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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안서원은 근래에 복원한 서원이다. 1600년 후반에 공성면 도곡리에 도안서당을 세웠다. 1783년(정조 7)에 김우태(金宇泰)가 죽고 난 후에 그가 살던 곳인 공성면 산현리로 옮기면서 묘호를 도안사로 승격하였다. 1870년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1999년 본손인 김규호의 노력으로 상주향교에서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당시의 전교인 정경진(鄭景鎭)을 위원장으로 하여, 도안서원을 청도김씨 세거지인 화동면 판곡리 원통산 아래로 장소를 정하여 복원하기로 결의하여 2000년에 복원한 서원이다. |
| 왼쪽에 묘우가 배치되고, 오른쪽에 강당이 있는 좌묘우학의 구조이다. 강당과 묘우사이에 담장이 설치되어 있어, 강당에서 묘우를 가려면 반드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
| -모현사(慕賢祠) 강당 왼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내부는 마루를 시공하였으며, 전면의 퇴칸은 시멘트로 되어있다. 문은 평범한 빗살무늬 분합문이다. 내부에 김우태, 김시태 두 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계명문(啓明門) 묘정을 출입하는 문으로 강당 왼쪽 묘우를 둘러싼 담장의 남향에 3칸 솟을대문으로 지어졌다. -예락당(禮樂堂) 서원의 강당 건물이다. 묘우 오른쪽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가운데 1 칸은 마루로 시공되었으며, 양쪽은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마루의 문은 사분합문으로 여름이면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 -서원중건비 강당의 왼편에 세워진 비석으로, 서원을 옮겨 중건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이다. 흰색 화강암 받침에 검은색 돌에 도안서원중건기를 새긴 것이다. |
| 모현사(慕賢祠) |
| 묘우 정면 처마에 걸린 현판이다. |
| 도안서원(道安書院) |
| 건물 중앙 마루 오른쪽 처마에 걸린 강당의 당호이다. |
내력과 기능
| 도안서원의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25일로 정해져 있다. 가을 향사는 치르지 않는다. 향사 홀기에 따르면, 향사 전날 유사는 서원 내외를 청소하며, 제기도 씻는다. 희생이 서원 문밖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복장을 갖추고 살펴본 후, 각자 처소로 들어가 제향에 대한 연습을 한다. 유사는 헌관의 자리를 묘우 중간에 설치하며 북향하여 서쪽을 상석으로 설치한다. 제생의 자리는 그 뒤에 차례로 설치한다. 내삼문 동편 문앞에 헌관의 자리를 마련하여 남으로 줄을 서며 북향하여 서쪽이 상석이다. 관세위를 동쪽 계단아래 설치하며, 행사 시작 오각 전에 장찬자는 사당에 들어가 제수를 진설한다. 알자가 초헌관을 모시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진설을 점검한다. 집례자가 차례대로 행사를 시작한다 |
관련인물
| - 김우태(金宇泰) | |
| 1647(인조 25)~1708(숙종 34). 본관은 청도이다. 자는 정수(定叟)이며, 호는 도촌(道村)이다. 처음 호를 짓지 않아 호가 없었으나, 후일 사람들이 선생이 거처하던 지명을 따라 도촌선생이라 하여 호가 되었다. 어머니가 부림홍씨 문광공(文匡公) 귀달(貴達)의 4세손이다. 그 인연으로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생원이 되고,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추천으로 광릉 참봉을 지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묘지명을 짓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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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시태(金時泰) | |
| 1647(인조 25)∼1729(영조 5). 본관은 청도이다. 자는 대형(大亨)이며, 호는 사물재(四勿齋)이다. 아버지는 상전(尙銓)이며, 생부는 상택(尙澤)이다. 종형인 우태와 함께 홍여하에게 배웠다. 성균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 부호군에 이르렀고, 저서로 《예설류집(禮設類輯)》5권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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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여하(洪汝河) | |
|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호(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
마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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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동면은 서남경계에 팔음산(762m)이 솟아 있으며, 대체로 300~50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동북부 산지에서 석천이 발원하여 면 중앙부를 지나 남쪽으로 흐른다. 경지는 이들 소하천 연안을 따라 분포한다. | |
| 주요 농산물은 쌀, 감등이며, 반곡리, 판곡리 일대에서는 흑연이 생산된다. 이소(以所), 선교(仙橋), 판곡(板谷), 어산(於山), 신촌(新村), 반곡(盤谷), 보미(甫尾), 양지(陽地), 평산(平山) 등 9개 동리가 있다. 백두대간의 남한구간 중심지로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며 중화지구의 중심지로서 산과 물 자연자원이 풍부하여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판곡리입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공원 안에는 청도김씨세거지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 곳 청도김씨는 고려 말 황간현감이던 김구정(金九鼎)이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조용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곳이다. 판곡리를 구성하는 마을로는 절곡(절골,너러실,판곡) 판자목이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적덕 선행과 활인으로 덕을 많이 쌓아 부자가 많이 났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신평 절골 마을 서편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여 거주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전대 산촌에 개척한 밭이 많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마을위치가 돈자루와 같아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말구리 관청에 말을 사육하는 곳으로 이 말을 사육, 관리하는 사람들이 입주한 것이 이 마을의 시초이다. |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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