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서원(硏經書院)
연경서원 터 - 매암
소재지 : 대구 북구 연경동
창건년도 : 明宗 19년 甲子 1564년에 건립
사액년도 : 顯宗 1년 庚子 1660년에 賜額
배향인물 : 退陶 李滉(1613년), 寒岡 鄭逑(1622년), 愚伏 鄭經世(1676년), 溪東 全慶昌(1639년), 梅巖 李叔樑(1647년)
▣ 연혁
퇴계의 문하생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아예 팔공산 자락으로 옮겨 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었다.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 예안 출신. 대구 무태동 들연경 마을에서 지묘동 서원연경 마을 가는 길목 동화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화암'(畵巖) 근처가 서당 터라고 했다.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됐다. 연경서원은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선생의 주도 하에 지역 유림과 관(官)이 힘을 모아 1563년부터 1565년까지 세 해에 걸쳐 연경동(硏經洞) 화암(畵巖) 부근에 세운 유림의 강학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30여 년 만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난이 끝난 후 태암 이주 선생께서 주관하여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고, 태암 선생께서 별세하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수년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계속하였다. 서원이 다시 모습을 갖추게 되자 비로소 사우(祠宇)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셨고, 이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의 위패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또한 별사(別祠)에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선생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였다. 국내 최초의 서원보다 불과 20여년 뒤지는 시기. 대구 권역에 있던 5개 사액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서원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4살의 나이로 몸소 창의해 임진년 10월 진주대첩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고 '임진왜란기 영남의병 연구'(최효식)는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연경서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길 때 함께 철폐됐다.
▣ 배향인물
1) 퇴계 이황
도산서원 조 참조
2) 한강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 가계와 수학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
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 관직
1573년(선조 6)에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이황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조식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 학문과 저술
그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그의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저서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이96)·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인 이론을 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성리학 부분의 대표작으로는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경사상(敬思想)을 토대로 하여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역사서로는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와 《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 10여권이 있으며, 의서로는 눈병에 관한 처방을 수록한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이 있다.
그밖에도 수령직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 수집하여 내용을 정리한 7종의 읍지(邑誌)를 간행하였는데,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誌》 하나뿐이다.
그밖에 《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걔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3) 우복 정경세(1563 - 1633)
본관 진주(晉州). 자 경임(景任). 호 우복(愚伏)·일묵(一默)·하거(荷渠). 초시(初諡) 문숙(文肅). 개시(改諡) 문장(文莊). 경상북도 상주(尙州)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謁聖)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봉교(奉敎)를 거쳐 158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수찬(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사간(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과 반목 끝에 삭직(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겸 춘추관지사로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에 밝았고 이기설(理氣說)에서 이황(李混)의 학설에 반대, 이이(李珥)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아서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로 불렸다. 시문(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찬성(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體參考)》《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있다.
4) 계동 전경창(全慶昌)
1532(중종 27)∼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 순(珣)의 아들이다.
