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13릉(중국 북경)-장릉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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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13릉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큰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자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성조 영락제의 장릉(인터넷 사진) |
중국 북경 여행객들의 대부분은 묘실이 개방된 명13릉의 정릉만 갑니다. 명13릉을 몇 번 가서도 명릉만 가 보아서 2012년 나홀로의 3차례 북경 행사시에 장릉/소릉/신도를 한 곳씩 일정에 넣어서 명13릉에서 개방된 곳을 모두 다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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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소릉(상단 좌), 유일하게 지하 묘실을 개방하는 정릉(상단 중), 장릉(상단 우)과 하단에 신도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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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어스로 내려다 명13릉의 장릉의 모습입니다. |
명(明) 성조(成祖) 영락황제는 이름이 주체(朱棣: 1360~1424)이며,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이다. 조카인 혜제(惠帝) 건문황제(建文皇帝) 주윤문(朱允炆: 1377~?)에게서 황위를 찬탈하였다. 22년간 재위하였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비사막 북쪽 정벌에 나섰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65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장지는 장릉(長陵: 지금의 북경시 북쪽 창평현 <昌平縣>의 십삼릉<十三陵>)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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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 입구인 능문(陵門) 전경 |
장릉(長陵)은 명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3대 황제인 영락제(成祖)가 묻혀있는 곳으로13릉 중 처음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05년에 착공되어 지하궁전 4년, 지상의 주요 건물 완성에 1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장릉은 13릉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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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문(稜恩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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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문을 들어서면 능은문이 보입니다. |
지하에는 진시황릉과 같은 지하무덤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락제는 조선시대의 태종대왕과 세조대왕과 비슷한 인생을 산 인물인데 골육상잔 끝에 왕위를 찬탈하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황제인데요.영락제는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고 지금의 자금성을 축조한 황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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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에서 바라 본 능은문과 능은문 좌우로 서 있는 비석 모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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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주체(朱棣)는 사실 고려여인 공비(碽妃)의 소생인데 황위 쟁탈 때 자칭 태조의 적자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주체는 연왕(燕王)에 책봉되어 북평(北平)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1390년 원(元) 왕조의 잔여세력 나일부화(乃兒不花)를 정벌하여 전승을 거둠으로써 태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조로부터 북부 변경의 군대를 통솔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또한 여러 차례 명을 받고 출정하여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
명13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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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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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태조 주원장이 태손(太孫) 주윤문에게 "바람이 불어오니 말총이 천가닥 실날같네(風吹馬尾千條線)"에 대한 대구를 짓게 명하였다. 이에 주윤문은 "비가 내리니 양털에서는 한가닥 노린네(雨打羊毛一片膻)"라 응대하였다. 이것을 듣고 기분이 상한 태조의 안색이 좋지 않자 옆에 있던 주체가 얼른 "햇살이 비치니 용비늘이 만조각 황금같네(日照龍鱗萬点金)"라고 응대하였다. 이에 크게 흡족한 태조는 그에게 아주 대구를 잘 지었다고 칭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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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문을 들어서면 능은문은 전방에 있고 우측에 있는 비정(碑亭)이 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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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태조는 주체가 문무를 겸비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더욱 총애하여 주윤문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을 생각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종법제를 유지하고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윤문을 태손으로 책봉하라는 신하들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병사하면서 건문황제(建文皇帝) 주윤문에게 황위를 계승토록 하고, 번왕(蕃王: 변방을 지키는 제후)인 자식들에게는 경성으로 달려올 필요 없이 영지를 지키라고 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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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의 능은전(稜恩殿)은 명13릉 중에서 유일하게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고 완전히 보전된 건물입니다. |
주체는 홀로 밤중에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회안(淮安)에 당도하였을 때 건문제가 보낸 사자에 의해 제지당하여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주체는 건문제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건문제는 변방의 제후국인 번(蕃)을 없애려고 하였으나 주체가 전력을 다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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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문을 지나서 바라 본 모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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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태조의 <<황명조훈(皇明祖訓)>> 중의 "누구든 감히 조상의 제도를 고치려는 자는 간신으로 간주하고 처형하라"는 조문을 인용하여, 군주의 측근에 있는 간신배들을 몰아낸다는 것을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후 남경으로 진격하여 1402년 6월에 황위를 찬탈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고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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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7년에 건조되고 부지만 4천400㎡에 달하는 능은전의 지붕은 황금빛 기와를 이어 놓아 멀리서 보면 금빛 찬란하게 보입니다. |
주체는 황제에 즉위한 후에 먼저 3일간 황궁 청소를 명령하고 궁녀와 내시를 거의 다 죽였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건문제의 옛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으며, 이때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은 산채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철현(鐵鉉)은 경성으로 압송되어 주체를 보고도 의연히 돌아서서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한 주체는 그의 귀와 코를 잘라서 삶은 후에 그의 입속에 밀어넣어라 명령하고는 그에게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철현은 사나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충신과 효자의 고기가 어찌 맛이 없겠소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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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전 내부 중앙에 위치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1360~1424)의 동상 |
