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81) 팔탄 구수천에 임천석대(林千石臺)

장안봉(微山) 2019. 7. 25. 18:19
(81) 팔탄 구수천에 임천석대(林千石臺)
번호84작성일2016.07.01조회수676
작성자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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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탄(八灘) 구수천(龜水川) 천년 옛길에 임천석대(林千石臺)

    백두대간이 화령의 봉황산(봉황산:740.8m)에서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며 남으로 달리면서 웅이산에서 지장지맥을 이루어 南으로 돌아서고, 팔음지맥이 西, 北을 감아 돌아나가니, 중화평야의 물은 내(川)를 이루어 백화산과 만경산 사이로 협곡을 이루며 이어지니 중모천(中牟川), 석천(石川) 또는 구수천(龜水川)이라 하는데 초강천에 합승하여 금강으로 들어간다.
    이 천은 크게 여덟 여울을 이루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1탄(灘)은 상주 모동의 백옥정이요, 마지막의 8탄은 영동 황간의 반야사이다.

    이곳에 상주시에서 천년 옛길 「백화산 호국의 길」을 조성 하였는데, 서북쪽으로는 기세가 웅장함을 더하는 아름다운 백화산(933m)이 최고봉 한성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으며, 양안에는 험준하고도 기괴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암벽이 서로가 조금도 양보를 모르고 쌍벽을 이루니, 한 폭의 동양화는 탄성을 자아내는 대협곡을 이룬다.

    구수천의 중간쯤 제5탄을 이루는 곳에 「임천석대林千石臺」불리는 자연석 절벽이 삼층을 이루고 있다. 그 옛날 최절경인 구수천에는 고려가 망하자 악사 임천석이 숨어 살았는데, 조선의 태조가 부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으로 절벽아래 깊은 소(沼)에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2월 13일, 김광우가 김철현과 임천석의 포양을 청하니, 묘당에서 품처하게 하다)에
    『···與應河, 同時殉節。.......高麗樂工林千石, 麗末抱琴入尙州之華山, 日上層巖, 援琴北望而長唏, 聞革命之報, 遂捨琴自投巖下, 至今傳林千石臺。.... 以彰其烈。命廟堂稟處。.....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은 상산의 탄금대(彈琴臺)라 일컬을 만한 절경이고 유서 깊은 곳이라 많은 시문(時文)이 전한다.

    또한 임천석대 맞은편의 저승골은 고려 때(1254년)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침입하자, 황령사 승(僧) 홍지(洪之)가 지휘하는 상주의 관민은 저승골로 유인하여 절반을 섬멸하니, 몽고군이 대패하여 물러나 대승첩을 이룬 곳으로 알려지고 있어 구수천 초입에 2013년에 “항몽대첩기념탑”을 세웠는데, 그 높이가 무려 7.5m이다.

    백화산의 금돌성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660년) 삼국통일의 대업을 도모한 전초 기지였으며, 임진왜란 시에는 의병 상의군 이 활동한 호국의 영산이기도 하다.
    구수천의 들머리 수봉에는 정승 방촌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교학을 하였던 옥동서원과 사담 위 헌수봉의 끝자락에는 백옥정이 두 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사담, 세심석, 명경대, 병풍바위, 저승폭포, 전투갱변, 난가벽, 부처굴 등의 수많은 명소와 주변에 용초, 용수폭포, 보현사, 반야사, 문수전, 너덜지역의 호랑이 모습 등이 있어 볼거리와 옛 선인들의 맑은 정신이 서린 역사성이 있는 관광지로서 개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상주에는 구수천을 따라 걷는 길을 "백화산 호국의길" 이라 부르며, 영동에서는 "백화산 둘레길" 이라 부르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산 태극과 물 태극을 이루고, 왕복 10km 남짓한 오솔길은 물소리와 새소리가 귓전에 함께하고, 징검다리와 구름다리가 적절히 가설되어 누구나 부담이 없는 사계절 걷기코스로 상주의 아름다운 명소입니다(참고: 상산지, 상주의 문화재). 뉴스상주(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