1555년(명종 10) 사마시를 거쳐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정언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한때 가야산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일반사신이 겸하여 추진하던 것을 전담사신을 파견할 것을 상소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계동집》이 있다.
5) 매암 이숙량(李叔樑)
1519(중종 14)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경북 안동 사람이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 아버지는 호조참판 현보(賢輔)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붓글씨가 뛰어났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후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했으며, 난중에 죽었다. 시조로 〈분천강호가 汾川江湖歌〉 6수가 전하는데, 부자·형제·친척 사이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라고 권고한 내용이다. 이현보의 풍류와 이황의 도학을 그 어느 쪽도 충실하게 잇지 못하고 관심을 좁혔다는 평을 받는다.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배향되었다.
▣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기문/매암 이숙량
명종계해(1563)년 여름 향시에 필요한 학업을 익히는 향중 선비들이 학당에 모여 글을 읽고 짓는 여가에 서로 팔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서원(書院)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후에 들은 바가 없었더니 무릉(武陵)주선생(周先生)이 처음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세움에 시청을 고동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나라 위대한 사업의 으뜸이었다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것으로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과 성주의 연봉서원(迎鳳書院)과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같은 것이 있다.따라서 크고 작은 고을에 파급되어 서로 다퉈가며 추모하고 점차 확장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어찌 모두 수령들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또 어찌 모두 반드시 어진이의 숭배를 위주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강학의 장소로 세운 것이 간혹 있었으니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는 데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하겠는가
우리 고을은 한 도(道) 가운데 선비의 후손이 많은 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몸을 사사롭게 하고 선비들은 그 학문을 사사롭게 하여 활과 말의 기예에만 따르고 문학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한 어찌 호걸스런 재목과 기위(奇偉)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퇴폐한 풍습속에서 능히 스스로 분발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이를 예사로 여겨 날마다 나빠졌으니 이 어찌 다만 우리 고을의 수치였겠는가 또한 국가의 불행이었다
지나간 것을 따를 수 없고 다가오는 것을 힘쓸 수 없으니 지금 어진 임금을 만났으며 하잖은 고을에서 어진 성주를 얻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을 풍속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모든 공인(工人)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만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선비가 있을 자리는 서원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이에 목욕 제계하고 성주에게 들어가 뵙고 서원 세울 뜻을 고하였으니 이때 성주는 밝은 성주 박응천(朴應川)이었다
그 향약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즉시로 명령하여 이르기를 [내가 비록 능히 주관할 수는 없으나 그 일로써 와서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였으니 또 이르기를 [집을 세우는 데에는 기와가 가장 큰 일이니 이것은 내가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일을 하는 데에는 유사(有司)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으니 유사의 우두머리를 선택하라]하였다
제생들이 그 명령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날 향사당(鄕射堂)에 향중 부호들을 모아놓고 역시 서원 세울 뜻을 말하니 모두 말하기를 [감히 동심협력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일을 주관할 사람을 세우고 또 재력(財力)의 규모를 계획하여 대소인원을 차례로 써서 그 빈부에 따라 돈과 곡식을 거두었으며 노력을 내는 데에도 역시 이와같이 하였다 이에 공인(工人)들을 먹일 곡식과 노임으로 줄 포백들이 단시일에 집합되었다
이에 마땅한 기지를 살펴 팔공산 기슭에 세우도록 작정하였다
고을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위의 마을은 지묘(智妙)라 하였고 아랫마을은 무태(無怠)라 하였으며 서원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름을 연경(硏經)이라 하였으니 당초에는 잡초가 우거진 묵밭이었던 것을 전임 성주가 공유지로 교환하였다
한 줄기의 맑은 냇물이 그 남쪽을 지나 잔잔하게 흐르며 구비구비 산을 따라 서쪽으로 10리를 체 못가서 호(湖)에 이르렀다
그 상류의 두 마장쯤 되는 지점에 왕산(王山)이 있어 웅장하게 서려있고 높이 솟아 아름다운 기운이 매우 짙었다
그 왕산을 호위하듯 그 남쪽에 벌려섰는 중첩된 봉우리가 마치 용이 날으고 봉이 춤추는 듯 굽고 방박한 것은 서원의 동남쪽 경관이다
서원의 북쪽산을 성도(成道)라 일렀으니 봉우리가 높이 솟고 골짜기가 아늑하고 깊어 흰 돌과
푸른 소나무가 은은하개 비추었으며 서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큰 바위가 깍은듯이 높이 서있어 화암(畫巖)이라 일렀으니 이는 즉 서원의 서쪽 진(鎭)이라 붉은 언덕 푸른 절벽이 높이 서 있어 기괴한 형상들이 저절로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었으니 화암이라고 한 이름이 이 때문이었는가? 그 아래 푸른 못이 잇어 깊고 맑아 잠겨있는 고기들이 헤아릴 수 있었으니 이는 즉
