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문묘(文廟)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여 수도를 정하고 문묘와 태학(太學)을 세웠다. 태종이 학궁(學宮)을 중수하여 영락(永樂) 17년 기해(己亥) 증자(曾子)와 자사(子思) 두 분을 배향위(配享位)에 올리고, 자장(子張)을 십철(十哲)의 반열(班列)에 올렸으며, 사신(詞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사가집(四佳集)》ㆍ<존경각기(尊經閣記)>
○ 성균관에는 양현고(養賢庫)ㆍ존경각(尊經閣)ㆍ전사청(典祀廳)ㆍ대성전(大成殿)의 동무(東廡)ㆍ서무(西廡)와 식당(食堂)이 있다. 모두 성균관 조에 상세하다.
○ 태종 14년에 임금이 태학에 거둥하여 알성(謁聖 문묘에 참알하는 것)하였다. 알성하는 예의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역대의 임금이 태학에 거동하여 알성한 일은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 태종이 송도(松都)에서 즉위하고 고관의 자제들을 태학에 입학하도록 명하였다. 변계량의 문묘비문 세종 3년에 세자가 입학하고, 겸대사성(兼大司成) 윤상(尹祥)을 박사(博士)로 삼았으며, 세조 3년에 세자가 입학하고, 대제학 최항(崔恒)을 박사로 삼았다. 이로부터 상례(常例)로 되었다. 중종 17년에 세자가 입학하였고, 명종 15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입학하였다. 인조 3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입학하고, 23년에 세자가 입학하였다. 효종 2년에 세자가 입학하였으며, 현종 10년에 세자가 입학하였다. 숙종 21년에 세자가 입학하였으며, 경종 2년에 세제(世弟)가 입학하였다. 현종조 이후로 세자가 입학하면 상례로 《소학(小學)》을 강의하여 왔으나, 이때부터 《대학(大學)》을 강의하였다. 영종 3년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입학하였고, 18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가 입학하였으며, 37년에 세손(世孫)이 입학하였다.
단종은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어 12세에 즉위하였는데, 입학한 것이 《선원보첩(璿源譜牒)》안에 기재되지 아니하였다. 단종 계유년에 덕종이 입학하였으나 그때는 아직 세자의 지위에 오르지 아니하였다.
왕자와 종친(宗親) 또한 입학하는 예가 있었으며, 사성(司成)으로 박사를 삼는다고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나 지금은 이 예가 없다.
○ 세종이 문묘에 참알하려 하니 예조 판서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옛 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당(唐) 나라에서는 화포(鞾袍)의 차림으로 선성(先聖)에게 전알(展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 제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강사포(絳紗袍)가 아닌가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강사포는 여러 신하들을 접견할 때에 입는 옷이거늘 어찌 이 옷을 입고 선성을 뵐 수 있겠는가. 나는 장차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의 차림으로 참알하겠다.” 하였다. 《국조보감》
문묘의 액(額)에 ‘대성전(大成殿)’이라고 쓴 것은 한호(韓濩)의 글씨이며, 명륜당(明倫堂)의 액은 두 개인데 하나는 주자(朱子)의 글씨요, 하나는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 성종 3년에 전사청(典祀廳)을 지었다.
○ 성종 23년에 처음으로 문묘의 위판(位版)에 궤독(櫃櫝)을 설비하였다.
○ 연산조(燕山朝) 때에 성묘(聖廟)를 더럽혔다. 연산기(燕山紀)에 들어 있다.
○ 중종 원년에 명하여 서총대(瑞葱臺)의 돌을 철거하게 하고, 반궁(泮宮)을 수축하여 위판을 도로 모셔다 봉안하였다.
○ 하정사(賀正使) 윤효손(尹孝孫)이 돌아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선성(先聖)ㆍ선사(先師)를 향사하는 데는 모두 찬탁(饌卓)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땅에다 바로 자리를 펴고 제사를 올리니 실로 존경하는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중국의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성종이 그 말을 좇아 처음으로 찬탁을 설비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홍귀달(洪貴達)의 기록에는 이극증(李克增)이 하였다고 되어 있다.
○ 선조 갑술년 여름에 교서저작(校書著作) 조헌(趙憲)이 질정관(質正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소를 올리기를, “신이 가만히 보니 중국은 가정(嘉靖) 때에 공자의 위패에 쓴 ‘문선왕(文宣王)’의 칭호를 ‘지성선사 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고쳐 썼으며, 안자(顔子) 이하의 위패에는 모두 관작(官爵)의 이름을 떼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문묘의 액(額)도 ‘대성전’이라 하지 않고 ‘선성묘(先聖廟)’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상고하여 보니 한(漢) 나라 평제(平帝) 때, 왕망(王莽)이 그의 간사함을 부리면서 공자를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 일컬었고, 당(唐) 나라의 현종(玄宗)이 또 ‘선왕(宣王)’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안자(顔子) 이하는 공(公)ㆍ후(侯)ㆍ백(伯)의 품질(品秩)로 일컬었습니다.그 ‘공(公)’이라 일컫고 ‘왕(王)’이라 일컫는 것은 왕망과 헌종이 부자(夫子)가 말씀하신,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지키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지키며,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리를 지키고, 아들은 아들의 도리를 지켜야 된다.’는 도리에 아주 패려하고 문란하면서 거짓으로 성인을 높여 천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일찍이 공자가 가신(家臣) 두는 것을 꾸짖고 증자가 대부(大夫)의 화려한 책(簀)은 자기의 신분에 맞지 않다 하여 바꿨는데 어찌 이 칭호를 받겠습니까. 더구나 자기는 황제라 칭하고 자기의 신하를 봉증(封贈)하여 억지로 씌운 것이니 더욱 성인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가정(嘉靖) 10년에 대학사(大學士) 장부경(張孚敬)의 진언(進言)에 의하여 천 년의 잘못을 한 번에 바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종전의 누습(陋習)을 답습하고 있으니,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야 될 것인가 합니다.” 하니, 하단(下段)은 계성사(啓聖祠) 조에 들어 있다. 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조정의 논의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따르고자 하는 자가 있었다.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성인의 덕(德)은 비록 봉증(封贈)으로 보태지거나 덜어지는 것은 아니나, 이 칭호로써 높여 온 지가 이미 오랜 세대였고, 정자(程子)ㆍ주자(朱子) 같은 유학자(儒學者) 또한 이의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삭제해 버린다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바입니다. 이번 이 일을 어찌 경솔하게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 하니, 고치지 아니하였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선조조 갑술년 여름에 송도(松都)의 국학(國學)에 있는 선성(先聖)과 십철(十哲)의 소상(塑像)을 철거하고 위판으로 대신하였다. 처음에 고려 충렬왕(忠烈王) 9년 계묘 윤 5월에 국학의 학정(學正) 김문정(金文鼎)이 선성ㆍ십철의 소상과 문묘의 제기를 원(元) 나라에서 가지고 돌아왔다. 대개 찬성사(贊成事) 안유(安裕)의 건의로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또 나머지 돈으로 김문정에게 부탁하여 사오게 한 것이며, 다시 국학을 세우고 소상을 봉안하였던 것인데 동ㆍ서무(東西廡)의 70제자는 위판을 사용하였다.충선왕(忠宣王)이 국학을 ‘성균관’이라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16년에 이르러 문선왕의 소상을 숭문관(崇文館)으로 옮겼는데, 문무백관이 관디를 갖추고 시위(侍衛)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려조 90년 동안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를 겪었으나 병화(兵火)를 면하였다. 우리 태조가 혁명하여 수도를 한양(漢陽)에 옮기니, 성균관을 송도부의 사람들이 ‘학당(學堂)’이라 일컬었다. 사당의 모습이 예전과 같았고, 한결같이 고려의 제도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상은 불상(佛像)과 같아서 교화(敎化)를 밝히는 학궁의 제사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수의(收議)하기를 명하여 위판으로 바꾸고, 소상을 묻으니 부(府)의 선비와 부로(父老)들이 소를 올려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유천(柳川)의 차자
옛날의 문묘 제도에 있어서는 중국은 소상을 봉안하고, 우리나라는 위판을 사용하였다. 다만 개성ㆍ평양 두 부(府)의 문묘에만 소상을 봉안하였는데 이는 원(元) 나라 때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가정(嘉靖) 병술년에 명 나라가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공자 및 배향한 여러 선현의 소상을 훼철하고 밤나무로 위판을 만들게 하였다. 또 “공자는 대성인(大聖人)이다.왕위가 없는 것을 왕의 칭호로 높인다면 반드시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고 하여 드디어 ‘대성문선왕(大成文宣王)’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위판에 ‘지성선사 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썼으며, 안자ㆍ증자 이하는 모두 관작의 칭호를 버리고, ‘복성안자(復聖顔子)’ㆍ‘종성증자(宗聖曾子)’ㆍ‘술성자사(述聖子思)’ㆍ‘아성맹자(亞聖孟子)’라 하였고, 민손(閔損) 이하는 ‘선현(先賢)’이라 하고, 좌구명(左丘明) 이하는 ‘선유(先儒)’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양과 개성에 있던 소상을 이때에 이르러 또한 중국의 예에 따라 묻었으므로 지금은 없다. 《패관잡기(稗官雜記)》 《지봉유설(芝峯類說)》
○ 임진년에 문묘에 병화(兵火)를 입어 전사청(典祀廳)에 임시로 위판을 봉안하였다. 환도(還都)하여 제일 먼저 문묘를 다시 중건할 것을 의논하였으니, 대성전은 신축년에 세워지고 명륜당은 병오년에 낙성되었다. 《월사집(月沙集)》
일찍이 계사년에 환도하여 임금이 문묘에 친제(親祭)하여 선성(先聖)의 영(靈)을 위안하고자 하였는데 예관이, “성전(聖殿)이 불타고 없어 제례(祭禮)를 거행할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신(神)이 천하에 있는 것은 물이 땅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어디를 가나 없는 데가 없다. 오직 정성만 다하면 신은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옛사람들은 간혹 단(壇)을 만들어 놓고 제사하였다. 어찌 반드시 나무로 만든 신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명하여 학궁 곁에 단을 쌓아 위(位)를 설치하고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였다. 《월사집》
임인년에 문묘의 중수가 준공되니 선성에 전알(展謁)하였다. 《고사촬요(攷事撮要)》 ○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신축년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면 왜놈들이 문묘에 방화하였으나, 끝내 태우지 못하자 “아아, 공부자(孔夫子)여, 만고의 공부자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헛말이다
.임진년 이후부터는, 문묘의 초하루와 보름의 전례(奠禮)에는 다만 분향(焚香)만 하였다.
전에는 비(碑)가 있었으나 또한 병화에 넘어져 부서졌다. 인조조 병인년에 이홍주(李弘冑)에게 명하여 돌에 고쳐 쓰게 하고, 김상용(金尙容)이 액(額)에 전자(篆字)를 쓰고 이정귀(李廷龜)가 그 대강 전말을 비의 후면에 기술하였다. 《월사집》
○ 인조조의 병자호란 때에 전복(典僕) 정신국(鄭信國)ㆍ박잠미(朴潛美) 등이 향유(鄕儒)와 태학생(太學生) 나이준(羅以俊) 등 3명과 더불어 위판을 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제기는 산골짜기에 묻어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야기문》
그때 문선왕 이하 십철의 위판은 산성으로 모셔 가고 동ㆍ서무(東西廡)의 위판은 모두 대성전의 뒤쪽에 묻었는데, 요행히 호병(胡兵)이 파내지 않았기 때문에 오욕(汚辱)을 면하였고, 문묘의 하인 남녀들도 모두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여 또한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면하였다. 《난리잡기(亂離雜記)》
○ 효종 2년 9월에 임금이 태학에 거둥하니 예관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석전일(釋奠日)이 아닌 때에 알성(謁聖)을 하게 되면 혹 작헌(酌獻)하는 예가 있었고, 혹은 다만 분향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왕의 위를 이으신 뒤, 처음으로 선성(先聖)의 사당에 전알하시는 것이니, 마땅히 작헌례를 행하셔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좇았다. 이로부터 문묘에 거동하면 반드시 작헌례를 행하게 되어 드디어 제도로 고정되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계성사(啓聖祠)
선조조 갑술년에 조헌(趙憲)이 올린 소 하단(下段) 에 아뢰기를, “신은 또 보니 성묘(聖廟)의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있는데,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가 북쪽에 있고, 안무유(顔無繇)ㆍ공리(孔鯉)는 동쪽에 있으며, 증석(曾晳)ㆍ맹손씨(孟孫氏)는 서쪽에 있고, 동무와 서무에는 또 정향(程珦)ㆍ채원정(蔡元定)ㆍ주송(朱松)이 있었습니다. 대개 학교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는 사당의 가운데에 있고, 그의 아버지인 안로(顔路)ㆍ증점(曾點)ㆍ백어(伯魚)는 아득히 먼 아래에 있으니, 보통 사람도 편안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성현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세종황제(世宗皇帝)가 비로소 별묘(別廟)를 지어 봄ㆍ가을의 석전과 동시에 제사를 거행하게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아들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받지 못한다.”고 하는 도리입니다.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문묘의 서쪽에 널찍한 빈땅이 있습니다. 만약 의논하여 그곳에 별묘(別廟)를 세우고, 봄ㆍ가을의 석전과 동시에 제사한다면 거의 인륜의 도리가 온전하여지고 사리도 합당하게 되어 한 나라의 부자(父子)된 자의 도리가 바로잡힐 것입니다.” 하였다.
명 나라에서는 가정(嘉靖) 9년에 계성묘(啓聖廟)를 따로 세우고, 숙량흘(叔粱紇)을 ‘계성공(啓聖公)’이라 일컬으며, 안무유ㆍ증점ㆍ공리ㆍ맹손씨를 ‘선현(先賢)’이라 일컬어 좌우에 배향하였고, 정향ㆍ주송ㆍ채원정을 ‘선유(先儒)’라 일컬어 동ㆍ서무에 종사(從祀)했으며, 석전일에는 한밤중에 소뢰(小牢)의 제물로 먼저 제사를 지냈으니, 건의한 신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때에 이르러 예관이 의견을 올려 중국의 계성묘를 따로 세운 제도에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못하니 논의하는 이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지봉유설》
○ 현종조 무신년 겨울에 관학(館學) 유생 신응징(申應徵) 등 1백 30여 명 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학교에서 닦아야 할 도리는 인륜을 밝히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고, 향사하는 예절은 어진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륜을 밝혀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 인륜의 차례를 거꾸로 바꾸어 놓아, 어진 이를 향사하는 사당의 제전(祭典)에 있어 누락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유도를 위하여 한스럽지 아니하며, 태평한 시대의 흠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문묘에 종사한 위차(位次)를 살펴보니, 안자ㆍ증자ㆍ자사는 정전(正殿) 위에 앉고, 안자의 아버지 무유(無繇)와 증자의 아버지 점(點)과 자사의 아버지 이(鯉)는 낭하(廊下)에 앉아 있습니다. 신 등이 삼가 《춘추전(春秋傳)》을 상고하여 보니, ‘아들이 비록 제성(齊聖)하더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오래된 예절이다.그러므로 우(禹)를 곤(鯀)보다 먼저 제사하지 아니하며, 탕(湯)을 설(契)보다 먼저 제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아들을 아버지보다 먼저 하고 있으니 그 제사가 거꾸로 됨이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옛날 부자(夫子)께서 장문중(臧文仲)의 무지(無知)한 일 세 가지를 열거하였는데, 제사를 거꾸로 지내는 것이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 부자의 사당에서 향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제사를 거꾸로 하고 있으니 무지함이 또한 심합니다. 또 보통 사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아들이 아버지보다 윗자리에 앉는다면 그 풍속을 크게 어지럽히고 예의에 어그러짐이 어떠하겠습니까. 신(神)을 섬기는 이치가 산 사람을 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하다면 안자ㆍ증자ㆍ자사의 영혼이 어찌 하루인들 사당에 봉안된 것을 기뻐하며 그 예의에 어그러진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신 등이 이른바, ‘인륜의 차례를 거꾸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ㆍ주염계(周濂溪)ㆍ장횡거(張橫渠)의 아버지는 모두 향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 공훈(功勳)이 한때에 드러난 자에게도 조정에서 베푸는 영화가 오히려 그 부모에게 미치게 하는 은전이 있는데 더구나 저 선성ㆍ선현의 아버지가 성현을 낳았으므로 만세에 공덕이 있는데도 후세에서 제사 받지 못한다면 성인을 추모하고 어진 이를 높이며, 근본을 생각하여 공을 갚는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선유 홍매(洪邁)ㆍ웅화(熊禾)가 모두 이르기를, ‘마땅히 따로 한 묘사(廟祀)를 설치하여 숙량흘을 향사하고 여러 선현의 아버지들을 차례로 배향한다면, 예로써 성현을 높이는 뜻에 거의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어른이 있음을 보여서 백성에게 효도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명 나라 홍무(洪武)ㆍ홍치(弘治) 사이에 유신 송렴(宋濂)ㆍ방효유(方孝儒)ㆍ정민(程敏)ㆍ사탁(謝鐸) 등이 모두 계성묘(啓聖廟)를 세울 것을 청하는 일로 전후에 각기 의견을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嘉靖) 초에 이르러 각신(閣臣) 장부경(張孚敬)이 다시 정민ㆍ사탁 등 여러 유자(儒者)의 말을 인용하고 거듭 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얻어 의논을 정하고 사당을 세워 가운데는 계성공(啓聖公) 숙량흘을 향사하고, 안무유ㆍ증점ㆍ공리ㆍ맹손씨를 배향하였으며, 정향ㆍ주송ㆍ채원정을 종사(從祀)하였습니다.최후로 만력(萬曆) 연간에 이르러 국자감학록(國子監學錄) 장양몽(張養夢)의 주청으로 주돈이(周敦頤)의 아버지 보성(輔成)과 장재(張載)의 아버지 적(迪) 또한 정향ㆍ주송의 예(禮)에 비겨서 모두 올려 모셔 향사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중국에서 이미 시행하는 제전(祭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따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결단하시어 쾌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고, 또 귀산(龜山) 양시(楊時)ㆍ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ㆍ연평(延平) 이동(李侗)을 동ㆍ서무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의 계목(啓目)에 아뢰기를, “이 신응징 등의 소에 말한 것을 보니, 이미 중국에서 시행하는 일이니 이제 소 안에 진술한 바에 의하여 따로 계성묘를 세운다면 진실로 합당한 일이 되겠습니다.정향은 제일 먼저 속리(屬吏)인 주염계의 학문을 알아보고 추천하여, 자신의 지위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또 두 아들로 하여금 그에게 좇아 배우게 하였고, 주송은 임종 때에 주자를 그의 벗 적계(籍溪) 호씨(胡氏)에게 부탁하여 정씨(程氏)의 학(學)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정향은 왕안석(王安石)의 새법[新法]에 붙지 아니하고, 물러나 낙양(洛陽)에 살았으며, 주송은 진회(秦檜)의 화의(和議)에 따르지 아니하고, 민중(閩中)으로 봉사(奉祀)의 자리를 구하여 갔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진 사대부로서 대현(大賢)을 낳았으니, 계성묘에 종사하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대단한 변경과 개정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사체(事體)가 더할 수 없이 중대하니, 대신들과 재야의 여러 유신들에게 문의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헌의하기를, “우리나라의 문묘의 예제(禮制)는 모든 것을 중국이 정한 제도를 따라 지금까지 준수하고 있습니다. 명 나라 때에 이미 강론(講論) 결정한 일이면 오래된 것이거나 가까운 것을 물론하고 마땅히 모두 본받아 시행하여야 할 것이나,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새로 증감(增減)하거나 승강(陞降)하는데 이르러서는 또한 불가함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은 헌의하기를, “관학(館學) 유생(儒生)의 상소와 예조의 회계에 자세하게 빠짐없이 차례로 진술하여 모두 고증과 근거가 있으니, 그대로 시행한다면 어찌 태평 성세의 높은 광경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명 나라는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고, 신은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렸으니 이러한 중대한 예전(禮典)은 결코 신 같이 늙어 정신이 흐린 자가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판중추부사정치화(鄭致和)는 헌의하기를, “결함이 있었던 일을 추후하여 바로잡아 거행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으나, 지금에 이르러 옛 것을 변경하여 새로 배향을 더하고 위차(位次)를 개정하는 것은 일이 매우 중대하고 어려우니, 마땅히 자세히 살펴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은 헌의하기를, “이제 문묘의 제전을 덜고 보태며 그냥 두고 개혁하는 데에 대한 논의는 다만 중국의 예제(禮制)와 선유들의 정론(定論)에 따르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혹시라도 마땅히 배향에 올려 모시거나 출향(黜享)해야 하는 일이 있어야겠다고 한다면, 원(元) 나라의 허형(許衡)을 출향하자는 선정(先正)의 논의가 있었는데, 예관이 마침내 들어서 말하지 아니하니, 어찌 이때의 형세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대체로 소신의 어리석은 천견(淺見)으로는, 송(宋) 나라의 종묘(宗廟) 제도에는 시속(時俗)에 따라 고례(古禮)에 틀린 것이 많았습니다.그러나 주자(朱子)의 뜻은 아직 임시로 그대로 두고 그 중에서 매우 패려한 것만을 조금씩 변경하였다가 다른 때에 흥복(興復)한 뒤에 천년 동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국가의 법을 이룬다면 또 선(善)한 일의 큰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일도 성상께서 스스로 역량과 사세의 여하를 헤아리시어 만약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니 아직 제도 문물 등의 일에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은 임시 조치로 현상을 유지하시면서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비록 작게 변통하는 일일지라도 예관의 논의에 좇아 유생들의 마음을 위안하는 것 또한 한 길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은 헌의하기를, “계성묘의 제도는 중국에서 이미 사행하는 것으로 그 뜻이 좋으며, 이연평(李延平)의 종사는 바로 주자(朱子)가 이미 행한 것으로서, 그 뜻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그렇다면 이 두 가지 조목은 더욱 급히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나머지의 예제는 천천히 헤아려 생각하여, 십분 옳고 합당함을 찾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다만 중국의 계성묘에도 주염계ㆍ장횡거의 아버지가 과연 정자ㆍ주자의 아버지와 위열(位列)을 같이 하고 있는지, 마땅히 그 두 사람의 사업과 행실을 중국에서 이미 시행하는 예전(禮典)을 다시 자세하게 상고해서 처리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은 병으로 헌의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계성묘에 관한 일은 여럿의 논의에 따른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을 주무 관아에 내렸는데, 흉년이었으므로 풍년을 기다려서 시행하기로 재결하였다. 《조야기문》
