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김천 직지사. 서산 부석사.인제 백담사 /문태준.시인과 떠나는 사찰 기행

장안봉(微山) 2013. 2. 12.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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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떠나는 사찰 기행

① 문태준 시인의 김천 황악산 직지사

 

참선을 하니 꽃비가 내리네, 방 벽에 표주박 하나 걸려 있을 뿐이네

 

 

직지사 템플스테이는 기율이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주말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삼보일배를 마친 뒤 참선을 하고 있다.

 

 

큰비가 지나간 후라 갑갑하던 대기가 후련해졌다. 직지사에 들어서자 귀에 먼저 들이친 것은 물소리였다. 직지사 바로 옆으로 계류가 흐르고 있거니와 대(代)가 끊어지지 않고 흘러내리는 이 물소리는 직지사 경내로도 작은 물길을 이루어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물은 풀리거나 느슨한 몸을 지녔다. 뼈가 없고, 물렁물렁하고, 유순하다. 또한 물은 상향(上向)에 반대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한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이 혼탁하고 악한 세속의 나를 씻기며 흘러간다. 수류화개(水流花開)라 했으니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가까이에 배롱나무의 붉은 꽃도 활짝 피었다.

산문(山門)을 들어서는데 마음가짐을 당부한 글귀가 보였다.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분별심을 쉬게 하고 약삭빠른 수단과 판단을 뒤로 물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때 묻은 마음을, 불타는 마음을, 넝쿨 같은 마음을 내려놓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1988년 1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직지사를 찾은 적이 있었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 때문이었다. 봉산면 태화리의 나의 고향집과 직지사와는 거리가 더할 수 없이 가까웠다. 직지사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소풍을 갔던 곳이기도 했다. 직지사 주최의 사생대회, 글짓기 대회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다. 여러모로 직지사와 나와는 오래 묵은 인연이 있었다. 직지사 템플스테이 사무국을 찾아갔다. 직지사 템플스테이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포교국장 민성 스님이 직지사 템플스테이를 소개했다.

“불교의 습의(習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해요. 잘못하면 참회시키고, 절을 많이 하게 하고, 묵언을 시키지요. 여긴 해병대 캠프보다 더 세요. 해병대 캠프는 근육을 쓰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만 자유가 있잖아요. 여긴 없어요. 중도에 돌아가고 싶어도 못 가요.”

묵언이라. 묵언은 말을 버리고 잠잠함을 얻는 것이다. 말을 버리고 마음의 근원(心原)을 보는 것이다. 무성처(無聲處)에 기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을 버림은 위대한 포기다. 나도 사찰 수련회에 여러 번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묵언은 참으로 무겁고 무섭다. 불교의 십악(十惡) 가운데는 말과 관련된 악행이 많다.

이간질 하는 말(兩舌), 남을 성내게 하는 나쁜 말(惡口), 겉만 좋고 실속이 없는 말(綺語), 망녕된 말(妄語)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혀는 제 몸을 패는 도끼와 같은 것이니 단속하라는 뜻이다.

세간 살림이 없는 방사(坊舍), 발우공양, 새벽예불, 108배, 좌선과 포행, 울력, 삼보일배 등으로 꾸려지는 직지사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참가자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지사 템플스테이에는 각별한 것이 있었다. 새벽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함께 읽는다.

