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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희(黃喜) 그리고 청백리

장안봉(微山) 2013. 2. 2. 06:51

 

                                             황희               黃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文臣)이자 재상(宰相)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일반적으로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록(實錄)에는 뇌물(賂物) 수수, 매관매직, 간통(姦通) 등의 비리(非理)사건이 자주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시절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내며 치적과 많은 일화를 남겼다.

                                             

 

황희는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시절인 1363년 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14세 되던 1376년 음직(陰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으로 복안궁(福安宮) 녹사(錄事)가 되었고, 21살에 과거(科擧)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사양하다가 28살에 성균관 학관(學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황희(黃喜)가 30살이 되던 해에 고려(高麗)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로운 왕조의 건국(建國)에 부정적인 다른 70여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개성 인근의 두문동(杜門洞 )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에(高麗) 대한 지조(志操)를 지키려 하였다. 이 일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결국 이성계(李成桂)는 두문동(杜門洞)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일행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황희)만 나와서 조선(朝鮮)의 관직에 오르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죽었다. 이들을 ' 두문72현 (杜門72賢) '이라고 부른다.  조선에 들어와 '황희'는 세자 우정자(世子 右正字) 등의 벼슬을 거치게 되었으나, 그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게 된 것은 47세에 지신사(知申事 .. 왕명의 출납을 담당)가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육조판서(六曺判書)와 대사헌(大司憲)등을 역임하는데, 중추원을 없애고 병제(兵制)를 일원화(一元化)하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하면서 태종(太宗)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게 되고, 태종(太宗)은 모든 정사(政事)를 황희와 깊이 논의하였다.

 

 

 

                                                   황희의 유배생활

 

 

 

 

'황희'가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재직하던 1413년,  태종(太宗)이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廢)하려 하자 황희는 이에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었다가,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 ..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反對)하다가 결국 폐서인(廢庶人)되어 교하(郊河..파주)로 유배된다. 물론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으나, 후술하듯이 이때 만약 황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세종(世宗)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종(世宗)은 즉위 후 황희를 불러들였으니 이 순간 인재(人材)를 알아보는 세종의 뛰어난 혜안을 느끼게 한다.

 

 

1418년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새 왕조 조선(朝鮮)에 정치적 파란이 일어났다. 바로 당시까지 세자(世子)이었던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사건이었다. 세자의 교체(交替)는 자칫 엄청난 살륙(殺戮)을 불러올 정도로 정치적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양녕대군을 폐위시킨 것은 계속되는 세자의 잘못된 행동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폐위시킨 태종도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어렵게 세운 새 왕조의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이기에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黃喜)가 세자의 폐위(廢位)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재직하던 황희는 대부분의 신료(臣僚)가 세자 폐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 폐장입유(廢長立遊 ...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는 재앙을 부르게 되는 근본이옵고, 또 세자가 비록 미쳤다고 하오나, 그 성품은 가히 성군이 될 것이오니, 치유에 주력하시기 바라옵니다 . 라며 국왕의 판단에 재고(再考)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종(太宗)과 대부분의 신료(臣僚)는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희를 지탄하였다. 황희는 끝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다가 마침내 강등(降等)되어 귀양을 갖고, 태종은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이 해에 태종(太宗)은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물러 나는데, 이때 교하(郊河 .. 지금의 파주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 남원(南原)으로 옮겨서 5년을 더 머물러야 했다. 황희는 남원에서 도교(道敎)의 이치에 따라 " 춘향전 "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廣寒樓)를 지었다.

 

 

 

 

 

 

 

  

 

 

 

                                           복직 ..그리고 영의정 18년

 

 

 

 

1422년(세종 4), 상왕(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太宗)은 남원에 유배되어 있던 황희를 소환하여 직첩(職牒)을 주고 세종(世宗)에게 부탁하여 등용토록 하였다. 이에 비로소 황희는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었는데, 이 때 황희(黃喜)의 나이 60세이었다.

 

 

세종(世宗)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反對)하였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판단하에 과감하게 유배를 풀고 등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9세 되던 143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후 18년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끌다가 1449년 87세에 은퇴하였다.

