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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구미시 오태동 지주중류비

장안봉(微山) 2014. 2. 16. 02:45

 

금오산 남쪽 맥이 동으로 휙 굽으면서 효자봉을 이루고 다시 천길 아래로 질주하다 나월봉을 낳은 후 낙동강으로 잦아든 구미시 오태동 산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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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체에 비해 유난히 글씨가 크게 새겨져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중국 무왕의 곡식을 먹지 않겠노라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아사한 백이와 숙제를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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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의 선비 백이와 숙제야말로 중국 황허(黃河)강 중류(中流)에 우뚝 서 아무리 험악한 물살에도 꺾임이 없다는 지주산(砥柱山)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떠받드는 비석과 서체하나 틀리지않게 판에 박은 듯한 지주중류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나는 뭇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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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조선 선조 20년(1587) 인동현감 유운룡(柳雲龍)이 고려 말기의 충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지난 1983년 6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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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柳成龍)의 형인 겸암 유운룡이 인동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야은 선생의 유택을 찾아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임 3년째에 유운룡은 야은의 무덤을 크게 정비한 후 낙동강을 굽어보는 아늑한 곳에 방위를 잡고 묘역에 오산서원(吳山書院)과 사당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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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유운룡은 야은의 지주비를 세워 후세에 남기기로 작심하고 한강 정구(鄭逑) 선생을 찾았다. 정구 선생으로부터 백이와 숙제 지주비의 묵본(墨本)을 얻어온 유운룡은 '砥柱中流' 네글자를 탁본을 떠 비석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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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원래 중국의 명필 양칭츄안(楊晴川)의 글씨다. 음기(陰記.비석뒤에 새기는 글)는 당시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자리에 있던 그의 아우 유성룡에게 쓰게 한다. 유운룡은 아우 성룡에게 야은 선생을 황허의 지주산에 빗대 이렇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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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중에 황하가 가장 크나니 천하를 횡유하고 범람할 땐 곤륜산(崑崙山)을 휩쓸고 여양(呂梁)을 박차고 이락(伊洛)을 삼키고 양송(梁宋)의 들판을 내치고 만물이 모두 휩쓸리나 오직 하나 우뚝섰다. 사석(沙石)으로 짓이겨도 홍파(洪波)로 부어도 만고에 하루같으니 충렬의 선비가 유속(流速)에 시립(侍立)하여 변치 않음을 볼 때 이와 같지 않은가. 또 시조(市朝)가 변천해 맑은물 구정물이 함께 흐르고 앞에는 작록(爵祿)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도거(刀鉅)의 위협이 뒤따르나 꿋꿋이 도를 닦아 운림(雲林)에 고도(高稻)하는 선비가 지주(砥柱)에 견줄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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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기의 전문(全文)을 형 운룡이 일러주는 대로 끝을 맺은 성룡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절하며 형에게 "극진합니다. 저도 이를 벗어난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성룡은 명(銘)을 붙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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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이여 무엇이 있는고 / 터가 있음이여 집이 있도다 / 낙동강 물이여 출렁출렁 / 그 흐름 무척도 길도다 / 묵정 벌의 한 주먹 흙이여 / 바로 선생의 무덤이로다 /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 만년을 드리워 빛이 나도다 / 충성은 과(課)하고 효도를 책(責)함이여 / 우리에게 은혜함이 한 없도다 / 난효(蘭肴)를 올리고 계서(桂壻)를 부음이여 / 영흠이 이르신 듯하도다 / 고산을 우러르고 청류를 굽어 봄이여 / 선생을 그리며 잊지 못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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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비석은 이곳 해평돌을 사용하였으나 비바람에 마모되어 193년 뒤인 정조 4년(1780년) 밀양에서 돌을 구해와 다시 세웠다. 전체적으로 글자에 비하여 비석이 작으며 갓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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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군에 있는 백세청풍비와 한 짝을 이룬다. 현재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도립공원 입구에 야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44년(1768년) 선산부사 민백종이 세운 채미정(採薇亭)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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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16호(충남) 청풍사(淸風祠)

 

고려 후기 충절공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길재 선생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로, 개경에 가서 이색·정몽주·권근 등 여러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몇 차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훗날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으로 일컫는다.

조선 영조 33년(1757)에 지방 유림과 금산군수 민백홍이 세운 것으로 사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청풍사의 앞쪽에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와 지주중류비(支柱中流)가 있는데 이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1678년 이조 19대 숙종때 건립한 것으로 충절공야은길재(忠節公冶隱吉再)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높은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청풍사 앞에 백세청풍(百世淸風)비와 지주중류(支柱中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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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246

고려 후기 충절공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길재 선생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로, 개경에 가서 이색·정몽주·권근 등 여러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몇 차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같은 마을에 살던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의 태종)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훗날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으로 일컫는다. 조선 영조 33년(1757)에 지방 유림과 금산군수 민백홍이 세운 것으로 사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청풍사의 앞쪽에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와 지주중류비(支柱中流)가 있는데 이는 야은 길재의 충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처 :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글쓴이 : 根熙 김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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