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묘
[왼쪽 아래로 1980년에 지은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보인다.]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번지
▣문화재지정 : 경기도 기념물 제1호
경부고속도로 판교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가 389번 도로를 타고 분당 아파트단지를 지난 다음 고개 하나를 넘으면 모현면 오포농협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회전하여43번 국도로 1km 가까이 가면 오른쪽에 비각이 하나 서 있고, 왼쪽으로 정몽주선생 묘소로 들어가는 영모교가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다리를 건너 500m 즘 올라가면 선생의 신도비각이 있고, 다시 좀 더 오르면 영모당과 선생의 후손이 살면서 묘소를 관리하는 살림집이 나온다.
묘소는 영모당 뒷산인 문수산(文秀山) 안자락 해발 145m의 나지막한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있고, 묘비에는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의 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쓰여 있다. 선생을 죽인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였는지 모르지만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추증했으나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은 이를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선생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이곳에 선생의 묘를 쓰게 된 것은 처음 순절하신 후 버려진 시신을 송악산 중들이 염습하여 풍덕(豊德)땅에 묻었던 것을 후일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던 중, 장례 행렬이 이 인근인 용인군 수지면 경계에 이르자 명정(銘旌)이 세찬 바람에 날려 이곳에 떨어져 지관에게 물어보니 명당중의 명당이라 이곳으로 하였다고 한다.
1517년(중종 12년) 왕명에 의하여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 문묘에 매향하는 한편 묘소를 환봉 청산하고 묘역 일대 임야 전담 등 2백40여만평을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서 내려 준 땅)로 지정하여 경계를 표시하고 산직을 두어 초목을 금하게 하는 등 묘소를 관리토록 하였다.
그 뒤 약 600년 동안 포은 정몽주 할아버지는 종손 집안을 중심으로 문중들이 묘소를 잘 관리해 왔으며 1982년에 영일정씨 포은공파 종약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어 종약원에서 묘소와 묘역일체를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1972년 12월에 상석 2개를 교체하였고 1974년 12월에는 곡담 35m를 보수하였으며 문중에서는 봉분 병풍석, 난간석, 장명등, 망부석 등을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묘지 경내의 민가 3채를 이전하고 묘지 입구에 신도비각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영모재(永募霽)를 해체 복원하고 주차장도 마련하였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이방원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한 다음 지금까지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에게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 加資)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正一品職)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正二品職) 감예문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正一品職)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 一品職에 오른 功臣의 封號)으로 추증(追贈: 죽은 후에 직위, 봉작, 시호 등을 내리는 것)되고, 시호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그 후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창업에 반대하여 역적으로 취급된 정몽주가 조선조 초기 그것도 그를 심복에게 죽이도록 사주한 태종에 의하여 복권되어 외관상으로는 명예가 회복되고 융숭하게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어느 때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역적으로 송도 어느 산야에 묻혀 있던 정몽주의 묘를 한양 인근으로 이장하였는데 그 곳이 지금의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남쪽 기슭이다.
정몽주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하면서 왕능(王陵)의 격식을 갖추어 둘레석과, 문무관석 등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은 능원리(陵院里)라는 이름까지 얻었고, 이 마을에는 정몽주의 묘 뿐만 아니라 정몽주사당과 하마비(下馬碑: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경고의 비석)까지 세워졌다.
정몽주의 묘가 있는 문수산은 남쪽으로 4개의 능선을 뻐치고 있데 양쪽 2개는 길게 뻗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가운데 2개 능선은 약 40m 간격으로 나란히 짧게 끝난다. 문수산을 바라보면서 왼쪽 날등에 포은의 묘(능)가 있고, 오른쪽 날등에는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태종15년 1415-성종8년 1477)선생의 묘가 있다. 모두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석형은 세종23년에 생원과, 진사과, 문과에 동시에 장원하여 한 방(榜: 과거 급제자 발표)에 세 개의 장원이 오른 조선조 최초의 삼장원(三壯元)이 되고, 세종25년에는 호당(湖堂: 일명 賜暇讀書라고도 하는 유망 인제 연수제도)에 뽑히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들과 10여년간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세종대왕의 문화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사육신 사건 때는 전라감사로 원지에 나가 있어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세조로부터 항상 우대를 받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正一品加資)에 까지 올랐으면서도 한명회 등 그 측근들에게 항상 견제를 받아 육조판서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하고 실권 없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正二品),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從二品),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正二品) 등의 직위에만 올랐으며, 최종 관직은 판중주부사(判中樞府事: 從一品)였다. 성종 2년에 시행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 내려졌으며 많은 시문을 남긴 사람이다.
이석형의 묘에 합부(合?)된 전배(前配) 연일정씨(延日鄭氏) 오늘 이 글 ‘출가외인’의 장본인인데 바로 정몽주선생의 증손녀(曾孫女)이니까 이석형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서이다.
