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13릉(중국 북경)-소릉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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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13릉 중에서 명나라 제12대 황제인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전경 - 소릉 입구 안내판 사진 |
북경 명13릉에서 개방하는 곳은 정릉/장릉/소릉/신도 4곳입니다. 일반인들은 지하 궁전을 보기 위해서 정릉만 가면 됩니다만, 광나루는 모두 가 보고 싶은 마음에 장릉에 이어서 소릉도 가 보았습니다. 소릉은 정릉/장릉에 비해서는 조금 작은편이며, 현지 사람들도 잘 몰라서 그런지 관람객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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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소릉(상단 좌), 유일하게 지하 묘실을 개방하는 정릉(상단 중), 장릉(상단 우)과 하단에 신도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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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어스로 내려다 명13릉의 소릉의 모습입니다. |
융경제(隆慶帝, 1537~1572)는 중국 명(明)의 제12대 황제로서, 이름은 주재후(朱載垕), 묘호(廟號)는 목종(穆宗)이다. 재위 때의 연호를 따서 융경제(隆慶帝)라고 부른다.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6)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효각황후(孝恪皇后) 두씨(杜氏, ?~1554)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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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 입구 전경 |
▲ 소릉 입구를 들어서 우측으로 바라 본 모습(관리사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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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 비각이 보이고 우측에 일부 전각이 있습니다. |
명13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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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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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 2월 4일, 가정제(嘉靖帝)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 명(明)은 심각한 정치의 혼란과 외환(外患)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정제(嘉靖帝)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내각대학사(内閣大学士) 엄숭(嚴嵩, 1480~1567)에게 정무(政務)를 위임하여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으며, 남에서는 왜구(倭寇)가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의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노략질을 일삼고, 북에서는 몽골 타타르족(Tatars, 韃靼)이 침공하는 이른바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초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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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비정(碑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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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 내부에 세워진 비석 모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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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경제(隆慶帝)는 황위에 오르자 내정 개혁에 착수하여 가정제(嘉靖帝) 연간(年間)에 간언(諫言)을 하여 파면되었던 해서(海瑞, 1514~1587) 등을 다시 기용하였고, 서계(徐階, 1503~1583), 고공(高拱, 1512~1578), 장거정(張居正, 1525~1582) 등을 재상(宰相)으로 중용하였다. 황실(皇室)의 도교 행사를 줄이고 도사들을 쫓아냈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擴充)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하여 해외무역(海外貿易)을 허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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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조선 왕릉의 금천교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안내판에는 석교(Stone Bridge)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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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교를 지나면 전방에 능은문(稜恩門)이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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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문 |
▲ 능은문에서 돌아 본 비정 |
나아가 왜구(倭寇)와 타타르[韃靼]에 대해서도 통상(通商)을 허용하는 등 유화책을 펼쳐 대외적인 안정을 이끌었다. 척계광(戚継光, 1528~1587) 등의 활약으로 남왜(南倭)의 위협은 점차 안정되었으며, 1567년 해금(海禁)이 해제되고 민간 교역이 허용되면서 왜구(倭寇)의 발호는 크게 줄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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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의 능은전(稜恩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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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문에서 걸어 들어가면서 바라 본 능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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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의 능은전 내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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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전 뒷편 삼문을 통해서 능역으로 갑니다. |
▲ 영성문(靈星門)을 지나면 명루가 나타납니다. |
그리고 척계광(戚繼光), 담륜(譚綸, 1520~1577) 등의 활약으로 장성(長城)의 방어가 강화되면서 북로(北虜)의 위협도 점차 안정되었고, 1571년(隆慶 5년)에는 몽골 타타르족과 화약(和約)을 체결하여 알탄 칸[阿勒坦汗, 1507~1582]을 순의왕(順義王)으로 봉(封)하고 교역(交易)을 허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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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의 오공(五供)과 명루(明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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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공 좌우의 계단으로 명루를 올라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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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하단 중앙 통로를 지나서 좌우로 명루에 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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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통로를 지나서 계단으로 오릅니다. |
▲ 능역으로 도는 길은 막혀 있으며, 명루로 갑니다. |
융경제(隆慶帝)의 재위 기간에 명(明)은 안팎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융경제(隆慶帝) 자신은 대학사(大学士)에게 정무(政務)를 맡긴 채 향락(享樂)을 일삼았으며 결국 황위에 오른 지 6년만인 1572년 7월 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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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릉의 명루 좌측 방향에서 멀리 바라 본 모습. 위 사진에 보이는 왼쪽 전각이 정릉, 오른쪽 전각이 장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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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 본 명루 |
▲ 명루에서 내려다 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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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중앙에 놓여 있는 비석(쪼개진 비석을 붙여 놓아)과 명루에서 바라 본 능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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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릉(昭陵)에 안장(安葬)되었으며, 계천륭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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