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북 안동] 마음의 고향 오천 군자리-1

장안봉(微山) 2012. 12. 15. 15:55

오천 군자리(烏川 君子里)

곳은 조선 초기에 광산김씨 예안파의 파조이신 농수 김효로( 聾金孝盧)공이 입향한 이래 그 후손들이

약 20대 600여년에 걸쳐 세거해 온 마을로 세칭 오천 군자리(烏川君子里)라 불리는 문화유적지 이다.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이 '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아닌 사람이 없다'하여 군자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특히,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오천출신의 일곱 인재를 오천칠군자로 불렀는데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산남공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월당 김부륜,일휴당 금응협, 면진재 금응훈 등이다

 

이곳의 건물들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구 예안면(舊 禮安面) 오천리(烏川里)에서 집단이건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탁청정(濯淸亭, 중요민속자료 제226호)과 후조당(後彫堂, 중요민속자료 제227호)은 국가문화재로, 탁청정종가(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호)와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 그리고 침락정(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40호)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후조당 김부필 ( 後彫堂 金富弼 )1516(중종 11, 병자)~1577(선조 10, 정축)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다. 약관에 이미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있으면서 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36세에 처음 퇴계 선생의 문에 이르러 퇴계와의 각별한 사제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퇴계의 사후에 심상 1년을 했다고 한다. 퇴계의 제자가 된 지 수년이 지났을 무렵 퇴계는 그에게 “그대는 관도에 오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지만, 일차 상경하여 임금을 한 번 배알한 뒤에 마음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서신을 보내 왔다. 그에 대해 후조당은 “벼슬을 뜬구름으로 여긴다.”는 시로 답하여 사양하였다. 그의 저서로 『후조당문집』이 있으며, 퇴계는 그의 주자학 연구가 자못 깊고 정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크게 감탄하여 그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연히 공과 모여 의혹되었던 바를 연구함으로써 전날에 잘못 이해하였던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되어 기쁘다”고 했고, 또 간재 이덕홍에게 이르기를 “애당초 피서할 곳이 없어 김언우(후조당) 등 여러 사람의 권유로 말미암아 서원으로 갔는데 차츰차츰 십여 인이 모여 함께 <심경>을 읽으며 강론하는 사이에 개발한 바가 많아서 바야흐로 옛날에 애매하고 잘못 알았던 곳이 적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1762년(영조38) 사림에서 낙천사(洛川祠)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후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사당의 이름을 ‘경현사(景賢祠)’라 했다. 1822년(순조22)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문순공(文純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후조당에 보존되었던 유물로 교지, 호구단자, 혼서, 분재기, 입양문서 등과 문헌이 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이다

 

 

 
탁청정 김 유 (濯淸亭 金 綏) 1491(성종 22, 신해)~1555(명종 10, 을묘) 
자는 유지(維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며, 생원이 되었고, 활쏘기에도 능하여 무과에도 서너 번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평생 독서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부모를 직접 모시면서 아침에 일어나 문안드리고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드리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가 세운 탁청정은 그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하여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낙성연에 초대된 퇴계가 강 건너에서 그 모양을 보고 ‘선비의 집이 너무 호사스럽다’고 하여 오르기를 꺼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때 남긴 퇴계의 친필 시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탁청정 현판은 당대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이 현판은 그 획과 점들이 듬직한 가운데 글자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느낌을 준다. 이 현판을 쓸 때의 설화가 전한다. 「탁청정의 현판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자 한석봉은 지체 없이 하경하여 탁청정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탁청정 현판감을 벽상에 걸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워낙 자신에 찬 글씨 솜씨라 벽상에 걸어놓은 판자에 탁청정 석자를 쓰고자 한 것이다. 그는 붓에 먹을 듬뿍 묻힌 다음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아니꼽게 본 문중의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 발길로 사닥다리를 걷어찼다. 여느 사람 같으면 마구 바닥에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때 명필 한석봉은 마침 ‘濯’자 둘째 점을 찍는 찰나였다. 그리고 그 점을 찍은 붓이 판상에 박혀 한석봉은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탁(濯)’자 둘째 점을 보면 특히 그것이 굵고 힘있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때 한석봉이 힘을 거기에 싣고 몸을 매단 자취라는 것이다.」 물론 위의 설화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며 명필 설화의 일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형과는 달리 벼슬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그를 찾는 빈객을 충심으로 접대하였다. 비록 평생을 고향에서 지냈으나, 경향간에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 한강 정구 등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 시를 짓고 글을 논했다. 그가 남긴 한문필사본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 가운데 하나로 총 121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각 항목의 서술내용이 재료의 사용에서 조리, 가공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여 당시 안동 주변의 식생활 형태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의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퇴계 이황이 묘지명을 지었으며, 뒷날 아들 산남 김부인의 현달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탁청정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읍청정 김부의 ( 揖淸亭 金富儀 )1525(중종 20, 을유)~1582(선조 15, 임오) 

자(字)는 신중(愼仲), 호(號)는 읍청정(揖淸亭 ). 연의 차자(次子). 퇴계 선생의 문인이며 1555년(명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천거(薦擧)로 사첨낭집경천참봉(司瞻郎集慶殿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사양함. 역동서원(易東書院) 창건시 서원(書院) 일을 주관하여 산장(山長)에 천거되리 만큼 사림(士林)에 신망을 받았다. 저서에「읍청정유고(揖淸亭遺稿)」가 있다.

 

 

설월당 김부륜 ( 雪月堂 金富倫 )1531(중종 26, 신묘) ~ 1598(선조 32,무술)

자(字)는 돈서(惇敍) 호(號)는 설월당(雪月堂). 부인의 제(弟). 퇴계 문인. 김성일(金誠一)ㆍ 이발(李潑) 등과 교유(交遊). 155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천참봉(慶殿參奉) ㆍ 돈영부봉사(敦寧府奉事) 등을 제수 받았다. 1585년 전라도(全羅道)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하여 향교(鄕校)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을 구입하는 등 지방교육 진흥에 많이 공헌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가산(家産)을 털어 향병(鄕兵)을 지원하였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설월당(雪月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로 「설월당문집(雪月堂文集)」이 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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