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남 예산] 남연군묘

장안봉(微山) 2012. 12. 14. 23:18

 남연군 (南延君,1788~1836)

본관은 전주(). 처음 이름은 채중()이었으나,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로 개명하였다.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세손() 병원()의 둘째 아들이자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이다.

장헌세자()의 서자 은신군() 진(禛)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의 손자로 입양되었고, 은신군이 후사가 없어 남연군이 그의 양자가 되었다.

1815년(순조 15) 수원관(), 1821년 수릉관() 등을 지냈다. 1829년(순조 29) 영조와 진종() 및 정조의 어필을 간행하여 보존할 것을 상소하였고, 1834년에는 공조판서 김유근 등과 함께 종척집사()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충청도 덕산(:예산군)으로 이장하였고, 현재 그의 신도비는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독일의 상인 E.J.오페르트 등에 의하여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남연군 가계도]

 

 

남연군묘도굴사건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유택.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덕산굴총사건이라고도 한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에 걸친 한국과의 통상요구에 실패하고 돌아갔다가, 1868년 4월 제3차 한반도답사를 계획, 한때 상하이 미국영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모험가 F.젠킨스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보좌관으로 대동하여 차이나호()에 백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한국 천도교인 약간 명, 청국인 승무원 약 l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항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군() 행담도()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면서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며 내하()의 퇴조(退)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이 사건이 관찰사 민치상()에게 알려지자 즉시 군관 100여 명을 출동시켜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대원군은 양이()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괴변은 필시 천주교도의 내응() 향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도를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하였으나 국민에게 악감정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의 묘-봉분 주위에 자연석 바위들이 많은것이 특징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거세게 내려 지세를 조망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있느 비문[유명조선국현록대부남연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 시 충정 완산이공휘구지묘 군부인여흥민씨부좌]

 

 

 

 망주석

 석양(石羊)

  장명등

 

 

남연군 묘를 이야기할떄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도굴사건이라고 한다.

(역사책에서 배웠다고 하는데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없다...)

 

[1868년(고종 5)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독일상인 오페르트(Oppert, E J)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제독 로즈의 조선원정 때 향도 및 수로안내인이었던 프랑스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구(球)의 묘를 발굴해서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Jenkins F), 페롱, 선장 묄러(Moeller), 조선천주교인등과 함께 충청도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 묘를 도굴코자 하였으나 묘실이 워낙 견고하고 배가 빠져나갈 수 있는 물때가 임박하여 도굴은 실패에 그치고 말았지만

국제적으로도 큰 파문이 되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이 강화대고 천주교탄압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