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불교)

[스크랩] 신행생활 - 보리심

장안봉(微山) 2013. 1. 30. 22:45

신행생활 (1) _ 수행의 바탕

수행의 바탕

수행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아 가는 것을 말한다. 닦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 마음 속의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나에게 아무런 번뇌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세상이 지극히 안락하여 아무런 모순도 갈등도 없이 모두가 행복하다면 수행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현실은 수많은 번뇌와 갈등으로 혼탁하기 때문에 누구나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수행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기억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불교에 귀의한 뒤에도 그 전의 삶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신심있는 불자라 하기 어렵다. 변화는 직접 실천할 때만 경험할 수 있다. 불교 교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의심이 많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수행이라하면 스님들만의 일이고 재가자는 복을 쌓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불교가 종교인 이유는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힘을 주고 실천의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苦)'로부터 해탈하고자 하며, 상구보리하화중생하는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데 출가와 재가가 다를 수 없다. 따라서 수행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할 불자의 본분인 것이다.

진리란 부처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것으로 다만 그것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니, 누구나 진리를 깨달으면 부처다. 따라서 수행이란 불법승 삼보를 믿고 나도 그와 같이 부처가 되겠다고 원을 세워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같은 지극히 편안하고 안락하며 자유로운 해탈.열반에 도달하고자 한다. 또한 자비와 지혜를 갖추어 인천의 스승이 되고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배고픔을 채울 수 없고, 먹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맛은 전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실천하여 스스로 체득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그 경지는 다른 사람에게 말로 전할 수 없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직접 체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불자들이 수행에 관심을 갖고 수행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낸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재가불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을 위한 여러 가지 필수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이 바르게 되고 나아가서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수행을 왜 하려고 하는지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크고 바른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결코 성불이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 둘째, 수행의 길은 반드시 자타가 함께 안락하며 무량한 공덕이 있음을 깊게 믿어야 한다. 셋째, 자기의 근기에 맞게 적절한 수행방법을 제시하며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점검해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선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와같은 조건들 중에서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없는 진리는 얻기 힘들다. 이제 이러한 조건들을 어떻게 갖추어 갈 것인지 알아보자.

신행생활 (2) _ 보리심 _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보리심이란 한마디로 부처님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무상정등정각이란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한역어로, 위없는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말로 부처님의 지혜를 일컫는다. 즉,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에 의해 수행이 시작되므로 보리심을 부처의 어머니라고 한다. 따라서 불자된 자는 마땅히 세속적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지 말고 불법승 삼보를 진리로 확신하고 거기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중생에서 부처로,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꾸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발보리심이다. 보리심이란 수행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결정되는 근거이며, 증득할 수 있는 경지가 미리 정해지는 중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산에 오를 때 정상까지 가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만일 그런 목적의식이 없다면 중턱이나 얕은 봉오리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그 경취에 반해서 그만 거기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신통을 얻기 위해, 병을 낳기 위해, 편안함을 얻기 위해 등의 목적을 가지고 수행하면 나름대로의 목적은 성취할 수 있어도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신 부처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불자들은 수행의 첫 관문에서부터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무엇이 바른 원(願)인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이것은 모든 수행자가 서원하여 부처를 이루는 본원인 사홍서원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 사홍서원에 있다. 즉 보리심은 자신만을 위한 깨달음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함께 성불케 하고 함께 안락케 하는 마음이다. 나아가 원효스님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직심, 신심, 대비심의 세가지 마음을 갖춘 발심을 무상보리심이라고 하였다.

직심이라고 한 것은 굽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진여를 생각하면 곧 마음이 평등하게 되어 다시 다른 갈래가 없을 것이니 무슨 이그러지고 굽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여법을 생각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니, 이는 곧 자리와 이타의 근본인 것이다. 심심이라고 한 것은 근원을 궁구한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의 선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근원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니, 근원에 돌아가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만행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 이루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며, 이는 곧 자리행의 근본이다. 대비심이란 널리 제도한다는 뜻이니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라 말하였으며, 이는 곧 이타행의 근본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내면 어떤 악이든 여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선이든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를 無上菩提心이라고 한다.

