 강론하다.
1753년(영조 29) : 49세
* 4월에 보본재(報本齋)를 별묘 앞에 세워 제당으로 삼았다. 조선적과 이상정이 기문을 지었다.
1755년(영조 31) : 51세
* 3월에 부인동 농연에 농연정(聾淵亭)을 완성하다. 이곳에서 배우는 사람들을 합숙하게 하다.
1757년(영조 33) : 53세
* 2월에 가야산을 유람하고 기행문인 <유산록(遊山錄)>을 지었다.
1760년(영조 36) : 56세
* 9월에 의고(義庫)가 완성되다. 여기서 흉년이 들 때 가난한 친척들을 구제하였다.
1761년(영조 37) : 57세
* 5월에 농연정에서 <<심경>>을 강론하다.
1763년(영조 39) : 59세
* 3월에 6대조 대암공의 글을 모아 문집을 편찬하다.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므로 남아있는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이다.
1765년(영조 41) : 61세
* 정월에 ‘백불암(百弗庵)’이라는 편액을 걸고 스스로의 호(號)로 삼았다. 이것은 주자(朱子)의 “百弗知 百弗能”에서 따온 것이다.
1766년(영조 42) : 62세
* 정월에 어머니 조씨의 상을 당하여 대구의 북쪽 도장동(道藏洞)에 장사를 지내다.
1770년(영조 46) : 66세
* 정월에 경상감사가 <<반계수록>>을 이름 있는 선비에게 교정을 받아 간행하라는 명을 받고 선생께 교정을 의뢰하다. 처음에는 보본당에서 교정을 시작하였으나 뒤에 동화사로 옮겼다.
1772년(영조 48) : 68세
* 3월에 이광정(李光靖, 호 小山)이 찾아와 <가례>에 대해 강론하다.
1778년(정조 2) : 74세
* 정월에 경모궁 수봉관(守奉官), 7월에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79년(정조 3) : 75세
* 12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1년(정조 5) : 77세
* 12월에 대산 이상정의 부음을 듣다. 3개월 동안 흰옷을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제문을 지어 슬퍼하였다.
1782년(정조 6) : 78세
* 8월에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천거로 장악원 주부(注簿)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3년(정조 7) : 79세
* 정월 정조 임금이 선생을 보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6월에 임금께서 <<반계수록>> 교정 수고에 대한 칭찬과 함께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사서언해(四書諺解)>> 한 질을 인쇄하여 하사하다.
* 12월에 특별히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4년(정조 8) : 80세
* 정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찾아오다.
* 7월에 익위사(翊衛司) 익찬(翊贊)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86년(정조 10) : 82세
*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다.
* 8월 22일에 시중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똑바로 누워 두건을 단정히 하시고 편안히 세상을 뜨시다.
* 10월 22일 칠계 동쪽 검덕산(儉德山) 언덕에 묻히시다. 원근의 유생들로 참례한 자가 3백여 명이었다.
1789년(정조 13) : * 6월에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받다.
1790년(정조 14) : * 정월에 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참찬관(參贊官)에 증직(贈職)되다.
'여행이야기(향교,서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존치된 47개 서원의 역사와 배향인물 (0) | 2013.04.11 |
|---|---|
| [스크랩] 매양서원(梅陽書院) (0) | 2013.04.11 |
| [스크랩] 한천서원(寒泉書院) (0) | 2013.04.11 |
| [스크랩] 인흥서원(仁興書院) (0) | 2013.04.11 |
| [스크랩] 이양서원(尼陽書院) (0) | 201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