『부모은중경』은 태에 잉태하고, 열 달을 다 채워 몸에 품고, 출산하고, 쓴 것을 스스로 삼키되 잘 먹일 것을 늘 생각하고, 마른 자리를 찾아 눕히고, 젖 먹여 기르고,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바라보며 애가 끓어 울고, 여든 살의 자식조차 쉼 없이 걱정하는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막중한지를 설한 경전이다. 많은 참가자들이 이 경전을 읽으며 미명의 새벽에 눈물을 삼켰으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직지사 템플스테이의 매력은 자기 소견을 내지 않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자신을 텅 빈 허공처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고요한 그릇처럼 바라보는 것에 있었다. 고요를 회복시키고 혼침(昏沈)을 다스리고 정신을 성성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참가자들은 자신의 형편이 부족하다는 푸념을 그치고 오유지족(吾唯知足), 즉 오직 족함을 아는 심경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민성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참가자가 스님께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스님은 그가 전투비행단 소속 파일럿이라고 귀띔해주셨다. 전투비행단 소속 조종사들이 템플스테이를 와서 오늘 이른 아침에는 만세루(萬歲樓)에 정좌를 하고 앉아 불교의 네 가지 법구인 법고, 운판, 목어, 대종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잠시 의아했다. 쾌속으로 활강하는 조종사들이 사물의 느린 소리와 울림을 감관(監觀)으로만 측량하다니. 조종사들은 황악산 등반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스님은 그들이 오른 황악산은 몇 해 전 연습비행을 하던 전투기가 추락했던 곳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스님의 말씀에는 습기가 있었고, 무겁게 내 가슴 한복판에서 맴돌며 울렸다.

대웅전에서는 사부대중이 『아미타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대웅전 뒤에는 정종의 어태를 묻었던 태봉(胎峯)이 부드러운 능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람한 감나무에는 탱탱하고 푸른 감이 열렸다. 조선시대에는 직지사에서 수확된 감들이 진상되기도 했다. 나는 직지사의 산내 암자를 찾아 한적한 숲길을 걸어 올라갔다.

“멀리 보면 산빛이 있고, 가까이 들으면 물소리 없네.

봄은 가고 꽃은 남았는데, 사람이 와도 새들은 놀라지 않네.

두두(頭頭)가 모두 드러났으니, 물물(物物)의 체(體)가 본래 평등하네.

어찌하여 모른다 말하리, 너무나 분명한 이 모습이여”

 

라고 적힌 명적암(明寂庵) 육화료(六和寮)의 주련 아래 한참을 앉아 있었다.

 


 

1 명적암을 오르고 있는 문태준 시인.

2 새벽 예불을 올리고 있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

3 늦은 밤 참선중인 어린 나이의 템플스테이 참가자(오른쪽 두번째)가 하품을 하고 있다.

 

 

더 올라가 중암(中庵)에 들렀다. 중암은 관응 스님께서 주석하셨던 곳이다. 관응 스님은 운허 스님, 탄허 스님과 함께 불교계의 삼보(三寶)로 불릴 정도로 교학에 밝으셨던 분이셨다. 법정 스님께서 길상사 개원 법회에 법사로 모실 정도로 법정 스님은 관응 스님을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응 스님은 연만하여서는 은자로 사셨다. 관응 스님을 오랜 세월 곁에서 시봉했다는 도진 스님이 단호박 감주를 내주시며 말씀하셨다.

“노스님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었지요. 외출을 접었어요. 바깥을 끊고 수행하다 죽겠다고 하셨지요. 정지견(正知見)을 가지고 수행을 하라고 하셨어요. 바른 지견이 열리지 않으면 나와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고.”

여실지견(如實知見),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고 명료하게 알아야 한다고 늘 이르셨다는 것이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께서 금생에서 수행정진하셨던 수미산방(須彌山房)으로 나를 안내했다. 길은 풀과 풀벌레 소리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수미산방의 주련을 읽으셨다.


“종일토록 깨어 있는 생각으로 참선에 들어가면 하늘과 땅이 한눈에 들어오네.

벗이 있어 초옥을 찾아오니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네.

종일토록 시름 놓고 참선을 하니 모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네.

내 생에 무엇이 남겠는가.

수행하는 방 벽에 물 떠먹는 표주박이 하나 걸려 있을 뿐이네.”


나는 수미산방 아래로 길게 누운 겹겹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물소리를 옆구리에 두르며 내려가 다시 저 아래 세속(世俗)으로 돌아갈 것이다.