곧은 마음이란 진여를 생각하는 것이니 왜 진여를 생각하면 마음이 평등해질까? 진여란 만물의 참모습으로 그 모습에는 나와 네가 없고, 못났다거나 잘났다거나,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거나, 추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다. 따라서 사물이 현상적으로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래는 모두 진여의 법성 그 자체임을 생각하면 차별심이 없어지고 따라서 분별과 대립이 사라지며 자리와 이타가 하나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사소한 선행이라도 즐겨 닦고자 하며,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자리 이타의 행이 저절로 나온다. 이러한 서원이라야 모든 중생을 다 건질 수 있는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으므로 무상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처음 발심할 때 이러한 마음을 뚜렷하게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면 이것이 바로 원력에 의지한 삶이다. 세속의 사람들은 욕망에 의해 산다. 욕망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그러나 욕망에 기초한 모든 것은 그 과정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서나 모두 괴롭다. 이루지 못할 때는 이루지 못해서 괴롭고 이룬 뒤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괴롭다. 그러나 원력에 의한 삶은 그 결과가 즐거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정이 또한 즐겁다. 만일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다. 흔히 수행하면 고행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은 성불이라는 궁극에 가기 전에도 첫 마음을 낸 순간부터 이내 즐거움을 준다. 물론 수행 중에 장애도 있고 고통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세속의 고통과 다르다. 수행 중의 고통은 고통을 마감하기위한 고통이므로 끝이 있는 고통이다. 즉 앞으로 나아감을 위한 과정이므로 은근한 인내를 가지고 극복해 나가다 보면 모든 고통의 본질을 꽤뚫고 그 자리에서 지혜를 싹 틔운다. 따라서 수행자는 마음이 편안하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 탐진치가 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잘 조복받는다. 또한 경계에 부딪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이를 수행의 재료삼아 더욱 정진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깨달음을 이룬 후 뿐만 아니라 발보심을 낸 바로 그 순간 이미 안락을 얻는다.

발심과 마지막은 차별이 없지만
이런 두 마음에 앞 마음이 어렵네
자기 제도는 못했으나 먼저 남을 건지나니
그러므로 초발심에 나는 경례하노라. <무량수경종요>

초발심의 마음과 깨달은 후의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앞마음과 뒷마음은 차별이 없다. 그러나 초발심이 없었던들 어떻게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초발심이 중요하다. 계율수행에 있어서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계를 어겼다고 하더라도 잃은 것은 아니라 하였고,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보리심은 모든 수행의 근본이자 성불과 왕생극락의 씨앗이며, 공덕장이다.

신행생활 (3) _ 보리심 _ 어떻게 발보리심 하는가?

보리심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시킬 수 없는 내면의 의지임이 분명한데, 보리심을 발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의 고통을 볼 수 있는 지혜와 그것을 아파할 수 있는 자비심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지극히 안락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다면 가슴 아플 일도 없고 따라서 수행해서 부처가 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옛날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자 시절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으실 때에도 "이 땅에는 고통받는 중생이 너무나 많으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건지오리다"는 서원을 세웠다. 이 외에도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이 자비심을 바탕으로 본원과 별원을 세우고 이를 성취하여 중생을 제도하니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보리심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범부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여실히 알아야 한다. 먼저 경전에서 범부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저 중생들은 어리석어 미혹해 있는 까닭에 온갖 여색에 취함이 백의가 물들기 쉬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욕에 빠짐은 구더기가 똥을 좋아하는 것 같고, 죄인이 갖가지 구속을 받게 되는 것 같고, 소경이 장님을 이끌어 함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선근을 해치며, 온갖 법보를 손상하며, 계향을 제거하며 혜명을 요절케 만든다. 중생들은 어리석은 까닭에 애욕의 맹인이 되고 애욕의 고용인, 애욕의 迷人, 애욕의 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

세상 사람들은 이 극악극고한 속에서 자신의 가업에 힘써 살아가고 있는 터이므로, 귀천.빈부.소장의 남녀들이 한결같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재물이어서 누구나 이것에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마음에 부림당해 잠시도 편히 쉴 때가 없으니, 밭이 있기에 밭 걱정, 집이 있기에 집 걱정, 우마 따위의 육축과 노비, 전재(錢財), 의식(衣食), 집물(什物: 세간, 가구)도 걱정거리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귀인이나 부호라 할지라도 이런 근심은 있게 마련이어서, 그것이 마음에 맺혀 뜻대로 살지 못한다.
또 빈궁해서 못난 사람들은 늘 가난에 쪼들린 나머지 밭이 없으면 밭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 집이 없으면 집이 있었으며 하고 걱정, 우마 따위의 육축과 노비, 전재(錢財), 의식(衣食), 집물(什物: 세간, 가구)이 없으면 그것들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는 바, 마침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결여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결여하여, 이같이 아등바등하면서 쉴 때가 없게 마련이다.
이렇게 살아가므로 도를 통달하지 못하고 진노에 빠져들어 재.색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고취에 들어가 그 속을 휘돌아서 수천억겁이 지나도 벗어날 때가 없는 것이니, 정말 딱한 일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세상 일 중 좋은 것을 택해 부지런히 이를 실천하도록 하라. 애욕이나 영화는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즐길만한 것이란 없나니, 부처님이 계실 때를 놓치지 말고 마땅히 정진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도록 원해야 할 것이다.<대아미타경>