○ 숙종조 신유년 7년 10월에 장령 정면(鄭勔)이 소를 올렸는데, 그 아뢴 대략에, “명 나라에서는 효종(孝宗) 홍치(弘治) 연간에 급사중(給事中) 장구공(張九功)의 건의로 따로 계성전을 설치하여 숙량흘을 향사하고 안로ㆍ증석ㆍ공리ㆍ맹손씨를 배향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소의 제례(祭禮)를 모두 명 나라 제도를 따르면서 유독 이 일만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건의하여 실행하기를 청하였사오나, 마침내 채택ㆍ실시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별전(別殿)을 새로 건축하여서 ‘계성(啓聖)’이라 이름하여 숙량흘을 정향(正享)의 위(位)에 모시고, 사성(四聖)의 아버지를 동ㆍ서의 자리에 나누어 자리잡게 하며, 또 정태중(程太中)ㆍ주위재(朱韋齋)를 그 아래에 있게 하여, 봄ㆍ가을의 석전(釋奠)과 함께 제사를 행한다면, 둘 다 성인을 높이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에 마땅하여 유감됨이 없을까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수의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계성묘에 대한 일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신응징(申應澄) 등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수의하고 새로 건설할 것으로 이미 반포한 명이 있었으나 연속되는 흉년으로 말미암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반드시 다시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12월에 송시열이 올린 소의 한 대문에 아뢰기를, “문묘에 정해져 있는 안자ㆍ증자ㆍ자사 부자의 위치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심정(心情)으로 헤아려 볼 때에 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만약 중국의 예(例)에 의하여 계성묘를 세우고, 안로ㆍ증석ㆍ공리ㆍ맹손ㆍ정향(程珦)ㆍ주송(朱松)을 숙량흘에 배향케 한다면 명분이 바로 서고 사리에 맞아서 일과 체통이 완비하게 되겠습니다.” 하였다. 《조야첨재》
경진년 26년 10월 4일의 주강(晝講) 때 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계성묘에 대한 논의는 이것이 현관(賢關 태학)의 중대한 일이요, 일이 유현(儒賢)을 존중하는 데 관계된다고 하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와 다릅니다. 나라에 태학(太學)이 있어서 선사(先師)를 높이 섬기고, 문하의 제자들과 후세의 유현들을 종향(從享)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서 계성묘를 설립한다는 데 이르러서는 의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사체와 의리에 있어서 모두 온당하지 못하니, 널리 여러 대신들과 유신들에게 문의하셔서 지당한 데로 귀결(歸結)되도록 힘쓰십시오.” 하였다. 동지사(同知事) 오도일(吳道一)은 아뢰기를, “일이 중국의 제도를 좇는 것에 관계되고 또 선조(先朝)의 내리신 명이 있으니, 진실로 이의를 용납할 수 없으나 해를 이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퍼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돌볼 겨를이 없으니, 아직 뒷날을 기다려 천천히 논의하여도 아마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오도일은 다만 일의 형세가 지금 곧 실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하나, 신의 의견은 그 일이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른다는 뜻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명 나라의 계성묘는 말세에 논의를 맡은 한 신하가 건의한 일이며, 왕수인(王守仁)의 종향(從享) 같은 일도 또한 그 말엽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어찌 한결같이 명 나라에 좇는다는 뜻으로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대신들과 여러 유신들에게 의논한 뒤에 아뢰어 처리하라 하였다.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이 헌의하기를, “비록 중국에서 이미 시행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나라가 이미 따라 행하지 아니하였으니, 후세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전례(典禮)는 아닌 줄 압니다. 더구나 지금은 때의 형세와 일을 처리할 힘이, 지나친 형식과 번거로운 의절에 미칠 겨를이 없어 3백 년 동안 시행하지 못한 일을 추의(追議)하기 어려우니, 아직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 또한 사의(事宜)에 합당할까 하옵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 헌의하기를, “이 논의는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송(宋) 나라의 말기로부터 명(明) 나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논의가 상세하여 중국에서 시행하였고, 우리 선왕께서도 그 논의에 따르셨는데, 지금에 이르러 마침내 의의가 없다고 핑계하여 드디어 중국이 이미 실행한 예전과 선조에서 이미 내리신 명을 폐지한다는 것은 그것이 과연 어떠할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오늘의 사세를 참작하여 또 정지하였다가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혹 그리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신완(申琓)이 헌의하기를, “아들이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하지 않는다고 하니, 따로 별묘를 지어 제사하자는 논의 또한 예(禮)로서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염계ㆍ정자ㆍ장횡거ㆍ주자의 아버지 등, 일찍이 사전(祀典)에 없던 사람들까지 널리 추급(推及)해서 일체로 함께 제사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과연 의리에 맞는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은 오직 중국의 전례를 따르고, 선왕께서 반포하신 명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나, 만약 번거로운 예절과 지나친 형식이 오늘의 급무(急務)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오직 상께서 헤아려서 처리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헌의하기를, “전후의 여러 사람들이 고집하여 말하는 것은 안자ㆍ증자ㆍ자사 부자의 위치의 차례가 거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뜻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계성묘의 제도가 집의 마룻대와 추녀의 높고 낮음과 간살의 넓고 좁음과 축문(祝文)ㆍ폐백(幣帛)ㆍ전물(奠物)ㆍ헌작(獻酌)의 절차와 희생(犧牲)과 대그릇과 나무그릇에 담는 제수(祭需)와 헌현(軒懸)의 풍악(風樂)과 육일(六佾)의 춤도 장차 모든 것을 왕자(王者)의 예(禮)를 써서, 대성전(大成殿)과 조금도 차별이 없게 할 것인지, 혹은 감손(減損)해도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약 모든 것을 대성전과 같게 한다면 옳고 그른 것은 그만 두고라도 사세가 반드시 그렇게 해낼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조금이라도 감손함이 있다면 공자가 그를 낳아 준 이를 높이는 마음으로써 논할 때 어찌 근심하는 모습으로 그에 대한 큰 향사를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안자ㆍ증자ㆍ자사가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 받는 것은, 공자가 위에 있어서 배식(陪食)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압존(壓尊)의 뜻으로 말할 수 있으나, 숙량흘(叔梁紇)에 이르러서는 제사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제사하면서 공자보다 낮춘다면 또 장차 무슨 의리라고 핑계하겠습니까. 안자ㆍ증자ㆍ자사의 마음을 위안하고자 하여 도리어 공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어찌 윤서(倫序)의 경중에 어그러짐이 없지 않겠습니까. 무릇 사람이 그의 조상에게는 진실로 미루어서 미치게 하고 멀리 추모하는 의리가 있는 것이나, 스승을 높이는 도리에 이르러서는 비록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들도 다만 공자를 위하여 3년의 심상(心喪)을 입었을 뿐이요, 반드시 공자의 아버지에게까지 추급(推及)하지 않았습니다.더구나 천만 년 뒤에 공자를 높여서 향사하는 의리로 인하여 숙량흘을 추급하고, 또 숙량흘의 제사로 인하여 증점ㆍ안로ㆍ공리 이외에 또 이름도 알지 못하는 맹손씨(孟孫氏)를 추급하고, 또 정자ㆍ주자ㆍ주염계ㆍ장횡거의 아버지를 추급하여 마치 신하가 조정에서 작위(爵位)를 받으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추증하는 것처럼 하니, 그것이 성현을 위하여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의리에 있어서, 높이려다가 도리어 낮추는 혐의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 경서(經書)에 말하기를, ‘7세(世)의 종묘에서 덕(德)을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조종조의 종묘일지라도 다만 공덕이 은 나라의 탕왕(湯王)이나 주 나라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과 같은 이의 신주만을 영구히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로 모실 뿐이고, 그 밖에 녜(禰) 이상은 차례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조묘(祧廟)를 떠나면 단선(壇墠)을 설치하여 제사하고 단선을 떠나면 귀(鬼)로 처리하는 것이 옛날의 예법입니다. 이제 유구한 먼 날에 있었던 성현의 아버지를 위하여 그 공덕이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또 그 이름자를 알고 모름을 물론하고서 천하를 통하여 제사하게 하고 영원한 후세까지 끝이 없게 하려 하니, 예의에 비추어 헤아려 보아도 아마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先朝)에서 재결하셨으나 즉시 시행하지 아니한 것은, 혹 논의가 오히려 확정되지 않았거나 제도를 아직 상세하게 알지 못한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유상운(柳尙運)은 헌의하기를, “남구만의 헌의 안에 말한 ‘설령 마땅히 행하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 지나친 형식이 되어 버린다면 차라리 중지하여 두었다가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고 한 것이 절실한 논의 같습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윤지선(尹趾善)은 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고,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최석정(崔錫鼎)이 아뢴 말이 꼭 신의 뜻과 일치합니다.” 하였다.
좌참찬 윤증(尹拯)이 아뢰기를, “감히 답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이조 참의 권상하(權尙夏)는 아뢰기를, “병으로 답을 올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리기를, “두 유신(儒臣)에게 다시 가서 문의하라.” 하였다. 윤증이 다시 아뢰기를, “감히 유신이라는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여 종전에는 수의에 한 번도 감히 헌의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일은 중국에서 이미 시행한 것이요, 선유들이 일찍이 논의한 바이니 비록 사사로운 마음에 조금 의심이 있은들 또한 어찌 경솔하게 논단하여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겠습니까.” 하였다.권상하는 다시 아뢰기를, “전일 태학에서 소장(疏章)을 올려 주청(奏請)할 때, 신이 재임(齋任)으로 참여하여 들은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 일은 이미 중국의 영법(令法)과 선왕의 성명(成命)에 의거하였고, 당시의 기로(耆老)와 장로(長老)들도 모두 이의가 없었으며, 신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에 이르러서는, ‘명분이 바로 서고 사리에 맞아서 일과 체통이 갖추어진다.’ 하였고, 혹은 ‘유학을 존중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유의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신은 이 논의의 실마리를 잘 들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조정의 논의가 그르다고 하니,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가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2월에 대신들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할 때에 임금이 이르기를, “계성묘를 짓는 일은 중국에서 이미 시행한 일이요, 또 선조(先朝) 때 많은 선비들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들과 유신들에게 널리 문의하여 이미 내리신 명이 있으니, 이제 갑자기 변경하여 고칠 수는 없다. 전일에 우의정의 수의(收議)를 보니, 바로 나의 의견과 서로 부합되었으므로 우의정의 논의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사년 정월에 예조 참판 이돈(李墩)이 아뢰기를, “이미 계성묘를 건축 중에 있으니, 사전(祀典)을 미리 재결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전일 영중추부사 남구만이 헌의에서 말한 것은 모두 깊은 생각과 먼 염려에서 나온 것이니, 잘 검토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계성묘를 건축한 뒤에는 당연히 위판(位版)으로 봉안하여야 할 것인데, 안로ㆍ증점ㆍ공리는 이미 봉작(封爵)이 있으니, 다시 논의할 것이 없으나 숙량흘과 맹자의 아버지에 이르러서는 모두 작호(爵號)가 없으니, 위판에 칭호를 무엇으로 써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좌승지 심재(沈梓)가 대신들에게 수의하기를 청하니, 동부승지 남정중(南正重)이 아뢰기를,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다만 대신에게만 문의할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도 같이 문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헌의하기를, “신은 지난번 수의에 감히 어리석고 망녕된 의견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제 영건하라는 성명(成命 임금의 명을 반포하는 것)이 이미 있었으니 그 조목에 대하여는 신은 진실로 감히 다시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데 이미 하문하심을 받았으니 또한 대답을 올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계성묘의 규모와 제도가 문묘보다 낮춰지는데 대하여 신이 지난번 수의에서 의심되는 점을 이미 헌의한 바 있습니다. 비록 안무유(顔無繇) 등 세 분에 대해 말씀하더라도 지금 만약 계성묘에 옮겨 배향한다면 뜰에는 풍악이 없고, 전물(奠物)은 다만 포(脯)와 술뿐이어서 의문(儀文)의 갖춤이 도리어 문묘의 동ㆍ서무(東西廡)에 있을 때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그래서 비록 높여 받든다고 말하나 실지는 낮추어지는 것이니, 어찌 더욱 미안한 바가 없겠습니까. 숙량흘과 맹손씨의 칭호에 이르러서는 상고하여 보니, 송 나라와 원(元) 나라 시대에 숙량흘을 공(公)으로 봉한 것이 있고, 또 아들을 왕(王)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공리라고 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여 왕으로 가봉(加封)한 적도 있습니다. 원 나라 사람이 또 맹자ㆍ안자를 국공(國公)으로 추봉(追封)한 일도 있었으나 증석ㆍ공리는 논하지 아니한 까닭에, 사성(四聖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의 아버지의 작호(爵號)도 또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습니다. 또 홍무(洪武) 연간에 시행한 계성묘의 한밤중의 향사에서는 다만 ‘계성공(啓聖公) 숙량흘’ㆍ‘선현(先賢) 안무유’라고만 일컬었으며, 가정(嘉靖) 연간에 정한 제도에서는 ‘문선왕’ 이하의 작호는 모두 떼어버리고, 다만 ‘선성’ㆍ‘선현’이라고만 썼습니다. 만약 반드시 명 나라의 예전에 따르고자 한다면 이제 마땅히 먼저 문묘에 모신 여러 성현들의 위판의 제주(題主)부터 고쳐야 할 것인데, 계성묘에는 송 나라와 원 나라 시대의 봉작(封爵)을 사용한다면, 주 나라에 좇는다는 뜻으로 볼 때 또한 그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최석정(崔錫鼎)이 헌의하기를, “이제 이 계성묘의 논의가 만약 아들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하지 않는다는 뜻을 위주로 한다면, 지금 지방의 큰 주(州)ㆍ목(牧)에서 동ㆍ서 양무(兩廡)를 아울러 향사하는 차례도 또한 거리끼는 바가 있습니다. 이것을 염려하여 이제 모두 사당을 따로 세운다면 일의 형세와 재정이 힘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루어 넓혀 가는 것이 너무 지나칠 것이요, 만약 성인을 낳았다는 것을 주로 삼는다면 지방의 주ㆍ목(牧)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태학과 같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하여 미루어 생각한다면, 중국 밖의 번방(蕃邦)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꼭 중국의 제도와 같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의 절차는 반드시 꼭 완정(完定)한 뒤에 시행해야 거림낌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일이 처음에 충분히 생각하고 살피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게 됩니다.” 하였다.이세백(李世白)은 헌의하기를, “오늘 거행하는 일은 주(周) 나라를 따른다는 뜻에서 나온 것인즉, 모든 대소(大小)의 예절에 관계되는 것도 또한 마땅히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명사(明史)》에 보면 ‘가정(嘉靖) 13년에 황제가 태학을 사찰하여 공자를 ‘선사(先師)’라 개칭(改稱)하고, 피변(皮弁)의 복식(服飾)으로 뵈었는데, 특생(特牲)을 사용하였으며, 명주를 폐백으로 드렸고, 풍악을 세 번 연주하였으며, 춤은 문무(文舞)로 팔일(八佾)을 추게 하였고 종사위(從祀位)와 계성공(啓聖公)의 전물(奠物)은 술과 포(脯)를 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하온즉 그 전헌(奠獻)의 절차가 문묘와 꼭 같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장총(張璁)의 논의 속에 웅화(熊禾)의 말을 인용하기를, ‘마땅히 따로 한 집을 설치하여 제국공(齊國公) 숙량흘을 가운데 있게 하되 남쪽을 향하여 앉게 하고, 기국공(杞國公) 안무유, 내무후(萊蕪侯) 증점, 사수후(泗水侯) 공리, 주국공(邾國公) 맹손씨는 서쪽을 향하여 앉아서 유식(侑食)하게 하여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또 말하기를, ‘정태중(程太中)ㆍ주송ㆍ채원정을 종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숙량흘ㆍ맹손씨도 또한 일찍이 봉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지금 그 칭호를 의거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청국에서는 오히려 명 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많으니, 앞으로 사행(使行)이 있을 때에 다시 탐문(探問)하게 한다면 더욱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완(信琓)이 헌의하기를, “계성묘의 논의가 비록 송 나라 말기의 여러 유신들에게서 시작되었으나, 홍무(弘武) 연간에 이미 그 제도를 논의하여, ‘봄ㆍ가을의 상정일(上丁日)에 태뢰(太牢 소ㆍ양ㆍ돼지의 세 가지 희생을 쓰는 것)로써 선사(先師) 공자를 제사하였는데, 이날 한밤중에 소뢰(小牢 양과 돼지의 희생을 제물로 쓰는 것)로써 먼저 계성공 공씨를 제사하고, 안무유ㆍ증점ㆍ공리ㆍ맹손씨를 좌우로 배향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사당집을 세운 것은 비록 가정(嘉靖) 연대에 있었으나 실은 홍무 연대의 옛 제도를 따른 것이요, 장부경(張孚敬)이 그 논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명사(明史)》에 이미 ‘계성사(啓聖祠)’라고 하였으니, 사(祠)와 묘(廟)는 차별이 있습니다. 비록 제왕가(帝王家)로 말하더라도, 전헌(奠獻)을 드물게 하고 자주하는 예(禮)와, 의식의 융숭하고 간소한 절목이, 그 시대에 따라 비록 혹 같지 않더라도 일찍이 혐의하지 않았는데, 유독 문묘에서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숙량흘ㆍ맹손씨가 모두 작호가 없다는 데는 예관(禮官)이 상고해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위패에는 이미 이름을 쓰는 일이 없고, 또 이미 전대에 봉작이 있었으면 지금에 와서 반드시 따로 칭호를 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서문중(徐文重)ㆍ윤지선(尹趾善)ㆍ유상운(柳尙運)은 병으로 인하여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다. 윤지완(尹趾完)은 헌의하기를, “예관의 아룀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권상하(權尙夏)는 헌의하기를, “《공자통기(孔子通紀)》를 상고하여 보니, ‘격공의(激公宜)라는 자가 장씨(仉氏)에게 장가들어 맹자를 낳았는데, 3세 때에 격공의는 죽었다.’고 하였으니, 다만 ‘격공의(激公宜)’라는 석 자가 모두 이름인지 혹은 격공(激公)은 작호(爵號)이고, 의(宜)는 이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배향위인 사성(四聖)에게도 이미 이름을 쓰지 않았으니 이 네 위(四位)에도 무슨 작(爵) 아무 씨라고만 쓰는 것이 더욱 마땅할 것 같습니다. 축문과 폐백과 제기(祭器)와 제수(祭需) 등에 이르러서는 계성공(啓聖公)과 연국공(兗國公)은 같은 공작(公爵)이니 다르게 할 수는 없으며, 악(樂)과 일무(佾舞)에 대하여서는 후세의 공(公)ㆍ후(侯)의 칭호는 모두 경(卿)의 계급이니, 순전히 옛날 제후의 예를 쓰는 것은 마땅치 않을 것 같습니다.신은 생각하건대, 대체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이 예이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예입니다. 계성묘와 문선왕묘(文宣王廟) 사이에 융숭(隆崇)함과 간소함의 차이가 있는 것이 얼른 보기에는 예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각각 그의 예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의리에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 것이니, 성인의 영혼이 어찌 불안해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적(典籍)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니, 숙량흘은 송 나라 상부(祥符) 연간에 제국공(齊國公)을 추봉하였으며, 맹손씨는 원 나라 때에 주국공(邾國公)을 추봉하였으니, 위판의 서식(書式)은 의심할 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례(祭禮)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이미 시행한 품식(品式)이 《도서편(圖書編)》이라고 하는 책 속에 자세히 실려 있사오니, 오직 이것을 본받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 나라의 제도에 의할 것을 명하고 ‘계성사(啓聖祠)’라고 이름하였다. 사(祠)는 비천당(丕闡堂) 북쪽에 있다.
