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중국)

[스크랩] 명13릉(중국 북경)-정릉1

장안봉(微山) 2012. 12. 27. 22:29

명13릉(중국 북경)-정릉1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명13릉의 정문인 대홍문. 여기서부터 능역이 시작됩니다. 주변 도로가 좁아서 차를 세울 수 없습니다만, 잠시...

중국 북경에 있는 명13릉을 다녀 온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만, 중국 역사도 잘 모르고, 더군다나 명13릉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어서 그 동안 자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늦게나마 사진 정리도 할 겸, 사진을 위주로 자료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시간이 되면 동청릉도 자료를 만들어서 올려 보겠습니다.

▲ 석패방은 명13릉 입구 조금 전, 도로 우측 철책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측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 왔습니다. 명나라 가정19년(기원1540년)에 건조하였으며, 높이 14m, 너비28.86m, 5문6주11루로 중국에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 제일 오랜 석패방이랍니다.

명13릉 중에서 세 곳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공개되는 왕릉 중에서 정릉은 지하 궁전(묘실)까지 개방하고 있어서 명13릉 간다고 하면 대부분 정릉을 가는 겁니다. 장릉과 소릉도 갈 수 있습니만, 지하 궁전은 개방을 하지 않으며, 전시실만 관람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들은 대부분 가지 않습니다.

명13릉 안내도

명13릉 입구로 들어가서 석물들도 보면 좋을텐데, 외국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 곳을 지나서 정릉으로 바로 갑니다. 이 곳의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버스를 주차할 곳이 없기도 하고, 입장료도 따로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대홍문에서 7km 가량을 걸어서 가야하니 가이드가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다음에는 갈때는 이 곳을 통해서 정릉으로 가 보아야 겠습니다.

▲ 조선조 왕릉은 명13릉의 능호를 많이 따랐네요... 위 자료는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소릉(좌)과 우측에는 유일하게 지하 묘실을 개방하는 정릉 그리고 맨 우측이 장릉의 모습입니다.

명나라(1368년~1644년)는 277년 역사에 16명의 황제가 재위했으며, 명대의 황릉은 베이징 북서쪽 44km 떨어진 천수산(天壽山)에 13기가 있어서 명13릉이라고 부른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의 손자인 제2대 황제 혜제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자, 자신의 삼촌인 영락제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쫒겨나서 무덤의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1421년)한 이후에 천수산 장릉(長陵)에 자리를 잡고, 이후에 명대의 황제들은 제7대 황제인 대종을 제외하고 모두 이곳에 묻혔다.

 

명13릉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곳은 장릉의 대문인 석패방과 신도, 영락제의 장릉(長陵), 제12대 황제인 목종의 소릉(昭陵), 제13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의 정릉(定陵)이며, 정릉만 지하궁전까지 개방하고 있다.

▲ 멀리서 바라 본 대홍문

▲ 좌측에 위치한 하마비 모습. 양쪽에 있다는데 한 곳만...

명13릉을 제대로 보려면 정문인 대홍문을 거쳐 석물(石物)들이 줄지어 선 넓은 길을 지나 정릉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7km나 되는, 長陵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갑옷을 입은 무관과 의관속대를 한 문관 등의 석상과 해태, 낙타, 코끼리 등의 돌짐승이 죽 늘어서 있다.

▲ 가까이에서 바라 본 대홍문

▲ 안으로 들어가면 신도(神道)가 있는데 석물들이... 인터넷 사진

신도(神道)는 6개의 거대한 대리석 돌기둥인 패루(牌樓)에서 시작되며, 패루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능묘의 입구인 대홍문(大紅門)이 나온다. 3개의 통로 중에서 중앙은 황제의 유해만이 지나갈 수 있었던 곳이다. 대홍문을 지나면 영락제를 칭송하는 3천5백 자의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비정(碑亭)이 나오고, 비정 북쪽에는 그 유명한 석상생(石像生)이 있다.

▲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신도 모습입니다. 신도가 굉장히 깁니다.

북쪽에서부터 공신(功臣)·문관(文官)·무관(武官)의 석인상이 각 4체씩 모두 12체(體)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말·기린·코끼리·낙타·해태·사자 동물상이 4체씩 서 있다. 석상은 영성문(木靈星門)에서 끝나고 신도는 칠공석교(七孔石橋)를 건너 약간 곡선을 그리면서 장릉(長陵)으로 이어진다.

명13릉의 금천교는...

▲ 정릉 입구에 위치한 금천교

버스는 주차장에 대고 관광객이 내리면 금천교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정릉 입구로 안내를 합니다. 그래서 1차 방문시에는 몰랐고, 2차 방문시에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비가 내린 모습입니다. 금천교 이외의 다른 사진들은 1차 방문시 사진을 사용했습니다.

▲ 우리나라 조선 왕릉의 금천교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굉장히 큽니다.

주차장에서 바로 이 곳으로 안내를 합니다.

▲ 정릉 입구에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비석(신공성덕비)이 서 있습니다. 정면의 빨간 건물로 입장을 합니다.

명13릉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황제가 생전에 지은 것인데, 이 부류의 능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데다 황제가 수시로 공정을 시찰하게 되므로 황제가 만족을 수준이 되어야만 끝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성조(成祖)의 장릉은 18년, 世宗의 永陵은 12년, 神宗의 정릉은 6년이 걸렸다고 한다.

