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 明齋故宅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살던 곳
윤증(尹拯)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號)는 명재(明齋) 또는 유봉(酉峰)이다.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아버지 윤선거(尹宣擧)는 병자호란 당시 처자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갔으나, 강화성이 함락되자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고 몰래 강화도를 탈출한다.
그가 강화도를 탈출하기 전에 그의 부인 즉, 윤증의 어머니 공주이씨(公州李氏)는 오랑케에 더럽히기 싫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王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내려 받아, 이 고택 앞쪽에 세워져 있다.어머니의 순절(殉絶)로 비록 정려(旌閭)를 받지만, 아버지 윤선거의 이러한 행적은 후일 윤증의 생애 내내 原罪가 되는 것 같다.
윤증은 유계(兪棨)와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학문을 익히게 되고, 후일 김집(金集)의 소개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朱子大典)을 배웠다. 송시열의 제자 중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지만, 20여차례에 걸친 벼슬 권유를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벼슬없이 지낸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 전혀 무관심한 은둔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뒤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스승인 송시열과도 격렬하게 대립하여 송시열은 노론(老論)의 영수로..윤증은 소론(少論)의 영수로 서로 반목하게 된다.요즘 표현으로 소위 여권(與圈)의 분열이고 내분이었다. 이를 두고 윤증은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평가와 송시열에게 대항한 유일한 인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명재 윤증의 고택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윤증은 이 곳에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주 검소하게 草家를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윤증의 첫째 아들인 윤행교(尹行敎)가 살던 집이다. 윤증의 말년에 둘째 아들인 윤츙교(尹忠敎)가 장손이자 형님인 윤행교를 위하여 1709년에 지어준 집인 것이다.윤증이 죽기 5년 전인데, 윤증은 근처에 살면서 가끔씩 들르는 정도이었다.
담장이 없다 .. 처음부터
전문가에 의하면 이 집의 특징은 사랑채의 담장이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그리고 사랑채를 높이 올려 전망을 살린 점 등이라고 한다. 담장이 없다는 것...
사랑채를 높이 올린 것...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여러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좋게도, 나쁘게도...
윤증 고택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 달에 1,000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통미를 간직하고 있는 고택으로는 강릉 선교장(船橋莊)과 이 곳 윤증 고택을 꼽는다. 선교장이 웅장한 장급(莊級) 고택이라면, 윤증고택은 소박하면서도 조선 양반가의 품위가 어려 있는 곳...더욱이 윤증의 후손들이 살면서 사람들의 훈김이 배어 있으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백의정승 白衣政丞 .. 벼슬을 거부하다.
윤증은 86세로 천수를 다 할 때까지 38세부터 20여차례에 걸쳐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단 한번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는 무려 열여덟번이었다. 그의 말년은 벼슬과의 싸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의정까지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그리고 윤증은 仁祖 대에 출생하여 효종,현종,숙종까지 네명의 임금을 모셨지만, 왕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고 정승의 반열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하였으며, 스승이자 최대의 정적(政敵)인 우암 송시열에게 맞선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단 한번 윤증은 벼슬을 받으려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과천에 머물며 박세채와 상의한다. 결론은 벼슬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 이외에 벼슬에 나가서는 안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 날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암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삼척(三戚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집안)의 문호는 닫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역량으로 그 것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되돌아 고향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윤증의 아버지 그리고 송시열
윤증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결코 두 사람은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아 그의 스승이자 정적(政敵)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아버지 윤선거와 스승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고, 친구사이이었다.
또한 윤선거와 그 아들 윤증의 관계도 보통의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윤선거는 윤증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자,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 할 치욕, 컴플렉스를 안겨 준 모순된 존재이었다. 또한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간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큰딸은 윤선거의 형 윤문거(尹文擧)의 며느리 즉, 윤증의 조카며느리이었다. 당시의 결혼은 집안간의 결합이었는데...
