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세종·단종 태실지, 일제가 훼손한 조선의 역사

장안봉(微山) 2015. 1. 7. 06:51

세종·단종 태실지, 일제가 훼손한 조선의 역사
2009년 03월 09일 (월) 김영신 기자 yskim@idomin.com

태실(胎室)은 산모가 태아를 출산 후 나오는 탯줄, 즉 태를 묻은 곳이다.

태실은 사대부 자녀의 태를 묻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왕실 왕 자녀의 태를 묻은 곳이다. 도교 사상과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둔 태실 풍습은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 왕실의 독특한 문화로 태를 생명의 근원인 '생명선'으로 여겨 소중히 다뤘다.

조선왕조는 왕의 태가 국가 장래의 국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 왕의 즉위년에 전국 최고의 명당을 찾아 태실을 만들었다. 태실은 전국에 40여 개소가 있으며 곳곳에 태실, 태봉, 태묘라는 지명이 많다.

태실은 신분의 귀천이나 직위에 따라 보관 방법도 달라 일반적으로 태옹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했으나 왕의 보위를 이어받을 왕손의 태는 석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고려시대 이전의 태실은 위치만 추정될 뿐 그 형태를 알 수 없고 조선시대 초기 왕실 태실은 대부분 경상·충청·전라도에, 성종 이후는 경기·강원도에 조성됐다.

태실문화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정착한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풍습으로 최초의 태실 역사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신라 김유신의 장태 기록으로 알려졌다. 사천 지역에는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세종 태실지와 그의 애손으로 가장 불운의 아픔을 가진 단종 태실지가 1㎞의 거리를 두고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에 있다.

조선 왕의 태 국운과 직결, 즉위년 최고 명당에 조성
개인·친일파 묘에 자리 빼앗겨…성역화 추진 어려움


   
 
  세종 태실지  
 
◇세종 태실지(경남도 지정 기념물 30호)

◇세종 태실지(경남도 지정 기념물 30호) = 세종 태실지는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에 있다. 조선왕실은 세종 즉위년인 1418년 당시 전국 최고의 명당인 이곳에 태실을 만들어 그의 태를 안치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왜적의 도굴로 태실지가 파손돼 1601년에 중수했으며 1734년(영조 10년)에 높이 180㎝, 너비 33㎝, 두께 27㎝ 규모의 태실비를 건립하고 태실을 수리한 기록이 담긴 <태실수개의궤>를 남겼다.

<태실수개의궤>와 자료에 따르면 태실은 팔각의 받침돌 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엽석을 놓고 나서 주변에 전석을 깔고 돌난간을 돌린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태실은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태실 임야를 민간인에게 매각하고 경기도 양주로 옮겨갔으며 현재 태실지에는 우리나라 대기업과 관련 있는 민간인 묘가 조성돼 있다.

현재 태실지는 개인 소유로 당시 조형 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의 중동석, 팔각대 등의 방치된 석물을 산자락에 모아 놓고 안내판주차장설치해 사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단종 태실지  
 
◇단종 태실지(경남도 지정 기념물 31호)
= 단종 태실지는 곤명면 은사리 산 438번지에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3년(1441년)에 그의 손자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앞산에 태실을 안치하도록 해 그 해에 조성했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봉해져 강원도 영월 땅에 유배돼 1457(세조 3년)년 그의 숙부인 세조에 죽음을 당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슬픈 운명의 임금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으로 규모가 큰 세종의 태실은 거의 파괴됐으나 다행히 규모가 작은 단종 태실은 화를 면했다. 단종 태실비는 영조 10년(1734년) 세종 태실비를 세울 때 함께 세워져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단종 태실 석물은 연꽃의 방향이 아래로 된 복련과 연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있어 이는 당시 조선왕실 내에서 불교를 믿는 왕실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단종 태실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됐고 해방 이후에 중추원 '칙임 참의'를 지낸 친일파 최연국의 묘가 들어섰고 96년 세워진 묘비에는 민족교육에 앞장서는 등 지역과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현재 태실지는 친일파 묘가 들어서면서 태실비와 유물들이 가장자리로 밀려 한곳에 모여 있어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다. 1972년 2월 세종 태실지와 함께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한편, 세종·단종 태실지는 임금 태실로는 처음 시작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고 태실지에 관한 자료 등으로 중요한 역사와 지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사천시가 성역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곳이 개인 소유의 땅으로 성역화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출처 :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글쓴이 : 初階/崔明宇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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