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이기론)

[스크랩] 장풍법

장안봉(微山) 2013. 3. 24. 22:32

명당 가운데서도 혈장(穴場)을 잡는 것이 목적인 풍수에 있어서 명당 주위의 지형(地形), 지세(地勢)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풍수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명당 주변의 지세에 관한 풍수이론을 통칭하여 장풍법이라고 하며, 결국 장풍법을 통하여 정혈(定穴)도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실제로 도읍이나 주택 혹은 음택(陰宅)을 상지(相地)함에 있어서는 장풍법이 바로 요체(要諦)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장서(葬書)에 의하면‘장자(葬者)는 생기(生氣)에 의지해야 한다.’하였는데 이는 ‘음양의 기는 내뿜으면 바람이 되고, 오르면 구름이 되고, 분노하면 우뢰가 되며, 떨어지면 비가 되고, 땅 속을 흘러 다닐 때는 생기가 된다.’하여, 풍(風)이나 생기를 모두 음양이기(陰陽二氣)로부터 생겨난 동질이체(同質異體)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음양이기라는 것도 장서(葬書)에 의하면 원래 하나의 기가 오르내림에 따라 음양이란 이름을 가진 것일 뿐으로 양이란 음의 체(體)요, 음은 양의 용(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기가 바람을 타면 흩어져 버리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葬者)가 생기를 얻을수 있도록 하는 법술(法術)을 바람과 물, 즉 풍수라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 장서(葬書)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풍수의 법술은 물을 얻고 바람을 막는 방법을 얻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바람은 지중(地中)에서 발생하는 생기를 흩어버리므로, 생기를 포용하고 음양의 원기(原氣)를 지닌 바람을 잡아 모을 수 있다면 풍수가 노리는 목적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장풍의 필요성이 생긴다. 이것은 바람을 막는 것[방풍(防風)]이 아니고 불어서 흩어지고 사라져 가는 바람을 잘 끌어들여 간수하자(장풍)는 의미로 보아야겠지만 실제 상지(相地)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혈장 주위를 산이 둘러싸고 그 중앙의 요지(凹地)에 음양이기의 결합과 생기의 활동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장서에서는 ‘古人聚之使不散 行之使有止’라 표현하였다.

혹은 장풍법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음내양수(陰來陽受)라는 원칙에 의하여 철형(凸形)으로 이어내린 내룡(來龍)을 요형(凹形)의 지세로 받아들여 그 요형 지세의 중앙에 혈을 정하는 것이 음양조화에 맞으므로 그것을 찾는 방법이 장풍법이라는 견해이다.

철형(凸形) 음내(陰來)의 내룡과 요형(凹形) 양수(陽受)의 중앙분지가 마주치는 곳에 생기가 넘쳐 흐르리라는 판단일 것이다.
이 때 혈 주위의 산세를 풍수에서는 사(砂)라 칭한다. 산수도(山水圖)에 의하면 ‘사(砂)란 혈의 전후좌우에 있는 산’이라 하였다.

사신수(四神獸) 관념(觀念)은 전통적 짐승인 청룡(靑龍) · 백호(白虎) · 주작(朱雀) · 현무(玄武)가 동서남북 혹은 전후좌우 방향을 수호해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본래는 수호성신(守護星辰)의 이름으로『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기타 위서(緯書) 등에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이는 고대 중국인의 천문사상(天文思想)의 영향인 것으로 후에 풍수의 혈처 사방의 산세에 빙의(憑衣)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사신수 신앙은 이미 풍수 전래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이며 고구려, 백제의 분묘(墳墓) 벽화(壁畵)의 사신도(四神圖)가 이를 증명한다.
장서에 의하면 사신사(四神砂)의 위치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라 하여 혈(穴)이 남향 즉 자좌오향(子坐午向)을 한 경우 동쪽이 청룡, 서쪽이 백호, 남쪽이 주작, 북쪽이 현무가 되는 셈이다.

한편 복응천(卜應天)은 『설심부(雪心賦)』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고인(古人)이 사수(四獸)로 사방을 나누던 것이다. 청룡은 목(木)에 속하여 동방(東方), 백호는 금(金)에 속하여 서방(西方), 주작은 화(火)에 속하여 남방(南方), 현무는 수(水)에 속하여 북방(北方)이 된다.

고 하였다.

먼저 현무사(玄武砂)의 경우를 보면, 여기에 해당하는 혈 뒤쪽(남향인 경우 혈의 북쪽)의 산으로는 태조산(太祖山)으로부터 맥세(脈勢)를 일으킨 용이 중조산(中祖山)을 거쳐 혈 바로 뒤의 소조산[小祖山 후산(後山) 혹은 주산(主山)이라고도 이르고 마을의 경우 진산(鎭山)이라 하기도 함]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현무와 주작의 관계는 주인과 손님, 남편과 아내, 임금과 신하의 사이처럼 인식된다. 이것은 음내양수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현무가 머리를 들어밀듯 음내(陰來)로 다가오는 것을 손바닥을 오므린 듯한 양수(陽受)의 주작이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그 형세는 현무는 머리를 곧추세우고 의연히(玄武垂頭) 그리고 주작은 춤을 추듯 부드럽게(朱雀翔舞)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현무 주작의 관계가 음양의 조화로 생기를 얻는데 있는 것인 만큼 주작이 산이 아니라 물의 경우에도 가할 수 있음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수주작(水朱雀), 즉 양내음수(陽來陰受)는 술법상 득수법(得水法)에서 다루게 된다. 이럴 때는 산인 현무가 양이 되고 수(水)인 주작이 음이 되어 양내음 수의 원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사신사(四神砂) 중에서도 생기와 직접 관련되는 현무 주작이, 생기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그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청룡 백호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

주작에는 주산에 대응하는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의 두가지가 있다. 조산은 주산에 대하여 주인에 대한 손님, 임금에 대한 신하, 남편에 대한 아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이므로 공손히 절하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특히 단정(端正) 청수(淸秀)해야 좋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본다.

