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북 영덕]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장군 생가지

장안봉(微山) 2012. 12. 15. 16:00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장군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태호(泰浩)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살해 사건과 단발령(斷髮令)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寧海)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896). 1905년에는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늑)약’(乙巳條約 / 乙巳勒約 양국의 평등한 조약이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임을 뜻함)을 체결하자 또다시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애국적 의분을 대일항쟁으로 쏟았다.

처음에는 의병 100명을 모아 영릉의병장(寧陵義兵長)의 이름으로 출발하였다(1906). 4월에는 울진 장흥관에서 일본군선 9척을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하였다. 이어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그들이 전선을 가설하는 작업을 공격하여 방해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울진 수동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증모하였고, 그 병력으로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켰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의병을 자청하여 약 3,000여 명이 증가하였다. 일본군이 강력한 의병 소식에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대일 전투를 벌였고, 청하로부터 조현(鳥峴)에 이르러서도 적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소항을 지나 대동(大洞)으로 진출하였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였다.

전국의 의병은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하여 양주(陽州)에 집결하였다(1907. 12).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양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당시 의병은 양반이나 유생 출신이 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1908. 1). 1908년 3월에는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세력을 강화하고,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도 평해 한곡에서(7월), 희암(9월)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활약한 후, 겨울이 되어 다음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키고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의병인 김상열(金相烈)의 집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형제들이 모의하여 그만 신돌석을 타살하고 말았다(1908).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신돌석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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