 

 

1452년 그가 사망한 직후에 작성된 실록(實錄)의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고 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여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후덕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않으며, 일을 의논할 적에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재상(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황희 묘역                    黃喜 墓域

 

 

 

 

 

 

 

 

 

 

 

 

 

 

 

 

 

 

 

 

                                                                 신도비                      神道碑

 

 

 

 

 

 

 

 

 

 

 

묘역 옆에는 부조묘(不凋廟), 묘역 아래에는 재실(齎室)인 원모재(遠慕齋)) 앞에 황희의 신도비가 있다. 그리고 신도비 앞에는 영정각(影幀閣)이 위치해 있다. 신도비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워졌으며,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 옛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여 1945년 다시 세운 비와 나란히 서있다.  

 

 

 

 

                                                                    부조묘               不眺墓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位牌)는 영구(永久)히 사당(祠堂)에 봉안하여 모시도록 국가가 허락한 신위(神位)를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불천위(不遷位)라고 하는데, 그 불천지위를 모신 사당을 부조묘(不眺墓)라고 한다.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 얼마나 좋은 명당(名堂) 자리이기에 이 묘(墓)를 쓰고 황희(黃喜) 같은 명재상을 배출하였을까. 또 당시  풍수(風水)의 말이얼마나 소중했기에 황희정승의 아버지 '황군서(黃君瑞)'는 살던 땅 남원(南原)을 머리고 개성(開城)으로 이사까지 하였을까 ? 

 

 

 

 

                                      출아향지지                     出亞鄕之地

 

 

 

 

묘(墓)를 쓴 후 반드시 고향을 떠나 객지(客地)에 나가 살아야 출세한다는 ' 출아향지지(出亞鄕之地) '는 과연 믿어야 하는 건지... '장수(長水) 황씨'문중에서는 시조 2세인 '황균비'의 묘와 고려 말 고승이었던 나옹선사(懶翁禪師) 간에 얽힌 비화를 굳게 믿고 있다. 나옹(懶翁)은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스승으로 땅 속 정기(精氣)까지 꿰뚫어 보았다는 당대 신풍(神風)이었다. 

 

 

나옹(懶翁)은 명당 길지(吉地)가 많은 남원(南原), 순창(淳昌) 지역을 즐겨 찾았는데, 돈 많은 남원의 '윤진사(尹進士)'가 좋은 자리 잡아 달라며 300냥을 선폐백으로 건네주었다. 벼르던 중창불사(重創佛事)를 일으킨 후 혈(穴)을 찾아 빚을 갚으려고 '풍산리'에 들어갔으나, 밖에서는 보이던 용맥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 챈 '윤 진사'가 채근하며 망신까지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희의 아버지 '황군서'가 선뜻 300냥을 풀어 묵은 빚을 대신갚아 주고 후한 대접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동안 가려졌던 자리가 훤희 보이는 것이었다. 나옹(懶翁)은 자리를 점지해 주며 ' 일국의 명재상이 나올 자리이기는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혈처(穴處) '라고 귀뜸하며 ' 반드시 타향으로 나가야 발복(發福)받는 자리임을 명심하라 '고 당부하였다. 

 

 

 

 

 

 

 

 

위 사진은 전북 남원에 있는 '황희정승'의 조부묘이다. 나옹(懶翁)의 말을 들은 '황군서'는 곧바로 아버지 '황균비'의 묘를 이자리로 이장(移葬)했고, 얼마 안 있어 부인한테 태기(胎氣)가 있자 개성(開城)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훌륭한 재상이면 그만이지 재산이 무슨 상관 있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래서 황희의 출생지는 남원(南原)이 아니라 개성(開城)이다.       

 

 

  

 

 

 

 

 

 

 

 

 

 

 

 

 

 

 

황희의 묘(墓)는 특이한 구조로 조영되어 있다. 3단(段)으로 넓게 조성된 묘역에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파서 봉분(封墳)과 연결시킨 구조이다. 조선 초기 왕실 대군(大君) 묘역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묘제로 봉분의 규모도 왕릉에 버금가면 후룡맥과 연결되는 후미(後尾)가 매우 예리하다.