애욕과 부귀의 노예가 되어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한치도 다름이 없다.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쾌락을 향해 달리고 있으나 결국은 괴로움을 향해 가고 있으니 지혜로운 이가 이것을 보면 부나비가 불을 찾아 뛰어 드는 것 같이, 구더기가 똥구덩이를 향해 가는 것 같이 안타까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욕심에 근거하여 세운 목표는 모두 고통을 동반한다.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로우니 왜 그런가. 구할 때는 얻지 못하여 괴롭다. 이루고 나면 다시 그것을 잃어 버릴까 염려한다. 그러다가 그것을 잃어버리면 다시 더 큰 괴로움을 얻게 된다.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큰 기쁨을 얻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못한다. 또 다시 부족한 무언가를 찾아 내고 말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러한 욕망에 의해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으나 결코 어느 것도 안전하게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없다. 부귀와 명예, 사랑하는 이 등 모든 것은 불안정한 존재로서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것을 붙들고 있으니 결국 괴로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심을 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찾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든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당한다. 그러면서도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집착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욱 곤란한 것은 고통 그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세속의 가치에 깊이 물들어 있으면서 그것에 대해 의심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 본 사람은 그런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성찰이 보리심을 내게 해준다. 지금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으며,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문제의식이 싹튼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러한 세속적 가치에 매우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수한 인간관계 속에서 집착으로 인한 애증(愛憎)으로 얼마나 얽매어 있는지 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았다 해도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인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으며,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시고 지금 그것을 위해 앞서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면 수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삼보에 대한 신심이 강할수록 수행도 힘있게 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보리심은 신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보리심이 있느냐 없느냐는 곧 신심이 있느냐 없느냐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신심이 있다면 곧 보리심을 발할 것이요 보리심을 발했다면 신심이 깊을 수 밖에 없다.

 

신행생활 (4) _ 신심 _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는 신심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신심이 깊어졌다거나 떨어졌다는 말을 종종한다. 신심은 무엇이며, 무엇을 믿는 것인가.

믿음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기는 말이다. 이른바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으며, 닦으면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을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대승기신론소별기 제1권>

신심이란 진리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인데,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그것은 삼보에 의해 생긴다. 부처님을 보며 그 위대한 덕을 믿고, 그도 우리와 같은 범부에서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믿고, 따라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도와 이러한 이치에 대한 설명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모두 있으며, 위대한 수행자들에 의해 그 일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심이란 삼보에 귀의함을 말한다.

이제 저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하신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 욕망을 떠난 것 중에서 가장 존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나이다. 온갖 집단 중에서 가장 존귀한 승가에 귀의하나이다.<최무차경>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첫째는 역사적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하여 그 분이 삶 속에서 보여주신 교훈을 몸으로 받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고 감도 없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법신불께 귀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성불에 귀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게 귀의한다는 것으로 그분들을 의지하여 불법을 배우겠다는 것이다. 승가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4부 대중을 말하며 불법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비심과 보리심이 뛰어나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분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찬탄하라. 우리가 속해 있는 수행공동체에 귀의하라. 이것이 삼귀의다. 진리가 있으며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신심인데 이것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목숨바쳐 돌아가는 삼귀의를 통해 가능하다

 

신행생활 (5) _ 신심 _ 어떻게 믿을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즉, 신심의 내용이 삼귀의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삼귀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의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나의 본성에 돌아가 의지함을 말하며, 목숨바쳐 귀의한다는 의미로 귀명이라고 한다.