3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계성사의 제기와 품식을 중국의 《도서편》에서 상고하여 보니, 계성공위(啓聖公位)의 그릇 수와 품식은 대성위(大聖位)와 같으나 감한 것은 소[牛] 하나이며, 사성위(四聖位)는 대성위에 비하여 감한 것이 소 하나와 대그릇[籩] 둘이고, 계성공의 배향위는 사성위보다 또 낮추어 감한 것이 양(羊) 하나, 보궤(簠簋) 각 하나, 변ㆍ두(籩豆) 각 넷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성위와 배향위가 같으니, 계성공도 배향위와 같아야 마땅할 것이오며, 기물(器物)과 품식(品式)은 낮추는 절차가 없을 수 없습니다.《도서편》에 실려 있는 것은, 계성공위에는 폐백[帛] 하나, 양 하나, 돼지 하나, 잔이 셋이고, 배향위에는 각각 폐백 하나, 잔 셋, 돼지고기 둘입니다. 계성공위의 기물ㆍ품식에 따르면 감하는 것은 소 둘뿐으로서 너무 줄이는 뜻이 없어지고, 배향위의 기물ㆍ품식을 좇으면《도서편》에 실려 있는 십철(十哲)을 종향(從享)하는 예의와 서로 같으나 양(羊) 하나가 없습니다. 양과 돼지는 계성공에게 쓰는 예를 좇고, 기물ㆍ품식은 배향위와 십철을 종향하는 예절에 따라 마련하고, 제향하는 관원은 《도서편》에 실려 있는 품식에 따라 국자감(國子監)의 삼품관(三品官)으로 정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십철위(十哲位)에는 원래 축문이 없습니다. 만약 성묘의 축문 서식에 의하여 시행한다면, 또한 높이고 줄이는 예절이 없어지니, 축사(祝辭) 중에는 다만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고 써 넣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오현(五賢)의 위판은 봉상시에 명하여 반수당(泮水堂)에서 조성(造成)하게 하여 제국공(齊國公) 공씨(孔氏) 숙량흘(叔梁紇)을 상부(祥符) 연간에 추봉(追封)하였다. 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곡부후(曲阜侯) 안씨(顔氏) 무유(無繇) 를 동쪽에, 내무후(箂蕪侯) 증씨(曾氏) 점(點) 를 서쪽에, 사수후(泗水侯) 공씨(孔氏) 이(鯉) 를 동쪽에, 주국공(邾國公) 맹씨(孟氏) 원 나라 때에 추봉(追封)하였다. 를 서쪽에 배향하였다.
계성사(啓聖祠)에 위판을 봉안할 때, 대성전(大成殿)에 고유(告由)한 축문(祝文)에, “오직 우리 문선왕은 만세의 스승이십니다. 전함이 있고 받음이 있어 도(道)의 전통이 밝게 이어졌습니다. 사성(四聖)을 배향하여 향사함이 매우 융성(隆盛)하시어, 이미 극진하게 높혀 모시니 어찌 근본을 추중(推重)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사당을 세운 것은 주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좋은 날을 가려 예의를 거행하고, 공경하여 신위를 베풀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건대, 안씨(顔氏)ㆍ증씨(曾氏)ㆍ공씨(孔氏)의 삼현(三賢)은 일찍이 성묘(聖廟)의 낭하(廊下)채에 배향하였습니다. 이제 위패를 새로 고쳐 만들고, 그 옛 것은 매안(埋安)하게 되어 이 찬 술잔을 올리어 경건하게 고유의 뜻을 폅니다. 의식을 간략히 갖추었으니 바라옵건대, 밝게 살펴 주옵소서.” 하였다.계성사에 오현(五賢)을 봉안하는 축문에, 제국공(齊國公) 공씨(孔氏)에게는, “큰 성인(聖人)을 낳으셨으니, 도(道)가 모든 왕(王) 중에서 뛰어나셨습니다. 근원을 미루어 근본에 소급하니, 그 공덕이 크게 빛납니다. 이제 새 사당에 봉안하여 선인(先人)의 일을 밝히오니, 평안하게 누리어 나의 성의에 감응하소서.” 하였고, 곡부후(曲阜侯)에게는, “일찍이 공자의 문하에 배우시어 가장 먼저 그 유액(誘掖)하심을 입으시고, 또 복성(復聖) 안자(顔子)를 낳으시니 더욱 공덕이 현저하십니다. 전에는 무사(廡舍)에 종향하였으나 이제 새 사당에 배향하옵니다. 정결하게 제사드리오니, 의식이 더욱 빛납니다.” 하고, 내무후(萊蕪侯) 증씨(曾氏)에게는, “타던 비파를 놓고 뜻을 말하여, 성인의 허여(許與)를 받으셨고, 우리의 종성(宗聖) 증자를 낳으시어 공덕이 크게 드러나셨습니다.전에는 성묘의 낭하채에 종사하였으나 이제 계성사에 배향하오니 조두(俎豆)가 빛이 나고, 향사가 더욱 영구할 것입니다.” 하였고, 사수후(泗水侯) 공씨(孔氏)에게는, “시(詩)와 예(禮)의 교훈을 아버지에게 전해받아, 성현의 집의 사업을 전한 바 있으며, 다시 술성(述聖) 자사(子思)를 낳으시어 선성의 도를 잘 이으셨습니다. 지금 성묘의 무사(廡舍)에서 종향하다가 새 사당에 배향하오니, 천추(千秋)의 제향에 조(祖)ㆍ손(孫)이 함께 누리시옵소서.” 하였고, 주국공(邾國公) 맹씨(孟氏)에게는, “노(魯) 나라의 공족(公族)이요, 성인의 후예로서 아성 맹자(孟子)를 낳으시니 그로 말미암아 성현의 도가 전수(傳授)되었습니다. 이에 드러내고 높이 받들어 고요한 사당에 향사해 공덕에 보답합니다.” 하였다. 모두《조야기문(朝野記聞)》에 있다.
영종조 15년에 각 도의 주(州)ㆍ부(府)와 큰 고을에는 풍년을 기다려 계성사(啓聖祠)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35년에 어필로 계성사에 액(額)을 써서 내리면서 달도록 명하였다.
원(元) 나라 문종(文宗) 때에 공사회(孔思晦)가 글을 올리기를, “문선왕 공자는 왕을 봉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벼슬은 아직 공(公)이오니 더 포장하여 높이기를 원합니다.” 하여, 이에 제국공(齊國公)을 계성왕(啓聖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명 나라의 홍무(洪武) 연간의 밤중에 지내던 숙량흘에 대한 제사에 아직 공(公)이라 일컫고 왕이라고 일컫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따른 것이다.
[주D-001]안무유(顔無繇) : 안자(顔子)의 아버지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문묘 종향(文廟從享)
대성 지성 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 한가운데 있고 남쪽을 향하였다.
동(東) 1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안회(顔回) 자연(子淵)
서(西) 1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삼(曾參) 자여(子輿)
동(東) 2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공급(孔伋) 자사(子思)
서(西) 2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가(孟軻) 자여(子輿)
이상은 배향(配享)
동(東) 1 비공(費公) 민손(閔損) 자건(子騫)
서(西) 1 운공(鄆公) 염경(冉耕) 백우(伯牛)
동(東) 2 설공(薛公) 염옹(冉雍) 중궁(仲弓)
서(西) 2 제공(齊公) 재여(宰予) 자아(子我)
동(東) 3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자공(子貢)
서(西) 3 서공(徐公) 염구(冉求) 자유(子有)
동(東) 4 위공(衛公) 중유(仲由) 자로(子路)
서(西) 4 오공(吳公) 언언(言偃) 자유(子游)
동(東) 5 위공(魏公) 복상(卜商) 자하(子夏)
서(西) 5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자장(子張)
이상은 전내 종향(殿內從享)
동(東) 6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 무숙(茂叔)
서(西) 6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백순(伯淳)
동(東) 7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정숙(正叔)
서(西) 7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 요부(堯夫)
동(東) 8 미백(郿伯) 장재(張載) 자후(子厚)
서(西) 8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중회(仲晦)
이상은 양무(兩廡)로부터 전내(殿內)에 올려 모시었다.
동(東) 1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 자우(子羽)
서(西) 1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자천(子賤)
동(東) 2 임성후(任城侯) 원헌(原憲)
서(西) 2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자장(子長)
동(東) 3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서(西) 3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계침(季沈)
동(東) 4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자목(子木)
서(西) 4 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자고(子羔)
동(東) 5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자약(子若)
서(西) 5 수양후(睢陽侯) 사마이(司馬犁) 자우(子牛).《비고(備考)》에는 ‘이(犁)’를 ‘경(耕)’으로 썼다.
동(東) 6 익도후(益都侯) 번수(樊須) 자지(子遲)
서(西) 6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자약(子若)
동(東) 7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자화(子華)
서(西) 7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자기(子期)
동(東) 8 천승후(千乘侯) 양전(梁鱣) 숙어(叔魚)
서(西) 8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자류(子柳)
동(東) 9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자로(子魯)
서(西) 9 상채후(上蔡侯) 조술(曹䘏) 자순(子循)
동(東) 10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자탁(子拆)
서(西) 10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자석(子石)
동(東) 11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자산(子産)
서(西) 11 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 자남(子南)
동(東) 12 복양후(濮陽侯) 칠조치(漆雕哆) 자염(子斂)
서(西) 12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자교(子驕)
동(東) 13 고완후(高宛侯) 칠조도부(漆雕徒父) 자교(子交)
서(西) 13 상규후(上邽侯) 양사적(壤駟赤) 자도(子徒)
동(東) 14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자수(子秀)
서(西) 14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자명(子明)
동(東) 15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자선(子選)
서(西) 15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何首) 자상(子桑).《비고(備考)》에는 ‘하(何)’를 ‘하(夏)’로 썼다.
동(東) 16 모평후(牟平侯) 공량유(公良孺) 자정(子正)
서(西) 16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자지(子之)
동(東) 17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자개(子開). 명 나라에서는 출향(黜享) 하였다.
서(西) 17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用蒧) 자철(子哲).《비고(備考)》에는 ‘용(用)’을 ‘용(容)’으로 썼다.
동(東) 18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자중(子中)
서(西) 18 부잠후(富箴侯) 안조(顔祖) 자양(子襄).《비고(備考)》에는 ‘잠(箴)’을 ‘양(陽)’으로 썼다.
동(東) 19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자우(子宇)
서(西) 19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勾井疆)
동(東) 20 기향후(祁鄕侯) 한보흑(罕父黑) 자소(子素)
서(西) 20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자비(子丕)
동(東) 21 즉묵후(卽墨侯) 공조구자(公祖勾茲)
서(西) 21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자기(子旗)
동(東) 22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자횡(子橫)
서(西) 22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행인(行人)
동(東) 23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자사(子思)
서(西) 23 구산후(朐山侯) 정국(鄭國) 자도(子徒)
동(東) 24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자숙(子叔)
서(西) 24 낙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자적(子籍)
동(東) 25 건성후(建成侯) 악해(樂欬) 자성(子聲)
서(西) 25 조성후(胙成侯) 염결(廉潔) 자용(子庸)
동(東) 26 당읍후(堂邑侯) 안하(顔何) 명 나라에서는 출향(黜享)하였다.
서(西) 26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자기(子期)
동(東) 27 임려후(林慮侯) 적흑(狄黑)
서(西) 27 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 자흠(子欽)
동(東) 28 운성후(鄆成侯) 공충(孔忠) 자무(子茂)
서(西) 28 임구후(臨胊侯) 공서여여(公西輿如)
동(東) 29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자상(子尙)
서(西) 29 내황후(內黃侯) 거완(蘧瑗) 백옥(伯玉). 명 나라에서는 향교로 내보내었다.
동(東) 30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자항(子恒)
서(西) 30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자선(子仙). 명 나라에서는 향교에 종사(從祀)했다.
동(東) 31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자지(子之)
서(西) 31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자금(子禽)
동(東) 32 문등후(文登侯) 신장(申棖) 자속(子續)
서(西) 32 탕평후(湯平侯) 금장(琴張) 자개(子開)
동(東) 33 제음후(濟陰侯) 안쾌(顔噲) 자성(子聲)
서(西) 33 단창후(慱昌侯) 보숙승(步叔乘) 자거(子車)
동(東) 34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서(西) 34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동(東) 35 수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서(西) 35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동(東) 36 내무백(萊蕪伯) 고당륭(高堂隆)
서(西) 36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형덕(兄德). 명 나라에서는 출향(黜享)하였다.
동(東) 37 낙수백(樂壽伯) 모장(毛萇)
서(西) 37 강도백(江都伯) 동중서(董仲舒)
동(東) 38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명 나라에서는 출향(黜享)하였다.
서(西) 38 곡부백(曲阜伯) 공안백(孔安伯)
동(東) 39 중모백(中牟伯) 정중(鄭衆) 중사(仲師). 명 나라에서는 향교(鄕校)에 종사(從祀)하였다.
서(西) 39 구씨백(緱氏伯) 두사춘(杜士春)
동(東) 40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자간(子幹). 명 나라에서는 향교에 종사하였다.
서(西) 40 고밀백(高密伯) 정현(鄭玄) 강성(康成)
동(東) 41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자신(子愼). 명 나라에서는 향교에 종사하였다.
서(西) 41 신야백(新野伯) 망녕(茫甯) 명 나라에서는 향교에 종사하였다.
동(東) 42 창려백(昌黎伯) 한유(韓愈)
서(西) 42 온국공(溫國公) 사마광(司馬光)
동(東) 43 장락백(長樂伯) 양시(楊時) 새로 승사(陞祀)하였다.
서(西) 43 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 새로 승사하였다.
동(東) 44 건녕공(建寧公) 호안국(胡安國)
서(西) 44 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 새로 승사하였다.
동(東) 45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경부(敬夫)
서(西) 45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동(東) 46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 새로 승사하였다.
서(西) 46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
동(東) 47 포성백(浦城伯) 진덕수(眞德秀)
서(西) 47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동(東) 48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서(西) 48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
동(東) 49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서(西) 49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동(東) 50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서(西) 50 문헌공(文憲公) 정여창(鄭汝昌) 《비고(備考)》에는 ‘헌(憲)’을 ‘헌(獻)’으로 썼다.
동(東) 51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서(西) 51
동(東) 52
서(西) 52
동(東) 53
서(西) 53
동(東) 54
서(西) 54
동(東) 55
서(西) 55
○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ㆍ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繇)ㆍ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
이상은 양무(兩廡)로부터 계성사(啓聖祠)에 올려 향사하였다.
○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ㆍ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ㆍ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ㆍ사공(司空) 왕숙(王肅)ㆍ사도(司徒) 두예(杜預)ㆍ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ㆍ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ㆍ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ㆍ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ㆍ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
이상은 출향(黜享)하였다.
○ 십철은 처음에는 모두 후작(侯爵)을 봉하였었는데, 송(宋) 나라 도종(度宗) 때에 와서 모두 올려 공작(公爵)으로 봉하였다. 지금 전손사(顓孫師)에게는 유독 ‘후(侯)’라고 쓰고, 도종이 봉한 진공(陳公)을 쓰지 아니하는 것은 의심할 만하다.
○ 한 나라의 후창(后蒼), 수 나라의 왕통(王通), 송 나라의 구양수(歐陽修)ㆍ호원(胡瑗)ㆍ육구연(陸九淵), 명 나라의 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ㆍ진헌장(陳獻章)ㆍ호거인(胡居仁) 등은 명 나라에서는 문묘에 종사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종사하지 아니하였다.
○ 고려의 현종(顯宗)이, 최치원(崔致遠)이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어, “계림(鷄林)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에는 푸른 솔”이라는 말로 은근히 태조의 창업을 협찬(協贊)한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특히 선성(先聖)의 묘정(廟庭)에 종사하게 하였다. 《지봉유설》
우리 조선의 종사하는 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최치원 같은 이는 한갓 문장(文章)만 숭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아첨함이 또한 심하였다. 그의 문집 속의 불소(佛疏) 등의 저작(著作)을 볼 때마다 몹시 증오스럽고 극히 한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런 이를 문묘의 배향에 참여시킨 것은 어찌 공자를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아니한가. 《퇴계집》
개성부(開城府)와 각도의 계수관(界首官) 향교는 태학의 제도에 따르고, 그 밖의 주ㆍ부ㆍ군의 향교에서는 전내(殿內)에 십철(十哲)을 종향(從享)하며, 동ㆍ서무(東西廡)에는 송 나라의 사현(四賢) 주염계ㆍ정이천ㆍ정명도ㆍ주자 과 우리나라의 15현(賢)만을 종향하였다.
○ 태종 7년에 성균관에서 전문(箋文)을 올려 증자(曾子)ㆍ자사(子思) 두 분을 선성(先聖)에 배향하고, 자장(子張)을 십철에 올리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하륜(河崙) 또한 헌의하여 청하였으므로 그대로 좇았다.
그때 허조(許稠)가 중국의 북경으로 가는 길에 궐리(闕里)의 성묘를 배알하고 그곳의 종사ㆍ승사(陞祀)ㆍ출향(黜享)의 제도를 보고 돌아와서 동중서(董仲舒)를 종향한 것과 양웅(楊雄)을 종향에서 내보낼 것을 청하니, 예관(禮官)이 전문(箋文)을 올려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좇고 또 허형(許衡)을 종사(從祀)하였다.
○ 중종조 정축년 9월에 태학생 권전(權磌) 등이 소를 올려 고려 시중(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종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소의 대략에, “단군(檀君)ㆍ기자(箕子) 이래로 성인(聖人)의 도(道)를 앞장서서 계도(啓導)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우리 동방의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우시어 유학(儒學)의 종사(宗師)인 정몽주가 고려 말기에 나왔습니다. 탁월한 자질을 가지고 나서 경국 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온축(蘊蓄)하였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 학문의 조예(造詣)는 바다와 못처럼 넓고 깊었으며, 스스로 깊이 자득한 바 있어 강설(講說)이 높고 뛰어나서 경전(經傳)의 오묘한 뜻을 은연중 통하고, 선대의 유학자의 학설과 저절로 합치되었고 그 충효(忠孝)의 큰 절개는 당시의 인심을 깨우치고 분발시켰습니다.상례(喪禮)를 제정하고 사당을 설립하기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니, 문물(文物)과 의례(儀禮)는 모두 그가 개정한 것입니다.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베풀어 유도(儒道)를 크게 진흥시켜 성인의 도를 밝히고, 후학을 계도(啓導)한 이는 우리나라에 한 사람뿐입니다. 학문을 주염계ㆍ정자에 비교한다면 진실로 차등이 있으나, 공적을 비교한다면 주염계ㆍ정자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문묘에 종사하여 우리나라 만대에 도학(道學)의 소중함을 밝히면 이 나라의 백성들이 우러러 섬길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 우리나라의 유선(儒先)으로서 문묘에 종사한 이는 최치원(崔致遠)ㆍ설총(薛聰)ㆍ안유(安裕)ㆍ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 모두 9명이다.