그러나 주산에 비하여 조산이 지나치게 얕거나 산체(山體)가 작으면 재상(宰相)이 되거나 만석거부(萬石巨富)가 되어도 항상 부족감, 불만감을 갖게 된다고 하여 역시 균형이나 조화를 잃지 않도록 설득한다. 반대로 조산이나 안산이 주산보다 지나치게 높거나 크면 오히려 주산과 혈장을 눌러 무세(無勢) 무력(無力)하게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조산(朝山)의 용(用)은 다음과 같다. 산형(山形)이 청수(淸秀)한 문필봉(文筆峰)이면 문장현세(文章顯世)의 선비가, 둥글면 거부(巨富)가 나오고, 그릇에 놓인 과일이나 떠오르는 보름달 같으면 부귀다남(富貴多男)한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토성체(土星體)를 제일, 금성(金星) · 목성(木星)을 다음으로 친다.

수성(水星)이나 화성(火星)은 다른 성체(星體)와 결합하여 장형(帳形) 혹은 귀인형(貴人形)을 이루어야 좋다.

풍수에서는 산의 모양을 나타낼 때 ‘성(星)’또는 ‘요(曜)’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늘에 있는 성요(星曜)가 지상에서 형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성체(星體)는 오성(五星)과 구요(九曜)가 기본이 되고 또 변격(變格)되어 다양한 형상을 나타내게 된다. 오성이란 금성, 목성, 수성, 화성, 토성의 다섯가지 성진(星辰)으로 곧 오행(五行)을 말한다.

『인자수지(人子須知)』에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태극(太極)이 나뉘어 음양이 되고 음양이 오행을 생(生)하고 오행이 만물을 생(生)한다.

고로 오행의 정(精)은 하늘에 매이고 오성의 형(形)은 땅에 있어 오재(五材)가 되었으며 기운(氣運)은 세(歲)에 거느려 오진(五辰)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오장(五臟)이 되고, 물건에 있어서는 오색(五色 : 청 · 황 · 적 · 백 · 흑), 오음[五音 : 궁(宮) · 상(商) · 각(角) · 치(徵) · 우(羽)], 오미[五味 : 산(酸) · 함(艶) · 신(辛) · 감(甘) · 고(苦)]가 되며 행(行)에 있어서는 오상(五常 : 부자(父子) · 군신(君臣) · 부부(夫婦) · 장유(長幼) · 붕우(朋友)이 되는지라, 고로 임금이 오운(五運)을 타 관직을 두고 오례(五禮)를 나누고 오형(五刑)을 베풀어 만방을 다스리고 백성이 모두 화순(和順)한 뒤에 이로 인하여 득실을 살피고, 비오고 개이고 차고 더운 것과 눈과 바람, 그리고 동물과 식물 등의 길흉화복의 변화를 보인 것이니, 지리법(地理法)도 마찬가지로 산의 형세로 오성을 분별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경험하는 이치가 당연하므로 오성에 대한 이치를 밝히 알아야 한다.」

고 하였다.

오성의 구분은 혈형(穴形)에 의하여 정하여지는데 금성은 원(圓), 목성은 직(直), 수성은 곡(曲), 화성은 예(銳), 토성을 방(方)을 그 정체(正體)로 한다. 또 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한데 금성은 태백성(太白星)이오, 목성은 세성(歲星), 수성은 진성(辰星), 화성은 형혹성(熒惑星), 토성은 진성(鎭星) 등이 그것이다. 오성에 의한 산형(山形)의 판단은 매우 까다로운 편으로 그 정체에 의하여 추론할 수 밖에 없으며 술사(術師)들의 그에 대한 해석도 무척 구구한 편이다.

예컨대 요금정(寥金精)은 금으로 문성(文星), 목으로 장성(將星)을 삼고, 장자미(張子微)는 금으로 무성(武星), 목으로 장성[역시 무성(武星)]을 삼고, 양균송(楊筠松)은 토(土)로 존성(尊星)을 삼고, 자미(子微) · 금정(金精) 두 사람은 토(土)로 재성(財星)을 삼는 식이다.

이 오성의 변격(變格)으로 이루어진 탐랑성(貪狼星), 거문성(巨門星), 녹존성(祿存星), 문곡성(文曲星), 염정성(廉貞星), 무곡성(武曲星), 파군성(破軍星), 좌보성(左輔星), 우필성(右弼星) 등이 구성(九星) 혹은 구요(九曜)가 된다.


조산(朝山)은 혈장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근조(近朝), 원조(遠朝), 암공(暗拱)으로 나눈다. 가까운 근조는 그 높이가 현무가 입수(入首)하는 두뇌보다 높으면 불길하지만 원조나 암공같이 멀리 떨어진 조산은 하늘 높이 치솟아도 무방하다.

이 때 어디까지를 조산, 즉 주산(主山)의 세력 범위로 보아야 하는가는 오직 내룡(來龍)의 규모에 따르게 되는데 내룡 백리(百里)면 조산 백리, 천리 내룡이면 천리 조산이란 원칙에 따르면 된다.

