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북 괴산] ?정효공 탄수 이연경(貞孝公 灘? 李延慶)? 묘역-광주이씨

장안봉(微山) 2013. 2. 27. 03:46

정효공 탄수 이연경(貞孝公 灘叟 李延慶)

 

1484(성종 15)∼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ㆍ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도사 수원(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의문(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라 해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ㆍ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ㆍ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 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ㆍ강유선(康維善)ㆍ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광주이씨묘역 입구

 

신도비-광양군이세좌(좌), 정효공 이연경(중), 충장공 이광악(우)

 

광양군 이세좌의 신도비

정효공 탄수 이연경의 신도비-퇴계 이황이 찬하였다

 

충장공 이광악의 신도비-강현(姜鋧)이 찬하였다

 

 

 

묘역 오르는 길

탄수 이연경 묘역(좌상), 아들 이호약 묘(후), 이광악 묘(전)

탄수 이연경 묘역-제일 윗쪽이 탄수선생의 묘이다

탄수 이연경선생 묘 전경

탄수 이연경은 의령현감 이연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두었으며 영의정 노수신이 사위이다.

 

 

 

 

 

 

 

 

 

탄수  이연경 묘 후경

이호약(李好約) 묘

 

 

 

 

이호약 묘 후경

 

 충장공 이광악(忠莊公 李光岳)

 

1557(명종 12)∼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호약(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ㆍ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손자 충장공 이광악 묘-윗쪽이 아버지 이호약의 묘이다

충장공 이광악과 배위 여흥민씨의 쌍분이다

이광악 묘 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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