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46] 전 홍유후 설총 묘

장안봉(微山) 2012. 12. 27. 21:35
오늘의 문화재

전 홍유후 설총 묘(경북 기념물 13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용강동 고분군을 돌아 나와서 경주 남산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설총 묘는 진평왕릉이 있는 안쪽의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 설총 묘

전 홍유후 설총 묘(傳 弘儒侯 薛聰 墓)는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인 설총의 묘이다.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널리 능통하였다고 한다. 신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후에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혔다.

▲ 설총 묘 앞의 상석

▲ 설총의 묘비

그가 이두를 창제했다고도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서동요』, 선덕여왕 때의『풍요』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은 6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였으며,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도 공헌하였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좌측에서 바라 본 설총 묘

설총은 1022년(고려 현종 1)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종받았고, 문묘의 동무에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었고 조선 후기인 1623년(광해군 즉위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재향되었다. 또 그는 《증보문헌비고》에서 경주 설씨(慶州 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무덤의 소재에 대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 당시의 형편을 감안하면 경주에 위치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조선후기 이래에 만들어진 각종 자료에 나타난 설총의 묘소에 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인 1799년(정조 3, 가경(嘉慶) 4) 9월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명문(明文)(사목(事目)) : ‘경주(慶州)에 있다’ 《홍유후설총(弘儒侯薛聰) 자은지(字隱智) 장경주(葬慶州)》

조선후기인 1848년(헌종 14) 편찬된 《순창설씨족보(淳昌薛氏族譜)》(무신보(戊申譜))에 의하면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로 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는 《경주지(慶州志)》는 ‘《설총분묘(薛聰墳墓) 》 경주이십리동(慶州二十里東) 오문외(五門外) 월토산자좌(月土山子坐) 비왈(碑曰) 신라홍유후설총지묘(新羅弘儒侯薛聰之墓) 월토산재계림(月土山在鷄林) 금경주부시야(今慶州府是也) ’. 이러한 서술의 근거가 된 저본은 확인할 수 없으나, 1912년 간행된 《홍유후문집(弘儒侯文集)》에 인용되어 있는데, 설총(薛聰)의 분묘(墳墓)에 대한 구체적인 위치를 표시하고 있는 자료이다.

그 외 일제강점기이래 설총의 묘소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위의 세 자료에 의거한 것들이다.

▲ 우측에서 바라 본 설총 묘

현재 경주(慶州) 및 순창(淳昌) 설씨(薛氏) 후손들에 의해 설총(薛聰)의 분묘라고 주장되고 있는 명활산 동쪽 능선 아래에 위치한 이 원형봉토분은 족보상의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 ’는 산(山)의 명칭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지 단석산(斷石山)을 월생산(月生山)으로 부른 예가 있음을 보아 명활산(明活山)을 (月土山)으로 불렀을 가능성은 없지 않고 《경주지》의 내용과도 부합된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 원형봉토분이 위치한 경주시 보문동에 거주하던 한 노파의 꿈에 설총이라고 자칭한 인물이 현몽하여 혈식(血食) 곧 봉사(奉祀)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의 신빙성 여부는 판가름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설총의 후예라고 신봉하고 있던 경주 및 순창 설씨들의 후손들에 의해 이 분묘는 설총의 무덤으로 받아들여져 이들에 의해 관리, 봉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이래의 이 분묘가 설총의 무덤이라는 구전과 관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현몽이 이루어진 당시에 경주 설씨 후손들이 이 무덤을 방문했을 때, 이 무덤을 황폐해져 있었으며 무덤의 후방 위쪽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었고, 무덤 앞에는 참판 정윤필에 의해 찬해진 비석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사유로 인해 이 무덤은 세간에서 설총의 무덤으로 인정되어 왔고, 그 결과가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편찬된 문화재총람 중 설총묘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덤은 명활산 동쪽 능선아래 위치한 마을에 위치해 있고, 인근에 10여호의 가옥이 있다. 원래는 산록(山麓)로 추측되지만, 후세에 개간되어 현재는 주위가 전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원형봉토분으로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최근새에 경주 및 순창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설치되었고, 외곽에 칠책이 설치되었다. 호석은 흙 속에 묻혀져 있으나, 일부의 흔적은 보이고 있다.

설총 묘 위치도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423                                                                    빨간 화살표 부분에 설총 묘가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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