그런데 조광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남(嶺南) 사람이니, 장하다고 할 만하다. 세상에서 영남을 인재(人才)의 창고라고 하더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봉유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오현(五賢)의 종향(從享)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
선조 원년 무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소를 올려 조광조(趙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고, 대사간(大司諫) 백인걸(白仁傑) 등이 잇달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백인걸이 차자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이 정몽주ㆍ김굉필로부터 비로소 근원이 있게 되었는데, 조광조에 이르러 그의 걸출한 재주로 정자ㆍ주자의 학문을 드러내 밝히고, 규범을 따라 실천하여 예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명분과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유교의 학문을 흥기(興起)시켰습니다.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도리를 다하여 덕정(德政)을 행하게 하니, 거의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태평 성세를 다시 볼 것 같더니, 간신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이 귀신과 물여우 같은 음해(陰害)를 자행하여 참소로 의옥(疑獄)을 얽어서 마침내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습니다.조정과 민간에서의 한스러워함이 오랠수록 더욱 새로운데도 유독 궁중(宮中)에서만은 간사한 꾀로 두텁게 덮어 가려졌기 때문에 알지 못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중종의 만년에 광조의 무리인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셨고, 인종(仁宗)께서는 말년에 명하시어 이미 사직하였던 광조의 관작을 복구(復舊)하게 하셨으니, 공론의 통분을 조금은 풀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세상 사람들의 심정이 아직도 분하게 여기며 한탄하고 있는 것은 광조의 도덕과 충의(忠義)를 아직도 모두 밝게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즉위하신 처음을 당하여, 바람이 불면 초목(草木)이 쓰러지듯이, 온 나라의 민심이 전하의 명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나라의 여론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참된 유현(儒賢)을 추중 장려하여 그에 대한 찬양과 존숭(尊崇)을 극진하게 하고, 높은 벼슬과 아름다운 시호를 추증하여 문묘에 종사하는 성전(盛典)에 참여하게 하여,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며 한 마음으로 도덕을 지켜 풍속을 같이 하게 된다면, 어찌 맑은 조정의 훌륭한 업적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정암집(靜庵集)》
경오년 4월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소를 올려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 등 4명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같이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거행할 수 없다.” 하였다. 소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암집》
5월에 병조 참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논의하여 아뢰기를, “문묘에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인걸의 의견이 비록 조광조를 지적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의리지학(義理之學)은 실로 김굉필에게서부터 계발(啓發)된 것이니, 두 사람은 문묘에 종사하여도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교(聖敎)에 경솔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시니, 신 등이 감히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석담일기》
계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론이 오래된 후에야 결정할 일이다. 경솔하게 할 수 없다.” 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우리 조선에서는 건국한 이래로 여러 유학자 중에 문묘에 종사할 만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 지금까지 종사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대한 의식이 결여된 것이 아니겠는가. 전조(前朝)에서 문묘에 종사한 이는 문충공 정몽주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향(安珦) 등은 유도(儒道)에 기여(寄與)함이 없다. 만약 의리로 따져서라면 세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제사할 수 있으나,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지금 여러 선현들 모두를 종사하기를 청한다면 그 사이에 어찌 우열이 없겠는가.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은 언론과 뜻이 미약하여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문원(李文元)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감이 자못 논의할 만한 것이 있고, 오직 문정공 조광조는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하여 밝히고 뒷사람들을 계도(啓導)하여 깨우쳤으며, 문순공 이황은 의리에 깊이 몰두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사람을 특히 드러내어 종사한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석담일기》
갑술년에 전적(典籍) 조헌(趙憲)이 사현(四賢)의 종사를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지난번에 관학 유생들이 종사하라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근신(近臣)들이 경연(經筵) 석상에서 아뢴 것 또한 승낙하지 않으시어 온 세상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을 막으시니, 신은 마음속으로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김굉필은 일찍이 도학을 부르짖어 옛 선현의 도를 이어 장래 후학의 길을 열어 놓은 업적이 있으며, 조광조는 그 뒤를 이어 더욱 성인의 도를 밝히어서 세상을 건지고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 공적이 있고, 이언적은 도(道)를 본받음이 순수 독실하여 쓰러지려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운 것을 버티어 바로잡은 노력이 있습니다.이 세 사람은 중국에서 찾아본다 해도 허형(許衡)ㆍ설선(薛瑄) 이외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며, 우리나라에서 찾아본다면 설총ㆍ최치원ㆍ안유 같은 이는 그가 도달한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더구나 이황은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주자(朱子)의 정통(正統)을 이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맞게 하려는 정성이 상소에 간절히 어리고, 물러나오면 사람의 재능에 따라 교육을 베푸는 뜻이 강의(講義)와 토론에 절실히 드러나서, 착한 자는 그의 말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며, 악한 자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스스로 계칙하였습니다.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조금이나마 임금을 높이고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가 그의 도덕에 훈도(薰陶)된 것입니다. 국가가 이미 그를 생시(生時)에 크게 등용하지 못한 것으로 식자들이 태평성세는 보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탄식하고 있는데, 또 죽은 뒤에도 높이 추장(推獎)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시니, 오직 질투하고 방종(放縱) 탄망(誕妄)한 무리들이 옆에서 보고 속으로 기뻐할 뿐만 아니라, 전일에 분발했던 이들도 모두 위기가 저상(沮喪)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급히 사현(四賢)을 추장하시어 문묘 종사의 열(列)에 두게 하시기를 엎드려 원합니다 …….” 하였다. 《정암집》
병자년에 백인걸(白仁傑)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한 선현들 중에는 오직 정몽주만이 선비들의 여망(輿望)에 맞을 뿐이고, 그 밖의 설총ㆍ최치원ㆍ안유는 모두 조광조의 아래에서도 매우 뒤떨어지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큰 예(禮)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조광조의 도학의 공적에만 보답하는 제사가 없으니, 신은 실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셔서 종사의 예전에 참여하게 하소서 …….” 하였다. 《정암집》
기묘년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백인걸이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기자(箕子)가 8조의 가르침[八條之敎]을 편 뒤로 수천 년 동안에 유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이를 전연 들을 수 없더니, 정몽주가 비로소 홀로 도학(道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굉필이 그 계통을 잘 받들었으나 오히려 크게 드러내지 못한 것을 조광조에 이르러 학문에 대한 뜻을 독실하게 하고, 모든 행동은 도학의 규범에 따랐습니다 ……. 광조가 현인이란 것은 아무도 이의가 없사온데,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그를 바르지 않은 학문과 위장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심지어 여묘(廬墓)를 지키는 시정(市井)의 천한 사람까지도 남을 거짓 속인 사람이라고 지목하여 문죄(問罪)하려고 하고, 사부(士夫)로서 유학의 향방(向方)을 가진 자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여얼(餘孼)이라고 가리켜 공격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였습니다.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신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궁중에서는 지금도 반드시 광조(光祖)를 역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전하께서는 이르시기를, ‘광조가 역적이 아님은 궁중에서 이미 알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생들이 사액(賜額)을 청하여 올린 소는 별로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신사년 10월에 호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지금 교화를 밝히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 추장(推獎)하시어 후배들로 하여금 모범받게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매양 중대한 일이므로 어렵다고만 하셨습니다. 비록 근일(近日)의 유현들을 모두 사전(祀典)에 넣을 수는 없으시더라도 도학을 남보다 먼저 주창하여 밝힌 조광조와 이학(理學)을 깊이 연구한 이황, 이 두 사람은 진실로 문묘에 종사하셔서 많은 선비들의 향학심을 일으키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광해조 무신년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소를 올렸는데, 임숙영(任叔英)이 지었다. 소의 대략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역대의 성주(聖主)께서 서로 계승하시고 부축하여 진작하시니, 인재가 잇달아 많이 나왔습니다. 문경공 김굉필ㆍ문헌공 정여창ㆍ문정공 조광조ㆍ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ㆍ문순공 이황(李滉)과 같은 이는 모두 한 세상에 뛰어난 유학자로서 멀리 전하지 아니한 학통(學統)을 이어 출중(出衆)하고 발군(拔群)하여 한 시대에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게 하였으며, 앞에서 창도(倡導)하고 뒤에서 계승하여 긴 밤에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해와 달같은 광명을 비춰 주었습니다.그들의 학문을 논한다면 주염계(周濂溪)ㆍ정자(程子)ㆍ장횡거(張橫渠)ㆍ주자(朱子)의 학통이며, 그들의 뜻을 말한다면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신하 같은 왕도(王道)를 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참 유학자이며, 오랜 세대에 걸쳐 존경받을 스승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높이 보답하는 예전이 없어서 향기로운 향사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 하였다. 《정암집》
경술년 7월 17일에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일로 삼사(三司)와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논청(論請)하였다. 대신들에게 수의를 명하자, 모두 빨리 시행하기를 청하니, 헌의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응천일기(凝川日記)》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청은 경오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이황이 별세하기에 이르러 많은 선비들의 소원은 더욱 간절하였고 주청(奏請)은 더욱 빈번하여졌다. 39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선조가 허락하지 아니한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특히 중대시하여 감히 쉽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제일 먼저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그 청을 윤허하였다. 경술년 9월 신해에 친히 선성(先聖)에게 석전(釋奠)을 거행하였는데, 그보다 닷새 앞서서 오현을 동ㆍ서무(東西廡)에 서열(序列)한다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우복집(愚伏集)》 <묘정계첩서(廟庭禊帖序)>. 선비를 시험보여 김개(金闓) 등을 취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ㆍ이황이 자기의 스승 조식(曹植)을 족하지 못하게 말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그들을 헐뜯고 무고(誣告)하므로 김육(金堉)이 성균관 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니 광해가 노하여 그의 죄를 적발(摘發)하고 금고(禁錮)의 처분을 내릴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의 주선으로 벌을 면하였다. 《조야기문》
오현을 종사한 뒤에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문묘 종사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재되어 있는 위호(位號)와 승사(陞祀)ㆍ출사(黜祀)와는 매우 다릅니다. 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공백료(公伯寮)ㆍ진염(秦冉)ㆍ유향(劉向)ㆍ대성(戴聖)ㆍ가규(賈逵)ㆍ왕숙(王肅)ㆍ마융(馬融)ㆍ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왕필(王弼) 등은 명 나라에서는 지금 문묘에서 출향(黜享)하였고, 거백옥(蘧伯玉)ㆍ임방(林放)ㆍ정현(鄭玄)ㆍ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복건(服虔)ㆍ범녕(范甯)ㆍ오징(吳澄) 등은 중국에서는 지금 고치어 향교에서 제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그대로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후창(后蒼)ㆍ양시(楊時)ㆍ왕통(王通)ㆍ구양수(歐陽修)ㆍ호원(胡瑗)ㆍ설선(薛瑄)ㆍ호거인(胡居仁)ㆍ왕수인(王守仁)ㆍ진헌장(陳獻章)을 종사위(從祀位)에 더 넣었으며, 정통(正統) 정사년에는 호안국(胡安國)ㆍ채침(蔡沈)ㆍ진덕수(眞德秀)를 종사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신장(申棖)과 신당(申黨)은 본래 한 사람인 것을 《가어(家語)》와 《사기(史記)》에 각기 그 이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잘못 알고 함께 제사하다가 중국에서는 신당은 버리고, 신장만을 두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사전(祀典)은 오직 중국의 정통 원년에 간행하여 정한 제도에 좇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가정(嘉靖) 9년에 이르러 예관(禮官)이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기 시작하고, 겸하여 황돈(篁燉)ㆍ정민정(程敏政) 등의 논(論)도 채택하여 마침내 수정 정리하여 승사(陞祀) 또는 출사한 일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시행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대명회전》에 이미 수정한 제도를 간행(刊行)하여 반포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공평하게 상고하여 보고 또 논평하옵건대, 마융(馬融)은 양기(梁冀)를 위하여 이고(李固)를 죽이라는 장주(章奏)를 기초하였으며, 탐오(貪汚)한 죄로 벼슬을 파면당하고, 머리를 깎이고 북방(北方)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을 받았으며, 유향은 신선(神仙)되는 방술(方術)을 즐겨 말하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황금(黃金)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였다가 실험에 성공하지 못하여 죄를 받았으며, 공백료는 자로(子路)를 계손(季孫)에게 모함하여 공자(孔子)를 저해하였고, 순황(荀況)은 그의 학설을 이사(李斯)에게 전하였으며 성악설(性惡說)을 저술하였고, 왕숙(王肅)은 권세 있는 간사한 신하에게 몸을 더럽혀 위(魏)를 배반하고 진(晉)을 좇았습니다.하휴는 《춘추(春秋)》를 주해하면서 주(周) 나라를 밀어 내치고 노(魯) 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였고, 가규는 도참(圖讖)을 경(經)에다 덧붙였으며, 왕필은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설을 주지(主旨)로 삼았고, 대성은 탐장(貪贓)을 범하였으며, 두예(杜預)는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지었고, 안하ㆍ진염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드러나지 않았으며, 또 《가어(家語)》의 70명 제자 명단에도 실려 있지 않으므로 정민정(程敏政)은 말하기를, ‘이름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다.’고 하였으니, 중국에서 이런 자들을 출향(黜享)한 것은 마땅한 처사입니다. 왕통은 비록 참람하게 경서(經書)를 모방하였다는 나무람이 있으나, 위(魏)ㆍ진(晉) 때 유학이 무너진 뒤 공자ㆍ맹자의 도학을 강설(講說)하였고, 나이 30세가 못 되어서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양시는 남송(南宋)에 도통(道統)을 전하였으니, 도학을 지킨 공이 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 못지 않으며, 호원(胡瑗)은 ‘체용의 학(體用之學)’을 앞장서서 부르짖었으며, 크게 학교의 법을 천명하였습니다.구양수(歐陽修)는 충의(忠義)와 문장(文章)뿐 아니라, 한자(韓子)ㆍ맹자(孟子)를 추존(推尊)하여 공자에게 계통을 댔습니다. 설선ㆍ호거인은 중국의 선유(先儒)들 중에서 그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 바른 것이었고, 후창(后蒼)은 비록 뚜렷이 드러난 사업은 없으나, 한(漢) 나라의 초기에 예(禮)를 해설한 글이 수만 자나 되어 《예기(禮記)》가 다시 세상에 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중국에서 종사위(從祀位)로 추가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 정현ㆍ정중ㆍ복건ㆍ노식ㆍ범녕ㆍ오징(吳澄)은 정민정의 논평에는 그들의 저작이 성인의 학문을 발전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였습니다. 거백옥ㆍ임방은 실은 공자 문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여 중국에서는 모두 고향(故鄕)에서 향사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향사할 시골이 없으니 이제 갑자기 문묘 종사를 폐지할 수 없습니다.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이나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ㆍ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는 비록 아울러 승사(陞祀)하고 있으나, 그들이 저술한 논설이 이단(異端)으로 흘렀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증사(增祀)하는 서열에 넣을 것으로 논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중국에서는 공자를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일컫고, 네 분의 배향위는 ‘복성안자(復聖顔子)’ㆍ‘종성증자(宗聖曾子)’ㆍ‘술성자사(述聖子思)’ㆍ‘아성맹자(亞聖孟子)’라고 일컬으며, 십철(十哲)과 문하 제자들은 모두 ‘선현(先賢)’이라 일컫고, 좌구명(左丘明) 이하는 모두 ‘선유(先儒)’라고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시호와 봉작(封爵)의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의 시호는 역대에서 각기 증손(增損)한 바 있으나 당(唐) 나라의 개원(開元) 때에 이르러 비로소 ‘문선왕(文宣王)’을 봉하였으며, 오랑캐인 원(元) 나라에 이르러서는 ‘대성(大成)’을 더 붙여 ‘대성문선왕’이라고 하였습니다.구준(丘濬)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공자의 영이 반드시 그 시호 받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일컬어 ‘지성선사(至聖先師)’라 하였으니, 그 칭호가 비로소 위대하며 그 높음이 비할 데 없어서 전대의 호칭보다 탁월하다고 할 만합니다. ‘성(聖)’이라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고, ‘유(儒)’라고 일컫는 것을 모두 명 나라의 정한 제도에 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70제자는 모두 ‘선현’이라고 일컫는데, 주염계ㆍ정자ㆍ장횡거ㆍ주자 같은 이는 공자ㆍ맹자 이후의 대현(大賢)으로 오직 출생의 선후 때문에 자리가 좌구명(左丘明) 이하의 열(列)에 있어서 아울러 ‘유(儒)’라고 일컫고 ‘현(賢)’이라 일컫지 못하니, 구별없음이 너무 심합니다.만약 출생한 순서를 가지고 자리의 고하를 정한다면, 자사(子思)가 어찌 공리(孔鯉)의 윗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맹자가 어찌 안자ㆍ증자의 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문묘는 도(道)의 모임이니 그 시대의 선후를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 등의 망녕된 의견으로는 주염계ㆍ정자ㆍ장횡거ㆍ주자는 ‘선현’이라고 일컫고, 전상(殿上)에 올려 모시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이제 오현(五賢)을 종사하는 때를 당하여 정승들의 헌의도 또한 이미 발단하였으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잘 검토하게 하여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이에 좇았다.
이항복(李恒福)이 헌의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秦) 나라가 서적을 불사른 뒤로 예(禮)와 악(樂)이 흩어져 없어졌을 때, 홀로 노(魯) 나라의 고당생(高堂生)이 의례(儀禮)를 암송으로 강설(講說)하여 소분(蕭奮)에게 전하고, 소분은 맹경(孟卿)에게, 맹경은 후창(后蒼)에게 전하여, 드디어 대대로 전문(專門)의 학문이 되었습니다. 정민정이 그의 사업이 현저하지 않다고 하였고, 후창은 맹경 뒤의 사람이고, 맹경은 한 나라 중엽 이후의 사람인데, 이제 한 나라의 초기라고 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후창의 학문은 두 번 전하여 두 대씨(戴氏)에게 이르렀습니다. 두 대씨는 형제로서 그 형은 대성(戴聖)인데 세상에서 대대(大戴)라고 말하는 이이고, 대덕(戴德)은 아우인데 세상에서 소대(小戴)라고 하는 이입니다. 각각 예서(禮書)를 논저한 것이 있어서 주자가 대대(大戴)씨의 예(禮)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그가 탐장(貪贓)으로 패(敗)하였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혹은 말하기를, ‘그와 원수진 집에서 허구로 무함한 것이라 하나, 이것은 본래 그 허실을 감히 밝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정민정에 대하여는 후대의 선비 중에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습니다. 다만 시제(試題)를 팔아먹은 것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그가 저술한 한두 편의 글은 우리 유학(儒學)의 죄인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러한 사람의 논정(論定)한 것이 후세의 단안(斷案)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두수(尹斗壽)는 헌의하기를, “신의 망녕된 논의로는 차라리 우리나라의 옛 제도에 의하여 행하고, 후일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혹 무방할 것 같습니다 …….” 하였다. 《병문집(幷文集)》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종사에 대한 논의
인조가 즉위한 처음에, 해서(海西)의 유생들이 제일 먼저 소를 올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5월에 관학(館學)의 유생 송시영(宋時瑩) 등 2백 80여 명 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일찍이 선성 선사(先聖先師)를 묘궁(廟宮)에 향사한 뒤로부터 오로지 후세의 유학자로서 유교에 공적이 있는 이를 제사하여 모두 동ㆍ서 양무(兩廡)에서 배식(陪食)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신라에서는 최치원ㆍ설총(薛聰) 같은 이가 있고, 고려에서는 안유(安裕)ㆍ정몽주(鄭夢周) 같은 이가 있으며, 우리 조선에서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 다섯 유신(儒臣)이 모두 그 사람들입니다. 명종ㆍ선조 때를 당하여 이황의 뒤를 이어 유림의 종사(宗師)가 된 두 사람이 있으니,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바로 그들입니다.계미 연간에 이이가 여러 소인의 무리들에게 모함당하였을 때, 혼이 서울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변명하였으므로 드디어 한쪽 사람들의 모함과 질시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로 중상당하고, 마침내는 정인홍(鄭仁弘)의 헐뜯는 욕설을 입어 선왕(先王)의 어진 이를 좋아하시는 성의가 그들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함을 얻지 못하여 황천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게 된 지 수십 년 만에,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기 미쳐서 비로소 원통함을 깨끗이 씻게 되었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건대, 이 두 신하는 오현(五賢)의 뒤에 나서 학문을 강설하고 도를 밝혀서 깊고 오묘한 뜻을 발휘하였습니다. 무릇 이ㆍ기(理氣)의 이합(離合)과 사단(四端)ㆍ칠정(七情) 등의 학설은 여러 유학자들의 논(論)한 것이 서로 득실이 있었는데, 이것을 거듭 논리(論理)하고 변증(辨證)하여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게 하여 능히 어두운 것을 다시 밝게 하고, 이지러진 것을 다시 완전하게 하여서, 미처 계발(啓發)되지 아니한 것을 확충시켰으며, 아직 미치지 못하였던 것을 바로잡아 놓아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본말(本末)이 이에서 거의 유감이 없이 되었으니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무릇 그 두 신하의 유도(儒道)에 있어서의 공과 덕이 이러한 데도 높이고 보답하는 예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신 등의 죄이며, 아마 성대(聖代)의 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이와 성혼이 비록 선인(善人)이라고는 하나 도(道)와 덕(德)이 높지 못하고, 결함에 대한 세상의 비방(誹謗)이 있으니, 더할 수 없이 중대한 문묘 종사를 결코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같은 날 채진후(蔡振後)ㆍ오정일(吳挺一) 등 57 명 이 올린 소의 대략에, “이이의 사직소와 선조(宣祖)께서 성혼을 죄책(罪責)하신 하교를 보면 그들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이의 문장과 재주와 학식이 족히 한때의 명신(名臣)이 될 것이니, 현대부(賢大夫)라고 이른다면 되지만 문묘에 종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의 진퇴(進退)가 바르지 못하다는 나무람이 있고, 성혼은 이보다도 훨씬 아래로 떨어지는 인물인 데다가 더군다나 이미 드러난 죄명이 있습니다.그가 간사한 자를 편들었다고 하는 것은 한때 반대파가 논한 바여서 혹 변명할 수도 있으나 임금을 버린 사실은 온 세상 사람이 목도(目睹)한 일이니, 그가 어찌 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행하게도 밝으신 전하께서 허물을 포용하시어 은덕(恩德)을 내려 관직을 회복하는 은전(恩典)을 입었으니, 은사(恩賜)하심이 컸습니다. 그들의 문묘 종향에 대한 회의의 첫머리에 신 등이 이 두 가지를 들어 반대하였더니, 재임(齋任) 윤유근(尹惟謹) 등이 억지로 자기들 의견을 고집하여 공론을 저지하고는 소리를 높이고 안색을 변하며, ‘만약 의견이 다르거든 나가라 …….’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들에게 배척되어 옆방으로 나와서 피하고 있었더니, 신 등의 말을 사설(邪說)이라 규정하여 제 마음대로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처벌을 가하여 성균관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동학(東學)에 이르렀더니 그들이 즉시 또 학관(學官)에게 통첩을 보내어 내쫓게 하였습니다 …….” 《소색(疏色)》심광수(沈光洙)가 지었다. 비답에, “문성공 이이 등을 종사하자는 청은 지극히 참람된 것이어서 나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였다.
