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서원(尼陽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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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3 ❏문화재지정: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32호(1995.05.12지정) ❏배향인물: 곽안방(郭安邦) 곽지운(郭之雲) 곽 규(郭 赳) 곽 황(郭 趪) ❏창건연도: 1707년(숙종 33) ❏향 사 일: 음력 2월, 8월 중정(中丁) |
1707년(숙종 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곽안방(郭安邦), 곽지운(郭之雲), 곽규(郭赳), 곽황(郭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54년에는 사당을, 1982년에는 동·서재를 건립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곽안방(郭安邦)
선생의 휘는 안방(安邦)이요 자는 여주(汝柱)이며 암곡 곽경 (巖谷 郭鏡)선생의 후예로 의영고사 곽득종(義盈庫使 郭得宗)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세종 때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역임하고 봉열대부(奉列大未)에 올랐으며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군공으로써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르고 청백리(靑白吏)에 녹선되었다. 선생은 무과로서 벼슬에 올랐으나 몸가짐이 유사로써 교유한 선비들이 당대의 명류들이였으며 또한 선생이 관직에 있을 때 청백함이 빙옥(氷玉) 같아서 왕래할 때 단기필마로서 행장이 표연하였다 한다. 김종직 문인이다.
선생이 일찌기 익산(益山)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종자가 한 쇄철을 차고 있음을 보고 깜짝 놀라 일으되 '관가의 논건에 크고 작음이 무엇 다르랴'하고 관에 돌리도록 하였으니 그 깨끗함이 이와 같았다. 후에 정백사인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항사 하였다.
2)곽지운(郭之雲, 1498~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우(汝雨), 호는 연일당(燕日堂)·삼옥당(三玉堂). 청백리 안방(安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양(承陽)이고, 아버지는 평(坪)이며, 어머니는 박문간(朴文幹)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는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였다. 죽은 뒤 현풍의 이양사(尼陽祠), 청풍의 청백사(淸白祠)에 제향되었다.
3)곽규(郭赳, 1521~1584)
자는 극정(克靜). 호는 만담재(晩蕁齋). 참의공파조(參議公派祖). 1546년(명종 1) 식년 생원시 1등합격(式年 生員試 一等合格), 1555년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에서 벼슬을 하고, 진주(晉州), 순천(順天), 광주(光州), 안동(安東), 안변(安邊), 동래(東萊)등 6주(六州)의 원 역임. 호조참의(戶曹參議), 승지(承旨) 벼슬후 학문에 심취하였으며 이양서원(尼陽書院)에 그의 유고(遺稿)가 있다.
4)곽황(郭趪)
자는 경정, 호는 탁청헌(濯淸軒), 탁청헌공파조(濯淸軒公派祖)이다. 공은 27세에 등과(登科)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 예안현감(禮安縣監), 함양군수(咸陽郡守)를 지냈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과 외삼문이 강학공간의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강당 우측으로 대지를 한단 높여 내삼문과 사당이 자리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좌학우묘의 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인 청백사(淸白祠)와 내삼문, 강당인 경렴당(景廉堂)과 외삼문인 존도문(尊道門) 등이 있다. 강당 오른편에는 청백사로 불리는 사당이 있다. 그리고 사당 우측에 관리사와 장판고를 두었다. 서원의 동쪽에는 고직사가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편,경북서원지, 20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 조선 청백리 관안방 추모…대원군 때 헐렸다 복원 솔례마을 이양서원 | ||||||||||
솔례마을에는 이양서원이 있다. 이양서원은 곽안방을 주향으로 곽지운, 곽규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33년(1707) 세운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면모를 갖췄다.
서원은 강학공간인 강당이 앞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뒤에 위치하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췄다. 지형적 제한에 따른 선택인지 알 수 없지만 이양서원의 배치는 강학 공간 경무당과 사당 청백사가 거의 일(一)자에 가까운 파격적인 설정이다. 곽안방은 세조 때 전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고, 해남현감과 익산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령을 지내면서 남달리 청렴한 벼슬생활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 곽안방’으로 불렸다. 곽안방은 세종 치세 말기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가 승진을 거듭해 해남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세조 때 군공이 인정돼 원종이등훈에 오른다. 그 후 익산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 솔례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다. 군현에 나아가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어질고 용서를 베푸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노래하며 숭상했다. 평생 얼음과 옥 같은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아무런 재물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채 그저 말 한 필에 의지해 돌아오자 고향 백성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곽안방이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한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고 했다. ‘현어’는 관공서에서 선물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의 청렴도를 나타낸다. 서당 내의 건물로는 3칸의 청백사, 6칸의 경렴당, 신문, 읍청루, 4칸의 고사 등이 있다. 청백사에는 곽안방 등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인 경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읍청루는 대문이며, 고사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두고 평소에는 창고지기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달성`김성우기자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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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03월 14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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