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녕[方有寧]
1460(세조 6)∼1529(중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군위(軍威). 자는 태화(太和), 호는 무기당(無期堂)·주탄(舟灘). 중랑장(中郞將) 을상(乙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형조참의 사우(思友)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중지(仲止)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봉례랑(奉禮郎) 승도(承道)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오르고, 14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청환(淸宦)에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파직당하였으나 다음해 4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등용되었고 1506년(중종 1)제주목사를 거쳐 함경남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512년 8월 좌부승지에 오르고 1515년 대사헌이 되었다. 1517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가 되었으나 속히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다음해 7월 성절사(聖節使)로 질정관(質正官) 최세진(崔世珍), 서장관(書狀官) 한충로(韓忠盧) 등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0년 병조판서에 특차되었으나 신진사류의 탄핵으로 병조참판으로 강등되었고, 1522년 군기(軍機)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2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 임명되었다. 벼슬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사헌부에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를 제거하려는 일파에 가담도 하였다.
무기당 방유녕 신도비
방유녕 묘역 전경
방유녕 묘 전경-뒷쪽의 봉분은 아버지 방중지(方仲止)의 묘이다
방유녕 묘갈-주세붕이 찬하고 청송 성수침이 썼다
병조판서무기당방선생지묘갈명-주세붕 撰, 창녕성수침 書이다
주세붕이 찬한 방유녕 묘갈 번역본(국조인물고해제 인용)
공의 휘(諱)는 유령(有寧)이요 자(字)는 태화(太和)이니, 군위인(軍威人)으로, 7대조 휘 방적(方迪)은 고려의 태상경(太常卿)이다. 고조 휘 윤용(允龍)은 예빈시 정(禮賓寺正)이요, 증조 휘 을상(乙詳)은 중랑장(中郞將)이며, 조부는 증(贈) 형조 참의(刑曹參議) 휘 사우(思友)요, 고(考)는 증 병조 참판 휘 중지(仲止)이니, 모두 공이 귀히 됨으로써 추작(追爵)한 것이다. 비(妣) 문씨 부인(文氏夫人)은 봉례랑(奉禮郞) 문승도(文承道)의 따님이니, 고려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후예이다. 공은 천순(天順)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 10월 임신일(壬申日)에 태어나서 가정(嘉靖)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 2월 경인일(庚寅日)에 졸하여 서울에서 합천(陜川)으로 귀빈(歸殯)하였고 11월에 선영(先塋)인 우산(于山)의 자좌 오향(子坐午向)에 장사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여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기유년(己酉年, 1489년 성종 20년)에 급제하여 연산조에 벼슬이 사성(司成)에 이르렀고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 11월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으며, 돌아와서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대사헌이 되기에 미쳐 신진(新進)들의 탄핵을 받았는데, 당초에 김응기(金應箕)공이 우의정이 되자 사헌부에서 바야흐로 탄핵을 하려 하므로 공이 대사헌 최숙생(崔淑生)에게 말하기를, “김응기를 탄핵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매 최숙생이 중지시키려 하니, 신진들이 최숙생을 탄핵하였고 공이 후임이 되자 공까지 탄핵하게 된 것이다. 경진년(庚辰年, 1520년 중종 15년)에 병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하였는데, 또 신진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전후로 병조 참판만 5년을 지냈다.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찬성(贊成) 이원(李沅)이 개령(開寧)으로 성묘를 왔을 때 공이 병으로 문안을 못하였더니 그로 인해 파직이 되었고 그로부터는 성균관의 동지(同知)로 있었다.
공은 지지당(止止堂) 김 선원(金善源, 김맹성(金孟性))과 점필재(佔畢齋) 김 문간공(金文簡公,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는데, 두 분은 매양 공의 독실함을 칭찬하였다. 나 주세붕(周世鵬)이 처음 등제했을 때에 고을의 후배로서 장의동(藏義洞)의 집으로 공을 찾아뵙고 종신토록 간직할 수 있는 말을 청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마음으로 스승을 삼으면 이것이 영능(靈能)이니, 스스로 선악(善惡)을 알게 된다네. 굳이 질정하자면 선은 힘써 행하고 허물은 반드시 고칠 것이며, 그 둘 사이에서 의심스러워 선택하여도 정밀히 할 수 없는 것은 차라리 일체 딱 끊어서 악에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네.” 하였다.~.......생략
무기당 방유녕의 아버지 증병조참판방중지(方仲止)의 묘 전경
군위방씨[軍威方氏]
군위(軍威)는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노동멱현(奴同覓縣: 일명 如豆覓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적라현(赤羅縣)으로 개칭하여 효령현(孝靈縣)·부림현(富林縣)과 함께 숭선군(崇善郡: 善山)의 관할이 되었다. 군위현(軍威縣)의 명칭에 대한 일설로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날 때 고려군의 위세가 당당함을 칭송하기위해 촌장에게 군위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018년(현종 9)에는 군위·효령·부계현(부림현)이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으며, 1143년(인종 21) 일선군(一善郡 )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1390년(공양왕 2) 효령현은 군위현으로, 부계현은 의흥군(義興郡)으로 각각 통합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의흥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 1896년(고종 33) 군위현(軍威縣)과 의흥현이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과 의성군의 일부가 군위군으로 병합되었다. 1979년에는 군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시조(始祖) 방적(方迪)은 고려조(高麗朝) 태상사경(太常寺卿)을 역임했다. 나라에 공(功)이 있어 군위군(軍威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모시고 본적을 군위(軍威)로 정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군위방씨 시조 제단 성지
고려태상경군위군방적(方迪)제단비
군위방씨2~6세 제단비
군위방씨시조제단에서 바라본 방유녕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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