서원에서 굽어보는 경관이다.
갑자년 봄 삼월에 상량하여 그 명년겨울 시월에 공사를 마쳤으니 집이 모두 40여칸이었다
그 정당(正堂)은 세칸으로 기둥이 높고 처마가 날으는듯 하였으며 산과 물의 형세가 다 그 안을 밝혀 읍하는 듯 하였으니 참으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가 좋아할만한 곳이라 그 이름을 인지당(仁智堂)이라 하였다
그 왼쪽 채는 넓고 깊어 그윽한 형세가 존엄하였으므로 수방재(收放齋)라 일렀으며 오른쪽 채는 상쾌하고 시원하여 마음이 저절로 가다듬어졌음으로 경타재(警惰齋)라 일렀다 그리고 동쪽 집을 보인(輔仁) 서쪽 집을 시습(時習)이라 일렀으며 긴 행랑의 중간에 초현문(招賢門)이 있고 초현문의 서쪽 곁에 동몽재(童蒙齋)가 있으며 그 동쪽의 양헌(涼軒) 두 칸을 양정당(養正堂)이라 일렀으며 그 서쪽 온실 세칸을 유학재(幼學齋)라 일렀다
그 밖에 주방과 창고를 동편에 붙여 세우고 원장은 서쪽으로 둘려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합하여 [연경서원]이라 일렀다
집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모든 용품이 미비하였다 이에 또 권고하는 안을 내어 향중 동지들과 의논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에따라 받아드렸으니 적게는 소반과 기명이요 크게는 돈과 곡식과 서책들이었다 그들의 재력에 따라 드려 놓았으니 한 고을의 동심합력이 참으로 가상할만 하였다
대개 서원의 건립이 비록 지방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에 근본하였으나 모든 계획과 처치에 있어서는 전후 성주의 힘이 많았다
당초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울적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성주가 담당하여 엄한 호령으로 순하게 인도하고 태만한 것을 이끌었으며 토지 노속의 배치 선비를 기르는 경비의 근본대책 등유 식염의 규정에 이르기 까지 모두 용의조치 하다가 완수하지 못하고 전임됨에 고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중도폐지 될까 염려하였더니 우리 유학에 행운이 깃들어 또다시 어진 성주를 만나게 되었다
부임하자 곧바로 서원건립에 마음을 기울여 모든 고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인부들이 부역이며 경비의 계속에 용의주도 하였으며 수호하는 군정과 주방의 식모들 까지도 힘써 주었으니 문학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뜻이 전임자와 후임자가 똑 같았다 우리 고을 많은 선비들의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두분 성주의 공적이 어찌 다만 구구하게 집을 짓는 사이에 베푼 조치의 말단에만 있었겠는가
뒷날 원근에서 이 서원을 찾아와 노는 사람들이 두분 성주의 근념과 서원을 건립한 뜻을 생각하여 글을 읽는 데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고 문장을 서술하는 데에는 미사여구로 다듬는 것을 말단으로 삼아 학문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고 외부의 물욕에 뜻을 빼았기지 말며 진실을 알고 성실하게 시행하여 다른 잡기에 현혹되지 아니하며
맑은 냇물에 임하거든 [가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추모하고 높은 바위를 우러러서는 맹자의 기상을 상상하여 뛰어난 사람은 심오한 학문의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어진 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궁하여서는 가문과 시속의 모범이 되고 현달하여서는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비호하여 충과 효를 다하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니 두분 성주의 공적이 이에 커져서 장차 화암과 더불어 우뚝 솟아 떨어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성주의 이른은 승간(承侃)이니 전임 성주와 성이 같으며 아름다운 치적도 잘 이었다
이 때 고을사람들이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주관토록 하였으며 완공된 뒤에 또 나에게 서원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선생에게 기문을 청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이에 퇴계선생에게 청하였더니 선생이 병환으로 사양하시면서 내가 쓴 내력이 기문에 적합하다 하시고 칭찬하시며 발문을 뜻 깊게 써 주시고 반드시 기둥사이에 같이 계시도록 하였다
내가 감히 안된다고 사양하면 이것은 졸작인 나의 글 때문에 발문까지 버리게 되며 나의 글을 버리고 발문만을 취하면 서원건립의 전말을 알 수 없게 된다 이에 감히 옳지 못한 죄를 범하면서 마침내 썼으니 뒷날 군자들은 못난 사람의 글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특별히 관용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명종22년 (1567)정묘 10월16일 진사 이숙량 기(記)
硏經書院記 ( 硏經書院記 )
嘉靖癸亥夏,鄕士之隷解業者,多聚于黌含,讀書綴文之暇,相與㧖腕而歎曰,書院之於吾東方前後無聞焉,武陵周先生創立於白雲洞,其聳動觀聽,作新人才,實我靑丘偉事之赤幟也,聞風而興起者,有若海之文憲,星之迎鳳,臨皐之於永,西岳之於慶,以及大小州縣,爭相競慕,寢廣而寢備,是豈皆出於守令之建立,豈必皆主於尙賢而設置,鄕人之能自奮發,
而爲立講學之所者,亦或有之,其爲講劘道義,激勵風俗,豈曰少補之哉,至如吾鄕居一道之中,衣冠之裔,不爲不多而,人私其身士私,其學善趨,弓馬之技, 不務文藝之習,其間亦豈無豪傑之才,奇偉之人,而能自振發於頹波之中者,其有幾者,風俗由是,而不美,人心職此而日渝,豈獨吾鄕之大可羞抑,亦國家之所不幸也,往不可追來者可勉,今代遭逢聖主, 陋邦得賢侯,此實鄕風革舊鼎新之機會也,語曰,百工居肆,以成其事,至於爲學,何獨不然,然則士之所居之隷,非書院乎,於是乎,薰沐齋祓,入謁於土主,以立院之意,告之于時,土主乃朴明府應川也,美其向學之心,而樂其成人之美也,卽命曰,吾雖不能專主凡以其事來告,則聽,又曰,立屋瓦事最鉅,此則吾當辦,又曰,作事莫先有司擇有司之長,諸生聞命,踴躍而退,翊日會諸鄕中父老于鄕射堂,亦以立院之意告之,咸曰,敢不同心戮力,於是旣立主事之人,又畫財力之規,列書大小人員等,其豐約而收其錢穀,出其力,而亦如是,於是餉工之粟,酬勞之布,不日而集, 乃相土地之宜經始于入公山之麓,去州里二十有許,其上有村曰,智妙,其下曰無怠院之宅,居其間坊,
名曰,硏經初不過爲荒草野田,我前侯以公田換之玉溪一帶經其南淙潺回互循山,而西未十里達于湖,其上流二里許,有王山,雄盤斗起,佳氣蔥鬱,護王山列,其南層巒疊嶂,龍飛鳳舞,蜿蜒而磅礴者,院之東南望也,院之北山曰,成道峯巒偃謇,洞壑窈窕,白石蒼松,隱暎而西馳,忽有巨巖削立千仞曰,畫巖卽院之西鎭也,丹崖翠壁,岌嵂撑拄奇形怪狀,自成圖畫,巖之得名,其以此歟,其下有碧潭,涵泓澄澈,游魚可數,卽院之俯瞰也,歲甲子春三月上樑越明年冬十月工訖,凡爲屋四十餘間,其正堂三,楹棟宇悛起,
