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산

[스크랩]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 조식 선생님의 유적지

장안봉(微山) 2015. 5. 23. 02:08

 

 

남명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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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깨어 있으시려 했던 남명 선생님의 뜻을  새긴 惺惺門으로 현판을 달아 놓은 것 같습니다.  이문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지혜롭고 惺惺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시대에도 저런 대 학자님들이  많이 계셧으면 하는 소망 갖어 봅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유적 ; 

사적 제 305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사리

왼편은 남명선생 신도비 오른쪽은 남명 선생님 상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 조식(1501~ 1572) 선생의 유적.

선생의 자는 건중, 본관은 창녕, 호는 남명.  선생은 1501년 현재의  합천군 삼가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 神魚山 아래에 山海亭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였고, 48세 부터는 삼가에 雷龍舍를 지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丹城縣監 등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일생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산천재, 덕천서원, 세심정,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등 벽화 3점이 남아 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 (선조 9년)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609년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데, 학문하는 여가에 휴식하는 곳이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손수 자리 잡은 곳이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는데 남명 기념관 경내에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로 별묘라고 일컫기도 한다.

 

 

- 옮긴글-

 

 

 남명선생 신도비문 국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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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선생 신도비문 국역비 옆면에 있는 글

 

 

 

 

  남명선생 신도비문 국역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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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기념관

몇해전에 갔을때 없었던 기념관이 새로 건립 되어 있습니다.

 

 기념관 문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남명 선생님의 사상을  표현한 神明舍圖

신명사도란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도덕의 주체인  인간 자신을 善性의 본체로  위치시키고  그런 다음 밖에서 유입되는 惡으로부터  그 선성을 보호하며, 나아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기미를 미리 잘라내고,  아울러 악을 극복함으로써 선성을 인간의 생명 활동과 도덕실천의 광장으로 확충시키고자 하는데 있다.   신명사도는 도덕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다툼을 전쟁에 견주어서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선천재가 완성되자, 이 신명사도를  자리 옆에 걸어 두고  자주 보면서  마음을 수양하였다.  또한 [신명사명神明舍銘]을 지어  [神明舍圖]의 심오한 뜻을 밝혔는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이 마음 수양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 옮긴글-

 

 

 

 

 남명 선생님의 초상화

직언을 서슴지 않던 뇌룡정 시대

선생의 나이 48세 때 삼가 토동에 뇌룡사를 지어, 자신을 더욱 더 함양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뇌룡이란 [장자(莊子)]에서 따온 말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연못처럼 깊숙이 초야에 묻혀 있지만, 그 덕화가 용의 신비한 조화처럼 나타나고 천둥소리처럼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뜻이다.

 선생은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 뇌룡정 시대에  그런 기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암부(民巖賦)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이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는 당시의 나라 사정을 '벌레가 백년동안이나 나무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라서 곧 쓰러지게 된 큰 나무'에 비유하여, 당시의 폐단을 조목조목 통렬히  지적하고 자신이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밝혔다. 이 상소에서  문정왕후를 '과부'라 하고 명종을 '고아'라고 하여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이 뇌룡정 시대에 선생의 현실에 대한 대응자세가 적극적으로 드러나는데, 대곡 성운은 선생의 묘비문에서 "그는 세상사를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애달파 하였다.  매번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마친 뒤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 옮긴글-

 

 

 남명선생님 종합 소문, 소축

 

 

 기념관 한편에 남명 선생과 제자들의  생전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

 

 

 왕실하사 오경백편

왕실에서 하사한 책이다.[오경백편]은  [주역] [서전], [시전], [춘추좌씨전], [예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100편을 뽑아 5권 5책으로 만든 것인데, 정조 22년(1798)에 만든 [어정오경백편]으로 추정 된다. 오경을 각 1책으로 펴낸 것인데 그 활자의 크기가  3cm여서 찾아 읽기에 편하게  되어 있고, 주변에 두고 항상 통독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다. 주석은 특기해야 할 行의 상단에 붙였는데 宋나라 학자들의 주석을  인용한 것 같다.

