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이지함선생 묘

장안봉(微山) 2012. 12. 27. 22:23

이지함선생 묘(충남 문화재자료 32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역 전경

2008년 8월, LG 답사회의 보령 답사를 준비하면서 보령 권역에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일반 답사팀을 데리고 묘지를 갈 수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한 분이 자가용으로 현지 합류를 한다고 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 묘역을 오르며 좌측에서 바라 본 모습

▲ 맨 아래 봉분에서 바라 본 묘역 정면 모습

답사 일정 중에 오후에 3시간 정도 대천 해수욕장과 갯벌 조개캐기 체험을 집어 넣어서 이 시간을 이용하기로 하고 그 시간대에 승용차를 빌려서 토정 선생의 묘를 찾았습니다. 마침, 토정 선생의 묘역에 도착하니 한 무리의 답사팀들이 내려 오고 있더군요. 그 날은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서 묘역을 잠시 둘러 보는 동안에 온 몸은 목욕을 한 것처럼 땀을 흘렸습니다.

▲ 묘역 좌측에서 조금 더 가까이 바라 본 모습

▲ 묘역 상단 좌측에서 내려다 본 모습

토정 선생의 묘역에는 하단의 자료에서도 보시다시피 토정 선생의 부모 묘와 3형제 묘 그리고 3형제의 자손들의 묘가 모셔져 있습니다. 토정 선생의 묘역를 돌아 나와서 김좌진장군 묘까지 가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 묘역 상단에서 내려다 본 묘역 전체 모습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 선생의 묘이다. 선조 6년(1573) 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의학 복술 천문 지리 음양 술서에 능했고, 풍수지리에 밝아 본인의 묘 터 역시 생전에 정했다 전하고 있다.

▲ 좌측면에서 바라 본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역 전경

▲ 토정의 묘 우측 상단에 위치한 부(이치)모 묘소

▲ 토정 이지함선생 묘역 전경

일생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어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복술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 신수를 보아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토정비결』이다. 묘소는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고, 묘의 앞에는 묘비·상석 등이 있다.

▲ 토정의 묘 우측 한단에 위치한 큰 형 이지번의 묘

▲ 토정의 묘 우측에 위치한 작은 형 이지무의 묘

▲ 토정의 묘 좌측 상단에 위치한 토정의 큰 아들 묘

▲ 토정의 묘 좌측 하단에 위치한 토정의 작은 아들 묘

이지함선생 묘역 안내도

이지함선생 묘역 위치도

                                               화살표 주변에 이지함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④ '토정비결'에 숨은 뜻은?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8.01.09 10:16 | 최종수정 2008.01.10 14:46

◇19세기 전반에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된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규장각 소장). 토정 이지함이 당시까지 일반인에게 널리 각인돼 있어 그가 살았던 지역이 '토정'(土亭·현재 서울 마포구 용정동)으로 지도에 나타나 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토정비결(土亭秘訣)'. 믿든 말든 한 해 자신의 운수를 점쳐보면서 새해를 계획해보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풍습으로 굳어졌다. 대부분 오래된 우리의 전통으로 알고 있지만 '토정비결'은 정작 조선시대의 새해 풍습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토정비결'의 저자가 조선시대의 학자 이지함(1517∼1578)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이지함의 저작이니 당연히 16세기부터 유행한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빌린) 저작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지함의 이름을 빌린 것일까?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보기로 하자.

이지함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토정비결' 하면 이지함을 떠올린다. '토정비결'은 '주역'의 이치를 응용하여 한 해의 운수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그러나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역의 기본 괘는 64개인데 '토정비결'에는 48개의 괘만이 사용되고 있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서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연(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토정이 말년에 현감으로 재직했던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는 그의 동상과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적인 특성과 백성들에 대한 편의를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의 괘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 총 6480구로 구성되었으며, "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숙종 때 그의 현손인 이정익(李楨翊)이 이지함의 유고를 모은 문집인 '토정유고'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재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일 가능성은 떨어진다. 특히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망 직후에 유행한 것이 아니라 300여년 뒤인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

