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여행>
굴원(屈原)은 기원전, 그러니까 BC 343년 경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楚)나라에서 태어나 BC 289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하진 않다.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에 자리한 큰 나라였던 초(楚)나라에서 왕족으로 태어났다. 중책을 맡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또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조정의 정적(政敵)관계 였던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이 자주 일어나자 굴원을 시기하고 모함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굴원(屈原)은 제(齊)나라와 동맹을 맺어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며 소신을 가지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회왕(懷王)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그는 유배지에서 울분을 삼키며 민속의식(民族意識)을 관찰하면서, "이(離)"는 "만나다"의 뜻이고 "소(騷)"는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離騷)란 곧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이 된다. 시름과 연군(戀君)의 정(情)을 노래한 서정적(敍情的)인 내용으로 아주 긴 장시(長詩)이다.
이 글을 쓰면서... 원래는 어부사(漁父辭)보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이름이 더 알려진 "이소(離騷)"를 소개코자 하였으나, 한 번은 용서 받은바 있었으나, 경양왕(頃襄王)에 의해 멀리 양자강 남쪽 강남(江南)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고 만다. 유명세를 타면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詩人이 되었다. 그는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울분을 삭히며 詩를 짓기도하면서 10 년 간을 방랑 생활로 보낼 무렵 자신이 그토록 우려하고 걱정한 대로, 진(秦)나라에 의해 조국인 초(楚)나라가 결국 멸망 당하자, 또 다른 문헌에는 62세에 자결했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앞 뒤의 정황과 당시의 수명을 유추해 보면 54세가 더 정확도가 높은 것 같다.
굴원(屈原)이 투신 자살한 현재의 지명(地名)인 멱수(汨水) 강가에는 그의 무덤이 있으며,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물고기가 시신을 훼손치 못하도록 북을 치고 쫓으며 물속을 휘젖던 것에서 유래한 놀이가 바로 용선뱃놀이의 기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오날에 간혹 쌀을 넣은 대통밥을 소태나뭇잎으로 싸는 것이나, 갈대잎이나 대나무잎으로 싸서 찐 수리취라는 떡을 물고기에게 던져주는 풍습이 있는데, 물고기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의 뜻에서 이어져 내려온 풍습이라고 한다.
어부사(漁父辭)는 굴원(屈原)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굴원의 강직한 성품이 묻어나며, 어부의 달관(達官)한 삶의 자세와 굴원의 인품이 대조되어 그 빛을 더하는 작품이다. "중취독성(衆醉獨醒)"의 고사성어는 이 어부사에서 연유한 말이다. 굴원(屈原)의 몇 몇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名詩選集)인 초사(楚辭)에 실려 내려오고 있다.
굴원의 작품이 실린 초사(楚辭)의 내용들은 한(漢)나라 때 크게 유행한 한부(漢賦)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와 같은 당(唐)나라 때의 詩人들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초(楚)나라의 詩人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그가 대표격이라 하겠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충정(忠政)에서 우러나는 직언(直言)은 위정자(爲政者)들의 귀에 늘 거슬렸다. 쓰디쓴 말이기에 들었다 해도 무시하기 일쑤였으며, 직언을 하는 신하를 눈에 가시쯤으로 여기다 크게 화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걸 역사는 빈번하게 반복해서 일러준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다 갔다.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말처럼 "역사(歷史)는 돌고 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游於江潭(유어강담): 강가와 물가에 노닐고 行吟澤畔(행음택반): 못가에서 시를 읊조리고 다니는데, 顔色樵悴(안색초췌): 얼굴색은 초췌하고 形容枯槁(형용고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어부견이문지왈 자비삼려대부여):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何故至於斯(하고지어사):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하니, 屈原曰, 擧世皆濁(굴원왈 거세개탁): 굴원이 말하기를, 세상이 다 혼탁한데 我獨淸(아독청): 나 홀로 깨끗하고 衆人皆醉(중인개취):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我獨醒(아독성): 나 홀로 깨어 있었습니다 是以見放(시이견방): 이런 까닭에 추방을 당했다.고 하니 漁父曰 聖人(어부왈 성인):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不凝滯於物(불응체어물):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지만 而能與世推移(이능여세추이):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世人皆濁(세인개탁):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何不굴其泥而揚其波(하불굴기니이양기파): 어찌 진흙탕을 휘어저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며, 衆人皆醉(중인개취): 뭇 사람이 모두 취해 있거늘 何不飽其糟而철其리(하불포기조이철기리): 어째하여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何故로 深思高擧(하고로 심사고거):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自令放爲(자령방위):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니 屈原曰, 吾聞之(굴원왈, 오문지):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新沐者(신목자):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必彈冠(필탄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新浴者(신욕자): 새로 목욕한 사람은 必振衣(필진의):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安能以身之察察(안능이신지찰찰): 어찌 맑고 깨끗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수물지문문자호):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寧赴湘流(녕부상류): 차라리 상수에 몸을 던져 葬於江魚之腹中(장어강어지복중):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안능이호호지백):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而蒙世俗之塵埃乎(이몽세속지진애호):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하니 漁父(어부): 어부는 莞爾而笑(완이이소): 빙그레 웃고서, 鼓木世而去(고예이거): 노를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乃歌曰, 滄浪之水淸兮(내가왈, 창랑지수청혜): 이렇게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창랑의 물이 흐리면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내 발을 씻으리라. 하곤 遂去不復與言(수거불부여언): 마침내 떠나가고 다시는 대화가 없었다.
*木世는 木과 世가 한 자로 붙어(나무목변에 인간세로 이루어진 한 글자) '노 예'자인데, 컴퓨터에 그런 글자가 없어서 각각의 글자를 붙여만들었음. 반송님이 귀띔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끝 - |
'묵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삼문 절명시 (0) | 2014.10.31 |
---|---|
[스크랩] 매죽헌(梅竹軒),성삼문(成三問), 흰 눈 속에 우뚝 선 푸른 소나무여! (0) | 2014.10.31 |
[스크랩] 이백 산중문답[李白 山中問答] (0) | 2014.10.31 |
[스크랩] 중국 간체자 (0) | 2014.10.31 |
[스크랩] 한강임조(漢江臨眺)-왕유[王維; ?699~761?] (0) | 201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