簷阿軒翔,山形水勢咸拱,其中眞仁智之攸樂,名之曰,仁智堂,其左翼,則宏深幽閴,體勢尊嚴,曰,收放齋, 其右翼,則爽割淸涼,心自警愓,曰,警惰齋,東齋曰,輔仁,西齋曰,時習,長廊之中,有招賢門,門之西旁有童蒙齋,其東之涼軒二間,曰,養正堂,其西之溫房三間, 曰,幼學齋,庖廩附于東偏,垣墻繚于西面,合以名之, 曰,硏經書院,屋宇旣成,百用未備,於是,又出勸剳論, 諸鄕人之同志者,從其自願而入,小則盤盂器皿,大則錢穀,書冊隨其有而納之,其爲一鄕之同心,可尙矣,大抵院之立,雖本於土人之所共願,至於施措處置,大槩則前後邑宰之力居多焉,當其鳩材陶瓦之始,私力之所未及,則侯旣當之,嚴其號令,道其順而率其慢,以至土田藏獲之施,養士廩祿之本,書油貿鹽之規,無不用意措置,措置未究,不意見遞,鄕人失望,方恐九仞之,將虧斯文有幸復値,今侯之仁賢,下車未久,銳意畢休,凡所告稟聽之如流,其於力役之助,財用之繼,終始無倦,以及守護之丁,炊爨之婢,亦爲之致力焉,其右文興化之意,前後同一轍也,則吾一鄕多士之幸,爲何如哉,然二侯之功,豈獨在於區區營造之間,措置之末哉院中,他日遠近來遊者,念二侯之勤,思立院之義讀書,而以格致誠正,爲本綴文,而以繪句雕章,爲末學而爲己,不奪於外物,眞知實踐,不眩於他技,臨淸流,則慕宣尼如斯之歎仰,高巖則想孟氏巖巖之氣,高者可入室,而升堂下者,猶不失爲仁人窮而爲範家表俗達而爲尊主庇民爲忠爲孝,人才蔚興,則二侯之功,於是爲大將與畫巖同其屹立而不墜也,無疑矣,今侯諱承侃,與前侯同姓,而繼美焉時鄕人不以余爲無似,旣令主管院,事旣成,又責余具述其迹,請記於退溪先生,先生辭以疾,乃以拙作敍事近於記誤借推奬因跋其尾深致意焉,必欲同掛楣間,然後已某欲強辭不敢,則是以余拙文之故,幷與跋語而置之,欲捨此取彼,則院之顚末,無以考其實,乃敢犯不韙之罪,而遂書之,後之君子,勿以人廢言,而特恕之幸甚,隆慶丁卯,陽月旣望,進士李叔樑記,
▣ 이대용(李大用)(매암,이숙량)의 연경서원 기문뒤에 씀/퇴계 이황
달성고을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여 고을 동쪽 연경리 화암에 서원을 창건할세 영천 이진사 대용을 추대하여 그 일을 주관토록 하였으며 공사가 완성된 뒤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대용이 본래부터 나와 서로 알고 왕래한다는 이유로 대용을 시켜 서원 건립의 내력을 기록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대용이 나에게 서원 기문을 요구하여 왔기에 사양타 못하여 그 기록을 받아두고 때때로 읽어보니 그 글이 청아하면서 풍부하고 순하면서 정당하였으며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사방의 좋은 견관을 실지로 기록하였으며 그 종말의 의론도 역시 조리바른 추향이 담겨있었으니 이른바 기록이 아니고 기문이었다
비록 내가 억지로 짓는다하더라도 그보다 나을수 없을 것이다 이에 그 초본을 약간 수정하여 돌려보냈다 또 이르기를 곧 이것이 기문이라 어찌 달리 구하겠는가 이 글을 판각게시하라 하였더니 대용이 다시 글을 보내 굳이 사양하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나를 희롱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 편지를 보고 놀라 회답하여 이르되 <대용은 말을 잘못하였다 대개 학당을 마련하여 글을 써놓는 것은 후세에 보이기 위함이라 이것이 얼마만한 중대한 일인데 함부로 희롱을 하겠는가 진실로 나로 하여금 이 일에 있어서 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희롱으로 대처하였다면 나의 정밀하지 못하고 단정하지 못한 것이 이미 심하였다 제군들이 어찌 나에게 글을 청하였겠는가 또한 말(글이라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면 취해야한다 어차 어피 또 무엇을 가리겠는가 대용의 말이 곧 나의 말이다>
일찍이 생각건대 오늘날 학교가 도처에 두루있으니 선비들이 여기에 놀면 족할 것이다 그런데 서원에 무엇을 취하여 이처럼 마음을 썼는가 그것은 학사행정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우리 학문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고을 사람들이 합의협력하여 이 서원을 크게 지은 것이 그 어찌 공연한 일이겠는가 창도하고 분발하여 진실로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한문에 종사하여 서로 보고 느껴 착해지고 서로 권면하여 성취시킬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 대용같은 사람이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일찍이 그 글을 얻어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연구하여 그 학설을 알았으며 지금 또 많은 사람들의 추천하는 바가 되어 이 서원을 지었으니 제군들을 창도하고 후생들을 인도하여 그 일을 충실하게 추진할 사람이 대용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진실로 그렇지 않아 대용이 이르기를 지극히 중대한 이 일을 내가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하고 이 일을 함께한 제군들도 역시 그와같이 말하며 이 서원에 와서 거처하는 후생들도 또한 장차 이르기를 우리 부형 선배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을 우리들이 어찌 능히 하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다만 지금 세상에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오늘을 이어가는 후세에까지 모두 그렇게 말할 것이니 서원을 세우고 학문을 창도하려는 뜻이 마침내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비록 뒷날 서문충공(徐文忠公)같은 우뚝한 인물이 그 고을에 다시 출생하여도 사도(斯道)의 경계를 얻어듣지 못할 것이니 이 또한 서원의 큰 수치가 아니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생각하지 아니하였다 그 어찌 먼데 있으리요』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인(仁)이 먼대 있는가 내가 인을 할려고 하면 인이 이른다』고 하였으며 성간(成磵)이 제경공(齊景公)에 이르기를『그도 장부(丈夫)며 나도 장부다 내 어찌 그를 두려워 하겠는가』하였으며 안연(顔淵)이 말하기를『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고 뜻을 가지고 하면 역시 그와같이 된다』고 하였으며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다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하였다.
아! 맹자가 사람의 성품이 착하다는 것을 말할 적에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어 실증하였으며 또 반드시 세사람의 말로 마치면서 이르기를『만약에 약이 독하여 어지럽지 아니하면 그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사람이 비록 요순과 같아질 수 있는 착한 성품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도(道)에 뜻을 두어 학문을 함께 반드시 그와같이 분발 영감 확고하고 능히 스스로 담당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이치를 궁구하되 마치 격렬한 전쟁처럼 해야만 진리를 얻어 학문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지 아니하고 유유범범하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럼으로 뒷날 주자(朱子)가 후학들을 인도함에 언제나 이 구절과 수방심(收放心)을 말한 구절을 들어 함께 말하되 반복 정녕하게 지극히 말한 것이 역시 이 때문이었다.