 

 

 

 

 

 

                                                황희의 다양한 얼굴

 

 

 

 

 

 

 

 

 

 

 황희정승 하면 우리는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야사(野史) 수준에서 알려진 것에 불과하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史料)를 보면 그는 세종(世宗)의 총애 아래, 오래도록 관직생활을 유지하였을 따름이지, 실제로는 부정부패(不正腐敗)를 꽤나 많이 저지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殺人) 사건을 맹사성(孟思誠) 등 모든 고위 관리들을 동원하여 무마한 일, 뇌물(賂物)로 토지를 받고 벼슬을 준 일, 부녀자 간통(姦通), 매관매직(賣官買職), 부정축재 등등 그가 연루된 비리(非理)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저 일처리에 유능하였던 관리라고 평한다면 모를까? 청렴,강직하다고 우러러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링컨, 슈바이쳐도 역사상의 위인이라고 평가되지만, 그들이 실제로는 흑인(黑人)과 노예(奴隸) 등을 비인간적(非人間的)으로 대하였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역사를 대할 때, 늘 이를 조심할 일이다.

 

  

당대사(當代史)도 버젓히 왜곡(歪曲)하는 마당인데, 수백년 전 얘기를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현대는 조금 나을지 몰라도 절대권력(絶對權力)이 말을 하는 왕조(王朝)시대의 역사기록물이란 적지 않게 분식(粉飾), 왜곡(歪曲)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다 아는 황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황희 집의 어린 종(從)들이 다투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가 그들을 보게 되었다. 어색해진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하여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하고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다른 어린 종이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 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하고 두 사람 모두를 이렇게 대하였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 그러자 황희는 " 맞소! 부인의 말도 참으로 옳소"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인도 그만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아주 진부한 애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교육자들이 이를 두고 똘레랑스(관용)의 전형이라고 극찬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황희의 덕(德)을 칭송하며 그를 명재상이라고 한껏 치켜 올린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과연 그렇게만 볼 것인가 ?

 

  

 

 

세상사 시비(是非)를 논하면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主觀)이 없기보다는  오히려 ' 역지사지 (易地思之) '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황희는 일인지일리(一人之一理)를 거푸 3번 긍정하였다. 황희는 세 사람 각자의 말이 일리있음을(三理) 긍정하였지만, 그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의 판단은 유보하여 두었다. 황희의 이러한 자세라면 삼리(三理)뿐만 아니라 , 백리(百理), 천리(千理)도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한편에 릴리(一理)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일비(一非) 또는 일과(一過)도 있을 터.... 황희가 좌의정, 영의정까지 지냈다면, 나라의 정사(政事)를 펴는 것인즉, 곧 시비(是非)를 가리고, 선악(善惡)을 분별(分別)하는 것이 그의 책무이었을 것인데, 그의 심리상태가 왜  이렇게 일인지일리(一人之一理)에 머무르고만 까닭은 무었일까? 

 

 

황희는 자신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죄를 무마하기 위하여 맹사성(孟思誠)까지 동원하여 사건을 덮어 버리듯, 종(종)들의 싸움도 그리 덮어 버리고 만 것은, 그가 덮음으로써 세상의 시비(是非)를, 선악(善惡)의 분별을 포기한 것에 다름아닐 것이라는 생각...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간단하다. 그에게는 덮어버리는 것이 더 남는 장사이었던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사위의 살인죄를 덮음으로서 덕(德)을 펴고자 함이 아니었듯이, 종들의 다툼을 덮음으로서 그가 덕을 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하므로써 득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종놈들의 시비(是非)를 그리 덮는 것이 얼핏 덕스럽게 보였다 한들, 사위놈 살인죄를 덮는 것조차 덕스러움의 발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황희는 까짓 종들의 다툼까지 시비를 가릴만큼 한가하지는 않았다. 