연일정씨가 이석형과 혼인한 후에도 남편 이석형은 벼슬살이 하느라고 한양에 가 있었지만 부인은 그냥 향촌인 이 곳 문수산 아래 살고 있었다. 지관을 들여 문수산 일대를 둘러 본 결과 가운데 2개 날등 중에서 오른 쪽이 아주 명당이라는 언질을 받아 장차 이석형의 묘자리로 점 찍어 놓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정몽주의 묘를 이장 할 곳을 바로 문수산으로 정하고 다음날 지관이 묘 터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일정씨는 밤중에 산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는 물웅덩이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오른쪽 날등에 갖다 붇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다음날 조정에서 보낸 지관이 먼 앞산에서 문수산을 바라보고 가운데 두 날등이 다 괜찮은데 오른쪽 날등이 아주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지관은 오른쪽 날등이 축축하게 물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아! 아깝다. 이 좋은 자리에 물이 나니 묘자리로는 안되겠다’ 하면서 왼쪽 날등으로 결정하고 돌아가 정몽주 묘는 왼쪽 날등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석형이 죽은 후 오른쪽 날등에다 묘를 썼다. 이석형의 후손은 아주 번창하였다. 그 후손 중에는
① 8정승(八政丞: 인조6년 李廷龜, 효종원년 李時白, 영조28년 李天輔, 영조34년 李후, 정조6년 李福源, 정조12년 李性源, 정조23년 李時秀, 순조27년 李存秀),
② 삼대대제학(三代大提學)을 비록하여 대제학 6인(선조34년 李廷龜, 인조9년 李明漢, 효종10년 李一相 삼대대제학, 영조37년 李鼎輔, 영조48년 李福源, 순조1년 李晩秀 2대대제학),
③ 조선조 대표적인 문장가 월상계택(月象鷄澤: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鷄谷 張維, 澤堂 李植)의 월사 이정구를 비롯하여 문장가록(文章家錄)에 오른 4인(李石亨, 李廷龜, 李明漢, 李天輔),
④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성공으로 이끈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부자(三父子: 부 李貴 1등 延平府院君, 장자 李時白 2등 延陽府院君, 3자 李時昉 2등 延城君),
⑤ 육조(六曹) 판서(判書: 正二品) 37인,
⑥ 2대 3부원군(府院君), 9대 11인의 봉군(封君:1대 李貴 延平府院君, 2대 李時白 延陽府院君, 李時聃 延豊府院君, 李時昉 延城君, 3대 李炘 延昌君, 4대 李相胃 延城君, 5대 李泳 延恩君, 6대 李明熙 延原君, 7대 李瑜 延陵君, 8대 李度陽 延川君, 9대 李押 延豊君) 등을 배출하는 반면 한 사람의 역신이나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고, 청백리(淸白吏)와 충효절열(忠孝節烈)이 줄을 이어 나왔다.
이렇게 후손이 융성한 것이 이석형의 묘자리 때문이라 것이 현대 과학적인 사고로는 허무맹랑한 것이겠지만 옛날 풍수지리설을 믿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다.
하기는 요즈음도 부친의 묘자리를 잘 잡아 이장하였기 때문에 -그것도 이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용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으니 옛날에는 그것이 부동의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정몽주의 묘와 풍수지리
[출전: 김두규, 한국풍수의 허와 실, 동학사 1995]에서 축약
정몽주 墓와 혈의 네 가지 종류(四象)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는 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것은 '이름난 명당들을 직접 답산 하라!'는 것이다. 대개 역사상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나 권문세가들은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에 무덤을 섰다. 따라서 답산을 많이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이들 명당들에게 공통적인 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무덤 뒤에 있는 산(主山)의 모양, 주산에서 무덤이 쓰여진 곳까지의 산줄기(來龍)의 모습, 무덤이 쓰여진 곳(穴, 당판 혹은 혈장이라 부름)의 모습, 좌우 주변 국세(청룡, 백호, 안산 등)의 모습, 무덤 앞에 흐르는 물의 방향이나 흐름세 등등에서 공통적인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 정도의 단계에 이를 때 한글로 출판된 풍수지리 이론서 읽기를 권한다.
