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교,서원)

[스크랩] 효곡서원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3. 2. 5. 16:54

 

 

 

 

 

 

 

 

 

 

 

 

 

 

명 칭 :  효곡서원(孝谷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 324-1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리 324-1)
건 축 주 :  상주 유림
건축시기 :  1685년(숙종 12)
중건시기 :  1968년


건축 배경
효곡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우곡(愚谷) 송량(宋亮)을 배향한 세덕사(世德祠)로 공성면 소곡리에 창건되었다. 본 손들이 선생 한 분을 배향하였으나 지세가 좁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이동이 불편하여 1724년 각회산(角回山) 아래로 옮겨 세우고, 서대(西臺) 김충(金冲),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두 선생을 추배하여 1735년(영조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80년 각회산 아래에 있던 서원을 현 위치인 용신리 절골로 이건하였다. 1786년(정조 10)에 일묵재(一黙齋) 김광두(金光斗)를 추배하여 네 분을 모시는 서원이 되었다. 1870년에 훼철되었다. 1931년 일제강점기에 유림의 발의로 상주 관아에서 사용하던 건물의 부재를 구입하여 강당을 복원하고, 1968년에 묘우를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건축 특징
서원의 강학 공간인 강당과 제향 기능을 가진 묘우를 구분하는 담장이 없고 강당 바로 뒤가 묘우이다. 묘우를 출입하는 문은 강당과 묘우 사이에 남향으로 시설되어 있다.

서원의 자리가 좁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이동이 불편하여 허물어지고 퇴락하여 서원을 세 차례나 옮겼으나, 효곡이란 이름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사림과 후손들이 계를 모아 재산을 모아 1931년 중건하였다.


건축 구성
- 숭덕사(崇德祠)

강당과 구별이 없이 뒤쪽에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모두 널문으로 설치하였으며,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었으며, 사면 벽은 하얀 석회로 발랐다. 내부는 마루를 시공하였으며, 송량, 김충, 고인계, 김광두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내삼문(內三門)
묘정을 출입하는 문으로 강당뒤편 묘우를 둘러싼 담장의 남향에 일주문으로 지어졌다.

- 강 당(講堂)
잘 다듬어진 돌로 기단을 쌓고, 전면에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여 세웠다.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구운데 2칸은 마루를 시공하였으며, 전면에 사분합 들문을 달아 여름이면 문을 들어 올려 강당을 시원하게 활용할 수 있게 시설하였다. 양쪽은 온돌방이다. 온돌방 모두 뒷 벽에 수납공간인 벽장이 있다. 1931년 상주 관아에서 사용하던 건물의 부재를 구입하여 건립하였다.


현판
숭덕사(崇德祠)
묘우 정면 처마에 걸린 현판이다.
효곡강당(孝谷講堂)
건물 중앙 마루 오른쪽 처마에 걸린 강당의 당호이다. 송천호(宋天浩)가 쓴 해서체의 글씨이다.
효곡서원(孝谷書院)
효곡강당 현판의 왼쪽 처마에 걸린 서원의 원호이다.
효곡강당중건기(孝谷講堂重建記)
1931년 송주범(宋柱範)이 지은 강당을 중건할 때의 기문이다. 효곡서원의 설립 과정과 이건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강당 마루 안쪽 위에 판각되어 걸려 있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효곡서원의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말정일(末丁日)로 정해져 있다. 가을 향사는 치르지 않는다.

향사 홀기에 따르면, 향사 전날 유사는 서원 내외를 청소하며, 제기도 씻는다. 희생을 서원 문밖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복장을 갖추고 살펴본 후, 부엌에 가서 제기들이 정돈된 것을 확인하고 깨끗이 하는 것을 살펴보고는 각자 처소로 들어가 제향에 대한 연습을 한다.

유사는 묘우 중간에 삼헌관의 자리를 만든다. 북면하여 설치하며 서쪽을 상석으로 설치한다. 제생의 자리는 그 뒤에 차례로 설치한다. 헌관의 문밖자리는 동문 앞에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설치한다. 관세위를 동쪽 계단아래 동남쪽으로 설치하며, 행사 시작 전에 장찬자는 사당에 들어가 제수를 진설한다. 알자가 초헌관을 모시고 진설을 점검한다. 집례자가 차례대로 행사를 시작한다.

