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물들어가는 평사리ㆍ불 밝힌 전어잡이 배…
전남 구례 사성암에서 시작해 광양 망덕포구에서 마감하는 길이다
가을의 풍경과 맛이 이 길 위에 있다
- ▲ 사성암. 오산 산비탈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즐거움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모두 준다. 둘 다 이제 찾아들기 시작한 가을의 풍광을 만끽하는 쾌감이다
섬진강이라면, 마땅히 봄에 찾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봄에 섬진강은 찬란하다. 3월이면 매화 떼가 구름처럼 피어나고 4월엔 길 양편으로 벚꽃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해서, 섬진강을 봄의 강이라고만 생각했다.
9월, 섬진강을 찾고 깨달았다. 봄처럼 찬란하진 않되 그 못잖은 매력으로 섬진강은 굽이쳐 흘렀다. 봄을 빛냈던 벚나무의 잎은 벌써 노랗게 물들어 흩날리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배롱나무는 색의 환영처럼 아련한 붉은 꽃을 피워냈다. 섬진강 허리에 핀 갈대꽃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렇게 섬진강에서, 여름과 가을의 색(色)이 겹쳤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만난 밤나무와 감나무의 열매는 아직 가을의 색을 갖추지 못했으되, 토실토실한 모양새로 가을을 예비했다.
섬진강의 가을을 찾아 나섰다. 전남 구례 사성암에서 시작해, 광양 망덕포구에서 마감하는 길이다. 가을의 풍경과 맛이 이 길 위에 있다.
- ▲ 섬진강은 제 모습을 쉬 드러내지 않는다. 고소산성은 그런 섬진강을 온전히 전망할 수 있는 드문 포인트 중 하나이다. /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wanfoto@chosun.com
◆구례 사성암
섬진강변을 달리다 문득 시선을 높였다. 거기, 한 암자가 산비탈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었다. 사성암이었다.
사성암의 사성(四聖)은 원효와 도선, 진각, 의상이다. 이들이 여기서 수도했다 해 네 성인(聖人)의 암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 연봉과 마주한 오산에 있다. 오산의 해발고도는 531m. 지리산에 비하면 낮다. 굳이 지리산을 두고 여기서 수도했다고 고개를 갸웃하지 말 것. 오르면 안다.
강변에서 버스를 타고 사성암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정상 즈음에서 약사전(藥師殿)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 고도를 높였음에도 여전히 약사전은 까마득하다. 사성암은 땅의 안정감 대신 높이 솟은 바위의 고양감을 취한다. 제 몸의 3분의 1은 바위에 걸치고, 나머지는 허공을 치고 오르는 기둥을 짚었다. 아찔하다. 사성암이 서 있는 공간은 수평의 감각을 지우고 수직의 감각만을 일깨우는 공간이다.
이 수직의 감각으로 가을의 사성암은 두 가지 즐거움을 안겨 준다. 하나는 아래서 사성암을 올려다보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암자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이다. 아래서 사성암을 바라볼 때 암자로 오르는 돌계단을 감싼 넝쿨과 약사전의 단청은 돌의 색깔을 닮는다.
벼랑 같은 돌의 색은 검붉다. 가을을 맞아 넝쿨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본래 선분홍이었을 약사전 단청은 색이 바랬다. 넝쿨의 단풍은 계절의 일이요 약사전의 바랜 단청은 세월의 일이다. 세월은 일방향이되 계절은 순환하니, 넝쿨의 색은 겨울이 오면 다시 멀어질 것이다. 오직 가을에만 사성암의 공간은 시간의 힘으로 서로를 닮아간다.
이제 약사전에 오른다. 수직을 지향하는 힘으로 약사전에 올라 내려다보는 지평(地平)의 공간은 드넓다. 강과 논과 산이 이룬 뭍의 풍경이 한눈이다. 크게 굽이치는 섬진강과 추수를 앞둔 구례평야, 구례를 감싼 산자락이 한 번에 펼쳐진다. 섬진강은 굽이치며 제 안쪽으로 모래톱을 안았고, 구례평야 옆으로는 구례읍내가 빼곡하다. 산은 멀어지며 채도를 잃어가되 먼 산이 안은 논은 연둣빛으로 해맑다.
◆하동 평사리
이맘때 섬진강은 고즈넉하다. 구례 사성암에서 하동으로 넘어와 19번 국도를 타고 남진할 때, 섬진강은 표면의 고요함으로 주변 풍광을 그대로 비춰낸다. 이제 피기 시작한 갈대 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백일홍(百日紅)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그 100일의 끝 무렵에서 붉은 꽃을 피워낸다.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표지판을 지나 좀더 달리면 이내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박경리가 쓴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오면 으레 최참판댁을 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같은 마을에서 오를 수 있는 고소산성은 찾는 이는 드물다.
본래 섬진강은 쉬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라북도와 남도, 경상남도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며 200km 넘게 이어져도, 정작 높이 서서 이 강을 보기란 쉽지 않다. 사성암과 더불어 고소산성은 그 일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고소산성 오르는 길은 사찰 한산사에서 시작된다. 절을 지나 700m쯤 산길을 걷는다. 역시 가파르다. 형제봉 쪽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10분쯤 오르면 돌무더기가 보인다. 고소산성이다.