그러나 술서(術書)에 따라서는 근조(近朝)만을 중시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데 복공(卜公)은 먼 외산(外山)의 천중산(千重山)이 가까운 일개 안산만 못하다 하였고, 먼 데 있는 산이 아무리 수려 장엄하여도 혈장 가까이 있는 조그마한 독봉(獨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요컨대 산세를 미시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거시적으로 보느냐 하는 안목의 차이일 뿐으로 양자 모두 균형과 조화의 산세를 추구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혈전(穴前)에 일반적으로 조산보다 낮고 작은 또 하나의 주작이 안산이다.

안산은 이름 그대로 주산의 책상 혹은 안석(廓案)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은 옥궤(玉廓) · 횡금(橫琴) · 안궁(眼弓) · 옥대(玉帶) · 집홀(執笏) · 안검(按劍) · 석모(席帽) · 아미(蛾眉) · 삼태(三台) · 관담(官擔) · 천마(天馬) · 정절(旌節) · 서대(書臺) · 금상(金箱) · 옥인(玉印) · 필가(筆架) · 서통(書筒) 등과 같으면 좋다고 한다.

안산은 조산의 발치 기슭에 위치함이 보통인데‘端正圓巧 秀眉光彩 平正齊整 回抱有情’하면 길사(吉砂)가 되고 형상이 좋다 하더라도 물에 흘러 날아가 버리듯 혈을 향하여 찌르듯 하면 좋지 않다. 또한 ‘?腫粗大 破碎讒巖 醜惡走竄’하고 혈에 대하여‘反背無情’하면 흉사(凶砂)이다.

혈장으로부터의 거리는 그 명의(名義)에 비추어 안산이 가까이에, 조산이 멀리 있음이 원칙이다.『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에서도

「혈전(穴前)이 주작으로 양명(陽溟8의 이름을 취하는 고로, 혈전 명당이 내양(內陽), 안산이 중양(中陽), 그리고 조산이 외양(外陽)

이라 하여 안산, 조산의 혈전으로부터의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술법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산보다 가까이 있는 안산을 더 중시한다. 조산은 없어도 결국(結局)이 가능하지만 안산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이 까닭이다.

어떤 산서(山書)에는 아예 안산과 조산을 그 산형(山形)에 있어서 동일시하는 경우까지 있는 형편이다. 일반적으로는 위엄이나 격식이 필요한 국도(國都) · 읍성(邑城) · 제릉(帝陵) · 왕릉(王陵)에는 조산이 필요하고 보통의 음택(陰宅), 양기(陽基)에는 조산보다 안산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는 현무의 형세이다. 언제나 수두(垂頭)하여 유정(有情)하여야 하며 꼿꼿이 치솟은 무정의 형태는 혐기(嫌忌)의 대상이 된다. 앙연(昻然)하여 위압감을 주는 산세보다 수그러들듯 온화한 기품의 산세가 길격(吉格)이라 생각한 듯하다.

현무는 그 대소(大小) 여하가 매우 중요한데 역량이 큰 용이 커다란 용혈(龍穴)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현무는 혈 뒤의 모든 산에 대한 총칭으로써 크게 넒은 의미의 내룡(來龍)과 좁은 의미의 내룡으로 구분된다. 넓은 의미는 태조산으로부터 주산을 거쳐 혈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산이 포함되며, 좁은 의미의 현무란 주산으로부터 혈장까지의 산세를 말하는 것이다.

현무사는 내룡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之) · 현(玄)’자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고 분맥(分脈)을 치며 내려오는 것이 좋고 고직(孤直)한 형세는 좋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좁은 의미의 현무는 입수(入首)와 두뇌(頭腦)가 중요 부분이다. 입수란 용의 머리가 혈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내룡의 말절(末節)이 낮게 두뇌로 넘어가는 곳이다.

두뇌란 혈 바로 뒤의 높이 솟은 부분으로 혈을 바로 주위에서 둘러싸고 있는 사성(砂城)의 뒤 가운데 가장 높은 부분을 말한다. 예컨대 왕릉으로 볼 때 곡장(曲墻)의 중앙 제일 높은 곳이다.

아미(蛾眉)는 두뇌에서 봉분(封墳)에 이르는, 도도록하게 솟아나온 부분을 말하며 팔자아미(八字蛾眉), 월미형(月眉形)의 2격(二格)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좋다. 입수 전체적으로는 진(眞) · 횡(橫) · 곡(曲) · 비(飛) · 삼체(三替)의 오격(五格)이 있다.

현무를 용의 머리로 간주하는 만큼 뿔(角) · 귀(耳) · 눈(目) · 코(鼻) · 이마(聊) · 수염(鬚) · 입(口) 등이 있는 것은 물론이며 부위에 따른 길흉법도 있다. 예를 들면 코나 이마는 좋고 뿔과 이마는 좋지 않다는 등이 그것이다.

용(龍) · 호(虎) · 작(雀) · 구(龜)의 사신수 가운데 좌우의 용호(龍虎)는 풍수의 성국(成局)으로 볼 때 불가결의 요건으로서 그 임무는 장풍에 있으므로 혈을 두루 감싸고 보호하고 있어야 한다. 산수도에서도 특히 혈 주위를 조밀하게 호위하고 생기를 융취(融聚)하는 것이 용호라 하였다.


청룡은 주산에서 안산을 향해 왼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를 말하며 백호는 오른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를 말한다. 청룡, 백호가 모두 내룡과 연결된 본신(本身)으로부터 발출(發出)한 것일 수도 있고, 둘 다 다른 산에서 나와 둘러싸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하나는 본신, 다른 하나는 다른 산에서 이어져 나올 수도 있다.

이 때 둘 다 본신에 이어진 것을 본신용호(本身龍虎), 다른 산에서 온 것을 외산용호(外山龍虎), 혼합된 것을 주합용호(湊合龍虎)라 부르기도 하며 본신용호가 가장 좋고 외산용호와 주합용호도 모두 흉격(凶格)으로는 보지 않는다.