“물은 젖음으로 본체를 삼으니 본체(젖음)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요, 파도는 움직임으로써 형상을 삼나니 바람으로 인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의 성품과 파도의 성품이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물결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따로 물결이 없어 그 젖는 성품은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상으로 생각해보면 본체와 작용이 하나인지 다른지를 가히 알 수 있다.”

서산대사의 저서인 『선문촬요(禪門撮要)』의 말씀을 생각하니 내가 돌아갈 길이, 돌아가 해야 할 마음공부가 멀고도 많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물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글=문태준 (시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김천 황악산 직지사는

사명당 출가한 1600년 역사 고찰 … 템플스테이 1호

직지사는 16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417년 건립)에 이어 한강 이남에선 두 번째로 들어선 사찰이다. 현재 직지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도리사를 말사로 두고 있다.

직지사는 템플스테이 1호 사찰로도 유명하다. 조계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이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국내 사찰 33개를 개방했는데, 그 대표 프로그램이 직지사에서 진행됐다.

 

 

비로전 천불상. 천불상 중에서 벌거벗은 동자승이 있다.

 

여느 이름난 사찰처럼 직지사도 천하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한 쪽 백두대간 중간께 위치한 황악산(해발 1111m) 자락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직지사 뒤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명적암·중암·운수암·백련암·은선암 등 암자 5개가 차례로 나오는데, 중암에서 내려다보면 양 옆으로 황악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발 아래 직지사를 품고 있는 게 보인다. 직시사 아래로 김천시내가, 김천시내 뒤편으로 금오산이 내다보인다.

직지사 템플스테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느림과 비움 그리고 나눔’이라는 이름의 수행형 프로그램은 매월 둘째·넷째 주말에 1박2일로 진행된다. 성인 5만원. ‘고요한 산사생활’이라는 이름의 휴식형 프로그램은 수시로 진행되는데 1박 3만원이다. 직지사 수행형 프로그램은 특히 기율이 엄격하고 일정이 빡빡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오후 3시부터 이튿날 11시까지 일정이 꽉 차 있는데 새벽 예불, 108배, 암자 순례는 기본이고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삼보일배를 한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하고, 묵언이 기본이며, 마음대로 화장실도 갈 수 없다. 직지사 포교국장 민성 스님은 “집의 소중함, 일상의 소중함을 배우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직지사는 사명당이 출가한 사찰이다. 사천왕문 앞에 출가하기 전 소년 사명당이 밤을 지새웠다는 장소가 있다. 명부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이 있고, 비로전 천불상 가운데 발가벗은 동자승이 서 있는데 한눈에 알아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054-429-1716. jikjisa.or.kr.

 

2012.08.31

 

 

 

 

 

 

 

시인과 떠나는 사찰기행

④ 문태준 시인의 충남 서산 부석사

 

소가 길게 드러누운 절, 소를 찾듯 나를 찾으란 뜻일까요

 

 

문태준 시인과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이 충남 서산 부석사 산신각 돌계단을 오르고 있다. 볕이 좋은 길목마다 나무의자가 참 많다. 고요히 쉬었다 가시라는 사찰의 배려다.

 

 

“노을 물든 텅 빈 절 / 무릎 안고 졸다 / 소슬한 가을바람 놀라 깨어 보니 / 서리 맞은 단풍잎만 뜰에 차누나.”