송시영(宋時瑩) 등이 다시 소를 올려 억울함을 변론하였더니 비답하기를,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모든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에 열중할 것이며, 다시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무릇 다섯 번이나 소를 올렸으나, 청이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영의정 윤방(尹昉)ㆍ좌의정 김상용(金尙容) 등이 차자를 올려 두 어진 신하는 본조(本朝)의 문묘에 참여한 여러 유현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극력 진언하고, 또 채진후 등이 따로 한 무리를 지어 선현을 헐뜯고 비방한 것은 선비의 미풍(美風)이 아니라고 진달하였더니 비답에, “차자를 자세히 보았다. 채진후가 국가의 처리를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소를 올린 것은 매우 경솔하고 망녕스럽다.” 하였다.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교외에서 병들어 엎드렸다가 송시영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흠과 잘못으로 비방이 있다.’고 하신 것과, 채진후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이 등의 종사를 청하는 것은 매우 참람되고 외람되다.’고 하신 것을 엎드려 보고, 놀라움과 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진후 등이 두 현신을 헐뜯고 무함한 상소를 얻어 보니, 허구ㆍ날조하여 임금의 이목(耳目)을 현란하게 한 정상이 매우 낭자하게 나타나 인심의 착하지 못함과 선비의 풍습이 패리한 것이 진실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신은 성혼의 제자입니다. 성혼의 마음과 일을 자세히 아는 자는 다만 늙은 신이 있을 뿐입니다. 청컨대 성혼이 무함을 입은 곡절을 자세히 진달하겠습니다.
계미년 사이에 선조께서 이이를 신임하셨는데, 그 물과 물고기 같이 서로의 뜻이 맞은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것이었는데 소인들이 매우 시기하고 질투하여 불측한 죄를 얽어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성혼이 마침 부르심을 받아 서울에 왔다가 이이를 변명하는 소장(疏章)을 올려 구원하였더니 좋은 말로 비답하시면서 이르기를, ‘어진 이가 국가에 유익됨이 이와 같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당론에 지목된 시초입니다. 신축년에 이르러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 한 쪽 사람들이 모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이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성혼만이 홀로 살아 있었는데, 그를 깊이 질시(嫉視)하여 그에게 죄를 씌우고자 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혼은 본래 산야에 살면서 세상의 논의에 간여함이 없었으므로, 비록 먼 곳에 귀양가는 일은 면하였으나 간당(奸黨)이라고 지목하여 죄명(罪名)이 매우 엄중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시골에 숨어 있는 신하로서 조정에 죄를 입어 방금 처벌을 논의하는 중에 있으니, 비록 국가에 변란이 있다 하더라도 부르는 명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궐하(闕下)에 나아간다는 것은 의리상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멀리서 우러러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아 나아가고자 하였지만 감히 나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임금의 피난 행차가 임진(臨津)을 지날 때에, 성혼의 집은 나룻터에서 20리 밖의 산골에 있었기 때문에 아득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성혼의 처남 사평(司評) 신식(申拭)이 임금의 행차를 따라 나룻터에 도착하였으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냥 성혼의 집으로 갔습니다. 비로소 듣고 알게 되어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뒤쫓아가고자 하였으나 나룻길이 막히고 난병(亂兵)들이 길을 막았으므로 드디어 병든 몸을 끌고 산골짜기를 전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광해(光海)가 이천(伊川)에 머물면서 글을 보내어 부르므로 병을 무릅쓰고 가다가 삭녕(朔寧)에 이르니, 광해가 또 글을 내려 가까운 곳에서 의병을 일으키라고 하였습니다.드디어 이정형(李廷馨)ㆍ김괴(金繢) 등과 더불어 의병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는 자가, ‘임금이 은근하게 부르셨건만 달려오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은 무함이 아니겠습니까. 광해가 성천(成川)에 이르러 또 부르는 명령이 있어 비로소 성천에 들어갔으나, 감히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광해에게 청하여 그 길로 임금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 갔습니다. 대체로 그의 마음이 분조(分朝)에 먼저 왔으니 또 전하께 빨리 달려가서 문안 올리지 않는 것은 의리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헐뜯어 말하는 자가 용강(龍岡)은 적병이 있는 곳에서 가까워서 급히 의주(義州)로 향해 갔다고 하는 것은 역시 무함입니다. 이는 그때 대간(臺諫)의 의논인데, 나이 어린 후생들이 그때의 사적을 알지 못하고 다만 대간의 언론과 전지(傳旨)에만 의거하여 망녕되게 헐뜯기를 이와 같이 하여 심지어 임금을 버렸다고까지 지탄합니다. 아아, 이 하늘 아래에 누가 임금이 파천(播遷)하면서 자기 집 앞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도 편안히 앉아서 나오지 않은 자가 있겠습니까. 인정이나 도리로 생각해 보더라도 전연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또 성혼이 간사한 자에게 가담하였다고 말하는데, 그들이 간사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입니다. 정철은 젊을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손하며 청렴 개결(介潔)하여 선비들이 추승하는 바 되었는데 성혼은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좋아하여 정의가 매우 두터웠습니다. 정철이 말년에 가서 비록 주색(酒色)의 실수는 있었으나, 큰 죄될 것은 없었습니다. 기축년 정여립(鄭汝立)의 변란 때에 정철이 갑자기 역옥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의 부실(不實)한 세론을 진정하지 못하였으니, 역옥이라는 큰 사건을 추국(推鞫)하면서 어찌 인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혼은 정철과 서로 절교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간사한 자에게 가담하였다 하는 것은 실정을 알지 못하는 말입니다. 아아, 선왕의 밝으심과 예우(禮遇)가 융숭(隆崇)하였음에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음을 보전하지 못한 것은, 처음에는 이홍로의 교묘한 참소로 인하였고, 이어서 정인홍의 사특하고 악독한 무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이제 채진후 등이 인용한 선조의 전지는 실은, 옛날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아들이 살인하였다는 헛소문이 세 번 거듭 전해지자 베 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는 고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이는 도학이 순수하고 바르며 조예가 정밀하고 깊어서 높고 밝고 뛰어나 성리(性理)의 근원을 속까지 환하게 꿰뚫어 보았으며, 그가 스스로 자기의 임무라고 하는 것이 중대하였습니다.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고, 이 백성을 건져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였으니, 진정 주자(朱子)의 바른 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성혼의 학문은 그의 가정에서 배운 것으로서 그 연원(淵源)은 유래가 있습니다. 이이와 도의로 사귀어 왔는데, 이이가 항상 ‘그의 몸가짐과 품행이 돈독하고 정확함은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스승의 도(道)가 오랫동안 끊어져서 도학과 경술(經術)은 전하지 못하고, 선비된 자는 다만 구두(句讀)와 문장을 업으로 삼아 선유(先儒)의 도학의 높고 낮음과, 학문이 도달하는 경지의 얕고 깊음을 아는 자가 대체로 적으니, 채진후의 무리가 방자하게 제 마음대로 모욕하여 기탄이 없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 하였다. 비답하기를, “차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내가 안 지 오래다. 이론에 동요되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전 예조 판서 조익(趙翼)이 소를 올려, 두 유현의 도덕의 높음을 극진히 말하고, 겸하여 헐뜯어 무함하는 자들의 잘못을 변론하였다.
그때 다투어 변론하는 이가 많았으나, 임금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심지원(沈之源), 수찬(修撰) 조석윤(趙錫胤)이 차자를 올려 임금이 내린 비답 중의 ‘허물이 있다, 외람(猥濫)되다.’ 하는 등의 하교를 잘못이라 쟁론하고, 또 아뢰기를, “유현(儒賢)은 헐뜯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헐뜯어서 말씀하고, 공론은 배척할 수 없는 것인데 배척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승들이 서로 이어 차자를 올렸는데도 비답하시는 말씀이 오히려 석연하지 못한 것 같으니, 신 등의 의혹은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최명길(崔鳴吉)이 아뢰기를, “동학(東學)의 소(疏)를 올린 유생 중에 정거(停擧) 처분을 받은 자가 6명인데, 소를 올리는 데에 참여한 50여 명이 모두 원점(圓點)을 하지 않고 있으며, 성균관의 재임(齋任) 6명과 소에 참여한 3명이 잇달아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관(四館)이 서로 정거 처분을 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이런 일로 인하여 안정하지 못하고, 재임 이외에는 한 사람도 원점에 참여하는 자가 없어 식당(食堂)이 텅 비었습니다. 대개 두 신하의 어짐은 어느 쪽을 물론하고 적어도 사부(士夫)라고 자처하는 자는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채진후는 문묘 종향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 유건(儒巾)의 차림으로 걸어다니면서 스스로 한 무리[一隊]를 지어 상례(常例)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유현을 무함하여 스스로 유교(儒敎)에 죄짓는 결과를 달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앞장서서 선동한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깊이 다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균관 유생 수백 명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어진 이를 높이려고 한 것에 이르러서는, 무슨 버림받을 죄를 지은 것이 있어서 2ㆍ3ㆍ4 관(館)이 한 번의 회의도 기다리지 않고 감히 자기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함부로 6명이나 되는 성균관의 재임을 정거 처분하게 하였으며, 영남의 유생들이 연명하여 유현을 높이 일컬어 올린 소가 무엇이 놀랄 만한 잘못이 있다고 끄집어내어 정거 처분을 시킨단 말입니까.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이 더욱 아름답지 못합니다.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사관(四館)의 여러 관원들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한 번 모여서 회의를 열고 그들 중에서 정거 처분하여야 할 사람과 정거시켜서는 안 될 사람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이어 여러 유생을 식당으로 도로 들어가도록 권유하여 화목하기를 힘쓰게 할 것이며, 서로의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곧 서로 배척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아뢴대로 처리 하라.” 하였다.
생원 권적(權蹟) 등 21명 이 소를 올려 채진후와 더불어 고루 죄를 받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오늘 유교에 죄를 입었는데도 기어코 원점하는 열(列)에 끌어넣고자 하니, 이는 신 등을 의(義)를 잃고 부끄러움이 없는 데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양현(兩賢)을 배척하는 말은, 이이가 부모에게 받은 모발(毛髮)을 깎고 자애를 끊어 산중으로 도망쳐 들어가 불교에 빠졌다는 것과, 성혼이 간사한 자와 한 당이 되었으며, 임금을 버리고 임금에게 선한 말을 올리고 악한 일을 그만두게 하는 태도, 그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간 것이 모두 뒷사람들의 의심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도승지 이민구(李敏求), 승지 홍명구(洪命耈)ㆍ한필원(韓必遠)ㆍ최행(崔荇)ㆍ이경인(李景仁)ㆍ구봉서(具鳳瑞)가 아뢰기를, “조정이 가까스로 안정되었으나 유생들이 채진후와 더불어 같이 죄를 입고자 하면서 함부로 분격한 말을 하는 것은 매우 불미하나, 20여 명의 소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도 타당치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이민구가 아뢰기를, “채진후 등 3명이 정거 처분을 받았는데, 벌을 모면한 자가 감히 원점에 참여치 못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로 하여금 참작하여 선처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진후가 유현을 배척한 정상을 진술하고, 이미 분소(分疏)하여 처벌을 결정한 것을 다시 선처하기는 어려우니, 대제학(大提學)의 직책을 해면하여 주기를 빈다고 하였다.비답하기를, “곧은 길을 거쳐져 가지 않은 것은 선비들의 잘못이다. 채진후 등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건복(巾服)을 벗지 않고 걸어서 동학(東學)으로 갔는데, 성균관과 동학은 그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인데, 진후 등은 임금이 창경궁에 계시기 때문에 그때 궐문(闕門) 아래를 지나 하마비(下馬碑) 서쪽을 경유하여 큰 시가(市街)를 돌아서 동학에 도착하였었다. 많은 선비를 내쫓는 유현을 어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명길이 재차 차자를 올리다 해면되니, 이민구가 또 차자를 올려 스스로를 논변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최명길은 외람하기 때문에 체직하였으니 이민구가 미안하게 여길 일은 별로 없다. 직임을 살피려 하지 아니하므로 체직한 것이다.” 하였다. 조익(趙翼)이 또 소를 올려 많은 선비들의 정거 처분이 억울함을 변명하고, 또한 최명길을 해명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내려 매우 꾸짖고 사관(四館)의 정호인(鄭好仁)ㆍ한극술(韓克述)ㆍ한극창(韓克昌)ㆍ김호철(金好哲) 등의 관직을 해면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들이 이미 벌을 풀어준 유생을 제 마음대로 다시 정거시켰기 때문이었다.
사학의 유생들과 해서(海西)의 윤홍민(尹弘敏), 파주(坡州)의 유응태(兪應台), 관서의 홍선(洪僎), 경기의 신도희(辛道喜), 풍덕(豐德)의 최시달(崔時達), 송도(松都)의 고형(高逈), 호남의 김시길(金時) 등이 잇달아 소를 올렸으나, 모두 청이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시길이 다시 소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번거롭게 강청(强請)하지 말라.” 하였다.
세 번째 올린 소의 대략에, “옛날 제왕(帝王)이 유관(儒冠)을 쓴 사람을 존경한 까닭은 그 사람들이 모두 어질어서가 아니고, 선비라는 이름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조(先祖朝) 때에 서울과 시골의 유생들이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라고 번거롭게 주청하였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선조께서는 비록 즉시 윤허하여 좇지는 않으셨으나, 두터운 예(禮)로 대우하지 아니함이 없어 소(疏)가 아침에 들어가면 비답이 저녁에 내려왔으며, 온화한 말씀으로 위로 권면하여 응대함이 메아리처럼 빨랐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즉 어진 이를 높이는 풍습을 막아서는 안 되고 여러 선비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신 등은 비록 미천하오나 모두 조종조(祖宗朝) 3백 년 동안에 북돋우어 길러온 바입니다. 옷자락을 찢어서 발을 싸매며 천리 길을 와서 소를 올려 지성으로 전하의 마음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잇달아 두 번이나 소를 올렸건만 밤이 지나도록 비답이 없어 허다한 유생들이 궐문 밖에서 방황하며 명을 기다리느라 바람과 이슬에 고생하고 시달려 피로와 고통을 겪으면서 한갓 하예(下隸)들의 업신여김과 비웃음을 사니, 성스러운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잘못되었다 하여도 옳을 것입니다. 선비가 되어서 어진 이를 높이고 신하가 되어 충성되기를 원하는 것이 무슨 죄과(罪過)가 되기에 전하께서 싫어하시고 박대하심이 이에 이르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신 등이 서글퍼하고 실망하는 까닭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가 마침내 어떻게 될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입과 혀로 다투어 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신 등은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잘못 처리하는 것이 있음을 보고, 묵묵히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간다는 것은 멀리 천리 길을 온 본의가 아니며, 또한 고향과 이웃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전교하기를, “시골의 유생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세 번이나 소를 올린 전례가 있느냐. 소를 받아들인 승지 조찬한(趙纘韓)은 추고(推考)하고 상소(上疏)는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 병자년에 태학생(太學生) 윤성(尹誠) 등이 소를 올려 종사(從祀)를 거듭 청하였다.
진사 이상진(李象震) 등이 소를 올려 비방하였다.
○ 효종조 기축년에 태학생 홍위(洪威) 등이 소를 올려 거듭 청하였다.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소를 올려 비방하였다.
○ 현종조 기해년에 태학생 윤항(尹抗) 등이 소를 올려 거듭 청하였다.
[주D-001]원점(圓點) : 성균관생(成均館生)이 식당(食堂)에 참석할 때에 원점(圓點)으로 출석을 표시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학생 출석부(出席簿)와 같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남중유(南重維)가 소를 올려 비방하다
임인년에 태학생 유정(柳淀) 등이 소를 올려 종사를 거듭 청하였다.
영남의 유생 김강(金鋼) 등이 소를 올려 비방하였다.
유정 등이 다시 소를 올려 무함 받은 것을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에, “뜻밖에도 이번에 영남의 유생 김강 등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또다시 간흉들의 남긴 의론을 주어 모아 선현(先賢)을 헐뜯고 무함하기를 패려ㆍ망녕되게 멋대로 하였습니다. 아아,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오늘날 사악한 언론으로 두 어진 신하를 무함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이(李珥)가 일찍이 선학(禪學)에 빠졌다는 것과 성혼(成渾)이 국난에 달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고 있는데, 지금 이강 등의 말 또한 이 두 가지에서 나왔습니다. 이이가 어릴 때에 학문에 뜻을 두어 불교가 이치에 근사한 것을 즐겨 하더니, 소년 시절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명복설(冥福說)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때 불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대체로 죽은 이를 섬기려는 효심(孝心)과 도(道)를 찾으려는 절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1년이 못 되어서 문득 그 잘못을 깨닫고 즉시 천리 밖인 영남 땅으로 이황(李滉)을 찾아가 친히 그의 도학에 대한 뜻과 방법을 받들어 거경궁리(居敬窮理)의 공부에 전력하여 크게 이황의 추중(推重)하는 바 되었습니다. 이황이 일찍이 이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옛날의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선비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단(異端)에 미혹하여 빠진 자는 원래 논평할 가치가 없거니와, 처음에 바른 길을 가다가 마지막에는 사도(邪道)에 빠지는 자가 있고, 유교와 불교의 중간에 서서 양쪽을 모두 옳다고 하는 자도 있으며, 겉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속으로는 그 편에 서는 자도 있었는데 정백자(程伯子)ㆍ장횡거(張橫渠)ㆍ주회암(朱晦菴) 등도 처음에는 불교에 드나듦이 없지 않았으나 곧 그 잘못을 깨달았던 것이다.아아, 천하의 큰 지혜와 큰 용기를 가진 이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홍수(洪水)의 물결을 벗어나서 참된 근원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는 등의 말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김강 등의 배척하는 말에, ‘드러나게 나무람을 표시한 일이 있다.’고 한 것 또한 이황의 이 말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황의 편지 내용에서 말한, ‘중간 입장에서 양쪽을 다 옳다고 한다.’고 한 것과, ‘겉으로는 배척하고 속으로는 그 편에 선다.’고 한 것은 대체로 여희철(呂希哲)ㆍ장자소(張子韶) 등 여러 사람의 일에 느낀 바가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대개 희철은 정백자(程伯子)의 문인(門人)으로서 추중 받던 사람이었으며, 자소(子韶)는 학문에 독실하다고 이름이 있었으나, 오히려 만년에 과오를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는 이미 미혹하였다가 뒤에 능히 바른 길로 돌아왔으니, 이황의 편지에서 큰 지혜ㆍ큰 용기라고 일컬은 것은 이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지금 이이를 헐뜯고자 하는 자는 더욱 그의 허물을 고치는 용기와 도(道)에 향하는 정성을 드러내기에 알맞을 뿐이지 어찌 이이를 흠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무진년에 이이가 올린 인책(引責)하는 상소를 스스로의 죄를 말한 것이라고 하여 공격한다면, 주자가, ‘내가 석가여래에게 있어 그 사람을 스승으로 하고, 그 도를 존중하여 구하기를 또한 간절히 하였다.’고 한 것 또한 주자가 스스로 자기 죄를 말한 것이라고 하여 곧 주자를 공박하는 단안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이가 일찍이 집안의 불행을 만나 바로 절에 들어갔다는 등의 말은 이 또한 대단한 무망함입니다. 전일에 이유경(李有慶)과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와 같은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이가 일찍이 세속의 인연을 끊지 않은 것을 자세히 알기 때문에, 간사한 말로 사람을 의혹하게 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혹은 상소에서 폭로하고, 혹은 논설과 저술(著述)에서 나타내어 모두가 명확한 증거로 삼기에 충분합니다.그런데 이이가 불교에 빠졌다는 말을 하는 간사한 사람은 송응개(宋應漑) 등의 나머지 도당(徒黨)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김강 등이 덕행이 있는 이황의 남긴 말을 믿지 않고, 한갓 뭇 소인들의 입놀리는 것만 쳐다보는 것은 본 마음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혼은 본래 산림의 선비로서 바야흐로 전원에서 도(道)를 닦고 성현의 글에 마음을 써서 영화로운 이름과 아름다운 비단옷이 진실로 혼의 처음의 소원은 아니었습니다. 어진 임금의 정성 깊은 초빙(招聘)과 손님과 스승으로 대접하는 예(禮)가 융숭함에 이르렀으니, 요순(堯舜)같이 어진 임금을 곧 결별하는 것 또한 어찌 성혼의 본심이었겠습니까.
