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80) 상주의 얼을 지닌 객사, 상산관

장안봉(微山) 2019. 7. 25. 18:18
(80) 상주의 얼을 지닌 객사, 상산관
번호83작성일2016.06.28조회수564
작성자김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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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의 얼을 지닌 객사(客舍), 상산관(商山館)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에서 동(東)으로 가지를 친 노음산(露陰山:728.5m)을 지나고, 천봉산(天峰山:435.8m)에 이르자 날개를 펼친 듯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그 오른쪽이 북천으로 인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니 자산(子山:294.5m)이다.
    이 산 자락 아래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상산관 商山館」이 있어 상산벌을 한 눈에 바라보며 저 멀리 갑장산(甲長山:805.7m)까지 닿는데, 상주의 성지(聖地)로 경상대로 3123(만산동 699)이다.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마다 객관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상산관은 상주목(尙州牧)의 객사(客舍)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인 전패(殿牌)를 모시고, 삭망(朔望)에 대궐을 향하여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나라의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관원이 여기에 모여 참배하였다고 하며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한다.

    향지인 “상산지”에는
    「客館 在州衙東高麗金永煦爲牧使時改建安軸有記嘉靖丙戌火牧使尹宕改搆壬亂皆燒 顯廟丙午牧使李松岭仍舊址改搆 주아의 동편에 있으며 고려 김영후 목사 때에
    개건하고 안축이 기를 지었다, 1526년에 소실되어 목사 윤탕이 다시 세웠으며 임진란 때 모두 불타 버린 것을 1666년에 목사 이송령이 구지에 개축하였다」라 전하고,
    “상주시사”에는 「상산관의 창건연대는 고증하기 어렵다. 백운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1196년 9월 2일 이규보가 여사(旅舍)에서 상산의 선비들과 주연(酒宴. 시회)을 베풀었다”고 하니 이미 그 이전에 세워졌다고 하겠다」라 적고 있다.

    또한 상주 객관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 14권, 선조 13년 2월 1일)에 「朔辛未/同知中樞府事許曄卒。 曄字太輝, 號草堂。 少從花潭 徐敬德學, 與盧守愼爲友, 以士類著名...... 仍病解職, 卒于尙州之客館 동지중추부사 허엽(許曄)이 졸하였다. 허엽의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젊어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따라 배웠고 노수신(盧守愼)과 벗하였으므로 사류로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병으로 인하여 해직되어 오다가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졸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 후 1845년 목사 홍세주(洪世周)가 중수하고, 제암 정상리(制庵 鄭象履1774~1848년)가 상량문을 지었는데「鷄鳴狗吠相聞而達邑治占四境之中央鳥革翬飛不勞而成館宇値一新之機會在....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 읍치에 합당한 터가 사경의 중앙에 점해 있고, 조혁 휘비하여 노고하지 않고 관우를 지어 일신 할 기회를 만났도다...」이다. 1907년부터는 상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상주농잠학교 개교 시에도 교사로 사용되었다. 1940년 상주경찰서의 신축으로 다시 상주여자중학교(남성동 148-1)로 이건한 후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1년에 충혼의 현장인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 지어 오늘에 이른다.

    태평루(太平樓) 아래에 위치한 본 관은 잔디광장을 앞으로 하고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4층의 기단 위에 중앙에는 건물의 본관을 두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연결된 구조이다. 본관은 맞배 기와지붕으로 앞면 3칸과 측면 3칸으로 망궐례 의식을 재현해 놓았네요, 동익헌은 앞면 7칸과 측면 3칸이고, 본관 쪽은 맞배지붕, 동쪽 끝은 팔작지붕으로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놓았네요. 서익헌은 앞면 4칸과 측면 3칸으로 동익헌과 같이 본관 쪽은 맞배지붕이고, 서쪽 끝은 팔작지붕이며 3칸에는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지요.
    본관과 양쪽 익실 사이에 각 한 칸이 있어 정면에서 보면 모두 16칸으로 보이며 3동이 연결되어 면적은 426㎡이다.
    지붕마루 끝에는 용 모양의 용두(龍頭) 16개가 있으며, 건물의 외부 기둥은 원기둥이고, 내진주는 각주(角柱)로서 7량 가구에 연목천장을 하였고, 익공집에 겹처마로 멋과 장식을 더했으며 객관의 규모가 장대하고 품위와 멋을 지니고 있는데, 편액은 본관 건물 중앙에 「상산관 商山館」이라 걸고 있으며, 동익헌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지요.

    본 관은 상산 선비들의 시회와 문회 등 창작공간이었으며 특히, 상산 제1의 시회
    장소였다고 하는데 천여 년의 상주 얼을 간직한 상산관은 현존하는 건물로는
    남부지방 최대의 규모라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는 임란시 조선중앙군과 왜군이 최초로 접전한 북천 변에 자리하여 상주의 문화·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임란북천전적비와 충렬사(忠烈祠), 침천정(枕泉亭)도 같은 역(域)내에 있으며, 매년 “삼백다례문화제”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고, 북천교와 어우러진 야간 조명은 시민들의 발길을 더디게만 하지요(참고: 상주시사, 상산지, 상주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