예를 들어 정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조선 후기 풍속 전반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데, 정월의 경우 세배하기나 세찬(歲饌), 떡국 먹기 등의 새해 풍습과 함께 새해의 신수를 보는 점으로 오행점(五行占)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저술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새해의 풍속 중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만약 '토정비결'이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다면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틀림없이 소개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국 '토정비결'이 빨라야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다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토정비결'은 16세기를 살았던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명성을 빌려 쓴 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토정비결'에 담긴 뜻과 이지함의 사상은 둘을 저작물과 저작자의 관계로 보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로 통하는 면이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을 둔 상수학(象輸學)적인 사고가 많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지함은 스승인 서경덕으로부터 상수학을 배웠으며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서경덕을 비롯한 16세기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들은 대개 기(氣)에 주목하여 당시의 사회를 안정보다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로 파악했다.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이지함이었던 만큼 주역 사상에 내포된 새로운 변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점에서 '토정비결'에 담겨 있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이지함의 사상과 연결할 수 있다. 이덕형이 이지함을 두고 말하기를 "세상이 풍수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이씨 집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맥락이 닿는다.

◇토정 이지함의 묘 앞에서 내려다본 보령 앞바다.

이지함의 자는 형백,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은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이지함의 가문의 영예는 조금 퇴색하는데, 조부 장윤과 부치는 각각 현감과 현령 직에 머물렀다.

 

이처럼 이지함은 이색을 배출한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처사의 삶을 살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유랑생활을 통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을 접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의 핵심이 민생문제 해결에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지함은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였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지함은 전국을 유랑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또 가난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고르게 분배해 주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토정유고'를 비롯하여 '연려실기술'이나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나오는 이지함에 관한 일화들은 백성들의 편에 섰던 이지함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인 실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명문가 출신의 선비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말업으로 치부되던 수공업, 상업, 수산업에 직접 종사했던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어우야담'의 다음 기록은 이지함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묵한 길에 흙을 쌓아 가운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 밤에는 집 아래서 자고 낮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거처하였다. 또 솥을 지고 다니기가 싫어 쇠로 관(鐵冠)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밥을 지어 먹고 씻어서 관으로 쓰고 다녔다.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것을 빌리는 일이 없었다.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고 여겼는데, 심지어 남에게 매 맞기를 자청해 시험해 보려 하였다."

◇'토정유고' 서문.

점술이나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던 이지함의 사상적 성향,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모습이 후대에도 길이 기억되면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주인공으로 남았고, 현재까지 그 이름이 회자(膾炙)하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토정비결'에 투영된 이지함의 이름 석 자는 백성의 편에 서서 살았던 한 지식인을 후대에까지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류의 책에 그에 관한 기록이 풍부한 데서도 발견된다.

 

'대동기문'에는 이지함이 스스로 상업행위에 종사한 일과 거지 아이에게 옷을 벗어 준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동패락송'에는 이지함이 괴상한 행동을 하다가 노인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계집종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했다는 이야기, 음률(音律)을 아는 이인(異人)과 장도령을 만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게는 철저히 엄격했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 데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토정비결'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직접 듣고 어려움을 해결한 그의 행적이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정비결'은 16세기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이후의 시대까지도 백성들에게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던 이지함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현재까지도 새해 우리들의 삶 속에 빠지지 않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새해에는 '토정비결'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이지함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⑤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묘
좌청룡 우백호에 확트인 보령 앞바다… 흠잡을 데 없는 명당
 ◇일월한문의 절묘한 조화. 마치 남녀가 마주보며 다정하게 속삭이는 형국으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래서 풍수에서의 좌향은 절대시된다.

토정 이지함은 수리(數理)의 천재였다.

 

남은 일년 신수가 궁금하여 토정비결을 풀어 본다. 공식과 이치를 터득하고 나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칫하면 남의 운세를 보아버리고 만다. 이처럼 치밀한 수학원리가 400여년 전 만들어졌다는 게 기이하기만 하다.

 

무작위로 1975년 3월15일(을묘년 음력 2월3일 경신일·32세)생의 운수를 풀어 본다. 토정비결은 반드시 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만세력이 있어야 볼 수 있다. 모두 144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상수, 중수, 하수를 산출해 내야 한다.

 

▲먼저 상수(上數)는 자신의 나이(32)와 보고자 하는 해의 간지(올해는 병술년)에 해당하는 태세수(20·매년 다름)를 합해 8로 나눈 나머지 숫자를 상수로 한다. 32+20=52. 52를 8로 나누고 남은 4가 상수다. 이때 나누어 떨어지면 상수는 8이다.

 

▲중수(中數)는 자신의 생월수(보고자 하는 해의 생일달이 크면 30, 작으면 29다. 병술년 음력 2월은 작은 달이므로 29)와 월건수(15)를 합해 6으로 나눈 나머지 숫자를 중수로 한다. 29+15=44. 44를 6으로 나누니 2가 남아 중수는 2다.