 

 

그저 넉살좋게 종놈들, 부인을 가지고 일시 희롱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종놈 중에 하나가 시비가 가려지지 않아 공연히 억울한 누명을 씌게 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황희야 후대까지 덕을 내리닫이로 훔쳐 받아 먹었다고 하지만, 구천에 든 그 때의 종 하나는 지금도 분해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의 분별(分別)이 덮어지는 순간, 그 그늘 밑에 억울한 일은 없을 수 있겠는가?

 

 

 

 

 

 

 

 

  

 

 

 

                                            황희의 각종 非理事件

 

 

 

 

 

 

지금까지 청백리 그리고 명재상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는 황희 ..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 그림자 또한 어둡고 짙은 법. 그는 누구보다 각종 비리사건으로 탄핵을 많이 받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흠결은 가문(家門)의 전통인냥 그 아들들에게 까지 이어진다.

 

 

 

 

                                                        매관매직

 

 

 

 

 

 

 

                                       사위의 살인범죄를 조작, 은폐하다

 

 

 

 

 

 

 

                                                         간통사건

 

 

 

 

 

 

 

                                                         뇌물수수

 

 

 

 

 

 

 

 

 

 

 

 

 

 

 

 

                                          世宗 같은 임금에, 黃喜 같은 정승

 

 

 

 

 

 

 

 

 

 

 

 

 

황희는 태종대(太宗代)에도 중용되었다. 황희가 이조판서로 있던 태종 18년(1418)에 태종은 장자(長子)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차자(次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을 제치고 삼남(三男)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세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황희는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지금의 파주인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 

 

 

이 해에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는데, 이 때 교하(郊下)가 서울에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 남원(南原)으로 이배(移配)되어 여기서 5년을 더 머룰렀다. 황희는 남원(南原)에서 도교(道敎)의 이치에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廣寒樓)를 만들었다. 

 

 

황희는 세종 4년(1422)에야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 의정부 참찬에 등용되는데, 이때 황희의 나이는 60세이었다. 세종은 황희가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였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 들였다.

 

 

그 후 황희는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다. 이 후 황희의 각종 비리로 탄핵, 파직 그리고 복직의 과정이 되풀이 되었으나, 세종은 황희에 대하여 끊임없는 신뢰를 보내고 드디어  69세 되던 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세종 31년(1449)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겼다.

 

 

 

 

 

 

 

 

 

 

                                       世宗 같은 임금, 黃喜 같은 정승

 

 

 

 

 

세종같은 성군(聖君)이 나기 위해서는 황희같은 명재상(名宰相)이 있어야 하고, 황희같은 명재상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세종(世宗) 같은 성군이 있어야 한다는.. 세종같은 임금, 황희같은 정승...이 말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과 황희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 최고의 조합 (最高의 組合))"이었다. 맹사성 같은 대단한 인물이 늙그막에도 좌의정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령(高齡)의 황희가 오랫동안 영의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재상(宰相)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淸白吏)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황희 (黃喜)'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른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落成式)을 하였다. 말이 낙성식(落成式)이지 크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될 무렵,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 선비가 비 새는 입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居處)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賂物)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하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 그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草家)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書冊)이 전부이었다고 하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청백리의 표상, 황희정승 ???

 

 

 

 

 

사실 황희는 청백리(淸白吏)가 아니었다. 황희는 24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모든 일을 관장했던 황희는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였고, 세종에게 충성을 다 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만들어 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황희는 그 누구보다도 각종 비리사건으로 탄핵(彈劾)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가 사간원과 사헌부의 단골 탄핵대상으로 보일 정도로 자주 황희의 비리사건(非理事件)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뇌물수수, 매관매직 그리고 섹스 스캔들 등이었다.

 

 

 

 

                                    황금 대사헌                     黃金 大司憲

 

 

 

 

  

 그러나 황희(黃喜)라고 어찌 재물(財物)을 싫어했겠는가 ? 그역시 한때는 ' 황금대사헌 (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년) 6월25일, 황희(黃喜)는 '박용(朴鏞)'의 아내로부터 뇌물(賂物)을 받은 일로 인해 사직(辭職)을 청(請)하였다. 당시 이 기사에 대하여 사관(史官)의 평가가 있어는데, 사관(史官)은 '박용'의 아내 일 말고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추가로 적고 있다.