귀명이라는 두 글자는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다. 능히 귀의하는 모습이란 공경하고 순종하는 뜻이 있어 귀의라 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 귀의라고 한다. 命은 목숨의 근원으로 모든 기관을 총체적으로 제어하는 것이다. 한 몸의 요긴한 것으로는 오직 목숨이 主이기에 모든 생명체가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보다 앞설 것이 없다. 이 둘도 없는 목숨을 가지고 가장 존귀하신 분을 받들어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기에 귀명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귀명이란 근원으로 돌아간다(還源)는 의미가 있다. 그 까닭은 중생의 육근이 일심(一心)으로부터 일어나지만, 그 근원을 등지고 육진(六塵)으로 분주히 흩어지는데, 이제 목숨을 들어 육정(六情)을 모두 수습하여 그 근본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 귀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돌아가는 바 일심이란 곧 삼보이기 때문이다.<대승기승론소별기 제1권>

삼귀의의 바른 뜻을 알고 진심으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자됨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부처님만이 우리의 귀의처요, 부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수 있으며 부처님의 교단만이 우리의 의지처임을 나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외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불 법 승 삼보에 의지하여 진리의 길에 나아 가겠습니다. 목숨 바쳐 귀의하나이다."하고 간절히 서원해야 한다. 이것이 있어야만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어떻게 믿을 것인가에 대해 네가지로 제시하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신심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인가? 대략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소위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서 항상 부처를 가까이 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이타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즐겨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대승기신론소별기 제6권>

첫째, 근본을 믿는다는 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진여의 발현임을 믿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성불이라는 목표가 정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중생이지만 내 마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나 궁구해야할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그것을 믿고 깨닫기만 한다면 현실에서 바로 부처가 되고 불국토를 이룬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근본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대승의 보리심을 발할 수 있으며 모든 수행과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불을 이루는 보리심을 낼 수 없으며 부처의 공덕을 갖출 수 없다. 따라서 근본을 믿는 것은 신심의 핵심이며, 수행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믿음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먼저 대승경전을 통해 우리의 근본을 이해하고 열심히 참구하여 어렴풋하게 나마 본성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근본을 믿는 굳은 신심이 자리잡는 것이며 이 믿음의 힘으로 본격적인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부처님과 같이 일체지를 구하고자 생각한다. 셋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항상 수행할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넷째, 승가에 대한 믿음으로 항상 선지식을 친근하고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게 믿는 자의 모습이다.

신행생활 (6) _ 선지식 _ 선지식의 필요성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느니라. <만공스님 어록> 중에서

수행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다음에는 직접 가야하는데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훌륭한 안내도가 된다. 이 지도를 가지고 우리는 길 없는 길을 간다.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부처님이 직접 길 안내를 해 주셨지만 지금은 경전의 말씀을 지도 삼고, 계율을 나침반 삼아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 가는 길은 너무나 막막하고 어렵기만 하다. 혹시 지도를 잘못 보아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마군의 집으로 가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경험 많은 안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깨달음을 가는 길에서 언제나 선지식을 찾는 노력을 먼저 해야할 것이다. 달마혈맥론에 "만일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으니, 비록 12부경을 다 외운다 하여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계에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아 벗어날 기회가 없으리라." 하였다. 이것은 불교에 대해 조금 아는 지식이나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마치 불법을 다 아는냥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만이 불법을 가로막고 있으니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을 찾아가 생사의 근본을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선지식은 어떤 분인가. 선지식은 성품을 보신 분이다. 따라서 선지식은 일체의 질문에 막힘이 없다,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라.

만공스님은 이와같이 말씀하시고 다시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된 사람으로 부처님의 혜병을 상속받는 분이니라" 하셨다. 또한 선지식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선지식은 그냥 만나지지 않는다. 먼저 간절한 구도심이 있어야 하며, 학식이나 명성 등 겉으로 보이는 외형들로 분별해서는 안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구법 여행에서 52선지식을 만난다. 그들은 신분과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선재동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선지식은 외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의 간절한 구법이 선지식을 만나게 한다. 따라서 먼저 발보리심을 한 후에는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선지식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가르침을 받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지식은 어떻게 찾습니까
누구나 자기가 잘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스스로의 지혜가 있지. 잘못 가르치면 따라가지 않는 법이지. 결국 자기가 부처이므로 안속는다. 찾다보면 계합이 되지. (서암스님)

신행생활 (7) _ 선지식 _ 선지식에게 배우는 자세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느니라.(만공스님)

먼저 선지식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받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식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지식을 만나면 지극한 마음으로 따를 것이며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즉, 그의 성격이나 외부적 조건, 가르치는 방식 등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믿고 따라야 한다. 만일 이런 믿음이 없이 의심하고 분별한다면 평생토록 선지식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훌륭한 원효스님이나 의상대사도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외형을 보고는 선지식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부처님께서는 발심한 중생들을 돕고 계신다. 이 사실을 믿고 지극한 마음으로 선지식을 구하라.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함이니,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스스로 진실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면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이니, 분별하지 않고 선지식의 가르침을 믿고 진실로 배우고자 하는 자세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출처: 달마넷

출처 :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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