무릇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며 알면서 하지 않은 것은 그 앎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되 스스로 힘쓰지 않은 자는 자포자기하는 자가 되며 힘을 쓰되 사사로운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자는 도(道)를 해치는 자와 다름이 없다 또한 명예를 피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은 스스로 굴복하고 물러나는 부류이며 후환을 염려하여 하류에 처하는 것을 좋게 여기는 것은 남을 속이는 흉험한 무리이다.
제군들의 뜻을 살펴보니 기문짓는 사람에게 비중을 두는 듯 하나 나는 이르되 서원의 경중이 제군들의 학문의 잘잘못에 있고 기문짓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겠다.
내가 일찍이 열 서원의 시를 지었는데 연경서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록 서원의 경중에는 관계가 없으나 제군들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조심스레 말미에 기록하여 들려주노니 바라건데 제군들이 힘써주면 다행이겠다
시에 이르되
화암의 좋은 형체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운데
서원세워 서로모여 육경(六경)을 외웠도다
이로부터 도학의 밝아진 소문 들려옴을 기다릴지니
많은 사람 잠속에서 깨어나지 않겠는가.
선조원년 정묘(一五六八)시월 열엿셋날 진성 이황(진城李滉)삼가 쓰다.
註:1.서문충공(徐文忠公)=조선조 중종때 좌찬성을 지낸 서거정(徐居正)의 시호
2.사도(斯道)=성인의 도 유도
3.성간(成磵)=제경공(齊景公)의 용사
4.안연(顔淵)=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
5.순(舜)=중국 상고시대 어진 임금으로 전해오는 임금(요임금의 와위를 물려받았음)
6.공명의(公明儀)=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7.문왕(文王)=주나라의 어진 임금
8.주공(周公)=이름은 단(旦)이니 문왕의 아들이며 성왕의 숙부로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제도와 예악을 제정한 성인
9.주자(朱子)=공맹의 도를 부흥시킨 송나라의 학자 주희(朱熹0에 대한 존칭
10.수방심(收放心)=물욕에 끌려나간 마음을 바로 잡는 것
11.육경(六경)=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악기
書李大用硏經書院記後 ( 書李大用硏經書院記後 )
達城府之人,相與共謀,刱書院於府東,硏經里之畫巖,推永川李上舍大用,主管其事,院旣成僉議又以大用素與滉,相識往來乃囑其具錄院事,來徵記於滉,滉辭之,不獲,則受其錄而藏之,時出而讀之,愛其文淸而贍婉,而正敍事詳而記勝,實其終之議論,亦有理趣,非所謂錄也,乃記也,雖使拙者,強而作之,諒亦無能出其右者,乃於本藳內,稍點竄數語而還之,且告之曰,卽此是記,何用他求, 君其往刋此文,大用復書,牢辭且見,謂子之言,其戲我乎哉,滉得書,瞿然而復之曰,大用於此,殆失言矣,夫爲學宮立言語,以示來世,此何等重事,而顧可以戲爲乎,誠使滉當此事,而不知其爲重,以戲處之,我之孟浪,不端已甚矣,諸君又何用徵余文爲哉,且言而當理,則取之在彼在此,又何擇焉,