 

 

 

김익정(金益精)과 함께 잇달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줄 다 중 설우(雪牛)의 금(金)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 황금대사헌 (黃金大司憲)'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亂臣)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姦通)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만에 시체(屍體)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檢眼)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한양에 들어와 황희(黃喜)의 집 마당 북쪽 토굴(土窟)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黃喜)가 이때 그 여자를 간통(姦通)하였으며, '박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밖에도 이 날의 기사(記事)에는 황희(黃喜)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奴碑)를 물려 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없다.   

 

 

 

 

                                    황희에서 보는 世宗의 인재활용, 위대함

 

 

 

 

 

 

 

 

 

 

 

황희의 수많은 비리(非理)사건에도 불구하고 '황희'에 대한 세종(世宗)의 총애는 그치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황희는 자신의 즉위(卽位)를 반대한 인물로, 아버지 태종(太宗)에 의하여 5년 이상의 유배생활을 겪은 정적(政敵)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 바로 '황희'의 유배를 풀고 중용(重用)한다. 그리고 갖은 비리에도 불구하고 계속 황희를 중용하며, 실질적으로 황희와의 공동정권(共同政權)이나 다름없이 조선을 통치하여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끌었고, 조선 500년의 기틀을 만들었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황희의 비리(非理)를 꿰뚤어 보고 있던 핵심인물이었다. 새종이 필요하였던 것은 황희의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의 정치력을 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황희만큼 세종(世宗)의 안목과 비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위아래를 아우르며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종에게 있어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의 조합(組合)이야말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결론적으로 황희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24년 동안 재상의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부도덕성(不道德性)마저 가릴만큼의 뛰어난 재능과 정치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였던 세종의 리더쉽과 합리적인 안목 그리고 일신의 편안함과 이해관계가  아닌 나라의 발전을 우선 생각하는 지도자의 면모는 더욱 위대한 것이다.

 

 

 

 

 

 

  

 

 

 

 

황희정승은 오늘날에도 청백리(淸白吏)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미복(微服)차림으로 '황희'의 집을 방문한 세종(世宗)이 그이 청빈(淸貧)한 삶에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한 나라의 정승이 집안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던 밥상에도 누런 보리밥과 된장, 고추장 밖에 없어서 임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황희(黃喜) ! 그는 정말 가난하였나 ?  이 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없을 수 없다. 50년 넘게 관직생활을 하고, 영의정만 18년을 넘게 지낸 인물이 그처럼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또 후세의 양반 지식인들이 그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임금이 황희정승의 청빈한 삶에 감탄사를 터뜨렸다는 것은 적어도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라에서는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科田)을 지급하였다. 더군다나 과전(科田)을 빼앗긴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준 사람이 바로 세종이다.  

 

 

 

 

                                          청백리 신화는 어떻게 탄생하였나 ?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4년 3월 18일에 세종(世宗)은 유배에서 복직된 황희에게 과전(科田)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세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황희'는 충녕대군(忠寧大君) 대신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지지하다가 교하(交河)와 남원(南原)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자신을 반대한 황희를 복권시키면서 그에게 과전(科田)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관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세종 자신이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는데, 막상 황희가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는모습을 보았다면, 그를 칭송하기 보다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어딘가 통념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황희정승이 실제로 가난했는가 하는 문제와 그가 초라하게 살았다는 문제는 분며 볅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방문하였을 때 황희가 초라하게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에 그는 나라로부터 과전(科田)을 지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난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청렴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왜 대외적으로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과 명(明)나라의 정치상황이 상호 유동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정치, 경제상황이 상호 긴밀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4,5세기의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도 그러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역대 한중관계 중에서 가장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가장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의 정치상황이 명나라의 정치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시기이었다.