도원인가(桃源人家) ...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는 뜻
회니의 반목 (懷泥의 反目) 또는 회니의 사건(懷泥의 戰爭)
명재 윤증(明齋 尹拯)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사제지간이다. 그러나 사상적 견해의 차이때문인지..정치적 노선의 차이인지...두 사람은 서로 비난하며 대립하여 각각 반대세력의 영수가 되어 사사건건 반목한다. 이를 회니(懷泥)의 반목이라고 부른다.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이 이 곳 노성(魯城)의 니산(泥山)에 살았기 때문에 후세에서 그렇게 부른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이 문제가 된다. 윤증의 나이 41세인 1699년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죽었다. 이미 윤증과 송시열은 서로 反目관계이었지만,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윤증의 아버지의 연보(年譜)와 박세채(朴世採)가 쓴 행장(行壯)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 부탁하자, 송시열은 윤선거(尹宣擧)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처자와 친구가 순절(殉節)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혼자만 탈출한 사실을 거론한다. 그리고 억지로 묘갈(墓碣)을 써 주면서.......
그저 적었을 뿐,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니다
나(宋時烈)는 윤선거(尹宣擧)를 잘 모른다.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취급하였다. 즉, 술이불작(述而不作)이라는 첨언을 분명히 하였다. 풀이하자면 나는 그저 적었을 뿐이지 내가 작성한 것은 아니다....
윤증은 몇번이나 수정을 부탁하였지만 송시열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증과 송시열의 사제지간을 영원히 끝나게 되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을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반목은 지금도 파평 윤씨(坡平 尹氏)와 은진 송씨(恩津 宋氏) 양 가문의 후손들사이에서도 유지된다.
하여튼 윤증은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를 변명하고, 이율곡이 어릴 때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율곡의 입산은 잘못이 있으나, 자신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 번에는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하였다고 윤증을 성토하고 조정에서는 큰 시비가 일었다. 윤증이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상소도 잇달았지만, 숙종은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 하면서도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윤증은 또한 스승 송시열에 대하여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고 맹비난하였다. 의리쌍행왕패병용 (義利雙行王覇竝用)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사람의 사감(私感)이 정치적, 사상적 성향을 달리하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사람은 노선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두 사람은 모두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지향적이었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명분을 고수하려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윤증이 학질로 81세에 사망하였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배신하여 사림(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한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하였는데, 수년 후그 일이 탄로가 나서 유계의 손자 유상기는 화가 나서 윤증에게 절교편지를 보냈다.윤증은 어렸을 때부터 유계(兪棨)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윤증이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
즉 윤증은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그리고 스승이 쓴 채긍ㄹ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를 당했다는 비양심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그러나 숙종은 윤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네. 평생에 얼굴 한 번 못보앗는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
또한 윤증년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에 조문한 인사가 무려 2,300여명이나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조선의 이름깨나 있는 인물은 전부 조문한 셈이다. 그것도 전국에서...윤증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지만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숙종실록은 믿지 말자. 실록은 윤증의 소론이 몰락하고 난 후, 노론측 인물이 사관(史官)이었음으므로...
이 집의 장맛이 유명하다고... 본격적으로 판매하지는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원하면 판매한단다. 간장독, 된장독, 김치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를 보기만 해도 마음은 푸근해지며, 귀소본능을 일깨우는 우리의 보편적인 풍경이다.
우물
연못... 조선시대 전형적인 연못의 형태이다. 네모진 연못 안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곳의 배롱나무는 유명하다. 지금은 철이 조금 지나 꽃이 화려하지 않지만, 꽃이 활짝 필 즈음이면 이 꽃을 보러 오는 사진가, 관광객들이 많이 온단다.
석가산 石假山
사랑채 앞마당에 잇는 조그만 석가산(石假山)이다. 사랑채에 앉아 마당쪽을 내다보면 40cm 크기 정도의 돌들을 세워 놓았다. 그냥 돌이 아니고 석가산이다. 수석들을 조성해 놓고 이르 산을 ㅗ여기고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이 석가산은 금강산을 모델로 한것이라고 한다. 사랑채에 한가로이 앉아 석가산을 보면서 금강산을 생각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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