▲ 신공성덕비가 굉장히 큽니다. 귀부의 머리는 관광객들이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합니다.

▲ 정면에서 바라 본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 모습

두 번째는 황제의 재위 기간이 짧든가 그밖의 원인으로 생전에 능을 만들지 못했을 경우, 장례 기일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여  서둘러 건조한 탓에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공정도 비교적 간단한 것이다. 예를 들어 仁宗의 獻陵은 3개월, 英宗의 裕陵은 5개월, 憲宗의 茂陵은 8개월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 만력제가 자신의 공덕이 문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여 비석에는 아무런 문구를 새기지 않았다고...

▲ 뒤에서 바라 본 모습. 우리나라 귀부는 대부분 화강암을 만들었는데, 이 곳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군요...

▲ 신공성덕비의 이수(머릿돌)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황제가 생전에도 사후에도 능을 만들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묘에 묻힌 경우이다. 예를 들어 14대 光宗은 즉위한 지 29일만에 죽었는데, 당시 국고가 빈약하고 신종의 장례도 아직 끝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신하들이 건의하여 代宗이 자신을 위해 건조해 놓았던 무덤에 묻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慶陵이다.

▲ 정릉 입구는 광장처럼 넓으며, 저 앞에 보이는 빨간 건물이 정릉 매표소입니다.

명나라 초기의 매장 제도는 '1황제, 1황후'였다. 그런데 영종의 유릉에는 두 명, 그 다음으로는 정릉에 두 명의 황후가 묻힌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3명의 황후를 매장하였다. 그래서 13릉에는 모두 13명의 황제, 23명의 황후와 1명의 귀비가 묻혀 있다. 23명의 死者들이 40평방미터 즉 남북한 넓이의 5,500분의 1의 땅을 차지하고 누워있는 것이다.

▲ 정릉 매표소 가기 전에 우측 건물에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데, 내부는 아마도 정릉 관련 박물관/전시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릉 안내도

▲ 위에서 내려다 본 정릉 모습(인터넷 사진)

▲ 위에서 내려다 본 장릉 모습(인터넷 사진)

▲  구글어스로 내려다 본 정릉의 모습입니다.

장릉(長陵)은 명13릉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규모도 가장 큰 明朝 제3대 永樂帝의 능이다. 전면에 있는 장려한 稜思殿의 배후에 明樓가 있고 '成祖文皇帝之陵'이라는 황금글자를 새긴 돌비석이 서 있다. 그 뒷부분의 언덕 아래에 영락제의 유체가 잠든 지하궁전이 있는데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정릉 매표소 입구 전경. 능문(陵門)이라고 합니다.

정릉(定陵)은장릉 다음으로 큰 제14대 萬歷帝와 황후 두 사람의 능이다. 1957년에 발굴되어 그 장려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만역제는 10세 때에 제위에 올라 22살 때부터 자기의 묘를 만들기 시작해 6년이라는 세월과 국가재정의 2년분에 해당하는 은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지하궁전은 5실, 모두가 하얗게 연마한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호화찬란한 부장품은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정릉 매표소 전경. 정릉박물관과 13릉-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 매표소 지붕 모습. 기와는 구워서 도자기 기와인 듯...

▲ 매표소를 통과해서 뒤로 돌아 본 모습

정릉은 神宗 13년(1585)부터 18년(1590)까지 6년에 걸쳐서 완공되었다. 長陵과 英陵에 이어 13릉 가운데 세 번째로 규모가 크며, 공정의 정교함은 가장 앞서가는 거대한 능이다.

▲ 매표소를 지나면 전방에 3개의 계단이 나타납니다. 저 위에 전각이 있었는데 소실되었습니다.

이 공사에 은 800만냥이 소모되었고, 연인원 6,500만명, 하루 3만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100만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 계단의 난간 모습입니다.

▲ 계단을 내려가면 박석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길이 있고...

▲ 전방에 다시 계단이 한 곳 나타납니다. 저 위의 전각도 소실...

당시 매 가구마다 6,5명 분의 노동력을 바친 셈이 된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국가의 연간 재정 수입이 400만 냥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나라 궁궐에서 보던 것과 같이 왕이 지나는 계단인 것 같습니다. 계단 중앙에는 용과 봉황이 조각된...

▲ 어로석조(御路石雕)라고 쓰여 있네요... 우리나라에서는 답도라고 합니다만...

이 곳에 묻혀 있는 신종은 매우 우매한 황제였다고 한다. 10세에 즉위하여 48년간의 재위 기간 중 주색을 탐하고, 여러 해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아 국력이 피폐해졌다고 한다.

▲ 어로를 내려서면...

▲ 전방에 정릉이란 현판이 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청나라의 건륭 황제까지도 명나라의 멸망은 마지막 황제인 숭종 때문이 아니라 신종과 희종(熹宗) 두 황제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정도이다.

▲ 정릉 입구(명루) 좌우에는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이 있습니다.

▲ 전시실 내부 모습과 전시된 유물. 전시된 대리석 돌은 묘지석 같아 보입니다.

2편에서 계속...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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