오직 당론(黨論)이 날로 퍼지고, 사악한 사람들이 틈을 타게 되어, 드디어 적신 정인홍 도당의 참소하고 이간하는 바가 되어 마침내는 당파의 지목에 들게 되었습니다. 조정에 이름이 오르게 되어서 비록 임진의 난을 당하여서 말하더라도 혼이 죄 입은 몸으로서 부르시는 왕명이 없었으므로 혼의 도리에서는 처음에 달려가지 않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음은, 옛날 왕촉(王蠋)이 밭을 갈다가 몸을 마치려함과 같은데 불과한 것이요, 마침내 불행하게 되면 강만리(江萬里)가 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을 본받아 결행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런 사정은 그가 스스로 행조(行朝)의 반열에 들면서 아뢴 내용에 이미 자세하고도 빠짐이 없이 진술하고 있으니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어찌 구차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선조조 임인년은 곧 중국 요(堯) 임금이 아직 곤(鯀)을 숭백(崇伯)으로 시용(試用)하고 있을 때처럼 간흉한 자들을 신임하고 있던 때로서, 지금 김강 등이 말하는 임인년의 비답은 곧 옛날 증자(曾子)의 자애 깊은 어머니도 여러 번 전해 오는 아들이 살인하였다는 말에 베짜던 북을 던졌다는 옛일과 같이 거듭되는 참소로 인하여 내린 것입니다. 선현을 무함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선조(先朝)의 비답을 인용하는 것은 정인홍이 선조(宣祖)의 비답을 인용하여 이황을 배척하던 수법(手法)입니다. 김강 등의 이 마음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반드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곧 조광조(趙光祖)의 죄안(罪案)으로 삼을 것이고,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이 선비들을 한 그물로 몰아잡은 계략도 중종의 본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이니, 그들의 마음 먹음이 탄식할 만하고 또한 비참합니다.
사단(四端)ㆍ칠정(七情)ㆍ이기지설(理氣之說)에 이르러서는 이이가 구명(究明)한 것이 비록 이황이 이루어 놓은 학설과는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요는 근원을 통찰하고 정밀ㆍ상세하게 해부 분석하여 전현(前賢)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견한 것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그때는 이황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서로 토론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황으로 하여금 이이의 학설을 보게 하였다면 주자(朱子)가 자기가 지은 《대학(大學)》의 ‘무자기장(毋自欺章)의 주석’을 임종(臨終)하던 날에 다시 고쳤던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김강 등이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는 뜻이 항상 선조(先朝)에서 윤허하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을 추측해 알고, 문득 ‘인조(仁祖)가 일찍이 배척한 바이고 효종(孝宗)이 엄중히 막으셨던 바입니다.’ 하고, 위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이 당론인 줄을 알고서 또 말하기를, ‘이것은 당론을 말하는 자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고, 임금이 깊이 근심하는 것이 신하들이 국사에 충실하지 않는 것인 줄 알고서 문득 말하기를, ‘국가의 안위를 일찍이 근심하지 않았다.’ 하고 마침내 말하기를, ‘사론(邪論)을 물리치고 바른 학문을 붙잡아 세워야 한다.’ 합니다. 아아, 간사한 자의 한없는 무함하고 속임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일에 송시영(宋時瑩) 등이 종사(從祀)를 청하였을 때, 인조께서 일찍이 허락하지는 않으셨으나, ‘내가 그들의 도덕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묘 종사는 일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못한다.’ 하신 전교가 있었으니, 이것은 작고한 정승 조익(趙翼) 등 여러 사람이 친히 받은 것입니다. 그 뒤에 홍위(洪葳) 등이 다시 종사(從祀)를 청하였을 때, 효종께서도 일찍이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두 유현의 높은 도덕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이는 작고한 정승 이경여(李敬輿) 등 여러 사람이 친히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이강 등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선조(先朝)를 모함하고 전하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에는 본래부터 선배(先輩)들이 많았습니다.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城龍)ㆍ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ㆍ문간공(文簡公) 장현광(張顯光)ㆍ문숙공(文肅公) 정경세(鄭經世) 같은 여러 사람은 남도 선비들이 다같이 높여 스승으로 받드는 이들입니다. 유성룡은 이이를, ‘문성공은 성인이로구나.’ 하고, 감탄하기까지 하였으며, 정구ㆍ장현광ㆍ정경세도 모두 두 선현을 높이 사모하여 언어와 논술(論述)에 나타났음은 모두 속일 수 없는 것인데, 지금 김강의 무리들이 유성룡을 믿지 아니하고 정인홍을 믿으며, 정구ㆍ정현광ㆍ정경세를 믿지 아니하고 경호(景虎) 등의 여러 적도(賊徒)를 믿는 것이 어찌 인홍ㆍ경호가 유성룡ㆍ정구ㆍ장현광ㆍ정경세보다 더 어진 데가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송(宋) 나라의 사현(四賢)과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올려 배향하고, 신당(申黨)과 선유(先儒) 9명을 출사(黜祀)하다
일찍이 현종조 무신년에 관학(館學) 유생(儒生) 신응징(申應徵)이 소를 올려,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소의 원문은 위의 계성사(啓聖祠) 조에 나왔다.
○ 숙종조 신유년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요사이 학교(學校)에 대한 행정이 이완(弛緩)하여졌으니 모름지기 옳게 밝힌 뒤라야 선비들의 풍습을 바르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사성으로 하여금 선정신(先正臣) 이이가 지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가져다가 오늘날 마땅히 시행해야 될 것을 참작하여 토의 결정해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 관학(館學)의 8도 유생 이연보(李延普) 등이 다시 소를 올려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고 또 아울러 송 나라 때의 세 유현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 을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비답하여 이르기를, “두 유현의 도덕과 학문은 실로 한 세상이 우러러 사모하는 바이요, 사림(士林)의 모범이니, 문묘에 종사한들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여러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어렵게 여겨 온 것은, 모두 일을 신중히 처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선비들의 청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지니 마침내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대신들에게 물어서 특히 그들의 청에 좇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ㆍ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수흥(金壽興)ㆍ정지화(鄭知和)ㆍ좌의정 민정중(閔鼎重)ㆍ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모두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고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대신들의 논의가 모두 이와 같으니, 전번에 내린 비답에 의하여 문묘에 올려 배향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문묘에 올려 배향하는 절차를 지금 장차 거행해야 하겠는데 듣자오니, 문묘의 동ㆍ서무(廡)가 좁아서 위판을 봉안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 다섯 유현의 위판을 새로 배향할 자리를 변통하여 옮길 수 없다면 집을 더 붙여 짓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성균관으로 하여금 먼저 그 형세를 살펴보게 한 뒤에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9월에 생원(生員) 박성의(朴性義) 등 70여 명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 등이 일찍이 이이의 사직소(辭職疏)를 보니, 말하기를, ‘생(生)이 불운한 때를 만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망령되게 슬픔을 막기 위하여 드디어 불교(佛敎)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달아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불가(佛家)에 종사한 지가 거의 1년이나 되어 오장을 뽑고 간을 빼내어도 더럽혀진 것을 씻기에 부족합니다. 어릿어릿하며 집에 돌아와서 부끄럽고 분하여 죽기를 원하였으니, 예로부터 석가여래의 독(毒)에 신처럼 심히 상한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으며, 선조(宣祖)께서 성혼에게 죄주는 하교에 이르기를, ‘재상의 열(列)에 있는 신하로서 서울에서 하룻길의 거리에 있으면서 변란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피난 행차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날에도 역시 나와 보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아아, 이것으로 두 신하의 일생이 명교(名敎)의 버림을 면치 못할 것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급히 두 신하의 문묘 종사의 명을 철회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두 유현의 도덕과 학문이 뛰어나 한 세상의 모범이 되어서 여러 선조(先朝)에서 높이고 숭상하는 바가 되었으니, 문묘에서 향사하는 자리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실로 선비를 높이고 도(道)를 존중하는 뜻에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역대의 임금이 즉시 윤허하지 아니한 것은 원래 선비들의 언론을 배척한 것이 아니고, 신중히 처리하려는 데에서 나온 처사였었다. 이제 유생들이 일제히 부르짖는 것으로 인하여 더욱 공론이 오래도록 억눌려서 펴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쾌히 종사하자는 청에 좇은 것이다. 박성의 등의 상소를 보니, 종이에 가득 찬 말은 사실이 아닌 음흉하고 참혹한 말뿐으로 바르지 않은 말 아닌 것이 없어 진실로 통탄과 놀람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들의 선현을 모욕하고 공론을 공박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소두(疏頭) 박성의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정지시키라.” 하였다.
예조 정랑 윤정화(尹鼎和)는 종사(從祀)를 수의(收議)하는 공문서를 수일(數日) 동안 보류하였으므로 파면되었다.
정언(正言) 이징귀(李徵龜)의 상소에 비답하여 이르기를, “몸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옳고 그른 것을 거꾸로 하여 바른 것을 미워하는 무리를 구원하고, 이미 결정된 임금의 명을 지체하여 둔 윤정화를 구하고자 하니, 진실로 지극히 놀랍고 괴이하다.” 하였다. 이에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이징귀를 파면하였다.
관학의 유생 정제태(鄭齊泰) 등이 소를 올려 박성의 등이 유현을 거짓말로 헐뜯은 정상을 자세히 논술하였다. 비답하여 이르기를, “많은 선비가 두 유현을 위하여 그 억울함을 변명한 언론은 내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하였다.
박성의를 대간(臺諫)의 아룀으로 인하여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지평 이일익(李日翼)의 상소에 비답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배향(配享)이라는 중대한 제전(祭典)을 거행하는데 서로 이어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무리들이 아직도 착란(錯亂)을 일삼고 있으니 진실로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10월에 생원 조신건(趙信乾) 등 80여 명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이가 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그가 불교에 귀의하였던 일을 밝혀 말하기를, ‘미친 듯 산중의 절로 달려가서 엎어지고 넘어지며 마음 둘 곳을 잃었던 것입니다. 공리(孔鯉)처럼 가정에서 친히 아버지의 교훈을 받들지 아니하였으며, 황향(黃香)이 하듯이 여름에 아버지를 위하여 부채를 부쳐주는 효도를 하지 아니한 것이 1년이 되었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자신을 꾸짖는 말이며 사실에 근거한 말로 몇백 년을 지나더라도 명백하여 덮어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문순공 이황이 밝힌 ‘천명도(天命圖)와 ‘심(心)은 성(性)을 통솔하고, 정(情)은 체(體)와 용(用)을 통솔한다.’는 설은, 드러난 것과 은미(隱微)한 것이 모두 미세(微細)한 데까지를 더할 수 없게 밝혔으며, 사단(四端)ㆍ칠정(七情)의 분석은 더욱 그 극치에 이르렀습니다.이는 백대(百代)를 두고 성인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이를 보게 하더라도 의혹함이 없을 것인데도, 이이는 평소의 학문과 경술(經術)이 이미 이에 대하여 깨달은 바 없고, 아직 유치한 경지에 떨어져 있으면서 성혼과 더불어 사사로이 서로 주고받아가며 이황을 공격하고 나무랐으니 하나는 이황의 말이 이치를 해쳤다고 한 것이요, 하나는 이황의 말은 성(性)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즉 ‘주자(朱子)가 진심으로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생하여 상대되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 또한 잘못이니, 어찌 주자답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전에는 인륜을 끊고 불교로 달아난 죄가 있고, 뒤에는 도학(道學)과 경술(經術)을 괴란(乖亂)시키고 그르친 흠이 있는데 그가 어찌 감히 문묘 종사의 반열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성혼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이보다도 하위(下位)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선조(宣祖)께서는 그의 명성(名聲)이 실지보다 지나쳤기 때문에, 처음에는 예우(禮遇)하심이 매우 두드러져서, 이이ㆍ성혼의 무리에 두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시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시험해 본 일이 이미 많았으므로 김휘(金翬)의 소에 답한 명백한 하교를 내리셨으니, 어찌 성혼에 대한 결정적인 죄안이 아니겠습니까. 급히 두 신하의 종사(從祀)의 명을 철회하시어 성묘(聖廟)의 사전(祀典)을 존중히 하소서.”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조신건은 멀리 귀양보내고, 전 정언 이징귀(李徵龜), 전 지평 이일익(李日翼)은 관직을 삭탈하고 내쫓으라.” 하였다.
○ 예조에서, 경술년에 오현(五賢)을 종사할 때의 절차는 지금에도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할 것이나, 송 나라의 세 유현의 종사에 이르러서는 일이 신규(新規)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여 대신(大臣)들에게 논의하여 재결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헌의하기를, “경술년에 다섯 유현(儒賢)을 종사할 때 이미 시행한 예절을 《일기(日記)》에서 상고해 내는 것은 비록 소루(疏漏)함을 면치 못할 것이나, 그때의 예관(禮官)과 헌의한 대신들 중에 이름난 신하와 어질고 착한 보필이 많았으니, 그들의 논의와 식견에는 반드시 참고하지 않고 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전(聖殿)과 동ㆍ서무의 각위(各位)에 모두 아울러 고유제(告由祭)를 거행하고, 새로 종사하는 위(位)는 위판을 만들어 동ㆍ서무 두 채에 나누어 모신 뒤에 봉안제(奉安祭)를 거행할 것이며, 봉안하기 전에 따로 교문(敎文)을 지어 그들의 가묘(家廟)에 치제(致祭)하는 등의 일들을 지금 마땅히 본받아 시행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송 나라의 세 유현에 대하여서는 일이 다릅니다.가묘(家廟)의 치제는 원래 논의할 것도 없으며 또한 교문도 있을 수 없으나 따로 제문을 지어서 고유하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 마련하는 위판(位版)은 마땅히 명륜당에서 해야 할 것이니, 위판에 제주(題主)하여 임시로 봉안한 뒤에 또한 고유의 절차가 없을 수 없으나, 다만 제사를 차리고 글을 갖추어 장차 문묘에 올려 배향한다는 뜻을 이 명륜당에서 지내는 봉안 고유제 때에 고유한다면, 아마 반드시 따로 고유제를 거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행판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ㆍ정지화(鄭知和)는 헌의하기를, “고유제의 한 조목은 평상시에 동ㆍ서무에 일이 있으면 다만 성전(聖殿)에만 고유하였으니, 이제 동ㆍ서무 두 채에도 당연히 모두 고유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다만 동ㆍ서무의 각위(各位)를 차례로 자리를 올려 모시는 것을 생각할 때, 평상시의 수개(修改)와는 같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따로 고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은 헌의하기를, “우리나라의 두 유현은 대략 종묘에 종향하는 의식을 모방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고, 송(宋) 나라의 세 유현은 또한 서원에 봉안하는 의식 절차를 모방하여 올려 봉안하는 날에 선성(先聖)에게 고유하고 동ㆍ서무에 나누어 배향한 다음에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여 아울러 향사할 것이며 따로 동ㆍ서무에 고유하여야 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물으라고 명하는 한편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아뢰어 처리하게 하였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통전(通典)》과 《통고(通考)》와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의 서적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았으나 의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에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의 유신(儒臣)을 종사하는 의식은 경술년의 전례가 의거하기에 충분하니, 반드시 다시 옛 역사의 기록을 상고할 것은 없으나, 옛날 선유를 종사하는 의식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우리나라 유신의 경우와는 같지 않아야 할 것인데,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습니다. 이제 종향하고 있는 선유 중 호안국(胡安國)ㆍ채침(蔡沈)ㆍ진덕수(眞德秀)ㆍ오징(吳澄)을 문묘에 올려 배향한 것이 명(明) 나라 영종(英宗) 정통(正統) 연간이었으니, 우리나라에서 그들을 종향한 것은 마땅히 그 뒤에 있었을 것인데,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종향 조항 중에는 이 네 사람의 일은 실려 있지 않아서 과연 어느 때에 있었던 일인지는 알지 못하나, 그다지 멀고 오래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만약 다시 예관(禮官)에게 물으시어, 실록(實錄)에서 상고하여 낸다면, 혹은 이것으로 인하여 그 의식 절차의 상세한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전대에서 종향한 여러 선유들은 후(侯)ㆍ백(伯)의 봉작이 있는데, 이번에 승사(陞祀)하는 송 나라의 세 유현 중에 양시(楊時)는 중국에서 승사할 때에 장락백(將樂伯)을 봉하였으나, 나종언(羅從彦)ㆍ이동(李侗) 두 유현의 종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는 까닭에, 제주(題主)할 봉작이 없으니 송 나라의 말기에 추증한 시호로써 제주한다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마지막 일절(一節)을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들의 논의가 모두 양시는 장락백이란 작호를 사용하고, 나종언ㆍ이동은 송 나라 말기에 추증한 시호로 제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논의에 의하여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대사성 이익상(李翼相)ㆍ예조 참판 김만중(金萬重)ㆍ참의 송규렴(宋奎濂)이 명을 받들어 살펴보니, 동ㆍ서무 두 채에 59위씩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매 상탁(牀卓)마다 양쪽 가장자리를 각각 5푼씩 깎아낸다면 5위를 나누어 봉안하기에 부족하지 않겠습니다. 의자는 두 모서리의 길고 짧음을 헤아려서 그 모서리를 알맞게 줄인다면 별로 장애될 것이 없어서 실로 편리하고 적당하겠습니다.” 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주강(晝講) 때에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叙)가 문묘 동ㆍ서무의 상탁을 조금씩 깎아버리자고 아뢴 헌의는 바깥 여론이 구차하고 소홀하다고 하니, 신중히 하는 도리에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상탁을 헤아려 깎는 일과 집을 더 늘려 짓는 일의 좋고 나쁨을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헌의하기를, “상탁을 적당히 깎는 것은 제물이나 제기를 감손(減損)하는 것 같은 미안한 일은 아닙니다. 자리를 차례로 밀어 옮겨서 봉안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으나, 이미 바깥에 물의가 있다면 집을 한두 칸 넓히는 것도 지나친 처사는 아니오니 급히 더 건축하게 하소서.” 하였다.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집터를 살펴보니 행랑채가 끝난 데서부터 남쪽 담에 이르기까지 전부 25척인데 너무 좁아서 일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대명회전》에 있는 문묘의 제도를 보면, 동ㆍ서의 작은 문[挾門]은 모두 남쪽 담으로 났습니다. 지금 만약 거기에 의거하여 작은 문을 변경하여 남향의 제도로 한다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이런 일은 변통하는데 관계되는 일입니다 …….” 하였다. 대신들의 헌의를 들은 뒤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거듭 다시 생각하여 보아도 결국은 더 건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당초의 재결에 의하여 더 건축하게 하고, 문묘의 제도를 변경하는 조목에 있어서는 다시 밖에 있는 유신(儒臣)과 옥당(玉堂)에 문의하여 품지(稟旨) 처리하라.” 하였다.
○ 장령 정민(鄭勔)이 소를 올려 계성사(啓聖祠)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 일단(一段)은 계성사(啓聖祠) 조에 상세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문청공(文淸公) 설선(薛瑄)은 학자들이 경재선생(敬齋先生)이라고 일컬으며, 주자(朱子) 이후의 유현으로는 그 한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융경(隆慶) 연간에 처음으로 문묘에 배향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널리 묘당(廟堂)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와 밖에 있는 유신들에게 문의하셔서 오현(五賢)을 배향하는 기회를 타서 급히 함께 거행하게 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하였다.
○ 영의정과 우의정이 헌의하기를, “우리나라 문묘의 제전(祭典)은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 만약 일체를 정리 수정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잇달아 올려 배향하는 것은 아마 문묘 배향을 존중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김수흥은 헌의하기를, “이제 여기에 배향하려는 송 나라의 세 유현은 송 나라가 남쪽으로 건너온 이후에 정자(程子)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아서 주자에게 전하였습니다. 많은 선비들이 반드시 이 세 유현을 들어 청하는 것은 그 뜻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서 본래 사문(斯文)의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밖에도 송 나라의 여러 현인(賢人)들 중에 어찌 문묘에 올려 배향할 만한 이가 없겠습니까마는, 한두 사람의 의견으로는 쉽사리 논하기가 진실로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대신들의 논의를 좇지말고 종사하라.” 하였다.