 

 

그러면 당시 명나라의 정치상황 중에서 조서에영향을 미칠만한 특기할 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명나라에서 재상직(宰相職)을 페지하고, 1382년에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설치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대학사(대학사)는 황제의 자문(諮問)기관에 그치는 자리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재상 호유용(胡惟踊)의 반란을 명분으로 재상직 폐지라는 혁신적인 결단을 내렸다. 주원장(朱元璋)이 재상(宰相)을 폐지하고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은 관료 집단에 대한 견제(견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조선에게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다른 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대립, 갈등을 보였다. 여기서 신권(臣權) 즉 기득권 양반관료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리가 바로 '재사익'이었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조선에서 재상직이 페지되면, 이는 양반 관료집단의 이익애 대한 침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신권(臣權)이 강화된 시기에는 기득권 집단의 이익이 강화되는 동시에 민중의 삶이 어려워 졌고, 반대로 왕권(王權)이 강화된 시기에는 기득권 집단이 반발하면서 민중의 삶이 상대적으로 나아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명나라에서 '재상직'이 폐지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의 정치구도에 영향을 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고자 하는 군주(君主)에게는 희소식이요, 왕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관료집단에게는 그 반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명나라의 정치상황이 상호 연동되던 당시의 환경에서 명나라의 재상제 폐지는 조선의 재상제 폐지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황희'라는 인물을 내세우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재상직을 지켜낼 수 있었다. 관료집단은 황희정승의 '신화(神話)'를 계속 재창조함으로써 왕권(王權)을 견제하고 신권(臣權)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 상황 이외에도 황희 스스로가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는 객관적인 조건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는 불리(不利)한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32년에 고려(高麗)가 멸망하자 조선의 건국(建國)을 반대하면서 한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던 사람이다. 또 1416년에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지지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 후일의 세종)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는 번번이 '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또 그런 뒤에는 매번 지조를 꺾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희'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였고, 그러한 약점(弱點)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흠 잡힐 만한 행동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거이었다.        

 

  

 

 

 

 

 

 

 

 

 

                                             청백리                    靑白吏 

 

 

 

 

 청백리(淸白吏)란? 조선시대에 선정(善政)을 위하여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관리에 대한 표창제도이며, 염근리(廉勤吏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라고도 하였다.

 

 

 

 

                                                      청백리의 기원

 

 

 

 

청백리제도가 제도화된 것은 조선시대이었다. 그러나 역대 중국이나 신라시대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염리(廉吏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여 재물이나 관직을 주었다. 후손들에게 (淸白 ..청렴하고 결백함)의 관리가 될것을 권장한다던가, 세인들이 청백한 관리를 칭송하였던 사실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중국의 경우 168년 (漢武帝 12)에 "  염리(廉吏)는 백성들의 표상이다 "라고 하면서 200석의 녹(祿)을 받는 염리(廉吏)에게 비단 3필을, 200석 이상의 녹을 받는 염리에게는 비단 3필/100석을 각각 수여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분명치는 않으나 1136년(고려 인종)에 ' 청백수절자(淸白守節者)를 서용(舒用)하였다.. 라는 기록과 고려의 문신 최석(崔奭)이 지방관리로 부임하는 아들에게 훈계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 청백의 표현이 있어, 그 개념과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家傳淸白無餘物     청백 외에 다른 재물은 가문의 전하는 바가 아니다

                只有經書萬卷存     경서 만권이 가보로 전하노니

                恣汝分將勤讀閱     이를 나누어 부지런히 읽기를 바라노라

                立身行道使君尊     세상에 이름을 빛내고 道를 행하여 人君을 높게 하노라

 

 

 

 

                                                      제도의 정착

 

 

 

 

청백리 제도가 언제 제도화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명백하게 시행된 시기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기록이 남아 있다. 태조 이성계가 안성(安省) 등 5인을 청백리로 녹선한 이래, 청백리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 경종,정조,순조시대가 제외된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약200명 내외가 선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발 기준 및 절차

 

 

  

 

선발 절차는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 이조(吏曺)..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 이조(吏曺)가 각각 왕명에 따라 경외 2품 이상의 관인(관인)에게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2인씩을 추천하게 하고, 그 추천자들을 육조(六曺)의 판서(判書)가 심사한 뒤, 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하였다.