용호는 2중 3중으로 호위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안쪽 것을 내청룡(內靑龍), 내백호(內白虎)라 하고 그 바깥쪽 것은 외청룡(外靑龍), 외백호(外白虎)라 한다. 성국(成局)과 합치되었다면 왕후(王后)를 배출할 수 있는 길세로 친다. 용호의 체(體)는 ‘청룡완연(靑龍伏穆) 백호순부(白虎順琅)’로서 서로 화합의 형태로 유정(有情)하게 감싸면 좋다.

더욱이 주산에 대하여는 복부(伏俯), 항복(降伏)의 형세를 취하는 용호라야 좋다는 사실을 누누히 설명하는 술서(術書)가 많다. 『설심부(雪心賦』에

「백호는 복(伏)하고 청룡은 강(降)해야만 한다. 그래야 혈장의 존귀한 정신이 스스로 백배(百倍)하여 청룡을 부를 수 있고 그에 응하여 대장(大將)이 등대(登臺)하여 전후의 사졸(士卒)을 스스로 만천(萬千)의 기상(氣像)으로 위엄(威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고 이어서 현무에 대한 용호의 분명한 주종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렇지 않고 용호가 후산(後山 주산)을 질투하는 듯 돌아 앉거나 용호가 서로 물어뜯을 듯 대치하거나 혹은 그 모양이 첨사(尖射) · 파쇄(破碎) · 반역(反逆) · 주찬(走竄) · 사비(斜飛) · 직장(直長) · 고압저함(高壓低陷) · 수약(瘦弱) · 노근(露筋) · 단요(斷腰) · 절비(折臂) · 앙두(昻頭) · 파면(擺面) · 조악(粗惡) · 단축(短縮) · 박협(迫狹) · 강경(强硬) · 엄락(掩落) · 순수비주(順水飛走) · 여도(如刀) · 여창(如槍) · 여퇴(如退) 한 것은 모두 흉악한 것으로 간주한다.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면서 온화한 산세를 길(吉)한 것으로, 흩어짐 · 부조화 · 불균형 · 갖추지 못함 · 포악 · 흉폭 혹은 부러지거나 흉기(凶器)처럼 생긴 산세는 흉한 것으로 본 듯하다.

용호의 용은 왕자(王者)의 표정 · 재화(財貨)에 관련, 호는 무력 용기와 자손 번성을 맡고 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청룡은 자손과 관귀(官貴)를 주재(主栽8하고, 백호는 처첩(妻妾) · 여식(女息) · 자부(子婦)와 재산을 주재한다는 설도 있다.

대체로 청룡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제왕(帝王) · 출세(出世) · 관귀(官貴) · 남자를 , 백호는 해가 지는 결실의 서쪽으로 여자와 재산에 유추(類推)하는 듯하다. 물론 용호가 아무리 이상적 형세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내룡이 진룡(眞龍)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용호는 풍수 구성상 종속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호위(護衛)와 장풍(藏風)을 조성(造成)하는 것이 그 주요 임무인 것이다. 따라서 용호 중 하나가 결여된 경우라도 만약 물이 음양의 순화(諄化)를 충분히 할 수 있다면 괜찮다.

이렇게 되면 장풍국(藏風局)이 아니라 득수국(得水局)이 됨은 물론이다. 용호가 현무, 주작에 비해서 중요성이 몹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소위‘좌청룡 우백호하는 풍수’라 하여 용호가 더욱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까닭은 고래(古來)로 풍종호(風從虎)[註]라든가 용은 구름과 비를 부른다는 기우관념(祈雨觀念)에서부터 비롯된 듯하다.

또한 용호는 주인격인 주산 내룡보다 형세가 장대하지 않고 변화도 다양함이 없이 가지런하며, 양명(陽名)하고 수려하며 배역(背逆)하지 않아야 한다. 용호가 자기 본분을 잃고 기세있게 변화하면 자체에 길혈(吉穴)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룡의 생기만 도기(盜氣)할 뿐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용호의 예리한 가지가 주산의 혈장을 충사(沖射)하여 살(殺)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양의 풍수적 입지 해석에서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국도(國都)의 주산 문제이다. 주산은 장풍의 입장에서는 사신사(四神砂) 중 현무에 해당된다. 내룡 맥절(脈節) 중에서 혈의 뒤쪽에 높이 솟은 산으로 양기(陽基)의 경우는 마을을 진호(鎭護)한다는 뜻으로 진산(鎭山)이라고도 하고, 단순히 혈 뒤의 산이라 하여 후산(後山)이라고도 한다. 이런 논리는 그 후 여러 논문에서 그대도 답습되어 왔는데 이는 아마도 촌산지순(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가 끼친 영향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택리지』그리고『동국여지비고』등에서는 모두 한양의 진산을 삼각산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주산을 백악(白岳) 즉 오늘의 북악산으로 제시하여 혼란의 여지가 있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權仲和)가 해산(亥山) 즉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임좌병향(壬坐丙向)을 취하라는 글을 올린 일이 있고, 백악을 현무, 주산으로 설명한 대목이 있으며 세종 때 국도 주산 문제의 논의에서도 한양의 주산은 백악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산은 반드시 백악이란 것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촌산지순(村山智順)의 해석대로 진산이 곧 주산이라고 한다면 한양의 후산 문제는 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기록에 따라서는 진산과 주산을 명백히 구분하여

「삼각산은 서울 북방에 높이 솟아 서울의 진산, 백악산은 삼각산의 중심맥으로 서울 북방에 둘러싸인 준봉(峻峰)으로 서울의 주산」

으로 명기하기도 하였다.

