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성은 김(金)이고, 이름[諱]은 덕만(德曼, 德萬이라고도 함), 시호(諡號)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632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 때 백성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로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632년(善德王 원년)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고, 겨울에는 각 지방에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휼하였다.
634년(善德王 3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영묘사(靈廟寺)가 낙성되었다.
636년(善德王 5년)에는 이찬(伊湌) 수품(水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였으며, 자장(慈藏)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또한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기 위해 몰래 침투해 왔으나, 왕이 이를 미리 알고 알천(閼川)을 보내 습격하게 하여 몰살시켰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이 해에 병이 들어서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여는 등 불법(佛法)의 힘으로 병의 회복을 기원하였다.
637년에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알천(閼川)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638년(善德王 7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왔으나, 대장군 알천이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지금의 강릉 지방인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만들고, 사찬(沙湌) 진주(眞珠)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640년(善德王 9년)에는 당 나라로 유학생을 보냈다.
642년(善德王 11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唐)으로의 통로인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았고, 대야성(大耶城)마저 백제에게 함락되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백제의 잇따른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선덕여왕은 이듬해(643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고,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 해에 당 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644년(善德王 13년) 여왕은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김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善德王 14년) 자장의 요청으로 황룡사 탑을 세웠으며,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그 해 여름에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자, 여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해 이를 도왔다. 하지만 백제가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7년(善德王 16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8월에 선덕여왕은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진평왕(眞平王)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국반(國飯, 國芬이라고도 함)의 딸인 승만(勝曼)이 그 뒤를 이어 왕위[진덕여왕(眞德女王)]에 올랐으며, 이듬해(眞德王 원년) 정월 17일에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어 비담(毗曇) 등 30여명이 처형되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도 힘썼다. 유학생을 파견하고,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보내 불법을 들여오는 등 당 나라 문화의 수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고,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데려와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632년(善德王 원년) 2월에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고, 겨울에는 각 지방에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휼하였다.
634년(善德王 3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였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영묘사(靈廟寺)가 낙성되었다.
636년(善德王 5년)에는 이찬(伊湌) 수품(水品)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였으며, 자장(慈藏)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또한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기 위해 몰래 침투해 왔으나, 왕이 이를 미리 알고 알천(閼川)을 보내 습격하게 하여 몰살시켰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이 해에 병이 들어서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여는 등 불법(佛法)의 힘으로 병의 회복을 기원하였다.
637년에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알천(閼川)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였다.
638년(善德王 7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해 왔으나, 대장군 알천이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지금의 강릉 지방인 하슬라주(何瑟羅州)를 북소경(北小京)으로 만들고, 사찬(沙湌) 진주(眞珠)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640년(善德王 9년)에는 당 나라로 유학생을 보냈다.
642년(善德王 11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唐)으로의 통로인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았고, 대야성(大耶城)마저 백제에게 함락되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백제의 잇따른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선덕여왕은 이듬해(643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고,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 해에 당 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644년(善德王 13년) 여왕은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김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善德王 14년) 자장의 요청으로 황룡사 탑을 세웠으며,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그 해 여름에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자, 여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해 이를 도왔다. 하지만 백제가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7년(善德王 16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8월에 선덕여왕은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진평왕(眞平王)의 동복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국반(國飯, 國芬이라고도 함)의 딸인 승만(勝曼)이 그 뒤를 이어 왕위[진덕여왕(眞德女王)]에 올랐으며, 이듬해(眞德王 원년) 정월 17일에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어 비담(毗曇) 등 30여명이 처형되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도 힘썼다. 유학생을 파견하고,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보내 불법을 들여오는 등 당 나라 문화의 수용에도 힘을 기울였다.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고,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데려와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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