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 별 |
4 |
|
강의자료 |
04-10-18 |
|
영 역 |
종가의 생활 |
종가탐방 안내자료
1. 일시 : 2008년 10월 18일(토)
2. 시정표
|
시 정 |
시간(분) |
적 요 |
|
09:00 |
대구 반월당 적십자병원 앞 출발 | |
|
09:30~09:40 |
10 |
군위휴게소 휴식 |
|
09:40~10:30 |
50 |
군위휴게소 출발⇨ 안동독립기념관(내앞) 도착 |
|
10:30~11:00 |
30 |
안동독립기념관 관람 |
|
11:00~12:00 |
60 |
안동독립기념관 출발⇨도산면 서부리(식당)도착 |
|
12:00~13:00 |
60 |
중식(한양식당) |
|
13:00~13:30 |
30 |
도산면 서부리 출발⇨ 농암 종택 도착 |
|
13:30~14:30 |
60 |
농암 종택 종손 종부와의 대화 및 종택 견학 |
|
14:30~16:00 |
90 |
농암 종택 출발⇨ 삼강 옛터 |
|
16:00~18:00 |
120 |
삼강 출발⇨ 대구 도착/ 해산 |
농암 종택(聾巖宗宅)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612번지
1.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 세조13(1467)~명종10(1555)>
가. 연보
字는 비중棐仲, 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永川으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형조참판, 호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으나, 그때마다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 안동, 경주, 대구,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풍토로 볼 때, 외직의 자청은 남다른 효심孝心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 효행
안동부사 시절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의 남녀귀천을 한자리에 함께 초청하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 선생의 행장行狀 기록과 일치한다.
선생은 휴머니즘이 가득한 목민관으로, 詩人이며 孝子였다. 화산양로연은 고향에서 마련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로 이어졌고, 여기서 선생은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90세 부모와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선생의 효도와 경로는 98세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전 생애 걸쳐 계속되었다. 이런 경로모습에 동료친구들이 일제히 축하시를 보냈고, 지금 그 친필시 40편이 그대로 종택에 보존되어 있으니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1202호)이 바로 그 책이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국왕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표연히 귀거래했다. 선생을 위한 전별연餞別宴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으로, 국왕은 금포金袍와 금서대金犀帶를 하사했고, 관료들은 일제히 전별 詩를 지어 선물했다.
다. 문학
선생은 평생 동안 많은 시와 글을 남겼으며 그 대표적인 시 몇 수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효빈가效顰歌’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한강을 건널 때 배 안에서 지은 시이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다시 노래 한수를 읊었다. 그 노래가 ‘농암가聾巖歌’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은퇴 후 선생은 농부로 自任하고 일개 書生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천성적인 시인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다. 이 감흥과 미의식이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 길 강물 돌아보니 만 겹 청산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에 달 밝아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수연壽宴을 받고, 그 감격을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했다. ‘생일가’는 이러하다.
功名이 끝이 있을까, 壽夭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인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님 은혜 일세
라. 정계 은퇴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 염퇴이양恬退頤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며 정관선기靜觀先幾했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정승在野政丞’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려 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선생이 유일하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분강서원’에 제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 행사가 있었으며, 2007년 11월부터 2008년 1월 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라는 주제로 '농암 선생 특별전'이 개최된 바 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 오던 〈어부가 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效嚬歌〉·〈농암가 聾巖歌〉·〈생일가 生日歌〉 등의 시조 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숙종 26)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2. 농암종택聾巖宗宅
농암 종택은 농암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 자손들이 650여 년을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최초 이 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입향시조 이헌李軒으로, 선생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자손들은 지금 이 분으로부터는 23세손, 선생으로부터는 18세손까지 내려왔다. 농암 선생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기에 ‘농암 종택’으로 부른다.
종택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肯構堂’은 1350년 이헌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明農堂’은 1501년 선생 나이 44세 때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또 마당에는 ‘옥인석玉印石’, ‘금상석金床石’이라는 우아한 4각형의 단아한 바위가 있었고,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아담한 연못도 있다. 그러니까 종택 건물 역시 ‘긍구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600년의 역사는 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종택 사랑마루에는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 있다. 크기가 무려 1m나 되는데, 선생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왕자사부 王子師傅의 벼슬을 받아 선조 임금께 나아가 사은숙배하니 임금이 “너의 집은 적선지가積善之家가 아니냐?” 하시고, 즉석에서 써서 하사했다. 선생의 '효와 경로정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었다.