풍수서에서는 주산 혹은 진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예가 별로 없다. 최근에 우리 글로 발간된 풍수서에는 주산이란 용어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지만 한적(漢籍)에서의 용례(用例)는 거의 없는 듯 하고, 특히 진산이란 말은 풍수술사(風水術士)들 중에서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진산이란 용어가 풍수술어(風水術語)라기보다 일반적 의미로 쓰여진 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주산이 쓰여진 용례를 굳이 들자면 『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에 원무(元武) 즉 북쪽 현무사가 주산[註] 이라 설명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것은 한양의 산세 중 현무사가 허약하기 때문에 나온 일종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개성은 종산(宗山)인 오관산(五冠山)으로부터 대단(大斷)하여 송악산(松岳山)으로 속기(束氣)되면서 송악으로 개성의 주산을 이룬 형국(形局)이며, 이 때의 송악산은 해발 588m로 그 남쪽 즉 조안사(朝案砂)에 해당하는 여러 산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위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주산이 곧 진산이 되어도 무리가 없지만, 한양은 북악산이 342m에 지나지 않아 조산, 안산에 해당되는 남산(265m), 관악산(629m), 남한산(429m) 등에 오히려 억눌리는 형태가 되므로 위치로 보아 북악산이 주산인 것은 분명하지만 진산으로서 성립될 수 없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양은 예외적으로 주산과 진산의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개성이 오관산에서 대단하여 송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송악의 산세가 크기 때문에 진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데 반하여, 삼각산은 위치상 혈후지주(穴後之主)는 아니나 북악을 대신하여 한양을 진호하는 진산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한양의 현무는 북악일 수 밖에 없다. 또 풍수상으로는 삼각산은 개성의 오관산과 같이 한양의 근조산(近朝山) 혹은 종산(宗山)으로 인식하면 혼동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항설(巷說)로는 주산이 그 전방의 조산에 대하여 신하에 대한 군주, 아내에 대한 남편, 자식에 대한 부모 등의 상징을 띠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며 남편이며 임금인 주산 북악산이 손님이며 아내이며 신하인 조산 즉 관악산보다 낮아 술법상으로는 손님 즉 외세의 간섭, 신하의 모반, 하극상 사건을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삼각산과 북악산의 진산, 주산 문제 이외에도 한양의 경우 주산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는 전도(奠都) 당시와 세종대에 몇번 더 거론되고 있다. 먼저 전도 당시의 주산 결정 및 국도(國都)의 좌향(坐向) 논의는 정도전(鄭道傳)과 무학(無學) 사이에 펼쳐진 것인데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은 의심스럽지만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학의 의견은 인왕산은 진산, 즉 현무로 하고 남산과 북악을 백호와 청룡으로 하여 도읍을 동향,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자는 것인데 대하여, 정도전은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펼쳐야 하는 만큼 궁궐을 남향,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여 백악 현무, 인왕 백호, 낙산(駱山) 청룡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무학이 한양의 세(勢)를 보며 인왕산으로 진산을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 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무학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내 말을 생각하리라’하였다. 산수비기(山水秘記)에 의하면 도읍을 택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점차 연존(延存)의 바람이 있을 것이지만,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하면 150년이 지나기 전에 찬탈(簒奪)의 화가 일어날 것이오, 겨우 200년 내외에 판탕(板蕩)의 난(亂)함에 이를 것이니 잘 생각하라고 나와 있다.

산수비기는 신라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은 것으로 800년 후의 일을 맞추었으니 어찌 성승(聖僧)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기에서 소위 승려란 무학을 이름이오, 정씨 성 가진 사람이란 정도전을 일컬음이다.

고 되어 있다.

무학이 의상대사의 『산수비기』에 의하여 그와 같은 좌향(坐向)을 내세웠다고 하나 믿기 어려운 기록이라 생각된다. 실록(實錄)에 남아있는 무학의 언행은 매우 현실적이었던 듯한데, 예를 들면 태조가 한양의 지세를 물었을 때도 ‘이 땅은 사면(四面)이 높고 중앙이 평탄하여 성읍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나 중의(衆義)에 좇아서 결정하소서’ 한 점 등으로 미루어 그런 그가 정도전과 언쟁을 벌이며『산수비기』를 인용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여겨진다.

그러나 한양의 좌향이 무학의 주장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을 바라보는 형세를 취했다면 현재의 서울과는 큰 차이를 나타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환경지각적(環境知覺的 environmental perception) 측면에서도 백성들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 중심의 핵심적 건물인 왕궁의 방향이 도시의 가로망(街路網)의 발전방향 등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기 때문이다.

도읍의 역내(域內)에서 남문 방향의 발전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서울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읍취락(都邑聚落)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 남문이란 주작 방향이 되며, 서울이 동향을 하여 동쪽으로 남문 기능이 배정되었다면 발전방향이 우리나라 내륙지방으로 유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권력 핵심부의 좌향 방위가 동향이 되기 때문이다.

주산 배정상의 또 다른 문제는 세종 때 풍수학인(風水學人) 최양선(崔揚善)에 의한 문제 제기이다. 그는

「경복궁의 북쪽 산은 주산이 못된다. 목멱산(木覓山-남산)에 올라보면 향교동(鄕校洞-오늘날 운니동)의 연맥(連脈)인 지금의 승문원(承文院) 기지(基址)가 바른 주산이 됨을 알 수 있다.

정도(定都)를 할 때 왜 이 곳이 아닌 백악 아래에 궁궐을 조영(造營)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주산의 혈에 인가(人家)가 있으면 자손이 쇠미(衰微)한다고 했으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터로 옮긴다면 만세(萬世)의 이(利)를 얻을 것이다.