大用之言,卽滉之言也,抑嘗思之,今之學校,遍于中外,士之遊居於此足矣,何所取於書院而惓惓, 若是其不以無拘於學政,而可專於吾學也耶,然則彼中諸人,所以合謀幷力大作此院者,夫豈徒然哉,倡起奮發,實從事於爲己之學,相觀而善相勖以成者,必有其人也,愚意如吾大用,有志此學, 蓋嘗得其書,口講心究,而知其說矣,今又爲衆所推,作爲此院,則倡諸君導後生,以實其事者,非大用而誰乎,苟爲不然,大用曰,玆事至重,吾何敢當之,諸君之共此擧者,其所云亦若是,後生之來居于院者,又將曰,吾父兄前輩,所不敢當我,何能馬哉,非徒今之世爲然,後來纔令者,苟所云皆若是, 是使立院倡學之意,終歸於墮地矣,後雖有文材卓早,如徐文忠者,復出於其境,亦不得與聞於斯道之藩籬矣,斯不亦大爲書院之羞也哉,孔子曰, 未之思也,夫何遠之有,又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成瞷謂 齊景公曰,彼丈夫也,我丈夫也,吾何畏彼哉,顏淵曰,舜何人也予何人也,有爲者,亦若是公,明儀曰,文王我師也,周公豈欺我哉,噫,孟子之道,性善必稱,堯舜以實之,又必繼之,以三人者之言,而終之曰,若藥不暝眩,厥疾不瘳者何哉, 人雖有與堯舜同歸之性,而其志道爲學,必須如是之奮發剛勇,便着春梁,克自擔當盡死力而痛理會,如血戰然,乃可以得之,不然,悠悠泛泛,終無可得之理故也,是以,後來朱子之接引後學,亦每擧此章與收放心章,幷稱而反覆,丁寧提耳,而極言之,亦爲是也,夫不知而不爲者,非其人之罪也, 知而不爲之者,其知也非眞知矣,爲而不自力者, 同歸於自棄者也,力而執私見者,無異於賊道者, 也避名而讓他他人自伏退産之須也慮患而甘處下流,詭託荒酗之比也,觀諸君之意,似若借重於作記之人,滉謂院之輕重在乎,諸君爲學之得失,不係於作記者之誰某也,愚嘗作十書院詩,硏經其一也,雖亦知無關於院之輕重,然又不欲有隱於諸君也,謹錄于後,以浼聞焉惟諸君因,而勉㫋幸甚,詩曰,畫巖形勝,畫難成,立院相招誦六經,從此佇聞明道術,可無呼寐得群醒,隆慶元年丁卯,陽月旣望,眞城李滉謹書,
한강(寒岡)을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봉안할 때에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 고유한 글
우리 유도가 동쪽으로 전해 옴에 / 吾道之東
선생이 대성을 하셨습니다 / 先生大成
실천하고 발휘하여 / 踐履發揮
정학이 이에 밝아졌습니다 / 正學以明
누가 그 전함을 얻어 / 孰得其傳
우리 선비들의 맹주가 되었는가 / 主吾黨盟
바로 한강이 / 乃有寒岡
여러 영재들 중에 빼어났습니다 / 拔出群英
어린 나이에 문하에 올라 / 幼齡登門
들어 받음이 이미 정하였습니다 / 聽受已精
마음으로 좋아하고 정성으로 복종하여 / 心悅誠服
단비를 맞은 듯 바람이 지나간 듯하였습니다 / 雨化風行
돌아와 이를 체험해서 / 歸來體驗
이미 진실하고 평이하였습니다 / 旣實且平
독실히 믿고 확충하와 / 篤信充擴
여러 봉사들을 자세히 가르치니 / 指掌群盲
그 규범을 헤아려 보면 / 揆厥模範
실로 선생에게서 나왔습니다 / 實出先生
일찍이 우리 서원을 방문하여 / 曾過吾院
배알하고 정성을 폈으며 / 展謁伸誠
물러가 여러 어린이들을 권면하여 / 退勖諸幼
나아갈 길을 거듭 가르쳤습니다 / 申指行程
이에 높이고 사모하여 / 于今景慕
올려 배향함이 참으로 정당하옵니다 / 躋配惟貞
공경히 처음 제사함을 아뢰오니 / 齊告始事
사문이 길이 형통할 것입니다 / 斯文永亨
硏經書院請額疏[乙亥十月] ( 硏經書院請額疏[乙亥十月] )
伏以[臣]本愚㝠。學未有聞。悲歎窮廬。朝暮待盡。迺於頃者。竊聞本道觀察使關。據禮曺奉承傳行移。若曰近來師友之教專廢。學校勸奬之事。依法爲之。可也。未知教官訓蒙着實爲之乎。别加飭勵。以恢勸奬之道。雖或法典之外。亦爲禀行也。云云。噫。聖主之所以畱意於斯文也。至於如此。誠作人興化之盛德也。[臣]竊誠歡誠喜。以爲三代教化。何幸於吾身親見也。旋聞觀察使關。又以備邊司啓下。各官書院。獘端滋蔓。其所屬人口。幾何。曁賜額與未賜額。查覈狀啓也。云云。噫。廟堂之所以鄙薄於儒生也。至於如此。此又傷風敗教之一端也。臣竊私憂過計。以爲叔季澆漓。不幸於吾身遂見也。憂喜交深。不知所定。敢冐萬死。請獻其說。㐲願殿下試垂察焉。嗚呼。凡天下國家。書院之設。初非偶然也。昔在三代之隆。家有塾黨有庠州有序國有學以造士。降及後世。教化崩壞。國學鄕校。僅有文具。家塾黨庠。其制遂絕。何幸南康創建白鹿洞書院。以爲國庠。宋朝因之。遂有四大驛送九經。官其洞主。及其南渡。百戰搶攘。猶尙書院。處處增置。御書扁額。祠祀聖賢。奬勸封植。如恐不及。盖不假有廟。則無所矜式。不加崇奬。則無以示後故也。雖以胡元之蠢爾。而亦立太極。以倡道學。逮于大明當天。遍置天下。使隱求之士。講道之倫。抱負墳典。得以蔵修。而出爲世用。尊主庇民。作成之效。於斯爲盛。是則士之爲學。非惟得力於書院也。國家之得人。亦必由於書院。故知道之士。願治之主。莫不於是乎眷眷焉。