그 밖에도 종택은 33점의 보물과 2점의 지방문화재를 포함한 5천여 점의 방대한 전적과 고문서 등의 유품을 최근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그 목록집이 발간된 바 있다.
농암 종택은 사당, 긍구당, 명농당, 사랑채, 안채, 별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가. 긍구당肯構堂(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
긍구당은 650여년(1370년경 건립)의 역사를 지닌 건물로,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李軒이 지었다. 농암 당시 퇴락하여 중수하고 ‘긍구당’이란 편액을 붙였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遺業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다. 농암은 이 집에서 태어났고 또한 이집에서 돌아가셨으며, 농암 사후 농암 종택의 중심 건물이 되어 모든 문사門事가 여기서 결정되었다. 건물은 몇 차례 중수했지만 원형은 변하지 않은 듯하다. 편액 글씨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 선생이 썼다.
1551년 7월 29일, 농암은 이 집에서 85회 생일을 맞이하여 동안학발童顔鶴髮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 직책을 지닌 재야 재상으로 ‘금서띠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사돈査頓 탁청정 김유, 퇴계 이황, 손서孫壻 금계 황준량, 예안현감 이봉수 등 이웃 친지들로부터 수연壽宴을 받고, 그 감격을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했다.
나. 명농당明農堂
1501년 농암 34세, 고향에 ‘명농당明農堂’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그리고 4년 뒤 49세에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러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 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 그렇지만 아직 부모님이 계시어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1542년, 농암은 드디어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계를 은퇴했다. 어버이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친히 접견하고 ‘금서띠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했다. 이 시기는 첨예한 사화士禍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가하여 이별시를 지어 선물했다. 이 날의 은퇴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져서 담장처럼 둘러선 구경꾼들이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찬탄하였다.
농암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효빈가效顰歌’라는 감격적 소회의 시조를 읊었다.
다. 농암사당聾巖祠堂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분강서원汾江書院의 사당이다.
순조純祖 27년(1827)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도산면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다. 그 후 2005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다시 이전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신문神門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은 토석담장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우물마루로 바닥을 깔고 벽에는 농암의 영정을 모셨는데 경상도 관찰사 시절의 모습이라고 한다.
라. 애일당愛日堂(유형문화재 34호)
이 건물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 이현보 선생의 별당 건물로 중종 7년(1512)에 농암 선생의 나이 46세 때 어버이를 위해 분강 기슭 농암 위에다 처음 지었고 명종 3년(1548)에 중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개건한 것이다. 농암 선생이 이 당을 짓고 94세의 노부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3. 분강서원汾江書院
분강서원은 1699년 후손과 사림士林이 농암선생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위패를 모신 숭덕사崇德祠와 강당 흥교당興敎堂과 성정재誠正齋, 동재 극복재克復齋, 서재 경서재敬恕齋, 그리고 관리사로 되어있다.
‘분강서원’ 편액은 성세정成世珽, 상량문 조덕린趙德隣, 기문 장신, 봉안문은 김화가 썼고, 서원 창건의 전 과정이 적힌 ‘창원일기創院日記’와 ‘복원일기復元日記’를 비롯하여, ‘영정개모일기影幀改摹日記’, ‘전장기傳掌記’, ‘부조기扶助記’, ‘임사록任司錄’, ‘분강영당영건소계첩汾江影堂營建所계帖’, ‘진설도陳設圖’, ‘홀기笏記’ 등의 적지 않은 자료가 남아있어 서원 건축과 운영 실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숭덕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 분강서원은 매년 한 번 향사享祀를 치며, 평소에는 학생이나 학술단체 등에 개방되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행이야기(향교,서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 (0) | 2013.02.15 |
|---|---|
| [스크랩] 문묘(文廟) - 연려실기술 사전 (0) | 2013.02.15 |
| [스크랩] 天符經 (0) | 2013.02.12 |
| [스크랩] 聖學十圖 (0) | 2013.02.12 |
| [스크랩]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0) | 2013.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