라고 개청(啓請)하였다. 그가 주산으로 제시한 승문원 기지는 오늘날 성북동 북서쪽 북악스카이웨이 아래의 328m 고지(高地)인 것으로 추측되며 이 후 이 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찬성론의 언설(言說)은 다음과 같다.

「삼각산은 뻗어서 보현봉(普賢峰)에 이르고 보현봉은 뇌락(磊落)하여 강룡산룡(岡龍山龍)을 이루며 좌우 이협(二峽)에 나뉘어 좌협(左峽)은 기복(起伏)이 요장(遙長)하고 관란(關欄)을 이루어 안암지(安庵地 안암동)에 이르며 우협(右峽)은 달리기 반리(半里)에 백악의 성봉(星峰)을 이루고 또 반리를 달리어 인왕산의 강룡(岡龍)을 이루고 인왕산을 달리어 남으로 회전하여 주산을 조읍(朝揖)하니 이것이 가위 조대(朝對)의 바른 것이라 할수 있으며, 중앙에는 정맥(正脈)이 있어 동남으로 입도(入都)하여 달리어 2리(二里)에 이르러 용구(龍丘)를 이루니 곧 주산이 이것이오, 주산의 낙맥(落脈)은 현사(縣絲)와 같되 봉요(峰腰) 단속(斷續)의 이상(異狀)을 재기(再起)하여 소위 현무수두(玄武垂頭)의 격(格)을 이루니 좌비(左臂)는 만환(灣環)하여 혈전(穴前)에 이르고 우비(右臂)는 활과 같은 형상으로 명당에 읍(揖)하고 있다.

또 삼중의 지엽(枝葉)은 좌우로 혈을 포옹하여 산수(山水) 서로 유정(有情)하며 중앙의 명당은 스스로 정(正)히 존귀하고 국중(局中)의 제수류(諸水流)는 천심(天心)에 합하여 가위(可謂) 기취(氣聚)의 지(地)가 되니 경(經)에 兩水夾處是明堂 枝葉周回中者是란 말에 부합이 된다.」

이에 대한 반대론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백악은 삼각산으로부터 내려와 보현봉을 이루고 또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강(平岡)을 이루어 수리(數里)에 이르면서 첨봉(尖峰)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백악이다. 그 밑에 기국(碁局)과 같은 명당을 만들어 만병(萬兵)을 세울 만하니 이야말로 전후정중(前後正中)의 정명당(正明堂)이라 할 수 있다.

주산의 북은 외협(外峽)이 삼각산의 서남에서 돌아 대일지(大一枝)를 이루고 나암사(羅巖寺) 남극(南極)에 환지(環至)하고 그 한 갈래가 또한 서남행하여 모악(지금의 안산) 서반(西畔)에 이르니 명당의 서북강(西北岡)이오 중수회환(衆水回環)의 대개이다.

또 주산의 동북은 그 일대지(一大枝)는 청량동원처(淸凉洞源剔8의 동북에서 동남으로 주회(周回)하여 대야(大野)에 이르러 멈추고 다른 일지(一枝)는 청량동원의 동남에서 벽와요(枓瓦窯)로 회지(回至)하여 대교(大郊)에 내려오고 또 한 가지는 사한동원(沙閑洞源)의 남에서 동으로 돌아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그치니 이는 곧 명당의 동남강(東南岡)이오 중수(衆水)의 대개이다.

그리고 백악 명당의 좌우로 말하면 우벽(右枓)은 주산 서반에서 나와서 서남으로 크게 회주(回周)하여 동으로 동대문 수구(水口)에 이르고 그 좌벽(左枓)은 동남으로 주회하여 또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주산 명당의 전후좌우는 균제방정(均齊方正)하여 펑탄치 아니함이 없고 또 조상정룡(祖上正龍)의 대맥(大脈)은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운이 치성(熾盛)하기 때문에 백악, 인왕, 남산, 모악이 모두 돌기(突起)하여 봉(峰)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 설자(說者)의 소위 내맥(來脈)이란 것은 그 기운이 적은 까닭에 단지 정업원(淨業院)의 뒷면 응봉(鷹峰)을 일으켜 종묘(宗廟)의 혈을 이룰 뿐이요 다른 혈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 봉 외에는 다시 성기(盛氣)가 없으므로 종묘로 들어간 혈도 또한 다시 봉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방기맥(傍起脈)의 둘로 말한다면 종묘의 지(地)는 이 곧 방기맥의 정맥(正脈)이라 할 수 있고 또 지금 설자들의 말하는 곳은 방기맥의 방맥(傍脈)이라 할 수 있다. 고인(古人)은 흔히 산맥의 대소(大小) 성쇠(盛衰)를 초목(草木) 지간(枝幹)의 대소 영고(榮枯)에 비하여 말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신명당(新明堂)의 지(地)는 첫째 보현봉 내맥(來脈)의 방지(傍枝)요 정맥이 아니며, 둘째 사신사(四神砂)가 불비(不備)하여 현무는 저연(低軟), 용호는 불수(不殊8, 주작은 과고(過高)하며, 세째 수류(水流)가 직거(直去) 무정(無情)하고, 네째 명당이 협소함에 대하여 백악 주산의 경복궁 좌지(坐地)는 첫째 보현봉의 정맥이오 과협(過峽)이 아니며, 둘째 현무가 특수하고 백호가 준거(?居)하여 형세에 합하며, 세째 명당이 관평(寬平)하고, 네째 고비기(古秘記)에 부합하는 점이 많으므로 현재 그대로가 옳다.」

는 황희(黃喜) 등의 주장에 의하여 일단락되었다.
이것은 우선 삼각산의 맥세(脈勢)가 한양으로 입수(入首)되기까지의 정룡(正龍)과 방룡(傍龍)이 어떤 것인가 하는 풍수적 문제점이 지적될 수 있다.