 

 

청백리의 자격기준은 법전에 명문화(명문화)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통일된 기준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유교적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청백, 근검, 경효(敬孝), 후덕(厚德), 인의(仁義) 청백탁이(淸白卓異 ..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남)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선발 인원에 대하여는 역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다만 " 많이 선발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고, 적게 선발하면 응당 선발되어야 하는 인물이 누락된다 "라는 기준 아래 최소한의 인원이 선발된 것으로 보인다. 임금별로 선발된 인원을 보면, 태조(5명), 태종(8명), 세종(15명), 세조(7명), 성종(20명), 중종(35명), 명종(45명), 선조(27명), 인조(13명), 숙종(22명), 경종(6명), 영조(9명), 정조(2명) 등 모두 218명이 청백리로 녹선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청백리가 거의 없는데, 이는 노론의 일당독재, 세도정치 그리고 탐관오리의 발호 등 전반적인 기강(기강)의 문란(紊亂)으로 선발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백리의 혜택 

 

 

 

 

생존시 염근리(廉勤吏)에 선발된 인물에게는 본인에게 재물을 내리거나 관계(官階)와 관직을 올려주고, 적장자(嫡長子)나 적손(嫡孫)에게 재물을 주거나 관직에 등용토록 하였다. 특히 숙종(肅宗) 대(1675~1720)와 1746년(영조22)의 "속대전" 편찬까지는 2품관 이상의 천거로 특채하거나 적손(嫡孫)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처음으로 주는 관직의 의망(擬望 ..관리 선발시 3명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혜택을 확대할 것을 천명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규정이 명문화되지 않았고, 인사 적체가 심했던 실태와 관련하여 문제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영조시절, 이익(李瀷)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 " 조정에서 매번 그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령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면 벼슬을 구하는 자가 간혹 벼슬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모두 초야에 굶주려 죽고 말았다 "고 하였듯이 관직에의 등용은 물론 경제적인 대우도 제공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청백리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녹선자가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관리들에게 염(廉)과 치(恥)를 일깨우고 탐관오리에게는 자극을 주는 정화기능(淨化機能)을 어느 정도 발휘하였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그 선발이 부실하였고, 혜택도 유명무실하여, 이익(李瀷)의 지적처럼 후손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광한루                     廣寒樓

 

 

 

 

 

태종 시절..  태종이 세자이었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廢)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하자, 황희는 이에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으로 경기도 파주로 유배되었다. 그 후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줄 때, 파주는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 남원(南原)으로의 이배(移配)를 명하였다. 황희는 남원에서 5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태종이 세종에게 부탁하여, 세종의 명으로 유배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황희는 이 곳에서 광한루를 세웠다.

 

 

 

 

 

 

  

 

 

1418년, '황희'가 세울 때에는 지금의 그것보다 규모가 작은 누(樓)를 지어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하였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하였고, 1444년(세종 26)에 전라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한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한루(廣寒樓)는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月宮)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하여 수리될 때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月宮)과 같은 선경(仙景)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황희의 네 아들

 

 

 

 

 

아버지 황희정승의 뇌물 수수, 매관매직에 한 술 더 하여, 그의 네 아들들은 궁궐내 재물을 빼돌리는 도둑질을 하다가 의금부에 적발되어 파직되었다. 황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적자(嫡子)로는 황치신(黃治身),  황수신(黃守身), 황보신(黃保身)의 세명과 서자(庶子)로 황중생(黃仲生)이 있었다.

 

 

이 중 황수신(黃守身)은 후일 영의정까지 지내어 부자(父子) 2대 영의정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 역시 각종 뇌물수수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었으며 나머지 형제들 모두 아버지 황희 못지 않게 부패와 비리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 황희의 후광으로 음서(陰敍 ..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고 공신 또는 고위직 자식을 등용하는 제도)를 통하여 벼슬에 오른다.

