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월남 이상재선생 묘

장안봉(微山) 2012. 12. 27. 22:06

월남 이상재선생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이상재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세계열강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려고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 독립협회활동과 YMCA운동을 통해서 민족을 계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나라의 진로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우리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이십니다.

묘역 입구에 세워진 이상재선생 신도비

▲ 신도비 앞에서 바라 본 금바위 저수지 전경

선생께서 탐관오리의 부패상을 탄핵하다 음모로 인해 옥고를 치르셨으며, 이 때에 처음 성경을 접하시면서, “기독교가 아니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기독교신자가 되셨고, 최초의 한국인 YMCA 총무로서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길을 밝게 열어 주는 등불이 되어 독립의 초석이 되셨습니다.

▲ 신도비 좌측으로 조금만 오르면 이상재선생 묘역이 멀리 보입니다.

선생께서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전개하셨던 물산장려운동과 절제운동은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현시대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신 강직한 성품과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따듯한 동포애는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오늘의 위리사회를 바로잡는 길잡이가 됨은 물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한국인의 사표가 될 것입니다.

▲ 묘역 하단에는 역삼각형의 연못이 있습니다.

특히 남북분단의 세월을 딛고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야만 하는 우리들은 선생의 민족정신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선생의 애국심을 본받아야 하겠지만 앞선 것을 배우고 믿음대로 행하며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선생의 삶을 기리는 것이야 말로 후손들에게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 연못 앞에서 올려다 본 묘역

▲ 묘역 하단에서 바라 본 연못

월남(月南) 이상재(1850.10.26-1927.3.29)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신사유람단 (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 연못 우측으로 돌아 올라서 바라 본 이상재선생 묘역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 묘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改革黨)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 이상재선생 묘역 좌우측에서 바라 본 모습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 이상재선생 묘역에는 상석과 묘비 그리고 장명등 뿐으로 묘역이 아주 단촐합니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월남 이상재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이상재선생 묘역 후측면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상재선생 묘역 위치도

 지도 우측 중앙의 연못에 있는 화살표 바로 윗편이 이상재선생 묘역입니다.                  소재지 : 경기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45-1

지도 우측 중앙의 화살표 지점에 이상재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지명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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