경허(鏡虛·1846~1912·한국 근현대 불교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승) 스님의 시다. 으스스하고 쓸쓸한 공기가 부석사(浮石寺) 마당에 가득하다. 나뭇잎은 꽤 졌다. 빈 가지에 하늘이 내려와 앉아 있다. 대공(大空)은 참 자유자재하다. 바위가 되어 묵중하고, 몰려다니는 낙엽이 되어 흐르고, 새의 울음소리가 되어 경쾌한 탄력이 있고, 예처럼 빈 가지가 되어 조용하고 심심하기도 하다. 나는 경허 스님이 머무르셨던 처소의 툇마루에 앉아 만추를 바라보았다. 경허 스님은 내가 앉아 있는 심검당에 사셨다. 스님이 사셨던 그때의 아궁이와 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방은 지극히 소박하다. 벽과 바닥과 천장,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작고 밝은 문이 있을 뿐이다.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 지혜의 칼이란 다름 아닌 취모검. 취모검의 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기만 해도 잘린다 했으니 중생의 무명을 베는 예리한 명검 아니겠는가. 스님은 이 심검당에서 제자를 길러냈다. 심검당 옆에는 목룡장(牧龍莊)이 붙어 있다. 용처럼 비범한 인재를 키워내는 곳. 이곳 또한 스님이 많은 선객을 가르쳤던 곳이다. 심검당과 목룡장 현판 글씨는 경허 스님이 직접 썼다. 천뢰가 들이쳤으나 필체는 여전히 부드럽고 활달하다.

큰 법당인 극락전, 그리고 목룡장·심검당은 나란히 배치되었다. 마치 소가 길게 누운 꼴. 아닌 게 아니라 쇠뿔이 있을 법한 곳에는 여지없이 큰 돌이 무언가를 들쳐 올리듯 솟아 있고, 심검당 아래 약수터는 소 형상에서의 젖가슴 부위로서 신선한 유즙과도 같은 차고 맑은 생수가 차오르고 있다. 부석사 도량 자체가 퍼질러 누운 한 마리 큰 소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본래 면목이 부처임을 깨달아가는 구도행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고 있으니 이 부석사가 불교의 종지를 잘 받들고 있는 유서 깊은 절임을 알겠다.

 

 

부석사 큰 법당인 대웅전과 목룡장·심검당이 길게 누운 소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다

 

 

부석사라는 현판은 만공 스님께서 직접 쓰셨다. 글씨 끝머리에 ‘칠십옹(七十翁)’이라고 적어 놓았다. 일흔 살의 늙은이라. 그 마음 씀의 소박과 온유와 겸허가 느껴졌다. 만공 스님은 28세 때 이곳 부석사에 왔다. 경허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만공(滿空), 혜월(慧月), 한암(漢岩), 수월(水月) 스님은 모두 경허 스님의 제자였다.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할 것을 권했다. 만공이라는 법호도 경허 스님에게서 받았다. 스승과 제자가 심검당과 목룡장의 긴 툇마루에 곁을 두고 흉금을 터놓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법희(法喜)가 생겨났다.

근대 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스님과 그 제자 만공 스님은 모두 심우(尋牛), 즉 나를 찾을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경허 스님은 “바랑을 지고 저자에 놀며, 요령을 흔들고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실로 일 마친 사람의 경계”라고 했고, 만공 스님은 부처의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몸과 마음에서 찾아지는 것이라고 했다.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과 산신각을 향해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규모는 작지만 큰스님들의 법맥이 흐르는 곳입니다. 처음 이곳에 주지로 왔을 때는 도량을 빼곤 모두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주경 스님의 얘기다. 지금 부석사는 그때에 비하면 규모도 커졌지만 흐트러졌던 도량이 깔끔하게 제대로 갖추어졌다.

밑동이 굵은 괴목들이 곳곳에 섰다. 가지 너머로 들판과 인가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으로는 몽산포가 잡힐 듯 눈에 들어왔다. 툭 트였으나 속세가 멀지 않았다. “비온 뒤 하늘이 한층 맑아졌습니다. 어제는 하늘에 별이 많고 밝아 북두칠성을 못 찾을 정도였습니다.”

 

 

 

‘부석사’ 현판. 근대 불교 중흥을 이끌었던 만공 스님의 글씨다.