此歴代書院。皆所以廣教思敦化源。以續夫三代黨庠之遺制也。惟我國家。雅尙文治。其於迪教。一遵華制。有學有校。而先儒臣周世鵬。又倣中朝書院。廼建於白雲洞。一如朱熹白鹿洞故事旣立規範。又祀鄕賢。事聞。自上命名紹修。作記刋下。加賜書籍。以示榮寵。於是。凡大小州縣。聞風興起。爭立書院。敦尙詩書。以賁王化。此則我朝書院之教。無愧宋朝。有光上國。實東魯萬世之宏模也。豈不盛哉。不幸亂離。規範廢墜。士習日卑。不務藏修。惟事游嬉。徒爾哺啜一味荒怠者。間或有之。至使議者。肆作指目。直欲上聞。一切革罷。然後己焉。誠可歎也。噫。千巖萬壑。琳宮梵宇。無君無父。不知幾何。而莫之或禁。惟吾學爲忠孝。蔵修道德者。絕無僅有。乃反剥之。至於斯極。不亦異乎。㳟惟方今聖上臨御。其於經世之務致治之道。無不講究深思。爲國之本。在於先立教化。夫旣畱意於學校之政。而遂以禀行法外。别加飭勵。丁寧爲教。則凡在廷之臣。所當依聖教。有可以闡揚斯文者。雖在於法典之外。乃敢討論。隨事陳達。有以作興。可也。况此書院。乃三代盛時之所遺制。歷代帝王之所封植。先朝列聖之所奬勸。古今大賢之所尊崇。顧惟聖明之世。方興學校之政。而獨於書院之教。非惟不爲之崇奬也。廼反比擬於宮家圡豪之無忌憚作弊者。與之同科。遂爲查覈。而其在宮家。則聖上猶慮夫有乖於親愛之道。而不之問也。至於書院。則廟堂不恤其有垂於勸奬之道。而迺首加焉。是則廟堂之所以待儒生者。亦不可謂不鄙薄也。其可乎。嗚呼。書院亦學宮也。雖末流不能無獘。而夫旣名之曰學宮。則須是維持點檢。革其舊而新是圖。可也。其於古今天下。寧有查覈學宮底道理乎。而况查覈二字。近於苛刻。若施於宮家圡豪。則彼有以自取之。固其所也。倘加於所謂學宮。則事不近情。言不中倫。噫。此豈盛世興邦之一言而爲依法勸奬之美事乎。然而其所以囘啓者。又未嘗敷陳書院與學校同爲學宮。而學校則隷於官府。拘於學政。而有科舉利祿之誘。書院則利於幽貞。專於講道。而爲學者藏修之所。故凡老師宿儒之學以爲己者。則不之學校而樂就於書院焉。要使書院學校。並加崇奬。一以講明道學。爲學者立心之本。一以課試舉業。爲士子出身之路。其於義理兩不相悖之意。迺精白以聞。而只以未能卒然革罷爲辭焉。其所以措語者。似若有不得已姑存於今日。而且將不得不革罷於異日者然。噫。此又豈禀行法外之聖㫖而别加飭勵之美意乎。雖然。天之將喪斯文。則己。天之未喪斯文。則所謂書院。實斯文義起之學。而乃古今賢士之所關也。雖在於權奸當國禁錮僞學之世。而未甞聞有查覈書院之令。雖在於執政惡儒諭使勿言之日。而亦未聞有査覈書院之請。盖上畏天命。下懼斯道。而有不得自肆也。豈可於今日堂堂聖明之下濟濟廟堂之上。而遂爲此前古所無之事。乃反爲笑於搶攘之南宋蠢爾之胡元乎。大抵所謂書院學校。制雖有異。義則同歸。自上誠欲興學校。立教化。以爲爲國底道理。則必也推聖上正心之學。以之朝廷。以之萬民。而其於學校。一遵學令。其於書院。一遵院規。所謂學之長官院之山長。亦須皆得其人。使之倡率諸生。相與講明正學。以蓄其德。以熟其仁。則嚮之荒怠者。無不相勸。昔之游嬉者。無不相戒。有以相觀。蔚然並興。其出而進於場屋也。其文必皆道其平日之學胸中之藴。而不詭於聖人。其出而進於仕路也。其行必皆共其職。勤其事。心乎國。心乎民。而不爲身計。其於爲天下國家也。亦無所處而不當矣。其所以轉移之機。顧力行如何耳。抑何必區區於査覈然後。始有以革其獘耶。若果能是道。則聖教所謂師友之教。始可得以不廢。訓蒙之學。亦可得以着實。而其於爲國家樹根本之道。其亦庶乎其可也。㐲願殿下幸垂察焉。且臣抑有所惑。敢復請獻。盖所謂查覈者。若只是查覈所屬。則慮其濫觴之獘。而出於酌損之義。猶之可也。今廼並與扁額之賜未賜查覈也。則朝廷之意。其於賜與未賜也。合有分别處置之道。而不但已也。國言洶洶。士論嘵嘵。咸以爲稷下甘陵基禍兆。此相顧錯愕。莫不疑懼。噫。此於風化。亦豈無所傷。而其在明時。又不可謂非一不祥之爻象也。臣伏未敢知其所以査覈者。其於未賜額之書院。則又將命賜。有以勸奬之意耶。抑未知一如議者之見。遂爲草罷之計耶。若非有革罷之計。而復有以奬勸之意。則其亦有說。盖古之書院。有有祠者。有無祠者。有祠道學者。有非道學而亦祠之者。又有非其鄕賢而其道德可爲師範。則其遺塵播馥之地。遺躅彷彿之處。爲之立祠。以爲多士之勸者。如永嘉書院。中先聖東伊洛而西祠鄕賢。涪溪書院。中先聖而左祠元結顔眞卿。絃歌書院。以武城之同名而祠子㳺。此類非一也。雖然。書院本爲明道學而設。人非道學。則其廟祠恐亦未安也。至於後世。道學不明。人私其身。士私其學。各尊所師。咸立祠宇。不問輕重。通稱書院。是則議者之所以指目與廟堂之所以査覈者。其亦有以也。雖然。誠有聖人愛禮存羊之意。則又不可於一朝。迺見刖而廢屨。因噎而廢食也。臣愚竊以爲若於一世之公論一國之所宗者。