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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암서원(洛嵓書院)은 의성김씨 상주 입향조인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와 두 아들인 월담(月潭) 김정룡(金廷龍)과 국원(菊園) 김정견(金廷堅)을 모시기 위한 서원이다. 류시완(柳時浣)이 지은 「낙암서원복원기」에 보면, 서원의 창건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들 삼부자는 벼슬할 때는 선정이 빛나 청백리의 반열에 들고, 물러나서는 스승을 따라 강학수도와 덕을 쌓아 청렴으로 백성들과 함께하였다. 그 문장과 업은 연이어 빛나니 소씨 부자처럼 주변에 알려지고, 당시의 사람들이 풍도와 덕을 흠모하여 따랐다. 1796년 봄에 영남의 선비들이 성주(星州)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서 발의를 하여, 도남서원에서 향내의 각 서원에 통문을 보내 세분 선생의 시축(尸祝)하는 곳이 없을 수 없다함을 알리고 재원마련을 위한 일을 시작한 지 하루만에 이루어졌다. 이 해 겨울에 서원이 완성되었다. 그 곳 지명을 따라 낙암서원으로 이름 하였다. 1870년에 서원이 훼철되어 유림의 아쉬움이 되었으나, 1987년 지방의 유림과 후손들이 상의하기를, 서원의 흥폐는 사도(師道)의 존망과 관계가 있어, 반드시 복원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공사를 시작하여 예전의 터를 넓혀 강당과 묘우를 지었다. 비용에 따라 건물의 크기와 집의 숫자를 맞추느라 전보다 규모는 작아졌다. |
| 법을 따르는 것이 상(象)이며, 백행의 근본으로 충효인의예지신(忠孝仁義禮智信)과 경(敬)과 겸양과 너그러운 용서와 근검을 위하는 것이 모두 덕(德)에 해당한다 하여 묘우를 상덕사(象德祠)라 하였다. 이 서원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세분 선생의 학문을 배우고, 덕을 지켜 존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게으르지 않게 뛰어나게 하라는 뜻으로 강당을 정도(正道)라 하였다. |
| -상덕사(象德祠)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마루이다. 김담수 와 두 아들이 배향되어 있다. -내삼문 묘정을 출입하는 삼문으로 솟을삼문으로 지어졌다. 문의 이름은 소수문(昭修門)이다. -강당 1988년 서원을 복원하며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며 양쪽에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외삼문 서원의 출입문이다. 1990년에 건립되었으며, 문호는 앙지문(仰止門)이다. |
내력과 기능
| 낙암서원의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21일로 정해져 있다. 가을 향사는 치르지 않는다. 향사 홀기에 따르면, 향사 전날 유사가 서원 내외를 청소하며, 제기도 씻는다. 희생이 서원 문밖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복장을 갖추고 살펴보며 깨끗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는 처소로 들어가 제향에 대한 연습을 한다. 유사는 헌관의 자리를 묘우 중간에 설치하며, 북향하여 서쪽이 상석이다. 제생은 다음 줄에 선다. 내삼문 동편 문 앞에 헌관 자리를 마련하며 남으로 줄을 서며, 북향하여 서쪽이 상석이 된다. 관세위를 설치하며 행사가 시작된다. |
| - 서계일고(西溪逸稿) |
| 김담수(金聃壽)의 시문집으로 3권 1책, 목판본이다. 1781년(정조 5) 7세손 동엽(東曄)과 동익(東翊)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는 문집을 교정한 이상정(李象靖)의 서문과 세계도(世系圖)가 있고, 발문은 없다. -월담집(月潭集) 김정룡(金廷龍)의 시문집으로 3권 1책, 연활자본이다. 1948년 후손 병준(炳準)과 성재(誠在)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굉(金굉)과 정창묵(鄭昌默)의 서문이, 권말에 김동필(金東弼)의 발문이 있다. |
관련인물
| - 김담수(金聃壽) | |
| 1535(중종 30)~1603(선조 36).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태수(台叟)이며, 호는 서계(西溪)이다. 성주 출생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사사하였으며,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서 심경과 근사록을 배웠으며,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에게 중용과 대학을 강의 받았는데, 모두 지극한 칭찬을 받았다.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와 도의로 사귀었고, 벗을 사귐에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선행을 즐겼으며, 모든 행실이 겸손하였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강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 경전공부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항상 가내법규를 엄중히 하여 친척 간에 친애함과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강조하여 우애가 돈독하였다. 특히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있었다. 후에 성주(星州)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선조가 황계처사(黃溪處士)라는 호를 내렸다. 문집에 《서계일고(西溪逸稿)》3권 1책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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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金廷龍) | |