 

 

빈 가지 위에 시선을 얹어놓고 있는 내게 주경 스님이 말을 보탰다. “부석사에는 나무의자가 참 많군요.” 나의 질문에 스님이 답한다. “몸이 쉬어야 마음이 쉽니다. 앉을 자리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분들은 최소 1시간 이상 절에 머물다 가십니다. 오래 체류하시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볕 잘 드는 곳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속세에서 데려온 마음의 근원을 돌이켜 보고 잠잠해졌을 것이다. 경허 스님께서 평소 강조하셨던 ‘정정(靜淨)’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정정(靜淨) 두 글자를 잊지 말라. 맑은 것은 보리요, 고요한 것은 열반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으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목에는 긴 염주를 걸었다.

산신각에는 중앙에 산신을, 우측엔 선묘 낭자를, 좌측에는 용왕을 모셨다. 선묘 낭자를 모신 까닭은 부석사 창건 설화에 선묘 낭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의상 스님을 흠모했으나 사랑의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다에 몸을 던진 이가 선묘 낭자다. 의상 스님은 이곳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지어 선묘 낭자의 혼을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했고, 그러던 어느 날 공중에 큰 바위가 떠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후 바위는 훌쩍 날아가 절에서 바로 보이는 바다에 떠 있으면서 절 짓는 공사를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이 돌이 물 위에 떠있다고 해서 ‘부석(浮石)’이라 불렀고, 절 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주경 스님이 손을 들어 멀리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곳에 있는 것이 부석입니다. 어느 해에는 부석사의 약수가 뚝 끊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상해서 어른들께 여쭸더니 부석이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니 함께 가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누군가가 부석이 있는 터에 무덤을 썼던 것입니다. 무덤을 옮겼더니 다시 약수가 솟아났습니다. 저 부석과 이 절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석사는 도비산(島飛山) 중턱에 있다. 간척이 되기 전까지 서해 바닷물이 이 도비산 아래까지 이르러 차고 밀려나갈 때에는 육중한 산이 마치 움직이고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터. 어쨌든 도비(島飛)와 부석(浮石)이라는 말이 매우 역동적으로 들렸다.

부석사는 산사음악회와 한문학당,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하다. 산사음악회가 열린 지 올해로 16년째나 되었다. “절 마당에 전깃불을 끌어오고 합판을 깔아 시작한 음악회가 이제 지역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지난달 산사음악회에는 이해인 수녀님이 다녀가셨습니다.”

한문학당은 여름과 겨울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방학기간에 연다. 템플스테이는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도비산과 천수만 주변의 생태환경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산빛 물빛의 생명세계가 한 몸이라는 것을 참가자들은 깨닫게 된다. 특히 탐조 체험은 인기가 많다.

“암컷과 수컷, 어린 개체와 성장한 개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먹이 활동하는 것을 망원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새들에게도 각각의 이름이 있고 저마다 모양이 있습니다. 인간 세계와 다를 바 없지만, 참으로 평화로운 교호(交好)의 풍경입니다.”

주경 스님이 말을 이었다.

 

 

 

“부석사 템플스테이는 참가하는 분들에게 편안한 휴식과 즐거운 체험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차를 마시면서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차를 마실 때에는 차만 마셔야 합니다. 그것이 집중입니다. 집중하느냐 못하느냐가 도인과 보통 사람의 차이입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집에서는 집의 일을 하고, 회사에서는 회사의 일을 합니다. 마음이 집중하고 고요해지면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고,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곳에는 봄이 되면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손톱보다 작은 야생화는 풀숲에 주저앉아야 보입니다. 그럴 때에야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경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서 나는 빈 의자에 좀 더 앉아 있었다. 무연한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마음을 측량할 생각도 버리고서. 쓸쓸한 가을바람과 뒹구는 붉은 낙엽, 흰 바위와 푸른 소나무, 날아가는 새들 속에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침묵으로 이 모든 움직임을 허락할 뿐이었다. 이 한적함이 고마울 뿐이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머리를 끄덕이며 늘 졸고 있네. / 조는 일 외에 별일이 없어 / 조는 일 외에 별일이 없으니 / 머리를 끄덕이며 늘 졸고 있네.” 이렇게 시를 지은 경허 스님의 한 소식이 해조음처럼 사무쳐왔다.