則稱以書院。等視於學校。而其已賜額也。則㪅加飭勵。使之復新。如未及賜額也。則㪅命宣賜。又使之作興焉。苟非一世之公論一國之所宗也。則依古者鄕先生没而祭於社之義。遂爲社學。稱以書齋。以續夫三代家塾之遺制。而亦皆勸奬。使有以成就。則不加查覈。自然區别。而其於書院。不患其貽獘於一邑。而惟患其道學之不講也。其於書齋。不患其貽獘於鄕閭。而惟患其訓蒙之不端也。惟是道之以德而齊之以禮。惟詩書是習。惟仁義是修。則其爲士者。有耻且格。雖或賞之。亦不爲獘。而羣疑自釋。衆志廼定。咸知向上。有所歸宿矣。此於聖教所謂禀行法外别加飭勵之道。夫豈曰小補之哉。竊惟本道古稱文獻。而大邱一府。實惟中處。迺一道之所會。四方之所視也。往在嘉靖癸亥。府下之士。亦建書院。號曰硏經。其後乃奉安文純公臣李滉。而配以文穆公臣鄭逑。盖李滉道德全僃。學問醇正。矜式一國。宗師百世。而嘗爲斯院。經理措畫。規範警切。怳若親炙。鄭逑。則早從李滉。得傳其學。而重新斯院。更完規範。故是崇是奉。以祀以配。掲䖍妥靈。遂爲師範。只是寂寞空山。精廬數間而已。守直老殘。流民十許而已。别未有募屬良丁貽獘於公家。而其淸芬剰馥。自有播及於風化之萬一焉。此亦固當依他書院。上聞於朝廷。表章於後世。其亦可也。嚮使朝廷。知有此院。乃在於廵營之下。爲多士依歸之所。而實惟四方之所視效。一道之所矝式也。則其所以祟奬激勵者。又豈在於他書院之後也。惟是建院雖舊。立祠未乆。而無人闡揚有以上達。故李滉所祠。若陶山伊山等諸書院。則無不獲被宣賜之寵。昭掲華額。得以榮耀於文明之世。而惟此硏經。獨爲沉滯。迄至今。猶且昧昧。名不載於國乘。事不經於朝命。而其於查覈所啓之狀。介於未及賜額之列。號各不重。人望不尊。體面埋没。氣象蕭索。雖在於廵營之下實多士依歸之所。而旣無以聳四方之觀聽示一道之效法。又無以立表準於當時爲可傳於後世。規範日就於陵替。生徒漸至於怠散。末由收拾乃復㪅張。此誠昭代之一大欠典。士林之一大遺憾。而抑亦斯文興廢。實關時運。意者。天必有待於今日也。臣竊㐲念兹者聖化維新之下。宜其德教之大行禮讓之彬彬也。而廼反貪鄙成風。節義掃地。邪說撗流。道學榛蕪。此又豈非朝廷之所當深憂而明主之所宜軫念者乎。倘於萬機之暇。欲爲更張有以振作。則非但奬勸學校之政。飭勵訓蒙之事。而爲可得也。其要實在於奬勸節義。倡明道學。以立標準。以正士趍。此又臣愚之所以仰思俯歎。竊獨有慕於李滉之道德學問。而請有以更加封植也。昔者。宋臣周述守江州。朱熹守南康。俱爲白鹿洞乞賜勅額。及朱熹入對也。宋帝委曲訪問。悉從其請。我朝[臣]沈通源。觀察本道。爲白雲洞請賜扁額。其後監司。又爲諸書院。有以啓請。蒙被允兪。皆許施行。扶樹教道。以衛斯文。若如議者指目。云云。一切査覈。遽欲革罷。則將何以培養士氣。能壽其國脉乎。脫使文風殄滅。士氣摧折。則欲立教化。本實先拔。以古準今。得失較然。毫差千里。此之謂也。伏願殿下。鑑前代帝王之所以眷眷於書院。而無有惑志於議者指目之謬見焉。體先朝列聖之所以眷眷於書院。而别加飭勵乎李滉道德學問之醇正焉。於臣所謂硏經書院。亦惟特命宣賜扁額以寵榮之。又命匡直輔翼以振德之。有以扶樹國家宏模。表章萬世師範。使入院之士。一遵院規。必先小學。以定根基。次讀學庸語孟。以立規模。以發歸趣。而其所以眞知力行希聖希天者。惟李滉是則。聳動四方。皷舞多士。轉相興慕。咸被陶甄。則斯文再起。士氣復振。而可以扶持國脉。永世無彊矣。又安知不復有豪傑之士。乃出於此院之中。有以輔佐國家。期臻至治乎。如是。則所謂教原於君上。而士樂於來遊。以賁揚聖朝右文之化者。庶可以趾美於前代矣。如是。則所謂吾東方節義之盛。道學之明。且將與鄒魯閩越。同其美稱者。亦可以復見於今日矣。如是。則斯院也。又不但只爲一邑之學一道之學而已也。必也與諸書院。同爲國庠。垂耀無極。學者益有所依歸。士風益有所丕變。而聖教所謂師友之教。非但不廢。且將大行也。訓蒙之事。非但着實。且將大成也。其於聖治。亦未必無小補也。㐲惟殿下特加畱神焉。[臣]雖愚㝠。心則無他。深懼三代遺制。一墜委靡。不可復振。又恐先儒書院。遂至埋没。無所矜式。出位犯分。敢冐區區。[臣]無任激切屏營之至。
『투암선생문집』은 채몽연(蔡夢硯 ; 1561~1638)의 시문집이다. 채몽연의 자는 정응(靜應), 호는 투암(投巖)이다. 이 중 소에는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대한 「청액소(請額疏)」가 있는데, 그 결과 사액(賜額)을 윤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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