 

 

 

 

 

 

 

 

 

 

 

병진년에 내탕(內帑)의 금잔(金盞)과 광평대군의 금대(金帶  .. 금띠)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동궁(동궁)이 쓰던 이엄(耳掩)을 잃어벼렸다. 중생(仲生)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耳掩)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애 내려 추국하였더니,그 전에 잃어버렸던 금잔(金盞)과 금대(金帶)도 모두 중생(仲生)이 훔친 것으로 다 자복(自服)하였다.  세종실록 22년(1440) 10월 12일 

 

 

 

 

 

 

                                                                       非理로 얼룩진 세 아들 

 

 

 

 

 

처음에 영의정 황희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碑)을 첩(妾)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황중생(黃仲生)이라 하였다. 중생이 동궁(東宮)의 소친시(小親侍)가 되어 궁중에서 급사(給事)하였는데, 병진년에 내탕(內帑)의 금잔(金爵)과 광평대군의 금띠(金帶)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동궁이 쓰던 이엄(耳掩)을 잃어 버렸다.

 

 

중생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三軍鎭撫)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耳掩)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에 내려 추국(推鞫)하였더니, 그 전에 잃어 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모두 훔친 것으로 자복(自服 ..자수)하였다.

 

 

 금잔의 무게는 20냥(兩)이었는데, 중생의 집에서 나온 것은 11냥이었으니 나타나지 않은 것이 9냥이었다. 의금부에서 다시 그를 추국하니, 중생이 말하기를 ..  " 제가 그 전에 적형(嫡兄) 황보신에게 주었습니다 "고 말하기에, 황보신에게 물으니 보신(保身)이 말하기를 " 나는 실제로 받은 바가 없습니다 "하므로, 중생에게 고문하기를 두세번이나 하였으나 중생은 처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중생으로 하여금 보신과 대질하게 하니, 보신이 또한 " 그런 일이 없다 "고 하니, 중생이 말하기를 " 너와 첩 윤이(閏伊)가 같이 앉아 있을때에 내가 바로 쥐어주었는데, 네가 윤이에게 묻기를 ' 네가 물리를 아는 체하였는데, 이것이 진짜 황금인가 ' 하니 윤이(閏伊)가 대답하기를 '진짜 황금이어요' 하니 네가 그제서야 가죽주머니 가운데 간직하였는데 어찌 숨기는가 ? " 하니

 

 

보신과 윤이가 말하기를 " 거짓을 꾸미는 것이지 실지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중생이 말하기를 

" 네가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을 때에 본부(本府)의 말 한마리와 필단(匹段) 2필을 훔치어 윤이에게 주더니, 이제까지 조사하여 꼬집어 내지 아니한 까닭으로 이것까지도 숨기고 있지 않은가. 너는 실제로 내가 준 금을 받았다 " 하였다. 

 

 

 

 

                                                                    父  傳  子  傳

 

 

 

 

본부에서 또 일찍이 금동곳을 몰입(沒入)한 적이 있었는데 , 보신(保身)이 또한 사사로이 훔쳐다가 몰래 사용하다가 금동곳 주인이 때를 타서 고소하자, 그 용처(用處)를 국문(鞫問)하니, 바로 윤이(閏伊)의 수식(首飾)이 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 장물(臟物)도 매우 많았다. 황희는 중생이 자기의 소생이 아니라 하여 아들로 삼지 아니하니, 중생이 드디어 성(姓)을 조(趙)라 불렀다.

 

 

 

사건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듯하였는데, 이버지는 첫째 아들 황치신(黃治身)이 치사한 사고를 친다. 황보신이 위의 죄를 짓고 파직됨과 동시에 그가 연봉으로 받았던 과전을 반납하게 되었는데, 동생 황보신이 나라에 반납해야 할 땅이 자기의 땅보다 좋을 것을 알게되자, 동생의 땅 대신 자기의 땅을 나라에 반납해 버린다. 결국 살인사건 은폐 및 조작 그리고 각종 뇌물사건과 간통까지 막아주었던 세종(세종)조차 포기하고 '황희'의 세 아들 모두를 파직(파직)시키고 만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의 규모가 매우 크다. 봉분 앞부분의 구조가 다른 묘와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화강암 장대석(長大石)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護石)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묘갈, 무인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출처 : 김규봉 ... 사는 이야기
글쓴이 : 非山非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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