 

 

 

 

 

시인과 떠나는 사찰기행

⑥ 문태준의 인제 백담사

 

차가운 고요와 적막 속 희열 … 사방이 한 칸의 선방

 

내설악 백담사가 눈에 잠겼다. 눈이 바다처럼 펼쳐진 세상에서 산사가 배처럼 떠있다. 얼얼한 한기만이 중중하였다.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우습다/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설악무산 스님의 시 ‘아지랑이’의 전문이다. 설악무산 스님은 신흥사 조실이면서 세간에는 시조시인 조오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승이다.

백담사에 찾아가기 전 만해마을 심우장에서 스님을 뵈었다. 스님께서 나를 맞으며 “멀찍하게 앉아라. 숨 막히지 않게. 팔순 늙은이가 죽지는 않고 여기 앉아서 낮을 다 보네. 팔순이라는 꼭대기에 선 거야. 끝없는 낭떠러지야. 돌아갈 곳도 없어. 쳐다봐도 허공이야”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이 시 ‘아지랑이’를 단박에 떠올렸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더 말씀을 않으셨지만 저 자탄의 말씀 뒤에는 ‘백척간두 진일보하라’는 말씀이 숨겨져 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무금선원에서 동안거 중인 스님들이 예불 시간에 맞춰 법당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백척간두 진일보라. 한 걸음을 더 떼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 절벽에 섰다는 것일까. 수행자의 처지가 절벽에 선 것과 같다는 뜻일 것이니 그만큼 목숨을 내걸고 용맹하게 정진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중생의 처지가 절벽에 선 것과 같으니 중생구제가 그만큼 절박하고 급하다는 뜻일 것이다.

설악무산 스님은 나에게 “그거 하지 마라”며 스님의 법문을 내가 받아 적는 일을 극구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스님의 말씀은 돌을 쪼개듯 또렷하게 이어졌다.

“괜히 해보는 소리지만 국화는 국화 향기가 있고, 야생화는 그대로 향기가 있는 거야. 좋다 나쁘다라는 것은 자기 생각이야. 그냥 다를 뿐이야. 옳고 그른 것은 각자 생각이야. 본디 못난 놈도 없고 잘난 놈도 없어.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어.”

나는 불교 경전의 한 비유가 생각났다. 가령 바싹 마른 풀을 구해서 불을 지피든지, 바싹 마른 무화과나무를 구해서 불을 지피든지 불이 곧바로 일어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또 그렇게 다른 땔감에서 불은 피어나지만 그 피어난 불의 열기와 빛은 차이가 없다. 스님의 말씀이나 경전의 이 비유가 뜻하는 것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이 가진 고유한 성품과 존엄에는 차등이 없다는 것이니 그 고유한 성품과 존엄은 어떤 종자, 불성(佛性)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설악무산 스님의 말씀은 대공(大空)을 활강하는 매처럼 매섭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천진하고 미소가 가득 고인 그곳에서 흘러나왔다.

“잘못되었다고 생각 마라. 잘못된 게 오히려 복이야. 섭섭한 생각을 마라. 일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거야. 이 세상 사는 것은 남 비위 맞추는 것이야. 그걸 제일로 잘한 분이 부처님이야.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 인생은 이와 같고 저와 같은 것이야.”

이 말씀에 내 심중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이와 같고 저와 같다고 생각하면 무엇에든 무착(無着)할 것이다. 고착도 막힘도 없이 능란하고 자유자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눈을 하나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착은 얼마나 큰 은산철벽인가. 집착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 해로움과 괴로움과 불편함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얼마나 뚫고 무너뜨리기 어려운가. 천둥과 벼락으로도 깨기 어려운 것 아닌가. 오욕락(五慾樂)이라는 것, 재물과 이성과 음식과 명예와 수면이라는 이 다섯 도둑에게 훔침을 당하기만 하는 나의 형편이 부끄럽고 위중(危重)하게 느껴졌다.

