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크게 들이쉬면 가슴팩이 뻥… 이맛에 못 떠나지라이"
"동네 성과 심 리 떨어진 핵교 댕게올 때먼, 냇가에 들어가 물장난도 침서 메기도 잡고 고동도 많이 줍고 그랬지라. 머루 달래도 많이 따 묵고, 귀신쏘 도적쏘 또 머시냐? 물에가 짚은 쏘도 많앴는디, 세월이 다 훔져 갔지라이."
최정환(67)씨가 태어난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삼치마을은 '구름과 달'을 벗삼을 만큼 깊은 산골 운월리(雲月里)에서도 후미진 마을이다. 석 '삼'(三) 자와 고개 '치'(峙)를 이름 삼은 것은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발산재, 중산재, 무지개재 셋 중 한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흥읍 출발 이후 강 따라 개울 따라 곡선과 직선을 반복하며 이어지던 아스팔트길은 유치면 대천리 암천마을에 닿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고, 좁디좁은 비포장 농로가 대신한다. 박재골 물줄기 따라 이어지는 농로는 억새가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여치가 구슬피 울어대는 가운데 개울 건너 숲 우거진 절벽은 울긋불긋 가을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 장흥 삼치마을에 사는 임종임 할머니. 완도 바닷가에서 산골로 들어와 남편을 여의고 아들딸 모두 시집 장가 보낸 뒤 혼자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노라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 정정현 영상미디어 기자 rockart@chosun.com
길가에서 콩과 고추를 따던 주름 가득한 할머니들 미소에 괜스레 고마워하면서 농로를 따라 20분쯤 들어서자 박재골이 속살을 드러냈다. 암반과 바윗덩이가 적당히 뒤섞인 개울에는 맑은 계곡물이 코발트빛 가을하늘을 담은 채 흘러내리고, 커다란 바윗덩이 아래 작은 소(沼)는 붉게 달아오르는 개울가 절벽을 끌어 담고 가을을 공유하고 있었다.
운월교 직전 삼거리에서 다리 건너 반듯한 아스팔트길 대신 오른쪽 흙길 따라 10분쯤 오르자 노부부가 길가에서 콩을 따다 외지인의 출현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밭에서는 깨를 떨어내느라 연신 팔을 휘둘러대던 할머니도 물끄러미 쳐다본다.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은 된비알(몹시 험한 비탈)에 접어들자 널찍한 콘크리트길로 바뀌더니 곧 삼치마을로 올라선다. 감나무마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호박들이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마을은 역시 이름 그대로 산에 폭 싸여 있다.
"이 산꼴짜기럴 머 땜시 오셨는가? 감이나 한나 들소. 전에는 바깥 동네 갈라먼, 고개럴 넘어사 했재만, 시방은 지갑재(중산재) 말고는 모다 숲이 우거져 갖고 못 댕기제. 그랑께 외려 더 짚은 산꼴이 되었당께."
산사면에 자리잡은 삼치 마을의 가구 수는 어림잡아 네댓 집. 삼치 마을서 태어난 최정환씨는 스물네 살 청년 나이 때 도회지로 나갔으나 몇 년 전부터 일주일에 이삼일씩 머물다 간다고 한다. 무릇 오지마을 주민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 주민들도 사연이 많다. 최정환씨는 영산포에서 살던 할아버지가 도박 빚 피해 들어왔다가 예서 태어나게 되었고, 마을 최고령자인 박판성(83) 할아버지는 화순에서 공무원으로 정년을 맞은 뒤 요양차 형집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되었다.
맨 위쪽 집에 사는 임종임(81) 할머니는 완도 바닷가가 고향이다. 임 할머니는 '논농사만 지어도 먹고살 수 있다'는 동네 할머니 말을 믿고 들어왔다. "쉼을 크게 들에 시어 보씨요. 좋지라? 가슴팩이 뻥 뚫릴 것이오. 바로 그거랑께라. 이 맛에 못 떠나는 거지라이."
해거름 즈음 할머니 네 분이 모여들자 동네 앞마당이 모처럼 떠들썩해졌다. 임종임 할머니가 밭에서 따온 고추를 그늘막 위에 늘어놓자 세 할머니는 "늦게 땄는데 우리 고추보다 훨씬 좋다"며 부러워했다. 김혜옥(76)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먼저 들어오고 나는 외손자들 다 키우고 10년 전 들어왔다"며 "이젠 광주 가서 살라해도 답답해 못살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 김종채(73) 할아버지와 함께 콩을 한자루 어깨에 짊어지고 막 돌아온 박숙아(65) 할머니는 "종채가 좋아서 걸어서 시집왔다"며 "시집온 지 45년 됐는데 지금도 남편이 좋다"며 활짝 웃었다.
할머니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어느새 해가 서산 너머로 꼴딱 넘어갔다.
[여행수첩]
대중교통: 장흥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천리(암천마을)행 군내버스가 하루 5회 다닌다. 40분, 2700원. 장흥교통 (061)863-0636. 암천마을에서 삼치마을까지는 비포장농로를 따라 약 3.3㎞.
유치면에서 접근하면 박재골 비포장길(2㎞)을 생략할 수 있다. 장흥에서 유치면행 버스는 하루 12회 운행하며, 유치면사무소 앞에서 보림사 경유 대천리행 버스가 하루 5회 다닌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하차해 아스팔트길을 따라 곧장 넘어가야 한다. 삼치마을까지 약 3.3㎞.
승용차: 무안광주고속도로 나주 나들목→나주시청→유치면→신풍신덕로→운월교 건너 삼거리에서 왼쪽 길→삼치마을(약 50㎞) 방향으로 접근하거나, 호남고속도로 문흥 나들목→나주시→이양 삼거리→곰치→봉림 삼거리→피재(도로공사중)→보림사→암천마을→삼치마을(약 70㎞) 방향으로 접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