시중에 나도는 책 가운데에 '아무개에 명당을 잡아 주었더니 대통령이 되었더라' 등과 같은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이나 풍수(명당)소설들은 권장할 것이 못된다. 풍수지리에 대한 접근을 그만큼 어렵게만 할 뿐이다.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들을 많이 답산한 후에 풍수 이론서를 읽게 되면 책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아하!, 책에 쓰여진 그 구절은 내가 보았던 아무개 명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구나!" 등과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소문난 명당들을 답산 하고 동시에 풍수 이론서를 몇 권 선정하여 반복하여 읽다 보면 자연스레 명당(眞穴)의 眞僞 여부를 구별하게 된다. 또한 많은 명당들을 보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보와 왔던 그 수많은 명당들이 몇 가지 유형에 모두 귀속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또한 많은 풍수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참고하되 자신이 답사한 산과 읽은 서적을 참고하여 취사선택하면 된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풍수지리서들이 명당의 모범이 될 만한 옛 무덤들을 많이 볼 것을 권장하였다("不可不觀古格") 이번호에서는 풍수의 문외한이라도 "정말 특이하구나!", "명당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인정할 만 한 포은 정몽주의 묘를 예로 들면서 明堂(진혈)의 유형을 설명한다.
천하의 그 어떤 大明堂이라도, 또는 어떠한 기혈(奇穴)이나 괴혈(怪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로 명당(진혈)이라면 고전적 풍수지리서가 분류하는 명당의 네 가지 종류(四象, 四像, 穴形四大格 등으로 표현함)중에 하나에 귀속되어야 한다. 또한 풍수(지관)들은 어떤 자리를 놓고 명당(진혈)이라고 감정을 한다면 그것이 명당(진혈)의 네 가지 종류 중에서 어떤 것에 귀속되며 왜 그렇게 분류하였는지를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
혈(명당)에는 와(窩), 겸(鉗), 유(乳), 돌(突)혈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정몽주 무덤의 경우 상기 네 가지 종류 가운데 하나에 귀속시키자면 유혈에 속한다. 단지 하나의 혈만 그곳에 잇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또 하나의 유혈이 나란히 있어 마치 처녀의 두 개의 젖가슴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것을 일러 '두 개의 늘어진 유방 명당("雙垂乳")이라 부른다.
이 두 개의 유혈 명당 중에 우측(산에서 바라보아)에 포은이 안장되어 있고 좌측에는 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무덤이 있다.
(중략)
세간에서 현재의 정몽주 무덤 자리 선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가족들은 처형된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하여 개성에서 고향인 경상도 영일 땅으로 운구를 한다.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그때 喪主의 두건이 바람에 '휘익-' 날려 저만치 떨어졌다. 두건을 주우려고 가보니 그곳이 명당이었다. 고향까지의 운구를 중단하고 그곳에 모셔 오늘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史實과 다르다. 포은의 시신은 처음에 해풍군에 안장되었다. 10여 년 뒤인 1406년(태종 6년)에 현재의 자리인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文秀山아래로 옮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이 명당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이곳으로 이장된 지 200년 뒤인 서기 1600년(선조 33년)의 일이다. 선조 대왕의 부인 의인 왕후(懿仁王后)가 죽었으나 오랫동안 능을 정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지관들로 하여금 좋은 자리를 찾아서 보고케 하였다. 이때 포은의 무덤 자리도 명당으로 보고가 되어 자칫하면 왕실에게 빼앗길 뻔하였다. 그때 선조 대왕이 "정몽주의 묘가 쓰기에 합당하다 할지라도, 어찌 忠賢의 후골(朽骨)을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파내게 하겠는가? 특별히 보지 말라."하여 파묘를 면하였다. 당시 지관들 사이에서도 이곳을 훌륭한 명당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그보다 훨씬 전인 1456년(세조 대왕 2년)때의 일이다. 포은을 奉祀하던 손자 정保가 死六臣 사건에 연루된다. 세조가 정保를 환열형( 裂刑: 양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은 뒤 수레를 양편으로 밀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에 명하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이 '정몽주의 손자이다'라고 하자 사형을 중지시키고 귀양을 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정몽주 후손은 조선조의 역대 왕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세금이 면제되거나 땅을 하사 받거나 혹은 벼슬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살펴볼 점은 현재의 정몽주 무덤과 그 옆에 있는 손녀 사위 이석형의 무덤이 대표적인 유혈(乳穴)이라는 점, 그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雙垂乳穴에 속한다는 점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600년전의 풍수지리 흐름을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흔히 요즈음 알듯모를듯한 현란한 술수로 범벅 칠을 한 풍수들은 무덤의 좌향(방향)을 辰戌丑未(24방위 중 남동, 북서, 북동, 남서에 가까운 방향을 가리킴)로 향한 산들은 胞胎法상(易術에서 상용되는 이론 중의 하나) 나쁜 방향(墓宮, 혹은 庫藏宮으로 표현)으로 보아 무덤을 써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몽주 무덤의 좌향은 진좌임을 보면 그 당시에는 이렇게 현란한 술수가 없었음을 엿보게 한다. 명당의 구비 요건인 龍(산), 穴(혈장, 당판), 砂(청룡, 백호, 안산, 조산), 水가 모두 격에 부합된다. 따라서 명당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답산을 권해 보고 싶은 곳이 이곳이다.
◐정몽주의 묘표와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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