 

불 밝힌 백담다원.(위) 문태준 시인이 백담사 일주문에 들어서고 있다.(아래)

 

 

스님께 삼배로 하직을 아뢰고 백담사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백담사로 가는 길은 하늘도 땅도 꽝꽝 얼었다. 계곡의 큰 반석은 큰눈에 덮여 흰 이마를 드러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없는 이 폐색(閉塞). 모든 것으로부터 오롯하게 차단되었다. 얼얼한 한기(寒氣)만이 중중(重重)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고요하고 차가운 적막에 희열이 느껴졌다. 아래 위 왼쪽 오른쪽 모두가 한 칸의 선방처럼 느껴졌다. 곡기를 끊고 오직 깨달음만을 구하는 선사의 수행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백담계곡 전체가 처참하리만큼 앙상하게 뼈를 드러낸 채 낮밤을 잊고 고행하는 수행자처럼 느껴졌다.

백담사라는 절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작은 담소가 100개째 있는 곳에 절을 세웠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나는 이 백담사에 꽤나 여러 차례 찾아왔었다. 오늘처럼 계곡 안쪽이 한천(寒天)으로 가득할 때에도 있었고, 쌀알보다 작아진 팥배나무 열매들이 나무에 맺혀 쪼글쪼글해지는 것을 보았던 때도 있었고, 유수(流水)에 망념을 씻던 때도 있었고, 밤새 철야정진을 하며 세속의 일을 깊이 참회한 적도 있었고, 계곡의 얼음이 꺼지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행적이 아직도 성성한 곳 아닌가. 나는 ‘복종’이라는 시가 특히 좋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 여성 화자의 사랑에 대한 역설적인 화법이 좋다. 스님은 1926년 회동서관에서 펴낸 시집 『님의 침묵』을 이곳 백담사에서 집필하셨다.

 

백담사 경내 만해 한용운 동상.

 

 

백담사 극락보전으로 들어갔다. 절을 올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법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설악무산 스님께서 언젠가 들려주셨던 “구하는 것이나 버리는 것이나 다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참답게 집착을 버리면 집착을 구하느니 버리느니 하는 그 마음조차 애초에 없다는 것 아닌가. 죄가 없으면 홀로 있어도 두려운 생각이 없거늘 법당에 가만히 홀로 있으니 짧은 순간에도 나의 만 가지 생각이 넝쿨 뻗듯 뻗어 나의 뿌리까지 얽어매는 것을 보았다. 당혹스러웠으나 좀 더 앉아 있어 보았다. 바깥이 침침하게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백담사 무금선원에는 동안거 결제가 한창이었다. 수좌스님들이 정진하고 계시는 터라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올겨울에는 무금선원에 스물여섯 분, 무문관에 열두 분의 스님이 정진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백담사 무문관은 밥을 들여놓는 작은 공양구(供養口) 외에는 문이 없다. 자물쇠로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가버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퇴로를 없앴으니 이 또한 백척간두에 올라선 것 아닌가.

절 마당으로 내려오니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가 서 있었다. ‘저물 무렵’이라는 시였다. ‘천봉우리 만골짜기 그 너머로/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 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 거나/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 있으리’

 

 

 

 

시행을 따라 읽으니 사방이 캄캄해졌다. 시비의 글씨가 어둠 속에 완전히 묻히고 있었다. 속간(俗間)에 봄이 오고도 한참 후에야 이 백담 계곡의 흰 잔설과 두꺼운 얼음은 녹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까지 이곳 백담계곡은 면벽좌선하는 수좌의 행색 그 자체일 것이다.

 

 

 

 

 

 

 

 


문태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뒤 미당문학상·동서문학상·소월시문학상 등 시 부문 주요 문학상을 받았다. 불교방송 PD로 일하며 서정적이며 불교적인 시를 생산하고 있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 산문집 『느림보 마음』등 출간.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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