 - 옮긴글-

 

 

 四聖賢遺像屛風: 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孔子, 周濂溪,  程明道. 朱子의 유상 병풍

훼손이 되어 아쉽지만 더 자세히 보시려면 클릭해 보세요!

 

 

 

 

 

 경의검과 성성자

경의검은 남명 선생이 평소에 마음을 수양하기 위하여 차고 다니던 칼인데,  손잡이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敬이오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 [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銘을 새겼다.

 

惺惺자는  남명 선생이 띠에 차고 다니며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깨우쳐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로 삼은 방울이다.  뒤에 이 성성자를 제자인 동강 김우용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 옮긴글-

 

 

 

 기념관 입구

 

 

 산천재 입구에 세워진 시비

 

 

 왼편 집은 여재실과   오른쪽 집은 제실 

문화재 명칭 : 조식 유적 여재실. 사적 제 305호 

조선시대 저명한 남명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묘. 가묘는 서원의 사당과 구별하여 별묘라고도  함.    여재실의 이름은 [禮記]에서 따온 것으로 "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 옮긴글-

 

 여재실 건너편에 조식 선생님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신  산천재

 

 

 山天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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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天齋에서 바라보이는 풍경

 

 

 

 산천재 부속 건물

 

 

 

산천재 옆에  남명선생 문집 책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64호

이 책판은 남명 조식의 시문집의 제작을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선생의 문집은 몇 가지 사유로 인하여 여러 차례 변천을 겪었는데,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인조반정 이전 간행된  초기본인 갑진본甲辰本 계통이 있고. 이 후 처음 간행을 주도하였던 鄭仁弘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체제에 다소 변화를 가져온 이정본 계통이 있으며, 고종 연간에  문집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한 중간본 계통이 있다.

 문집은 처음 1602년(선조 35 )해인사에서 간행하였으나 판각이 불에 타 1604년(선조  37)에 다시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이후 이정본에서는 편년 등의 내용 추가 되고 [學記類編]과 [山海師友淵源錄]까지 포함한 [이정합집본]이 간행되도록 하였다.   현재의 목판은 중간본 계통의 최후 간행본으로 185매로 된 6완전한 분량이 보존되어 있다.  선생의 문집은 선생의 학문의 맥과 깊이를 전해 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지역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전하고 있어 남명학 연구는 물론 지역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옮긴글-

 

 

 남명선생님 유적지를 돌아보는 우리 일행  아기가 대장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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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천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89호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이자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운 대학자나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친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곳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曺植 1501~ 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돌아가신 4년 뒤인 1576년(선조 9)에 창건 되었다.  덕천 서원은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하응도 河應圖 등의 주도와 진주목사 구변, 경상감사 윤근수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서원의 터는  작은 집을 지어놓고 선생을 모시고 노닐던 장소를 하응도가 기증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불탄것을 1602년(선조 35)에 이정, 진극경, 진주목사 윤열 등이 중건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에 덕천서원으로 사액(賜額) 되었다.  이 후에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다가 1870년(고종 7)에 불탄 것을  河載華 등이 중건하여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원의 배치는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양식인 앞에는 학문을 위한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례의 공간을 두는 형태(前學後廟)를 취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과 함께  유생의 생활 공간인 동, 서재(東, 西齋)가 있다. 경의당은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경'(敬)과 '의'(義)를 중요시하였던 선생의 학문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다. 숭덕사(崇德司)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현재 매년 봄 . 가을 두차례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南冥齊를 지내고 있다.

 

 

 - 옮긴글-

 

 남명선생님의 기상을 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합니다. ㅎㅎㅎ

 

 

 

 매일 청소를 하는지  깨끗하여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방문 위에 작은 문이 인상적입니다.

 

 

 

 덕천서원 맞은편 냇가 위에 세심정, 조식 선생님께서 휴식하시던 곳

 

 

 세심정 아래 나무 사이로 흐르는 냇물

 

 

 세심정 옆에 있는 시를 쓴 돌

냇물에 목욕하며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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