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중국)

[스크랩] 명13릉(중국 북경)-소릉

장안봉(微山) 2012. 12. 27. 22:36

명13릉(중국 북경)-소릉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명13릉 중에서 명나라 제12대 황제인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전경 - 소릉 입구 안내판 사진

북경 명13릉에서 개방하는 곳은 정릉/장릉/소릉/신도 4곳입니다. 일반인들은 지하 궁전을 보기 위해서 정릉만 가면 됩니다만, 광나루는 모두 가 보고 싶은 마음에 장릉에 이어서 소릉도 가 보았습니다. 소릉은 정릉/장릉에 비해서는 조금 작은편이며, 현지 사람들도 잘 몰라서 그런지 관람객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소릉(상단 좌), 유일하게 지하 묘실을 개방하는 정릉(상단 중), 장릉(상단 우)과  하단에 신도가 있습니다.

▲  구글어스로 내려다 명13릉의 소릉의 모습입니다.

융경제(隆慶帝, 1537~1572)는 중국 명(明)의 제12대 황제로서, 이름은 주재후(朱載垕), 묘호(廟號)는 목종(穆宗)이다. 재위 때의 연호를 따서 융경제(隆慶帝)라고 부른다.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6)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효각황후(孝恪皇后) 두씨(杜氏, ?~1554)이다.

▲ 소릉 입구 전경

▲ 소릉 입구를 들어서 우측으로 바라 본 모습(관리사인 듯...)

▲ 소릉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 비각이 보이고 우측에 일부 전각이 있습니다.

명13릉 안내도

소릉 안내도

1567년 2월 4일, 가정제(嘉靖帝)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 명(明)은 심각한 정치의 혼란과 외환(外患)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정제(嘉靖帝)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내각대학사(内閣大学士) 엄숭(嚴嵩, 1480~1567)에게 정무(政務)를 위임하여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으며, 남에서는 왜구(倭寇)가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의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노략질을 일삼고, 북에서는 몽골 타타르족(Tatars, 韃靼)이 침공하는 이른바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초래하였다.

▲ 소릉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비정(碑亭) 전경

▲ 비정 내부에 세워진 비석 모습 ▼

융경제(隆慶帝)는 황위에 오르자 내정 개혁에 착수하여 가정제(嘉靖帝) 연간(年間)에 간언(諫言)을 하여 파면되었던 해서(海瑞, 1514~1587) 등을 다시 기용하였고, 서계(徐階, 1503~1583), 고공(高拱, 1512~1578), 장거정(張居正, 1525~1582) 등을 재상(宰相)으로 중용하였다. 황실(皇室)의 도교 행사를 줄이고 도사들을 쫓아냈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擴充)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하여 해외무역(海外貿易)을 허용하였다.

▲ 비정을 지나면 다리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조선 왕릉의 금천교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안내판에는 석교(Stone Bridge)라고...

▲ 석교를 지나면 전방에 능은문(稜恩門)이 있습니다. ▼

▲ 능은문

▲ 능은문에서 돌아 본 비정

나아가 왜구(倭寇)와 타타르[韃靼]에 대해서도 통상(通商)을 허용하는 등 유화책을 펼쳐 대외적인 안정을 이끌었다. 척계광(戚継光, 1528~1587) 등의 활약으로 남왜(南倭)의 위협은 점차 안정되었으며, 1567년 해금(海禁)이 해제되고 민간 교역이 허용되면서 왜구(倭寇)의 발호는 크게 줄었다.

▲ 소릉의 능은전(稜恩殿)

▲ 능은문에서 걸어 들어가면서 바라 본 능은전

▲ 소릉의 능은전 내부 모습

▲ 능은전 뒷편 삼문을 통해서 능역으로 갑니다.

▲ 영성문(靈星門)을 지나면 명루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척계광(戚繼光), 담륜(譚綸, 1520~1577) 등의 활약으로 장성(長城)의 방어가 강화되면서 북로(北虜)의 위협도 점차 안정되었고, 1571년(隆慶 5년)에는 몽골 타타르족과 화약(和約)을 체결하여 알탄 칸[阿勒坦汗, 1507~1582]을 순의왕(順義王)으로 봉(封)하고 교역(交易)을 허용하였다.

▲ 소릉의 오공(五供)과 명루(明樓)

▲ 오공 좌우의 계단으로 명루를 올라갑니다.

▲ 명루 하단 중앙 통로를 지나서 좌우로 명루에 오를 수 있습니다.

▲ 명루 통로를 지나서 계단으로 오릅니다.

▲ 능역으로 도는 길은 막혀 있으며, 명루로 갑니다.

융경제(隆慶帝)의 재위 기간에 명(明)은 안팎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융경제(隆慶帝) 자신은 대학사(大学士)에게 정무(政務)를 맡긴 채 향락(享樂)을 일삼았으며 결국 황위에 오른 지 6년만인 1572년 7월 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 소릉의 명루 좌측 방향에서 멀리 바라 본 모습. 위 사진에 보이는 왼쪽 전각이 정릉, 오른쪽 전각이 장릉입니다.

▲ 측면에서 바라 본 명루

▲ 명루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명루 중앙에 놓여 있는 비석(쪼개진 비석을 붙여 놓아)과 명루에서 바라 본 능역

그는 소릉(昭陵)에 안장(安葬)되었으며, 계천륭도연의관인현문광무순덕홍효장황제(契天隆道淵懿寬仁顯文光武純德弘孝莊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 발췌 -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