주체는 다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칼로 난도질하여 베어 죽이라 명하였다. 철현은 죽어면서도 입을 놀리지 않고 욕을 해대자 주체는 또다시 그의 시체를 기름솥에 집어넣어 태우라 명했다. 문학박사 방효유(方孝儒)는 건문제가 분신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궁궐로 들어갔다가 주체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며칠 후 주체는 그에게 자신의 등극을 위해 즉위 조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방효유는 붓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울면서, "죽일테면 죽여라. 난 절대 조서를 쓰지 않겠다!"라고 욕하자, 주체는 "네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설마 너의 구족도 돌아보지 않을까?"라고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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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전 내부 전체에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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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의 전체 모형도 |
"구족이 아니라 십족을 멸해도 난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방효유는 붓을 주워들고 종이 위에 큰 글자를 몇 자 써서 주체에게 던졌다. 주체가 그것을 들고 보니 "연적찬위(燕賊簒位: 연의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 네 글자였다. 화가 난 주체는 방효유를 꽉 잡으라고 한 후에 칼을 들어 그의 입을 귀 옆까지 베어버리고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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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전 모형도와 사진 전시물들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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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은전 뒷편 모습 |
▲ 능은전 뒷편 삼문을 통해서 능역으로 갑니다. |
주체는 또 방효유의 종족, 친구, 문하생, 십족 등 873명을 체포하여, 한명 한명 그를 만나게 하였다. 그래도 그가 끝까지 동요하지 않자, 주체는 방효유와 그의 십족을 모두 죽이라 명했다. 건문제에게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주체는 그를 55년간 가둬 두어 멍청이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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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문에서 바라 본 영성문(靈星門)과 명루 |
▲ 영성문은 돌아서 나올때만 문안으로 지나간다는... |
항복을 바라는 건문제의 옛신하들에 대해서는 주체는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다. 남경을 함락시켰을 당시 건문제 때 여러 신하들이 올린 책략서를 획득하였다. 신하가 그것을 들고 가서 그에게 보이자 그는 "이들은 당시에는 건문제의 신하였기에 당연히 그를 위해 계책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니 굳이 그것을 살펴볼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 책략서들을 모두 불태우라 명함으로써 그에게 투신한 많은 대신들의 근심을 없애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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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의 오공(五供)과 명루(明樓) |
주체는 비록 그의 정적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지만 그가 번왕(藩王: 제후)들의 병권을 해제한 것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다지는데 대단히 유리하였다. 그는 정화(鄭和)를 서양으로 파견하여 쇄국의 벽을 허물고 무역을 희망하는 30여개국과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노아간도지휘사사(奴兒干都指揮使司)를 설치하여 흑룡강(黑龍江), 우수리강, 우띠하(烏第河), 쿠예도(庫頁島) 등지를 관할하게 하였으며, 고비사막 북부를 다섯 차례나 원정하여 원나라의 재건 세력을 평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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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공 앞에서 바라 본 명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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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중앙 통로로 들어가면 맨 끝에서 우측 통로가 명루로 오를 수 있는 입구이며, 좌측 통로는 출구입니다. |
북경성 건설과 북경 천도, 만리장성 중수,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 등은 모두 중국 역사상 커다란 업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황성의 동안문(東安門) 북쪽(현재의 동창후퉁<東廠胡同>)에 동창(東廠)을 설치하여 탄압정치를 강화하고, 환관을 중용하여 환관이 정사에 간여하고 농민을 심하게 착취함으로써 당새아(唐賽兒)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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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으로 나와서 돌아 본 모습 |
▲ 능역으로 도는 길은 막혀 있고, 우측으로 명루로 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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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뒷편에서 바라 본 능역 전경. 봉분이 아니라 나무 숲이 있는 작은 동산입니다. |
주체의 황후는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장녀이다. 서황후(徐皇后)가 병사하자 주체는 그녀의 여동생 서묘금(徐妙錦)을 황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서묘금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주체는 끊임없이 궁녀를 보내 서묘금을 설득하였으나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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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는 전후만 뚫려있고, 좌우는 막혀있습니다. |
그후 주체의 명을 받은 궁녀가 서묘금의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반드시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하자, 그녀는 "내겐 여성적 매력이 없어 황후가 되기에 부족하니 폐하께 다른 훌륭한 여자를 간택하시라고 고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궁녀가 궁궐로 돌아간 후 그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 일로 주체는 매우 낙심하여 다시는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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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문황제지릉(成祖文皇帝之陵) - 성조(成祖)는 영락제의 묘호이고, 문황제(文皇帝)는 시호 |
1424년 주체는 다시 북벌을 떠났으나 달단족(명대에는 동몽고인을 가리켰는데 지금의 내몽고와 몽고인민공화국의 동부에 거주했음) 군대를 찾지 못하여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병이 나서 7월에 유목천(楡木川: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다륜현<多倫縣> 서북쪽)에서 죽었다. 죽기전에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태자 고치(高熾)에게 황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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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 중앙 세워진 비석을 전후에서 바라 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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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 좌대 모습 |
▲ 명루에서 바라 본 능역 |
주체가 죽은 후에 그의 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1538년 가정제(嘉靖帝)가 그의 묘호를 성조(成祖)라 고쳤으며, 역사에서는 습관적으로 그를 영락황제(永樂皇帝)라 칭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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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루에서 내려다 본 영성문과 능은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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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올려다 본 명루 |
▲ 명루 좌측으로 돌아 내려갑니다. |
주체가 죽은 후에 궁녀 30여명을 함께 순장했다고 한다. 궁녀들을 순장하기 전에 먼저 잔치를 벌여 후하게 대접한 다음 방안으로 데리고 가니 일시에 곡소리가 밖으로 울려퍼졌다. 그녀들이 작은 받침대 위에 올라서서 각자 자기의 목을 천장에 매단 후 내시가 그 받침대를 치워버림으로써 그녀들은 산채로 매달려 죽었다. 이러한 행위는 통치자들에 의해 "투환순주(投缳殉主)"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하였다. - 인터넷에서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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