정룡이란 간룡(幹龍) 혹은 원룡(元龍)이라 하는 것으로 주산은 반드시 정룡의 맥세를 받아야 하며 방룡은 지룡(支龍)이라고도 하는데 좌우보조룡(左右補助龍)의 역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 경우 비봉(碑峰)으로부터 거의 남향하여 국(局)을 이룬 북악산을 정룡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안목일 것이지만, 이 점 술법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결과만을 놓고 말할 때 북악은 북의 서방에 편재하여 있는데 반하여 328고지는 정중앙에 위치한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것도 논란 여지가 있는 것이 중국은 모든 건물의 배치가 정확한 대칭으로 운영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정확한 대칭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는 역시 단정적으로 장점이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현실적으로 주산을 바꾸면 이궁(移宮)의 조영(造營)이 뒤따르는 만큼 재정문제와 결부되어 복잡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또 범안(凡眼)의 안목으로는 북악이 정맥인 것으로 짐작되어 유야무야로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풍수적 논의는 명분을 위한 방편으로서 거론이 되고 그 결론은 항상 풍수이론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현실적, 합리적으로 내리고 있는 경향을 보여 준다.

주산을 328고지로 옮겼을 경우를 가상할 때, 서울의 시가지는 오늘날 종로 3가 부근을 도심(civic center)으로 도성(都城)의 범위가 숭인동, 신설동, 청량리 방면까지 확장되고, 그 후의 도시 발전방향도 그에 따라 달라졌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산을 동향 이동코자 개청했던 풍수학인 최양선(崔揚善)의 의견은 몇가지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또 이곳이 백악하(白岳下) 보다는 산세환포(山勢環抱)가 깊어 주거입지상 월동(越冬)의 편의가 나을 것이란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산을 보는 안목은 술사(術師)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어 예컨대 조선조 사격론(砂格論)의 제일인자로 추앙받는 이사(李師)의 가좌도(加佐島)에 있는 속칭 ‘제왕지혈(帝王之穴)’이라는 친산(親山)을 역시 풍수달인(風水達人)인 일이승(一耳僧)이 보고 개탄하여 말하기를 ‘以李師之才 何爲邊葬也 無他 其時 應有掩眼之兆矣’고 평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일급 술인(術人)들 사이에서도 간룡의 의견이 이렇듯 달랐다.

여기에 고려 때 김위제(金謂纖)의 오덕구(五德丘)에 관한 해석도 만일 그의 의견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양은 풍수상 지극히 길지(吉地)라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오덕구는 삼각산 남쪽, 서울을 중심으로 한 오방(五方)의 오행산(五行山)이란 뜻이다.

중앙에 면악[面岳-백악(白岳)]의 모양이 원(圓)하여 토덕(土德)에 속하고, 북에 감악[紺岳 적성(積城)]이 곡(曲)하여 수덕(水德)에 속하고 남에 관악이 첨예(尖銳)하여 화덕(火德)에 속하고, 동에 남행산[南行山-양주(楊州)]이 직(直)하여 목덕(木德)에 속하고, 서에 북악[北岳-부평(富平)]이 방(方)하여 금덕(金德)에 속한 것이라 한다.

김위제의 결론은 이 오덕구의 중앙인 토덕, 즉 백악의 터에 남경(南京)을 건창(建쾍)하고 때에 따라 순주(巡駐)하는 것은 국가 사직(社稷)을 위하여 커다란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풍수상 오성귀원(五星歸垣) 혹은 오기조원(五氣朝垣) 또는 오성승전(五星升殿)이라는 지귀(至貴)의 격(格)에 해당된다.

수성(水星)은 북에 장막을 치고, 화성(火星)은 남에 솟고, 목성(木星)은 동에 벌리고, 금성(金星)은 서에 솟고, 토성(土星)은 결혈(結穴)되어 중앙에 거(居)한 것이니, 국(局)에 올라보면 사면이 서로 비등하고 각각 그 지위를 얻으니 이는 천지가 오기(五氣)의 정(精)을 만들어 보인 것인 바, 만령(萬靈)의 모임과 정기의 종(綜)한 바로 위에는 성신(星辰)이 응하고, 아래는 방위(方位)가 맞이하여 지존지귀(至尊至貴)하므로 만에 하나도 얻기 어려운 격이다.

다만 성신이 진정(眞正)하여야지, 기울어지거나 파쇄(破碎)되고 흉살(凶殺)을 띠며, 혹은 원근(遠近)이 맞지 않고 대소(大小) 고저(高低)가 마땅치 않으면 그 모양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오성귀원격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다. 너무나 귀하고 또 찾기 어려워 한 나라를 통틀어도 있을까 말까한 격이기 때문에 술가에서도 오성귀원격을 찾는 일을 망령이라고까지 말한다.

대룡(大龍)이 결작(結作)되려면 만산(萬山)이 떼를 지어 옹호해야 하는데 그러한 국세(局勢)를 원상(垣象)이라 하고, 이 때 사정방(四正方)의 산봉(山峰)이 원성(垣星)이 된다.[註] 이 원성이 다시 제 방위를 찾아 빙 둘러싸인 모양, 즉 귀원(歸垣)이 되었으니 그 좋음은 물론이라 할 수 있다.

김위제가 말한 오덕구가 과연 오성귀원의 국세를 이룬 것인지의 여부는 역시 술가에 따라 찬부(贊否)가 있을 수 있다. 요컨대 한양을 매우 요긴하고 중요한 땅으로 국가를 다시 한번 흥륭케 할 수 있는 땅으로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될 만한 사실이다.