○ 11월에 이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제 8도의 많은 선비들이 거듭 청함으로 인하여 윤허하시는 명이 이미 내려서 멀지 않아 몇 분을 추후로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사전(祀典)에 미처 배향하지 못한 이를 장차 모두 드러내어 종사하게 되었으니 한(漢) 나라와 진(晉) 나라 선비로서 중국에서 출향(黜享)된 이 또한 어찌 이 기회에 일체 정리하여 바로잡지 않겠습니까. 지금 《회전(會典)》과 《명사(明史)》를 가지고 상고하여 보니, 원래 문묘에 종사하던 이로서 강등되어 향사(鄕祠)에서 제사하는 이가 7명이며, 종사를 바로 폐지한 이가 13명이나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제사할 향사(鄕祠)가 없으니 종사를 폐지할 수 없으며, 13명 중에도 한두 사람 애석한 이가 있어 모두 출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황(荀況) 같은 이는 ‘사람의 천성은 악한 것이다.’ 하고, ‘예(禮)는 거짓이다.’ 하였으며, 자사(子思)ㆍ맹자(孟子)가 천하를 어지럽게 했다고 하였습니다.옛날 순황을 말하는 이는 반드시 ‘순(荀)ㆍ양(楊)’이라고 아울러 일컬어 왔는데, 양웅(楊雄)이 이미 양저(楊砥)의 한 마디 말에 의하여 출향되었으니 순황이 어찌 홀로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융(馬融)은 양기(梁冀)에게 붙어서 이고(李固)를 죽였으며, 뒤에는 남군(南郡)의 수령이 되어 탐오(貪汚)한 죄로 파면되었습니다. 왕필(王弼)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학설을 숭상하여 하안(河晏)과 더불어 앞장서서 청담(淸談)을 부르짖었습니다. 왕숙(王肅)은 위(魏) 나라에서 벼슬하여 봉후(封侯)에까지 이르렀으며, 자기의 딸을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보내었고, 또 사마사(司馬師)를 위하여 문흠(文欽)ㆍ관구검(毌丘儉)을 토벌할 계책을 세워 주었으며, 두예(杜預)는 양양(襄陽)에 주둔했을 때 서울에 있는 귀인들에게 선물을 많이 보냈고 강릉(江陵)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이는 신하가 되어서는 순수하지 못하였고, 장수가 되어서는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하휴(何休)는 《춘추(春秋)》를 주석하는 데 있어서 주(周) 나라를 제외하고 노(魯) 나라를 왕실로 내세웠으며, 또 풍각(風角 점술(占術)의 일종) 등의 서적을 주해하여, 《효경(孝經)》과 동렬(同列)로 쳤습니다. 신장(申棖)과 신당(申黨)은 실은 한 사람입니다. 공백료(公伯寮)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또 자로(子路)를 헐뜯은 자로서, 이 때문에 바로 자복경백(子服景伯)이, ‘나의 힘으로 능히 공백료를 저자에 내어 죽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니 이들은 모두 문묘에서 내보내어야 합니다.대체로 이 출향하자는 의론은 처음에는 명 나라 송렴(宋濂)의 논의에서 일어났으며, 더욱 정민정(程敏政)의 소에서 드러나게 되어 마침내 가정(嘉靖) 때에 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조헌(趙憲)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중국의 제도를 좇기를 청하였으며, 그 뒤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가 되었을 때, 또 정리ㆍ수정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때의 일들이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윤허하여 시행하지 못하게 되자, 식자(識者)들이 한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난날에 미처 다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거행하시어 한 시대의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사전(祀典)을 완성하는 것을 오늘에 기대합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문묘 배향에 혹 배향해서는 안 될 자를 억지로 올려 놓았거나, 혹은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오인하여 동ㆍ서무에 나누어 배향했다면 국가의 흠절(欠節)로서 어찌 후세에 비방을 받지 않겠는가. 예조에 명하여 널리 대신들과 유신들에게 문의하여 아뢰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헌의하기를, “진염(秦冉)ㆍ안하(顔何) 두 사람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있는 70제자의 열명(列名) 속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민정(程敏政) 또한 이름이 잘못 유전(流傳)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미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그를 당연히 출향해야 된다고 단정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대성(戴聖)이 탐오하였다고 비방을 듣는 것은 사가(史家)가, ‘그것은 대성과 원수 진 집에서 헐뜯은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그 허위와 진실을 밝히기 어려우며 그가 전한 《대대례(大戴禮)》는 예문가(禮文家)들의 숭상하는 바가 되었으니, 그 공적이 적지 않습니다. 유향(劉向)이 황금을 만들 수 있다고 아뢴 것은 특히 젊은 때의 일이요, 그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의 참된 충성과 바른 언론은 세상의 교화에 도움됨이 있었으며, 경학(經學)에 박흡(博洽)한 것은 한(漢) 나라의 선비로서 그에게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니, 진실로 애석한 데가 있습니다.그 나머지 공백료(公伯寮)ㆍ순황(荀況)ㆍ하휴(何休)ㆍ왕필(王弼)ㆍ왕숙(王肅)ㆍ마융(馬融)ㆍ두예(杜預) 등 성현의 경전(經傳)에 위배되어 명교(名敎)에 죄를 지은 자들은 제일 먼저 내쫓고, 가규(賈逵)ㆍ오징(吳澄)은 김석주의 차자에서는 함께 내 보내기를 청하지 아니하였으나, 가규는 작은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나무람을 받았으며, 그가 경서의 뜻을 강의ㆍ논설하는데 이르러서는, 오로지 도참(圖讖)을 주로 하여 억지로 갖다 붙이고 꾸며대며 벼슬할 매개(媒介)로 삼았으니, 이것은 하휴가 풍각(風角) 등의 술서(術書)를 주석한 것과 어찌 크게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오징은 송 나라의 진사(進士)로서 오랑캐 원(元) 나라에서 벼슬하여 절개를 잃었으며, 그의 학문도 또한 이포색(伊蒲塞)의 풍습에 흐르고 있으니, 이 두 사람 또한 종향(從享)의 열(列)에 그냥 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신장(申棖)ㆍ신당(申黨)은 한 사람인데 둘 다 제사하는 것은 그 잘못됨이 매우 심합니다.요즘 논의하는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승사(陞祀)하는 일을 대폭으로 거행하여 일체 중국의 제도에 따르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그 내쫓는 일만을 좇는다면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그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있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 쫓아내는 데에도 취할 것과 버릴 것이 있으므로 더욱 마땅치 않다.’고 하는데. 신의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육구연(陸九淵)ㆍ왕수인(王守仁) 같은 이단의 학문으로 세상을 의혹하게 하고, 어진 이를 무망(誣罔)한 자를 중국에서 추가하여 종사(從祀)하였다 하여 한결같이 그 예를 구차하게 좇아야 된단 말입니까.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과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승사(陞祀) 또한 중국에서는 아직 거행하지 않은 것이나 일찍이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승사하는데 혐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정을 참작하여 내보낼 것은 내보내고, 추가할 것은 추가하는 것이 아마 사체에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 김수흥(金壽興)은 헌의하기를, “좌구명(左丘明) 이하를 성묘(聖廟)에 종사한 것은 당 나라의 정관(貞觀) 때에 시작하여 송 나라와 명 나라에 이르는 동안 그대로 이어가며 잘못된 것을 답습하였는데, 마단림(馬端臨)의 이의가 있은 뒤로부터 홍치(弘治) 시대의 여러 신하들 또한 출사를 청하는 이가 많았으며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장부경(張孚敬)의 한 마디 말로 단연 개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전대에서 서로 답습하여 오던 잘못을 깨끗이 씻고, 영원한 세대에 걸쳐 길이 존숭하는 전례(典禮)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건대, 임방(林放)은 비록 제자(弟子)의 열명(列名)에는 들어 있지 않고, 거원(遽瑗) 또한 공자의 친구로서 제자는 아니나 임방의 예를 좋아함과 거원의 허물이 적은 것을 선유들이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정중(鄭衆)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범녕(范寗) 등의 경전(經傳)을 보호한 공적은 잊을 수 없는데, 우리나라는 그들을 제사할 만한 향리(鄕里)가 없으니, 모두 반드시 내보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진염(秦冉)ㆍ안하(顔何)는 비록 진비(秦非)ㆍ안회(顔回)와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데서 온 잘못이라고는 하나, 이미 고증할 수가 없으니, 경솔하게 논의하기가 어려운가 합니다. 신장과 신당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명백히 알고 있는 것이며, 공백료ㆍ순황ㆍ대성ㆍ유향ㆍ하휴ㆍ가규ㆍ마융ㆍ왕숙ㆍ왕필ㆍ두예ㆍ오징 등은 종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모든 선유들의 정론이어서 신은 감히 거듭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 정지화(鄭知和)는 헌의하기를, “퇴폐하고 실추(失墜)된 것을 닦아 일으키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때는 바로 이때입니다.” 하였다.
○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은 헌의하기를,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는 개정하는 것이 있고, 승사하는 것이 있으며, 출사하는 것이 있어서 시행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인데, 다만 한 가지만 시행한다는 것은 도리어 전연 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중국에서는 ‘문선왕(文宣王)’이란 칭호를 개제(改題)하였으며, 안자(顔子) 이하는 모두 봉작의 명칭을 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이르기를, ‘공자는 가신(家臣)의 예(禮)로 모신 제자의 거짓을 꾸짖었으며, 증자(曾子)는 대부가 사용하는 평상을[簀]을 바꿨다고 하는데, 그러한 이가 어찌 이 봉작의 이름을 즐겨 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부경의 진언으로 말미암아 몇 천 년의 잘못을 단번에 고쳤던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도록 오히려 잘못된 것을 답습하고 있었으니, 아마 마땅히 의논하여 고쳐야 될까 합니다. 주(周) 나라를 좇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일에 이것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후창(后蒼)ㆍ왕통(王通)ㆍ구양수(歐陽修)ㆍ호원(胡瑗)ㆍ설선(薛瑄)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는 모두 이미 승사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좇지 않고, 유독 출향(黜享)하는 일만을 중국의 제도에 좇는다고 하면서 단연히 결행하려 하니 또한 의리에 온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 집의 이상(李翔)은 헌의하기를, “종향(從享)을 정리ㆍ수정하려는 한 조목은 이전 사람들이 이미 결정한 논의이니, 다시 논할 것이 없으며, 문묘의 구조ㆍ제도에 이르러서는 결국 집 칸 수를 더 붙여 짓는 것보다 온당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 사업(司業) 박세채(朴世采)는 헌의하기를, “당초에 취한 것과 버린 것이 이미 의심되는 것이 많은데 다만 쫓아내는 것만 중국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진선(進善) 윤증(尹拯)은 헌의하기를, “지식이 없고 암매(暗昧)하고 고루하여 감히 헌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문묘에 배향하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어찌 구차하게 전례를 그대로 좇아서 지나친 종사라는 풍자(諷刺)를 스스로 하겠는가. 이번의 승향(陞享)하는 기회를 당하여 아직 미처 베풀지 못하였던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것은 진실로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예조 관원을 시켜 공백료ㆍ순황ㆍ마융ㆍ왕숙ㆍ왕필ㆍ두예ㆍ하휴ㆍ가규ㆍ오징 등 9명은 급히 문묘에서 내쫓게 하라.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배향하는 것은 더욱 아무런 의의가 없다. 신당의 위판을 철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신장과 신당이 한 사람이란 것은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김석주가 홍문관을 시켜 상고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논어》에는 신장은 있으나 신당은 없고, 《사기(史記)》에는 신당은 있으나 신장은 없으며,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신속(申續)은 있으나 신장ㆍ신당은 모두 없습니다. 당(唐) 나라의 개원(開元) 때에 처음 70제자를 성묘(聖廟) 종사하였는데, 대체로 《논어》와 《사기》에 기재된 자를 합하여 모두 종사하였기 때문에, 신장과 신당이 모두 사전(祀典) 속에 있는 것입니다.송 나라에 이르러 형병(刑昺)이 그의 《논어주소(論語註疏》 속에 비로소 한 나라 정현(鄭玄)의 설을 인용하여 장(棖)ㆍ당(黨)ㆍ속(續)이 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가정 때의 개정은 실은 형병(刑昺)의 설을 좇은 것으로 《공자통기(孔子通紀)》 《만성통보(萬姓通譜)》 등과 같은 서적에는 모두 장ㆍ당의 이름이 아울러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가정(嘉靖) 이전의 기록인데, 가정의 개정 때에 이 설을 쓰지 않고, 형병의 《논어주소》에 좇아 단정한 것은 정씨(鄭氏)의 시대가 옛날 공자의 춘추시대와 떨어짐이 멀지 않으므로 그의 말을 참고하여 믿는 것이 옳다고 하여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전번 전교에 의하여 신당을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12월에 영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병으로 헌의하지 않았다가 추후하여 올린 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한 이가 8명에 이르건만 그들이 모두 순수하게 유도(儒道)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생의 무리가 혹은 사사로이 논의하며 마음에 불복(不服)하는 자가 없지 않습니다. 신은 항상 말하기를, ‘처음에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여 뒤에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보다는 처음에 자세히 살피어 마침내 할 말이 있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땅이 좁고 사람의 기운이 국한되어 아직 거시적인 안목과 위대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 나와서 바로잡아 개정하지 못할 바에는 그냥 따르고 이어 답습하여 앞으로 그러한 인물이 나올 때까지 몇 백 세대라도 기다려야겠습니다.그러나 송 나라의 세 유현에 대하여는 또한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朱子)가 창주(滄洲)의 향사(享祀)에서 다만 연평(延平) 이동(李侗)만 제사하고,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은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까닭없이 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양시의 학문의 흠은 주자가 여러 번 말하였으니 이르기를, ‘귀산(龜山)은 먼저 《장자(莊子)》 《열자(列子)》를 보았기 때문에, 비록 이천(伊川)의 글을 보아도 이 장자ㆍ열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배어 있어서 때때로 튀어나오는 것이며, 나중소(羅仲素) 또한 이러한 경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마침내 말하기를, ‘양귀산(楊龜山)이 불교에 대하여 수다를 떠는 것은 마치 이업(李鄴)이 금(金) 나라 오랑캐를 과대 평가하는 것과 같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요사이 귀산의 열자설(列子說)을 읽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유도(儒道)와 배치되는지 사람으로 하여금 너무나 두렵고 놀라게 한다.’고 하였고,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태도를 논한 데는 ‘귀산은 사람됨이 구차하고, 또 이때는 녹봉을 받기 위하여 벼슬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나갔다,’고 하였으니, 대개 채경(蔡京)에게 벼슬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창주의 향사에서 주자가 취함과 버림이 있는 것은, 혹은 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종사에서 비록 갑자기 취하고 버리는 일을 할 수는 없으나, 오직 그들의 도덕이 순수한가, 흠이 있는가와 주자가 경중의 평정을 그렇게 한 까닭을 정밀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문성공 이이(李珥)에 이르러서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이 주자가 도겸(道謙)과 상종(相從)한 일을 숨기지 않는다고 칭찬하였으며, 옛날 문순공 이황(李滉) 또한 이이가 자기의 지난 일을 숨기지 않는 것을 칭찬하였으니 이 또한 연평과 같은 뜻입니다.” 하였다. 연평(延平)이 일찍이 말하기를, “원회(元晦)가 처음에 개선사(開善寺)의 도겸(道謙)에게 가서 공부하였는데, 도겸은 즉 고승(高僧)이었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마땅히 내보내야 할 자를 내보내지 아니한 자도 없지 않으니 그 사람은 원 나라의 허형(許衡)입니다. 문성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허형이 원 나라에서 벼슬한 것이 비록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니나 몸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신이 일찍이 이것으로 허형을 문묘에서 출사할 것을 성조(聖祖)께 아뢰었더니, 성조께서는 정당한 논의라고 하시고, 다만 그 일이 세상의 이목(耳目)을 번거롭게 할 우려가 있어 당장은 어렵다고 은밀히 타일러 주셨습니다. 지금 승사와 출사를 단행함을 인하여 아울러 내보낸다면 별다른 흔적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중국의 예에 의하여 계성사(啓聖祠)를 세우자고 하였다. 이 한 대문은 계성사 조에 상세하다. 또 아뢰기를, “주염계(周濂溪)ㆍ정이천(程伊川)ㆍ정명도(程明道)ㆍ장횡거(張橫渠)ㆍ소강절(邵康節)로부터 주자까지는 실로 공(孔)ㆍ맹(孟)의 정통으로서 그 도(道)가 지극히 크고, 그 공(功)이 지극히 높아서 십철(十哲)의 반열에 참여하여도 오히려 억울하다고 할 것인데, 오히려 동서의 무사(廡舍)에 있어 외람하게도 최치원(崔致遠) 등이 더불어 나란히 하고 있으니, 이것은 대단히 불가한 것 중에도 심한 것입니다.이런 까닭에 주자가 죽림(竹林)의 사당에 다만 주염계ㆍ정자 이하의 7명의 유현만을 직접 공자ㆍ맹자에게 배향하고, 다른 사람들은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주자는 그 공덕이 공자의 다음 가는 분이겠습니까. 마땅히 전내(殿內)에 올려 모시어 그 도학의 계통을 이어온 줄기를 밝혀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7명의 유현 중에도 이론이 있을 수 있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소강절(邵康節)의 학문은 성인의 도에 순수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가 이것을 논란하였고, 그의 말을 《근사록(近思錄)》에 넣지 않았으며, 그의 전기(傳記)를 연원록(淵源錄)에 참여시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뜻은 실로 만세에 걸쳐 도학의 큰 근원이 되는 것인데, 소강절은 바로 복희씨(伏羲氏)의 심법(心法)을 계발하였습니다.주자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저작할 때 한결같이 그의 학설을 인용하였으니, 공적이 누가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오직 온공(溫公)에게는 주자가 그 공로는 인정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허여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가 중국 역대의 왕실의 계통을 말함에 있어서 한(漢) 나라를 제외하고 위(魏) 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떠받든 것은 춘추의 대의명분(大義名分)과 매우 어그러져서 혹은 뒷세상의 참란(僭亂)한 자의 구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는 일찍이 옛날 조(趙) 나라가 진(秦) 나라를 높여 황제라고 일컬을 것을 거부한 노중련(魯仲連)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연평 이동(李侗)은 비록 지적할 만한 흠은 없으나, 그의 도학은 그다지 명백하고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이 두 유현은 정자ㆍ주자와 함께 전내(殿內)에 승사(陞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면재(勉齋) 황씨(黃氏)는 실로 주자의 도를 전한 정통으로서 주자가 그에게 당부하고 기대한 뜻은 왕복한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그가 편찬한 《통해속서(通解續書)》는 성현의 도에 크게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그 공적은 《상서집(尙書集)》에 못지 않습니다. 그런데 홀로 구봉(九峯) 채씨(蔡氏)와 더불어 같이 종사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斯文)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두 논의 결정하게 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하고, 또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종향(從享)을 청하였다. 이 한 대문은 다음에 나오는 김장생의 종향 조에 상세하다. 임금이 대신들과 유신(儒臣)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대신들의 헌의를 들은 뒤에 전교를 내리기를, “송 나라의 다섯 유현을 전내에 올려 배향하는 한 조목은 영중추부사 송시열의 소에 말한 대로 시행하되, 이때에 거창한 공사(工事)를 하는 것은 경솔하게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천천히 풍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라. 면재 황씨는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동과 아울러 함께 승사(陞祀)하게 하고, 허형은 비록 흠과 허물이 없지 않았으나 갑자기 출향하면 세상에 소문이 번거로울 것이니, 아직은 논제(論題)로 삼지 말게 하라. 문원공(文元公)에 이르러서는 학문과 도덕의 높음을 내가 처음부터 환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문묘 종향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니, 지금 갑자기 승배(陞配)할 수는 없다. 대신(大臣)들의 수의에 아직 후일을 기다리자고 말한 것 또한 매우 마땅한 의견이다. 지금 많은 선비들의 부르짖음에 좇아 우선 다섯 유현[五賢]을 배향하는 것 역시 좋겠다.” 하였다.