 

▲하수(下數)는 자신의 생일(15)과 일진수(17)를 더하여 이번에는 3으로 나눈다. 15+17=32. 32를 3으로 나누니 남는 수 2가 바로 하수다. 그러므로 1975년 3월15일생은 상(4)·중(2)·하(2)수를 조합한 422가 바로 신수다. 111부터 863까지 괘(卦)로 표시되어 있는 계수를 찾아 확인하면 풀이가 나온다.

 

여기서 태세수, 생월수, 월건수, 일진수 등과 복잡한 수리 공식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 권의 책 속에 계수하지 않고도 쉽게 찾아보는 해법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음력의 큰 달과 작은 달의 차이로 30일 생일의 경우, 어떤 해에는 사라질 수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토정 선생 묘 앞에서 내려다본 보령 앞바다. 길 앞이 옥대봉이며 건너의 안산이 수려하다.

 

 

우주선이 날아가 달나라 흙을 퍼오는 세상에 토정비결이 과연 맞는가를 따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 토정이 살던 그 어지러운 난세에 이 같은 비결서가 나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 시대에도 종로거리나 압구정동의 사주카페에는 온갖 비결서의 예언을 찾아 사람이 찾아들고 있는 것이다.

 

토정과 관련된 옛날이야기는 누구나 한두 번쯤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가 충남 아산의 현감(지금의 군수에 해당)으로 있을 때 일이다. 아산만 물이 해일로 넘칠 것을 미리 안 토정이 백성들을 높은 산에 피신시켜 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또 걸인청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거두어 구제하기도 했다.

 

삶의 궤적 자체가 기행과 이적으로 가득 차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려진 이지함(李之函·1517∼1578). 평생을 마포 강변에서 흙담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호가 토정(土亭)이다. 전국 산하를 속절없이 누비며 천하 명당과 길지를 수없이 점지해 주고 다닌 기인. 과연 그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서해안고속도로 보령나들목을 나서니 대천해수욕장 이정표가 반긴다. 여름만 되면 더욱 설레는 고장이다. 더구나 이곳 성주면 성주사(聖住寺)는 통일신라시대 낭혜무염(朗慧無染·801∼888) 선사가 성주산문을 개창한 구산선문 중의 큰 가람이 아니던가.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 불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한국 불교사에 불후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던 유서 깊은 절이었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 27-3. 보령화력발전소를 물어 찾아가면 오른쪽 국수봉 기슭에 바로 토정의 묘가 있다. 1992년 8월17일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됐다. 그의 가계를 적은 현판 바로 위에 10여기의 묘가 얼굴을 맞대듯이 다정하게 용사(用事)되어 있다. 일행들 모두가 “그 유명한 토정 선생이 바로 여기 계셨구나” 하면서 감격스러워한다.

 

토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토정의 가족묘 터는 1532년(중종 27년) 어머니상을 당할 때 처음 정해진다. 이때 2년 전 다른 곳에 모신 아버지 묘를 이곳에 합폄(합장)하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예언했다. “향후 우리 형제(지영, 지번, 지무)는 기해년(1539년) 귀득자(貴得子)하고 후손 중 일품직(一品職·영의정)이 나올 것이다”라고. 과연 그의 말대로 기해년에 형 지번이 후일 영의정이 되는 산해(1539∼1609)를 낳고 자신도 장남 산두를 낳았다. 모두가 크고 작은 벼슬을 하여 예언이 딱 맞아떨어졌다.

 

 

◇묘 뒤에 두툼히 솟아오른 내룡맥. 간산길에서 이런 용맥을 만나면 쾌재를 부른다. 산진수회(山盡水回·산이 다하여 물이 감아도는 곳)하는 곳에 큰 자리가 형성된다.

 

 

이런 자리로 수백년간 소문나 있으니 풍수 공부하는 후학들의 발길이 끊일 날 있겠는가. 잔디가 무성한 데로 먼저 간 발길 따라 오르니 묘 정상이다. 문득 조상을 명당 자리에 모셨거나 유명인물이어서, 오가는 길손들이 수없이 오르내린다면 자손들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여말 삼은 중 한 분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 토정의 가족묘를 보며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인구에 회자됨이야 토정이 앞서겠지만 비문을 자세히 살피니 그보다 높은 벼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혈처에 대한 윤갑원 교수의 설명은 어떠할까.

 

“여러 사람의 묘가 용사되어 있을 때는 전체 내룡맥(묘 뒤에서 잘록하거나 두툼하게 내려온 등성이)을 살피고 나서 당사자 묘를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함께 올라가 봅시다.”