효곡서원의 배향 위치는 묘우 신문의 정면에서 바라보아 맨 왼쪽에 서대(西臺) 김충(金冲), 그 다음 오른쪽에 우곡(愚谷) 송량(宋亮),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 일묵재(一黙齋) 김광두(金光斗) 순으로 봉안되어 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김충(金沖)
1513(중종 8)~1572(선조 15). 본관은 상산이다. 자는 화길(和吉)이며, 호는 서대(西臺)이다. 1515년 별시문과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 형조좌랑, 감찰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61년 낙향하여 작은 초막을 짓고 서대라 이름하고 후진양성과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성품이 청렴하고 간소하며,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 있는 자들에게 이부하지 않는 지조로 유명했다. 저서로 《서대이문록(西臺異聞錄)》이 있다.
- 송량(宋亮)
1534(중종 29)∼1618(광해군 10).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자는 경명(景明)이며, 호는 우곡(愚谷)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당(璫)이며, 어머니는 재령강씨(載寧康氏)로 선무랑 완(琬)의 딸이다. 상주 소곡리(素谷里)에서 출생하였다.

성운(成運)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학행으로 정구(鄭逑)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566년(명종 21) 노기(盧麒), 정국성(鄭國成)과 함께 낙사계(洛社契)를 창설하여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조약을 만들어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 힘썼다.

1580년(선조 13) 류성룡(柳成龍)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강(鄕講)을 설치하고 그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였다.

1602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오현원(五賢院)을 창건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저서로 《우곡문집(愚谷文集)》 4권 2책이 있다.
- 고인계(高仁繼)
1564(명종 19)∼1647(인조 25).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자는 선승(善承)이며, 호는 월봉(月峯)이다. 아버지는 전력부위(展力副尉) 경운(慶雲)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큰아버지인 고성군수 흥운(興雲)에게 입양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피난 중에서도 입양모 박씨(朴氏)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 및 박사가 되었다.

이때 동인으로 북인에 가담하지 않아 연서찰방(延曙察訪)으로 좌천된 뒤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형조정랑, 충청도도사,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공조정랑,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었다. 저서로 《월봉집(月峯集)》이 있다.
- 김광두(金光斗)
1562(명종 17)∼1608(선조 41).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자는 여우(汝遇)이며, 호는 일묵재(一默齋)이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정경세(鄭經世), 이전(李㙉), 이준(李埈), 조정(趙靖) 등과 같이 함창(咸昌)의 황령사(黃嶺寺) 에서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청빈을 평생의 신조로 삼고, 이를 훈육하여 후손들은 청빈한 생활 속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여 당대에 이름난 문사가 많았다.

마을이야기

상주 > 남동권 > 공성면 용신리
- 고려 초에 공성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으며, 신라시대 때에는 사벌주의 4부곡의 하나인 대병부곡으로, 고려 현종 9년(1018년) 대병부곡의 예속이었던 평안, 평산과 같이 상주 7현이 되었다가 고종 33년(1896년) 공동, 공서면으로 개편하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시 공동, 공서면을 병합하여 공성면으로 하였다.
상주와 김천의 중간지로서 상주시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동으로는 신암산, 남으로는 백운산, 서쪽으로는 용문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친 가운데, 평지가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웅산에서 발원한 이수가 중심부를 흘러 병성천으로 들어간다.

산천이 수려하여 산을 옥산이라 하고 시내를 금계라 하며 경북선 철도와 국도 3호선이 시내 중앙을 관통하여 교통 또한 편리하다. 동쪽은 선산군 무을면과 접하며, 남쪽은 김천시 감문면과 어모면, 서쪽은 모동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북쪽은 외남면과 청리면에 인접되어 있다.

효곡서원이 있는 용신리는 용상리(龍上里)와 신서리(新書里)에서 “龍”자와 “新”자를 따서 용신(龍新)이라 한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용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이다.

구성하는 마을로는 용산골, 용산각, 삼거리, 절골 등이 있다. 용산(龍山)골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김씨가 피난 왔다가 정착하였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삼거리 마을은 용산각, 장동, 옥산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 절골은 효곡서원이 있는 동네이다. 동네 서쪽 산 정상 부분에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빈터만 있고 절은 없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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