○ 교리 박태보(朴泰輔)가 올린 소의 대략에, “성묘(聖廟)에 종사한 인물 중에는 흠과 허물이 없지 않으며, 사체 또한 소홀하고 구차한 것이 많습니다. 후세에 성인 군자가 나와서 예(禮)의 제도를 논의하는 임무에 당하는 이가 있게 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정리하고 수정(修正)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적임이 아닌 사람이 망령되고 참람한 의논으로 정리 수정하여 천년의 정론(定論)이 되지 못한다면, 도리어 옛것을 그냥 지키어 죄를 짓지 않음만 같지 못합니다. 송렴(宋濂)ㆍ정민정(程敏政)이 앞장서서 출향(黜享)과 종사(從祀)의 논의를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전현(前賢)을 지적ㆍ배척함이 지나치게 각박하고 잘못된 점 또한 많아서 정론이 되기에는 부족하여 이들의 수정이 있은 뒤에도 오히려 전과 같았습니다.장부경(張孚敬)은 경망한 사람으로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하여 단연히 출향과 종사의 일을 행함이 방자(放恣)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었던 것은 본래 논평할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논의하는 이들이 중국의 제도에 좇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실지로는 취사 선택하고 있습니다. 《사기(史記)》에 실려 있는 72명의 공자의 제자 중 《서전(書傳)》에 나타난 이는 35명이고, 그 나머지 42명은 겨우 이름자만 전할 뿐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말하기를, ‘공자에게 수업하여 육예(六藝)를 능통한 자가 72명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의 명부(名簿)란 것이 공씨(孔氏)의 옛글에 나왔습니다.후세의 사람으로 옛사람의 행실을 논하려 다만 이것을 지킬 뿐이지, 그 중에서 경솔하게 선택하여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소홀한 일입니다. 공백료(公伯寮)의 위인에 대해서는 다만 《논어》의 한 장(章)에 보일 뿐입니다. 혹은 그 사람이 처음에는 악하였으나 마지막에는 선하였는지, 혹은 우연히 《논어》에 나오는 것 같은 이런 과실이 있었으나, 그 밖의 것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가령 반드시 그들을 장차 모두 쫓아내고자 한다면, 염구(冉求)의 행적이 다만 염구가 벼슬할 때 백성의 재물을 거둬 들여서 계씨(季氏)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논어(論語)》 한 장의 기록이 있을 뿐이고, 재여(宰予)의 말은 부모의 3년상은 기한이 너무 길다는 《논어》 한 장의 기록이 있을 뿐이니 논거(論據)를 세우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사기》에 여러 제자를 기록한 것은 모두 《논어(論語)》의 차례대로 편차(編次)한 것인데, 거기에 신당(申黨)은 기재하고 일찍이 《논어》에 실려 있는 신장(申棖)의 일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사마천은 처음부터 두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형병(邢昺)이 갑자기 방불(彷佛)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한 것을 가지고 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으니, 그것을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장은 비록 《논어》에 나오기는 하나, 혹은 70제자의 축에 들지 못하는 이일 수도 있는 것이니, 억지로 신당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순황(荀況)의 학문은 비록 잡되어 순수하지는 못하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 큰 선비로서 그가 세운 공적은 한 나라와 당 나라의 장구(章句)나 일삼는 선비들에 비한다면 위일 뿐만이 아닙니다. 하휴가 《풍각(風角)》등의 서적을 주석한 것은, 유향이 방술(方術)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일에 불과합니다. 역사에는 그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감을 예(禮)에 맞게 하고 누차 충성스런 말을 진언(進言)하였다고 칭찬하였으니, 그 사람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향을 내쫓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하휴를 내쫓는 데에는 용감하니, 또한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융의 잘못은 진실로 많습니다.그러나 탐욕하고 더러운 행실로 벼슬에서 파면당하였다는 것은 양기(梁驥)의 무함입니다. 지금 이것으로써 마융을 죄책하면서 대성(戴聖)의 탐장 행위(貪贓行爲)는 원수진 집의 허구라고 핑계하니 또한 공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의 잘못을 논란하기는 매우 쉬우나, 자기가 다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입니다. 지금 세상에 있어서 갑자기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한 채 정리 수정의 책임을 맡겨서 구차하고도 소홀한 의견으로 역대의 옛 법을 변경하고 개정하기보다는 이른바 옛 관례를 그냥 좇아 죄를 짓지 않음보다 못하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까운 신하들이 전하의 겸손한 덕을 높이고 신중의 도(道)를 지키도록 보도(輔導)하고, 전하의 성질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바로잡아 도울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전하를 도와 선유를 배척하여 내쫓고, 중대한 제전(祭典)을 헐어 무너뜨리도록 하였으며, 전하께서도 곧 다시 한 붓으로 삭제하여 조금도 어렵게 여기시지 않으시니 거조가 너무 급작스럽고 소문이 매우 의혹스럽습니다.이러한 폐단이 점차 불어나면 아마 한 가지 일의 실수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신은 실로 두려워합니다. 전하께서는 급히 전번에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시어 중대한 예전(禮典)을 가볍게 논의할 수 없음을 보이시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끝에 가서는 또 이조 판서 이단하(李端夏)가 갑인년에 선왕(先王)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릴 때, 처음에는 송시열의 예를 그르친 사실을 빼버렸다가 고치라는 명을 받고 겁을 내어 예론(禮論)의 전말을 더 보충한 일과, 이단하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혁폐청(革弊廳)을 세우고 국구(國舅) 민유중(閔維重)으로 구관당상(句管堂上)을 삼을 것을 청한 일을 논난하여 배척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박태보(朴泰輔)의 상소 안에, 첫째 일은 출향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한 것은, 이는 각자의 의견이 같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니, 반드시 들춰서 문제로 삼을 것은 없으나 그가 논사(論思)의 직위에 있으면서 조정을 가볍게 여기고, 공론을 업신여긴 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태보의 관직을 파면하라.” 하였다.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문묘의 좌우문(左右門)은 모두 남향(南向)으로 하는 제도를 따르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번에 대신들의 수의(收議)에 좇아 문묘의 제도를 이미 조금 변동하기로 하였다. 이제 와서 출향과 위치를 옮기는 이가 많아서 10명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비록 증축하는 일이 없더라도 봉안하기에 넉넉하니 증축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임술년 5월에 예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이번에 성묘(聖廟)에서 출향하게 된 10명 중에는 동무(東廡)에 3명, 서무(西廡)에 7명이 있습니다. 이에 새로 승사하는 송 나라의 네 유현을 연대의 차례로 서무에 모시면 자연 그 빈 자리를 보충하게 됩니다. 차례대로 계산하여 보면 동ㆍ서무에 각각 3위를 더 모실 만한 여유가 있으니, 우리나라의 두 현신(賢臣)을 두 채의 끝자리에 나누어 모시면 편리할 것 같습니다. 종사(從祀)할 길일(吉日)은 5월 25일로 하고, 승사와 출사의 사유를 모두 이 날에 대성전(大成殿) 아래에서 축문으로 고유하고, 출사한 10명의 위패는 대성전 뒤 깨끗한 곳에 묻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또 우리나라에서는 옛날 오현(五賢)을 승사할 때, 승사하기 전에 본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와 교서를 내리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제 동ㆍ서무에 모신 위판의 차례를 보니 송 나라의 여러 유현 중에는 혹 차례가 잘못된 곳이 있습니다.”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채침(蔡沈)이 진덕수(眞德秀)의 아래에 있고, 호안국(胡安國)이 장식(張栻)의 아래에 있으니, 바로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로 할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여섯 유현의 위판(位版)을 5월 18일에 썼는데, 장락백(將樂伯) 양시(楊時)ㆍ문질공(文質公) 나종언(羅從彦)ㆍ문정공(文靖公) 이동(李侗)ㆍ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ㆍ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ㆍ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라고 했다. 종사한 이튿날 임금이 친히 나와서 교서를 반포하였다.
두 유현 종사의 청이 인조조 을해년 때부터 시작하였고, 선왕조(先王朝) 무신년 무렵에는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부터 다시 송 나라의 세 유현을 아울러 배향하라는 논의가 있더니 이제 비로소 그 예(禮)가 이루어졌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3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출향(黜享)과 복향(復享)
숙종조 기사년 3월에 원주(原州) 유생 안전(安) 등이 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文廟配享)을 출향하기를 청하였다. 또 왕실의 종통(宗統)을 괴란(乖亂)하여 나라의 근본을 동요하게 하였다는 것으로서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3월에 진사 이현령(李玄齡) 등이 올린 소의 대략에, “이이ㆍ성혼의 종향(從享)을 청하는 일이, 을해년부터 신유년에 이르기까지 전후 50년 동안에 여러 번 일어나고, 여러 번 그쳤다가 종말(終末)에는 드디어 힘으로 공론에 항거하고 위세로 한때를 제압하여 제멋대로 선비들의 여론이 일치하게 돌아갔다고 일컫고, 기어코 종향(從享)의 위열(位列)에 올려놓고야 말았으니, 그 성묘(聖廟)에 욕됨과 사문(斯文)에 재앙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아, 우리나라의 유현으로 문묘에 종사한 이가 전후를 통하여 어찌 한두 사람뿐이겠는가. 그러나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흡연(洽然)하여 끝끝내 이의하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이 두 신하에게는 여러 선비들이 정성을 다하여 일제히 부르짖으며 반드시 그들의 출향을 원함이 그칠 줄 모르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대체로 역대 임금의 밝은 가르침을 준수하고, 저 무리들이 흠과 허물을 가리어 덮고 속여 외람되게 승사(陞祀)한 것을 아프게 생각하는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한 번 두 신하가 배향의 열에 오른 뒤로부터는 시열이 그들의 나머지 논의를 주워 모아, 사람을 무찌르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끝에 생긴 폐해를 말하자면 조정이 분열되고, 인심이 사악에 빠져 들어간 것이 윤증(尹拯)을 극력 배척하는 일에 있어서 다시 수습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거의 떳떳한 윤리가 퇴패해 끊어지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길이 생각할수록 어찌 마음아프지 않겠는가. 공론을 끝내 거부할 수 없어 특히 청하는 것을 윤허하여, 한편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한편으로는 사설(邪說)을 억제하려 한다.” 하였다.
3월 18일에 고유(告由)하고 위판을 묻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지금 진사 심제현(沈齊賢) 등이 고(故) 찬성 이이와 참찬 성혼을 출향한 일에 대하여 한 장의 소를 올렸는데, 말의 뜻이 몹시 패려하므로 신 등이 깜짝 놀라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두 신하의 평생의 행적을 제현(齊賢) 등이 크게 칭찬하였는데 이는 다 깊이 속이는 말이니, 신 등이 대략 변론하기를 청합니다. 이이의 아버지가 일찍이 첩에게 빠져서 이이를 대하는 것이 좋지 않았으므로, 그가 드디어 절로 도망해 들어가서 중이 되어 그 이름을 ‘의암(義菴)’이라고 고쳤으며 중들이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치에 가까운 것을 보고 불교에 물들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거짓입니다.또 중의 옷을 입지 않았으며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말한 것 또한 거짓입니다. 이이가 처음에는 비록 발을 잘못 내디뎠으나 뒤에 곧 바른 길로 돌아왔기 때문에, 지적해서 논란할 만한 흠은 없고 깨끗이 허물을 씻은 공(功)이 있었으니 제현 등이 ‘어린 시절에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을 족히 추후해서 허물할 것은 없다.’고 말한 것 또한 잘못이라고 할지 모르나 지금 이이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년(丁年)은 어린 나이가 아니며, 당한 일은 곧 인륜(서모와의 관계)의 한 변고입니다. 더구나 그의 뜻을 고친 뒤에도 그의 마음 쓰는 것과 일 다루는 것이 조잡하고 정밀하지 않았으며, 편파하고 공정하지 못하였으니, 성인의 자신을 반성하는 노력으로 볼 때 아주 동떨어지게 서로 같지 않아서 진실로 자기의 전날의 허물을 속죄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타고난 소질(素質)은 진실로 뛰어난 데가 있으나, 오직 마음으로 깊이 깨달아 얻은 힘이 적기 때문에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남을 응접하는 데에도 걸리는 것이 많았습니다.조정에 서게 되면 처음에는 조화시키려 하였으나 뒤에는 당파를 만들었으며, 이기(理氣)를 논하게 되면 오로지 기이한 학설을 창작하는 데에만 힘을 써서 걸핏하면 스승의 학설을 배반하였습니다. 이준경(李浚慶)은 어진 정승입니다.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인데 그는 장주(章奏)에 드러내어 공격하여 자기 감정을 한껏 풀었으며, 정철(鄭澈)은 간신인데도 마음속에 남을 해칠 생각을 품고는 사사로이 서로 붕당이 되어서 찬양하고 허여(許與)함이 매우 지나쳤습니다. 그의 한 평생의 마음가짐과 행적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분명히 드러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성혼으로 말하자면 이이보다도 못한 자입니다. 학문의 순수함과 잡된 것은 말할 가치도 없고, 임금의 피난 행차가 지나갈 때, 길 옆 지척(咫尺)의 거리에 살면서도 감히 드러누워 자신의 편한 것만 취하고, 마침내 행차에 따라오지 않았으며, 분조(分朝)에서 불러도 또 말[馬]이 없다고 핑계하다가 명 나라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오게 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행재소(行在所)로 쫓아가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주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아가고 물러감이 근거가 없고, 움직이고 멈추는 일이 인사 도리에 어그러졌는데, 이제 심제현 등이 ‘의리로써 결정지었다.’고 말한 것은 이 얼마나 패려한 말입니까. 기축년의 옥사에도 성혼은 정철과 더불어 표리(表裏)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몸은 비록 밖에 있으나, 실은 혼(渾)이 주장한 것입니다. 최영경(崔永慶)이 처음 석방되었을 때, 성혼이 그의 아들 문준(文濬)을 보내어 쌀을 갖다 주며 말하기를, ‘누구에게 미움을 받아 이렇게 되었습니까.’하니, 영경이 답하기를, ‘다만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을 뿐이다.’ 하였습니다.문준이 멍하니 앉았다가 물러났습니다. 사람들은 영경이 다시 국문을 당하게 된 화는 실로 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宣祖)께서 문득 깨달으시고 전교를 하시기를,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고 하셨습니다. 이 전하의 여덟 글자의 말씀이 간사한 그들의 속마음을 갈파(喝破)하기에 넉넉합니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그들을 다스리는 처분이 너그러워 성혼의 무리로 하여금 무고죄에 대한 반좌(反坐)의 율(律)을 적용하지 않았으므로, 흉도들의 서로 전해주고 단련한 것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징계함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성혼이 영경을 죽인 것은 선조께서도 환하게 알고 계시는 일이온데, 이제 제현 등이 말하기를, ‘혼이 일찍이 영경을 구해 주었다.’고 하니, 하늘의 밝은 태양이 위에서 보고 있으니 그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송시열이 장문(長文)을 지어 성혼의 그 실적(實跡)을 벌여 놓았는데, 어진 이를 죽였다느니 왜국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한 잘못이 있느니 하는 말이 어수선하게 많아서 조사(朝士)들 사이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시열은 음흉한 적신(賊臣)으로서 평생에 우러러 사모하는 자는 이이와 성혼이었는데, 지금 윤증과 서로 알력이 생긴 뒤에는 윤증이 성혼의 외친(外親)의 후예라고 하여 성혼의 죄과를 지적함이 이와 같으니, 그 말이 본래부터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은 못되나, 또한 어찌 전연 허무맹랑한 말을 시열이 발설하였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을 감히 공자의 묘정(廟廷)에 올려 모셔 배향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사문의 한 가지 큰 변고(變故)였습니다.공론이 모두 분하게 여기므로 전하께서 밝게 살피시고 급히 물리쳐 내치시는 일을 단행하시어 여러 사람의 여망(輿望)을 크게 통쾌하게 하셨는데, 제현 등이 이에 감히 공공연하게 사설을 벌여 많은 선비들의 공정한 논의를 교밀(巧密)한 계략이라 하고, 승정원의 계달(啓達)을 권고 유도한 것이라고 하며, 전하의 처분을 사리에 어그러지며, 전도되고 착란된 처사라고 하니, 조정의 관원들을 무함하고 모욕한 것은 본래 말할 나위도 없으나 임금을 능멸히 보고 모욕한 것은 신하의 분의(分義)에 어떠하겠습니까. 당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마음에 달게 여기고 전하를 멸시하는 것이 원래 이 무리들의 본래의 모습이오나, 진실로 매우 통한스럽습니다.” 하였다. 승지 이담명(李聃命)이 지었다.
윤 3월에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두 신하를 출향하라는 명이 내린 지가 이미 수 개월이 지났으나, 아직 거행하는 일이 없고, 수령(守令)들 중에는 이 일을 거행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사피(辭避)하다가 기필코 파직되어 돌아가는 자 또한 많습니다. 각 도의 감사(監司)를 경중에 좇아 추고하여 엄중한 신문을 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 갑술년 1월 18일의 비망기(備忘記)에, “무릇 세상의 일이 간혹 앞에서 잘못한 것을 뒤에 바로 고치는 것도 있으며, 오늘의 옳음을 깨닫고 어제의 그른 것을 뉘우치는 일도 있다. 이미 그 그릇됨을 살피고 또 그것의 잘못을 알면서도 내가 이미 시행한 것이니, 그대로 놓아둔들 어떠하랴고 말한다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폐해란 날로 시들어지고 약해져서 한 가지 일도 해내는 것이 없을 것이니, 어찌 이럴 도리가 있겠는가? 아아, 문묘에 종향하는 것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당연히 승사해야 할 자를 승사하지 아니한 것은 한때의 흠전(欠典)에 지나지 않으나, 승사해서는 안 될 자를 억지로 승사한다면 그것이 성묘(聖廟)를 더럽히고 유도(儒道)를 욕되게 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이와 성혼은 본래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 또 가리기 어려운 허물이 많은 것을 내가 살피지 못하여 외람되게 승사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어찌 내 이미 행한 것이라 하여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옳고 그른 것을 밝히는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경화(更化) 첫머리에 쾌히 공론에 좇은 까닭이다.다만 이때에 혹은 소장을 올려 이이ㆍ성혼을 위하여 편을 드는 자가 있고, 혹은 조정의 명령을 위반 거역하고 즉시 출향을 하지 않는 자가 있다. 이처럼 인심이 옳지 않은 데로 빠져 들어가고 의리가 어둡고 막힌 이때, 여윈 돼지가 절룩거리며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소인(小人)의 도(道)가 점차 만연하려는 징조와 바르지 않은 언론이 함부로 퍼져 돌아다닐까 염려되니 미리 엄중하게 방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뒤에 감히 이이와 성혼의 일로 공론을 좇지 아니하고 몸을 바쳐 출향 반대의 깃발을 세우는 자에 대하여는 마땅히 성묘를 모욕한 죄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 갑술년 5월에 양주ㆍ광주의 유생 진사 박순(朴珣) 등이 올린 소의 대략에, “두 현신(賢臣)의 출묘(黜廟)를 복향(復享)하라는 명이 아직 없습니다. 기사년의 변고는 말하려 하면 가히 통곡할 만합니다. 승향(陞享)도 전하께서 하시고 출향도 전하께서 하셔서 한때의 두려워하는 호소의 여론이 비등(沸騰)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저 두 어진 신하의 도덕이 전에는 높고 후에는 낮은 것이 아닙니다. 대체로 성현의 도가 융성함과 쇠망함이 때가 있고, 전하의 덕을 지킴이 한결같지 않은 까닭으로 소인들의 말이 틈을 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도깨비 같고 물여우 같은 안전(安澱)ㆍ이현령(李玄齡)의 무리가 헐뜯은 말은 본래 그들이 새로 끄집어 낸 흠이 아니고 여러 간사한 무리의 허구와 무함을 이어받아 서술한 것입니다.사설과 정론(正論) 사이에는 옳고 그른 것이 자연히 분별되는 것이온데, 어찌 전하의 유도(儒道)를 숭상하시는 성의로 시종일관하지 못하시고 단번에 참소하는 말에 따라 변하고 옮겨졌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지난 때에 권세를 잡은 간신들이 일마다 가리고 속인 정상을 이미 깨달아 알고 있는데, 하물며 이는 사문(斯文)의 흥망에 관계되고 시운의 성쇠가 달려 있는 일이겠는가. 마땅히 해당 조(曹)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문묘에 승배하는 일은 중대하기 때문에 다만 시골 유생의 한 장의 소로 인하여 바삐 서둘러 구차하게 거행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 못한 일입니다.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셔서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두 현신(賢臣)의 종사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전에는 이미 승사하였다가 출사하였고, 지금은 이미 출사하였다가 다시 승사하는 것이오니, 유생이 올린 소로 인하여 해당 조(曹)에서 거행하는 것은 그 일을 중대하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신은 다만 신(臣) 한 사람이 있을 뿐이오니, 아직 밖에 있는 여러 대신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널리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지선이 아뢰기를, “만약 전하께서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특히 처분을 내리신다면 성덕(聖德)에 더욱 빛이 있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널리 대신들에게 문의하는 것이 진실로 신중히 하는 도리이나, 다만 두 현신의 도덕은 처음에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바른 것을 미워하는 무리들의 기망ㆍ은폐하는 바 되어 출향하기에 이르러 내가 일찍이 후회하고 한탄하였다. 만약 전도(顚倒)되는 것을 염려하여 즉시 거행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흠전(欠典)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두 현신을 복향하는 일은 반드시 예조의 회계를 기다릴 것 없이 특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두 현신을 문묘에 복향하는 길일(吉日)을 윤 5월 28일로 하고, 승사의 사유를 먼저 대성전에 고유한 뒤에, 두 신하의 위판을 임술년에 승배(陞配)하던 때의 옛 예에 의하여 봉안하도록 하며, 그날보다 앞당겨 그의 본가(本家)에 사제(賜祭)하고, 이어 교문(敎文)을 선포하며 각 도(道)의 향교에는 순찰사(巡察使)로 하여금 위판을 만들어 나누어 주고, 이날에 조정의 백관(百官)들은 교문을 중외(中外)에 반포한 것을 하례해야 합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려 감히 두 현신을 복향(復享)한 처사를, 문묘를 더럽히고 사문을 욕(辱)되게 하였다고 하면서 사설(邪說)로 기망하기를 조금도 기탄함이 없습니다. 일전에 경연에서 전하께서 이미, ‘두 현신의 도덕을 처음에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바른 것을 미워하는 무리들에게 속은 바가 되어 출향하기에 이르렀던 것을 내가 일찍이 후회하고 한탄하였다.’고 하교하셨는데, 이와 같은 음흉ㆍ사특하고 올바른 것을 미워하는 무리를 어떻게 하오리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소는 받아들이지 말라. 그리고 이처럼 지나간 일을 깊이 후회하고 선정(先正)을 복향하는 날을 당하였는데, 애초에 그들이 기만과 엄폐하는 말을 기회를 타서 돌연 내놓아 올바른 것을 미워한 죄에 대하여 명백한 처분이 없었기 때문에 종석(宗奭) 등이 조금도 꺼려함이 없이 사설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깊이 미워하고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출향을 주청(奏請)한 소두(疏頭) 이현령(李玄齡)을 먼 변방으로 정배하라.” 하였다.
충청도 유학(幼學)기에 임봉진(林鳳珍) 등이 소를 올려 한종석(韓宗奭)의 무망(誣罔)을 변론하였다. 비답하기를, “너희들이 유현(儒賢)을 위하여 억울함을 변명하였는데, 헐뜯는 말의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는 그 말이 매우 명백하고 시원스럽기에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이현령의 사설을 주워 모아 틈을 타서 올바른 것을 의곡하게 한 죄는 진실로 깊이 미워하고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형조를 시켜 모든 것을 품지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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