 

동행한 최병운 이병근 이교수 김경애씨 등이 앞선다. 입수룡(入首龍·먼 산에서 묘 뒤까지 척추처럼 솟아 내려오는 맥)의 방향을 재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자룡(子龍·북쪽)으로 내려와 결인(結咽·사람 목처럼 움푹 패고 좁아졌다가 힘 있게 경사지어 치고 올라가는 산세)이 된 후에 임룡(壬龍·북쪽에서 서쪽으로 15도 기운 방향)으로 바뀌면서 만두(巒頭)를 형성한 후 당판(묘를 쓰는 혈처)으로 내려왔습니다. 토정 선생 묘는 자좌오향(정남향)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고 판단됩니다.”

 

앞을 보니 기가 막히다. 쪽빛 같은 보령 앞바다가 간간이 출렁댄다. 주차장 길 건너의 옥대봉(玉帶峰·묘 앞에 좌청룡이나 우백호가 길게 이어져 띠를 이룬 산형. 관복의 허리띠라 하여 벼슬과 발복을 의미한다)이 바로 자기 안산(묘 앞의 가장 가까운 자그마한 산)이다. 더구나 바다 건너의 삼태봉(三太峰) 가운데 중심봉의 안산이 수려하여 큰 인물이 겹쳐 나올 자리란다. 마치 일월한문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듯하다. 경사는 겹친다 했다. 혈처 앞의 바닷물이 당문파(堂門波·묘 앞의 바다, 강이나 저수지 물로 부(富)를 상징한다)로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대개 안산이 혈처에 비해 너무 낮으면 역할이 미약하다. 청룡 백호와 안산이 너무 높아 푹 파인 분지에 묘가 있으면 남에게 능멸당하고 하극상을 당할 수 있다는 판단도 곁들인다. 이 같은 기록은 풍수의 고전인 ‘청오경’과 ‘금낭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토정의 묘와 비석(왼쪽), 서점에 나와 있는 토정비결. 번역서와 비결서만도 수십권에 이른다.

 

 

토정 묘의 전후좌우를 살피다 보니 부모 형 아들 조카 등 촌수를 헤아리기가 어지럽다. 좀 더 자세히 챙겨 보니 아버지 묘 위에 아들이 있고 할아버지 묘 위에도 손자가 있다.

 

일반 사가에서는 증조할아버지 묘 뒤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자리가 넉넉하면 구태여 역장(逆葬)할 필요야 없겠지만 좁은 면적에 용사할 경우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용례는 조선왕조 초기에서 현재까지 묘지제도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왕손 묘역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정 가계의 촌수를 따지느라 전전긍긍하니 윤 교수가 간단히 풀어 준다.

 

“촌수 따질 사람과 하나로 만나는 조상을 찾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당숙간은 5촌인데 당숙과 나의 같은 할아버지를 소급해 올라 갑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당숙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증조부는 나와 3촌이 되고 당숙에게는 2촌이 되어 3촌+2촌을 더하면 5촌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초면의 문중 일가 간에도 계촌법(計寸法)이 분명해진다. 왜 사촌간인가 했더니 사촌도 할아버지와 2촌, 나도 할아버지와 2촌이어서 4촌간이다. 부자지간은 1촌이요 형제간은 2촌인데 부부간은 촌수가 없는 무촌이라고 한다.

 

토정은 대학자였던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백사 이항복을 제자로 두었다.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은 그의 친구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였던 조식은 마포 토담집의 토정을 찾아와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했고 후학들은 ‘한국의 장자(莊子)’로 일컫기도 한다.

 

첨단 과학문명 시대를 살면서 이인(異人)과 기인(奇人)을 어찌 봐야 하는가. 대선을 앞두고서는 예나 지금이나 복서( 卜書 )와 잡술(雜術)이 활개를 치고 있다. 비술(秘術)이라 하여 한마디 했다가 맞으면 도통한 양 으스대고 틀리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만다. 토정비결을 풀이한 책들도 수십권인 데다가 심지어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해석했다는 기이한 책들까지 있다. 토정의 저서로 알려진 ‘월영도(月影圖)’와 ‘현무발서(玄武發書)’는 지금까지도 해독하는 이가 거의 없다.

 

토정은 백성들의 천거로 포천 현감과 아산 현감에 올랐으나 청빈무욕의 삶을 살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벼슬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았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백성을 수탈하던 때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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