| 1561(명종 16)∼1619(광해군 11).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시현(時見)이며, 호는 월담(月潭)이다. 할아버지는 관석(關石)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참봉 담수(聃壽)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曺氏)이다. 초명은 응룡(應龍)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1586년 예안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 수송에 공이 커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607년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내고, 그 뒤 영월군수, 풍기군수,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집안의 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소학에 정력을 기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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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견(金廷堅) | |
| 1576(선조 9)∼1645(인조 23).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훈경(勳卿)이며, 호는 국원(菊園)이다. 담수(聃壽)의 아들이며, 정룡의 동생이다. 정구(鄭逑),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먼저 정구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배웠고, 뒤에 상주의 정경세를 따라 도학을 닦았는데, 임진왜란의 와중에서도 경의(經義)의 연마에 힘쓰고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 많은 제자를 두었다. * 관련인물 - 조식(曺植), 덕계(德溪) 오건(吳健),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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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면은 낙동강 건너 상주시 최동쪽에 위치한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반도로서 낙동강이 흘러서 남쪽은 낙동면, 서쪽은 낙동면과 상주시 동문동과 사벌면이 접한다. 동남으로는 대구 팔공산에 기원류를 두고 낙동강에 합류되는 곳은 합강봉이 있으며, 합강봉의 부근에는 봉황성 및 양처사굴이 있다. 동쪽은 의성군 다인면과 단북면, 단밀면이 접하고, 북으로는 건지봉이 우뚝하게 솟아 황금의 준봉(峻峰)을 이웃하여 예천군 풍양면과 인접되어 있다. | |
| 중동면은 신라 점해왕 때부터 중동으로 칭 하였다고 전하며 낙동강과 위강으로 인하여 열한 곳의 나루를 통하여 내왕이 가능 하였으므로 역사적으로 외침이 거의 없었던 지역으로 인심이 순후하다. 1,600년을 전후하여 지역에 들어온 풍산류씨와 의성김씨 문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선비의 고장이기도 하다. 낙암서원은 중동면 죽암리에 위치한다. 죽암리는 비봉산이 길게 뻗어 야산이 되면서 취락을 형성하고 낙동강이 연안에 층암과 절벽으로 축을 쌓은 듯 한 곳에 평야를 펼친 수려한 경관과 풍요가 함께한 마을이다. 원래 대바우로 통칭되어 오다가 구상, 소비와 구중의 일부를 병합하여 죽암리로 하였는데 죽암1리는 자연부락으로 대바위, 반래, 중리이다. -대바우 원죽암이라 한다. 선조 때 의성김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열었으며 층암위에 대나무가 무성하고 비봉산의 봉황이 이곳에 이르러 대나무 열매를 따먹는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연유하여 동네 이름이 되었다. 청류산, 돔매, 앞산 등 나직한 산들이 둘러선 가운데 큰마을, 작은마, 웃마, 뱃가가 형성되어 나누어 부르기도 하며 밋골재를 넘어 간상리의 수동과 통하고 대바위 나루에서 낙동분황과 왕래하는 도선이 있어 상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 지역 주민이 많이 이용하여 번잡 하였다. 그리고 동구에 낙암서원이 있다. -반 천 약 400여 년 전에 의성김씨 정견이 여기에 살며 교육을 하고 진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이니 성균생원이 사는 마을이란 뜻에서 반내라 하였다고 하며 또 이 마을 앞에 갈대가 무성하여 갑장산에서 내린 장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대안에 위치하였으나 천류가 반만 보이므로 “반내”라 하였다고 하는 설도 있고 내 옆에 있는 마을 이라고 반내 라고도 했다 한다. -중 리 죽중리, 구중리 또는 중리라 한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 하였고 죽암의 중앙이므로 죽중이라 하고 인근 9개 동리 중 중앙에 위치하므로 구중리라 하였다 하며 지금은 중리라고만 부르고 들 가운데 마을은 “섬마을”이라고도 부른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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