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이기론)

[스크랩] 윤관 장군 묘역

장안봉(微山) 2013. 3. 24. 22:18

5. 파평윤씨(坡平尹氏) 발복지 윤관(尹瓘) 장군 묘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 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 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이(尹彦頤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이(尹彦頤)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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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 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윤씨 못지않은 청송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윤씨와 청송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묘지 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한다. 사람도 경호원이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귀한 사람이지만 산도 귀하게 본다. 때문에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이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하고 험한 기운을 모두 털어 버리고 순수한 생기(生氣)만 모아 혈을 맺는다. 이때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치도록 하여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인속기법으로 최종적으로 용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어 기를 모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좌우 선룡법으로 내룡(來龍)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용맥의 끝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이때 물이 우측에서 흘러나오면 용맥은 좌측으로 돌아야 하고, 물이 좌측에서 나오면 용맥은 우측으로 돌아야 음인용과 양인물이 서로 음양교합을 할 수 있다. 이를 좌선수(左旋水)에 우선룡(右旋龍), 우선수(右旋水)에 좌선룡(左旋龍)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 번째는 태식잉육법으로 현무봉 중출로 처음 나오는 용을 태(胎), 과협이나 결인속기처럼 잘록하게 변화하는 것을 식(息),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에 기를 모아 마치 아이밴 모습과 같은 잉(孕), 아이를 출산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혈을 육(育)이라 부른다.


용맥이 혈을 결지(結地)하였는지 여부를 살필 때는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세 가지 현상 모두가 있을 때도 있는데 윤관 장군 묘가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너무 많은 정비를 하여 이를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 관리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예산을 들여 성역화(聖域化)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꼭 대대적인 사업을 해서 원형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파괴다. 또 문화재는 조형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도록 한 지형도 중요하다. 주변 땅을 파헤치고 석축(石築)을 쌓으면 물길과 지기(地氣)가 변해 문화재에 나쁜 영향을 준다. 이러함에도 대대적인 정비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문화재 범위에는 지형까지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철령 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현등산), 수원산, 죽엽산, 광릉 용암산을 거쳐 축석령을 지난 다음 양주군 주내면 불국산(470m)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한북정맥은 산성, 호명산을 이루고 의정부 뒤 산맥을 따라 남진하여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으로 이어진다.


파주 일대로 오는 산맥은 의정부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칠봉을 만들고 장흥유원지를 이루는 꾀꼬리봉과 앵직봉(621.8m), 계명산(621.3m)을 지나 뒷박고개를 넘은 다음 박달산을 만드니 이곳의 소조산(小祖山)이다. 박달산에서 기세 장엄하게 광탄쪽을 향하던 산맥은 분수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넓은 국세(局勢)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었다.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형산 정경연 홈페이지에서


출처 : 서경대 경영대학원 풍수지리전공[석사]
글쓴이 : 金賢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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