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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강서당 이야기

장안봉(微山) 2013. 2. 5. 16:47

 

 

명 칭 :  봉강서당(鳳崗書堂)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 2동 줄포
건 축 주 :  나주정씨 줄포문중
건축시기 :  1856년(철종 7)
소 유 자 :  나주정씨 줄포문중(관리자 : 나주정씨 줄포문중)

건축 이야기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안정평야 앞에 나주정씨의 집성촌인 줄포(茁浦)가 자리 잡고 있다. 지대가 낮고 늪이 맑아 줄풀이 무성하다고 하여 줄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입향조는 검암공 정언숙인데 안동 판관으로 있다가 고향 원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 줄포의 아름다운 경관에 도취했다고 한다. 1635년(인조 13)의 일이다.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마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건축 배경
봉강서당은 1856년(철종 7) 나주정씨 줄포문중에서 후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웠다.

건축 구성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이다.

 

 

 

 

 

 

 

 

관련인물
- 줄포에 터를 닦은 정언숙

봉강서당은 줄포에 사는 나주정씨 문중에서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것이다. 줄포에 처음 자리를 잡은 나주정씨 입향조는 검암(儉巖) 정언숙(丁彦王+肅)이다. 정언숙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올라 호조 정랑을 거쳐 영월·홍천·배천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80세가 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정언숙은 1635년 안동 판관으로 재임 시 이곳 산천의 수려함에 끌려 줄포에 자리를 잡았다. 줄포는 소백산 아래 안정평야를 깔고 앉은 길지(吉地)로 풍광이 아름답고 들녘의 바람이 시원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언숙은 이 고장의 선비 학사 김응조·매음 나이준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며 유유자적했다. 시에 뛰어나 명작을 많이 썼고, 『검암시집(儉巖詩集)』을 남겼다.
영주 > 시내권 > 가흥동
-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져진 가흥동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은 동쪽으로 상망·영주·휴천동을 경계로 하고 있고, 서북부로는 안정면과 봉현면, 서남부는 장수면과 문수면을 접하고 있다.
가흥동은 조선시대 영천군 가흥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줄동·대사동을 병합하였고, 가흥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가흥리라 하고 영주군 영주읍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80년 영주시 승격에 따라 일부지역을 편입시켜 가흥 1·2동으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흥동은 동으로 낙동강 지류인 서천이 흐르고, 북은 서천 지류인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서남쪽은 구릉형 산지로 서천연안에 경지와 가옥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대사동(한절마, 한저)은 7세기경 김억산이라는 부자가 자식을 두지 못해 그 소원을 이루려고 삼존불상을 건립하고 큰 절을 지어 한절마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삼존불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옛날 마애 삼존불상 남쪽에는 덕산 숲이 있었는데, 조선 초 영천군수 하륜이 이곳에 수재가 심한 것을 보고 둑을 쌓고 나무를 심어 그 피해를 막게 했다.
또한 배고개는 조선 중종 때 구암 황효공이 서울 배고개에서 살다가 이곳에 이주하면서 전에 살던 서울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대로 배고개라 불렀다 한다.
또한 대부촌은 한절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광복 후에 집단촌으로 개척된 마을로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부촌이라 했다 한다.
나무고개 밑 도화동은 광복 후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안에 복숭아나무가 많다 하여 도화동이라 불렸다. 지난날 가흥동에는 이조판서 백암 김륵의 구학정이 있었다.
현재 가흥동에는 가흥리 암각화, 매양정, 제민루, 가흥동 5층석탑, 괴정, 소고 박승임 사당, 육우당, 산천서원, 한정의 삼락당, 성잠의 심원정, 서릿골의 인동장씨 재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가흥동은 영주시의 서쪽 관문으로, 중앙고속도로와 강변로가 뚫린 교통의 요지이다. 시민운동장, 영주직업전문학교, 가흥농공단지, 영주시의 식수인 상수도 수원지, 초중고 3개 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

출처 : 수산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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