이곳을 설명하는 표지판은 고소성을 가야의 성으로 추정한다. 1500여 년 전, 가야인은 여기 서서 적의 동태를 관망했다. 서남쪽으로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 보여, 남해에서 오르는 배를 통제하고 상류에서 남진하는 적을 막는다. 동북쪽으로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줄기에 기대 배후가 든든하다.
목적 잃은 지금의 고소성은 다만 섬진강의 가을을 전망한다. 왼편으로 평사리 들녘이 가깝다. 부부송(夫婦松)으로 유명한 소나무 한 쌍은 그 드넓은 평야에서 유별하다.
고소성을 오르는 데 힘을 쏟았다면 잠깐 길을 돌려 ‘도시고양이 생존연구소’를 들르는 것도 좋겠다.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같이 운영하는 이곳은 하동을 걸어 유랑하는 배낭여행객이 꼭 들르는 명소다. 김영호(37)·이지은(35) 부부가 작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김영호씨는 서울 사람이다. 설계 일을 하다 5년 전 가평에서 고추밭을 일구며 일종의 ‘귀농 예행연습’을 했다. 재작년 하동에 정착했다. 연고 없는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오로지 풍광. 건물을 직접 설계했다. 가평에서 배운 도자기 공예와 밭일을 병행하며 카페를 운영한다.
독특한 이름의 카페는 이 여정의 쉼표다. 화개면 덕은리 산중턱에 자리한 이곳 풍경은 정겹다. 토란 잎이 바람에 크게 펄럭이고, 녹차 밭의 색은 짙다.
- ▲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wanfoto@chosun.com
◆광양 망덕포구
광양 망덕포구는 섬진강의 끝이다. 500리 물길 끝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서 섬진강은 제 이름을 잃는다.
망덕포구는 작다. 가구 수십 채가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에 기대 산다. 봄이면 어른 손바닥만 한 벚굴을 채취하고 가을엔 전어를 잡는다. 십여 곳의 식당은 강변에 크게 비닐 집을 지어놓고 각종 회를 내놓는다. 요즘은 당연히 전어가 인기다. 회와 구이, 무침을 세트로 해서 내놓는다.
가을에 이곳 어부의 밤낮은 바뀐다. 전어는 밤에 수면 가까이 올라온다. 해서 어부들은 밤에 길을 나선다. 작은 모터보트에 주로 노부부 한 쌍이 탄다. 밤새 광양만 일대를 돌며 그물을 친다. 그물은 두 종류다. 바다 표면에 가깝게 치는 뜬 그물과 깊게 치는 그물. 뜬 그물은 20~30분마다 한 번씩, 깊게 치는 그물은 2~3시간마다 한 번씩 걷는다. 그물 양끝엔 작은 전구를 매단다. 그물을 친 자리이니 다른 어선에게 에둘러 가라는 이정표요, 후에 찾기 쉽게 하기 위한 표지다. 그렇게 그물을 치고 당기며 멀리 동녘 하늘이 붉어질 때까지 밤새 바다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전어잡이 어선이 광양만 앞바다를 도는 밤의 풍경은 아련하다. 이들을 둘러싼 것들은 크다. 망덕포구에서 광양만으로 나아갈 때, 여수산단과 광양제철소가 시야에 든다. 공단의 불은 찬란하다. 어부가 그물에 건 불빛은 이에 비해 간신히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날이 밝아오면 여수와 광양을 이으려는 이순신 대교와 거대한 화물선이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전어잡이 어선은 화물선에 비해 간신히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가을, 광양만의 밤 풍경은 간신히 버틴 것들로 아련하다.
때로 전어잡이 어선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다. 가뭄으로 강의 수량이 줄고 바다가 강 깊숙이 올라올 때, 전어가 먹이를 찾아 강을 거슬러 오르는 탓이다. 황용억 광양전어축제위원장은 “그럴 때면 하동 매화 마을에까지 전어가 오른다”고 했다.
망덕포구에서 뜻하지 않은 이름도 같이 만날 수 있다. 바로 시인 윤동주다. 1941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자필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일본 유학 중 윤동주는 경찰에 검거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 사이 정병욱은 아버지가 기거하던 가옥의 마룻장을 뜯어 원고를 보관했다. 그리고 1948년, 시집으로 묶어 냈다.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오랜 기간 시집을 품은 정병옥 가옥이 망덕포구에 있다.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근대 가옥이다.
구례 사성암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화엄사 입구에 한식당 ‘예원(061-782-9917)’이 있다. 산채 정식을 낸다. 예원 이외에도 백화회관(061-782-0600), 지리산 식당(061-782-4054), 지리산 회관(061-782-3124)에서 산채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광양 망덕포구에선 모든 횟집이 전어 요리<사진>를 낸다. 횟집 중 여수 세계 박람회 지정업소는 바다횟집(061-772-1717)과 련 횟집(061-791-7791).
광양은 불고기로도 유명한 곳. 향촌옥(061-792-5858), 삼대광양불고기집(061-763-9250), 금목서회관(061-761-3300), 금정광양불고기(061-792-3000), 대호불고기(061-762-5678), 조선옥숯불갈비(061-792-8558) 등에서 맛볼 수 있다.
구례 문화관광과 (061)782-2014
하동 악양 종합관광안내소 (055)880-2950
도시고양이 생존연구소 010-5670-0535
광양 문화홍보담당관실 (061)797-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