산의 모양을 보아 오성에 비정(比定)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서도 제시한 바와 같이

「오성의 형체는 고인(古人)이 설명한 바, 조달(條達)에서 상(象)을 취하니 직(直)한 것을 목(木), 염염(炎炎)에서 상을 취하니 첨(尖)한 것이 화(火), 후중(厚重)에서 상을 취하니 방(方) 것이 토(土), 주견(周堅)에서 상을 취하니 원(圓)한 것이 금(金), 유동(流動)에서 상을 취하니 곡(曲)한 것이 수(水)이다. 따라서 산형(山形)은 직(直)한 것이 목(木), 첨예한 것이 화(火), 방정(方正)한 것이 토(土), 광원(光圓)한 것이 금(金), 곡동(曲動)한 것이 수(水)가 된다. 그러나 오성에서 형(形)이 불순(不純)한 것이 변격구성(變格九星)이 되는데, 그러므로 구성(九星)은 오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실제 산을 보면 직(直), 원(圓), 곡(曲) 하듯이 단순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직(直)하면서도 원(圓)하고 첨(尖)하면서도 직(直)하며 혹은 어느 것에 비겨야 할 지 알 수 없는 산형도 많은 것이다.

필자 최창규(崔昌祚)의 생각으로는 김위제가 진실로 귀원(歸垣)을 보고 오덕구를 주장했을 것 같지는 않고 다만 중요성의 강조를 그와 같은 원국(垣局)에 비정(比定)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대축척(大縮尺) 지형도상(地形圖上)에서의 판단도 말 그대로의 원국 정격(正格)을 이룬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관련하여 백악을 목성으로 본 『택리지(擇里志)』팔도총론(八道總論) 경기도조(京畿道條)의 지적은 그러나 타당한 듯 하다. 백악의 생김새는 일견(一見)하여 직용(直聳)의 세(勢)이기 때문이다.


한양의 용호인 낙산과 인왕산은 풍수법에 크게 벗어나는 곳은 없으나 몇가지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곳은 있다. 예컨대 조선초에 윤신달(尹莘達)이 ‘우리나라에서 송경(松京)이 가장 좋고 한양이 그 다음이라’하면서 ‘단지 유감되는 것은 건방(乾方)인 북서쪽이 저하(低下)하고 명당수(明堂水)가 고학(枯醴)함’을 지적한 것이 그것이다.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오늘날의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청운동 자하문 쪽이 건방이 되며, 그 곳이 북악산(342.4m)과 인왕산(338.2m) 사이에 끼어 100m 이하인 곳이기 때문에 윤신달의 지적은 적절하다.

북악을 주산으로 임좌병향(壬坐丙向)의 남향으로 경복궁 정침(正寢) 즉 혈장(穴場)의 좌향(坐向)을 결정한 한양에서 건방의 함몰은 바로 황천살(黃泉殺)이 되어버리는, 매우 꺼리는 지세가 되는 결과를 빚는다.

혈장에 황천살이 끼는 데도 누구 하나 이것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 갔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유독 윤신달만이 건방의 저하를 탓하고 있지만 그 역시 황천살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술가(術家)에서는 황천살이 들면 인망재패(人亡財敗)와 관송형옥(官訟刑獄)과 정신질환자가 나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살인 퇴재(退財)의 흉액(凶厄)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제악(諸惡) 중 최흉(最凶)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것을 보는 방법은

「경좌(庚坐) 정좌(丁坐)에 곤방(坤方)이 허결(虛缺)하면 황천살, 곤방에서 경(庚), 정방(丁方) 역시 불가(不可), 손좌(巽坐)에 을(乙), 병방(丙方)이 최혐(最嫌), 을(乙), 병방에 손방(巽方)이 수파(水破) 불가, 갑(甲), 계좌(癸坐)에 간향(艮向) 불가, 간좌(艮坐)에 갑, 계좌 불가, 건좌(乾坐)에 신(辛), 임향(任向) 부득(不得), 신(辛), 임좌(壬坐)에 건향 불가, 묘진사오(卯辰巳午)는 손궁(巽宮)을 기피(忌避), 오미신유(午未申酉)는 곤방을 기피, 유술해자(酉戌亥子)는 건방이 그렇고, 자축인묘(子丑寅卯)는 간궁(艮宮)이 흉(凶)이다.

여기서 임좌병향의 혈은 건방이 허하면 황천살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수 있다.
한양 혈처에 황천살이 들어 살인 재패가 됨은 속신(俗信)이니 알 바 아니지만 우리나라 겨울철의 한랭한 북서계절풍이 허결(虛缺)된 건방을 통하여 몰아 닥칠 것은 필지(必知)의 사실이므로 이는 분명히 한양의 풍수 및 현실적 입지상 취약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서울의 겨울철 풍배도(風配圖 windrose)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의 풍수지리학자 윤신달의 지적은 그것이 비록 황천살이라고 못을 박은 것은 아니지만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 역시 보는 입장의 차이나 간룡상의 의견을 달리하는 술가의 경우는 황천살을 수구(水口)에 관련시켜 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백악, 인왕, 낙산, 남산에 의한 한양 사신사(四神砂)의 결정은 도성(都城)의 축조에도 그대로 이용되었다. 한양 성곽은 위 네 개의 산을 사지(四至)로 하여 고험(高險)한 곳은 석성(石城), 그렇지 않은 곳은 토성(土城)으로 쌓아 전체 길이 59,500척에 달하였다 [펌].

출처 : 서경대 경영대학원 풍수지리전공[석사]
글쓴이 : 金賢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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